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창세기27:26-29절을 보면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복 싫어하는 사람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가난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고 누구나 부자는 아니더라도 남에게 구차한 소리 해가면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목사님 저도 늘 사역을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지만 역시 여유를 가지고 사역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모두가 원하는 일이고 할 수만 있다면 부자로 살아가고 싶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평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욕심이 지나쳐서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는 일이 생겨나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보이는 바알을 섬겼다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자기 마음에 있는 바알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재물 얻기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또 하나님께 떼를 쓰가 시피하면서 밤을 세워가면서 기도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신앙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회가 점점 발전을 하고 물질의 위력이 점점 더 세지고 있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을 마치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기 위한 하나의 수단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 너무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너무 좋아하다가는 그 영혼이 패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복을 받기 위해 하는 행위 하나하나가 결국에는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바알을 섬기는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바알이 점점 자라게 되면 나중에는 하나님은 마치 복을 주는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복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복을 받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신약을 사는 이 시대도 그렇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그것은 너무도 큰 오해를 가져 오게 됩니다. 이생에서의 복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행위를 잘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잘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하나라도 더 구할 수 있습니다.
또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에게 자연은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잘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또 기도를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고른 비와 해를 비춰 주시는 일반저인 은혜라고 보아야 합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습니다.
저는 농사일을 안 해보아서 잘은 모르지만 수확을 하기 까지는 여러 가지 단계가 필요하고 또 그에 따라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농부가 씨를 뿌리고 하나님께 기도만 한다고 하면 그 농사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 한 일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주는 하나님의 일반적은 은총이라고 보아야 하고 성도라고 해도 이 세상의 복은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너무 기복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하고 있고 또 그것이 바른 신앙인의 모습인가 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꾸어 잡는 것이 매라고 일단 축복을 받으면 모든 것이 다 용납이 되고 또 그런 축복을 보면서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은 것이라고 그것을 믿음과 연계를 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바알 신앙입니다
며칠 전에 문자 메시지를 받았는데 아는 목사님의 문자인데 만사형통 복을 받으라는 메시지를 받고 나서 과연 그가 바른 목회자 인가 씁쓸하게 혼자 삼키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 성도에게 만사형통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도 않고 오히려 고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해야 한다고 하는데 목사라는 사람은 이 세상의 사상에 미혹이 되어서 만사형통이라는 말을 아무 거리낌이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러고 어떻게 하든지 축복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을 이삭이 받았던 복을 야곱이 받았던 복을 받아서 자기들도 거부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목사들이 축복 기도를 해 준다고 하면 아주 좋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복을 받아 누리고 있으면서도 목사에게서 그런 기도를 받는 것을 너무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의 통로가 되어 달라고 합니다.
얼마나 복을 좋아하면 복의 통로라는 이상한 말까지 사용을 하고 있고 그런 말을 들으면 마치 자기가 그렇게 될 것 같은지 아주 좋아하고 그렇게 기도를 해 주는 목사를 너무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복만 빌어주면 교인은 그저 행복해 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사도가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이 세상의 복을 위해 기도를 해 주셨습니까?
그러나 이 시대의 목사의 주요 일이 복을 빌어 주는 일이 되었고 복을 빌어주는 기도를 안 해주는 목사를 아주 싫어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축복보다는 더 현실적이고 계산이 와 닫는 이 세상의 복을 위해 바알을 열심히 섬기고 있습니다.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제가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어디를 가면 꼭 축복을 위해 기도를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고 또 축복 기도를 안 해주면 이상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복을 위해서라면 바알을 섬기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굳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바알을 믿으면 됩니다.
심사가 곱지 않습니다.
이 세상 복도 받고 천국의 복도 받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둘 다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성도들 신약에 나오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복을 받기 보다는 환란과 핍박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사를 공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진리를 지키기 위해 믿음을 갖기 위해 지켰던 성도들은 그 사회의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로써 그들은 종교화 되어 있는 집단을 피해 산이나 광야나 기타 사람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 믿음을 지키면서 유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야 지금 교회의 논리대로 라면 그들은 저주를 받은 자에 불과 하고 그들의 신앙인 거짓에 불과합니다.
성도의 삶은 고단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몇몇 사람을 빼고는 대부분의 성도들의 삶은 곤고했고 그들은 세상에서 아니 교회에서 핍박을 받으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복을 받는 것이 마치 믿음이 좋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그런 사상은 바로 우리나라의 근대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복 너무 따라가지 마세요.
그것은 하남님께서 주시는 대로 살면 됩니다. 그렇다고 제가 복을 받는 것 가체를 터부시 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분복을 주셨다면 마땅히 그것을 누려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에 나와 있는 교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복을 보면 그 소위가 참으로 악하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핑계 댑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면서 이 세상의 복을 하나님께 달라고 때를 쓰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부모에게 효도를 하려고 하는데 부모가 재산을 줘야 할 것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산을 물려주면 그것으로 효도를 하겠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는 그들의 마음이 더 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너무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야곱이 이삭에서 축복을 박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하는 것을 지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삭에게 축복을 받기 위해서 아버지를 속이고 자기가 에서라고 하면서 지금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그런 야곱에게 속아서 이삭은 자기가 원하는 에서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을 축복하고 맙니다.
야곱이 받고 싶어 했던 복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형을 속이고 또 아버지를 속이면서 까지 그토록 받고 싶어 했던 축복은 이 세상의 복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야곱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축복이 이 세상의 평안함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재산을 누가 다 받았습니까?
이삭이 누렸던 그 모든 재산은 실제 야곱이 받은 것은 없습니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의 거의 모든 재산을 받았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거부가 될 정도로 부요한 삶을 누렸습니다. 그 모든 재산 중에 야곱이 유산으로 받았다고는 성경에 기록이 안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받은 후에 야곱의 삶은 오히려 더 고단하기만 했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 축복을 받은 후에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했고 그것을 들은 리브가에 의해 밧단아람으로 거의 도망을 가다 시피 자기 몸을 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그 길이 곤고했는가를 성경은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잤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가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이삭은 거부였기 때문에 집에서 기르는 종들이 많았을 텐데도 야곱이 먼 길을 떠나가는데도 어느 누구하나를 대동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가 축복을 한 아들이 생면부지의 땅으로 가고 있는데 종을 함께 가게 하지도 않았고 또 재물을 나눠 주지도 않았음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이삭으로 축복을 받았지만 그 축복은 어떻게 보면 자기 육체에 있어서는 저주처럼 다가왔음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야곱은 복을 받지 못 했습니다.
그는 한 푼도 못 받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버림을 받다 시피해서 밧단아람으로 쫓겨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이삭의 재산을 물려받았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물론 나중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해 주셔서 거부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실제 이 세상의 복을 받았다고 보기에는 힘이 듭니다.
야곱의 고백입니다
창세기47:9절을 보면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실제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후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보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밧단아람으로 가서 외삼촌으로부터 그는 거의 종이나 다름없이 지내게 되었고 아내를 얻기 위해서 그가 어떻게 수고를 했는가를 성경이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리브가의 임종도 보지 못 했습니다.
자기를 너무도 사랑하고 자기에게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게 한 리브가가 죽을 때 그는 곁에 있지도 못했습니다. 실제 아버지 이삭은 야곱을 사랑하기 보다는 에서를 더 사랑했던 것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과 같이 어머니 리브가가 죽을 때 곁에 있지도 못하는 야곱이었습니다.
또 비록 후처이기는 하지만 자기 장자가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을 듣는 아주 억장이 무너지는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어느 부모가 이런 일을 듣겠습니까? 야곱의 삶은 축복이 아니라 어쩌면 저주에 가깝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 자기의 외동딸 디나가 이웃 이방인의 족장의 아들로부터 강간을 당하는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그 족장의 집안을 멸하고 야곱은 자기가 살던 터전에 옮겨가야 했고 그 길에서 자기가 너무도 사랑하는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게 됩니다.
또 그는 자기가 너무도 사랑하는 요셉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물론 실제 죽지는 않았지만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만 알았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 세상에서는 축복을 받았다고 보기는 힘이 듭니다. 물론 물질적으로는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사람은 야곱의 고백과 같이 나그네 생활이 험악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누가 이렇게 겪으면서 살았겠습니까?
더구나 그는 나라도 없이 자기 땅도 없이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디 마땅히 정착할 곳이 없이 유목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는 대로 살아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의 삶은 저주에 가깝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스스로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야곱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승리자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었습니다. 자기가 이겨서 승리한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이삭으로부터 받은 축복으로 인하여 그는 하늘의 축복을 받는 승리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야곱을 구속해 주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축복을 받았는가를 보겠습니다.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누구의 옷을 입었습니까?
야곱은 자기의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이삭이 사랑하는 에서의 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나가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만약 야곱이 자기 옷을 입고 이삭에게 나가서 축복을 받으려고 했다면 그는 오히려 이삭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 옷의 냄새를 맡고 이삭은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기 옷을 입고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형의 옷을 입고 축복을 받았고 그 형의 옷의 향취를 맡고 이삭은 마음껏 야곱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로 인하여 축복을 받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됩니다. 야곱이 그 형 에서의 옷을 입고 축복을 받은 것 같이 우리 역시 우리의 맏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입고 하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맏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취만을 좋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27절을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야곱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축복을 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그 말씀을 통해서 야곱이 어떤 축복을 받고 있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은 이 세상의 그런 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을 선언을 해 주는 그런 축복입니다 바로 세례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실제 그때는 세례가 없었지만 이삭을 통해 야곱을 축복하면서 세례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입니다
야곱의 옷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삭은 야곱에게 하늘의 복을 축복해 주고 있습니다. 성도가 받아야 하는 복은 이 세상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하늘의 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나에게서 예수를 아는 냄새가 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고 있습니다.
세례가 없었던 시절에 이삭을 통해 세례를 보여 주었고 야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과 같은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하고 그렇게 옷을 입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향취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축복은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곡식은 무엇을 의미라고 또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제가 말씀을 안 드려도 설교를 많이 보신 분은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요함복음6:55절을 보면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무엇을 빌어 주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곡식을 네게 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곡식은 생명의 양식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야곱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곡식을 주시라고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또 교회에서 성경을 배워서 예수를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게 됩니다.
또 포도주를 주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5:18절을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앞에 나오는 술은 율법입니다
이 율법은 진노의 포도주이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도는 이 진노의 포도주가 아닌 새 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축복은 이 땅의 축복이 아닙니다.
구약의 그림자를 보면서 자세히 성경말씀을 상고하지도 않고 그저 축복이라는 단어만 보고 무조건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제왕이 되어서 축복을 받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영원한 시간에서 인생이라는 팔십 년은 그저 한 점에 불과할 뿐입니다
수를 셀 가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설령 제왕이 된다 해도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에 불과 합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복이 그것입니까? 만약 그것을 원한다면 제가 처음부터 말씀을 드렸지만 이 세상의 다른 종교를 다니거나 아니면 철저하게 바알을 섬기면 됩니다. 하긴 지금 교회를 보면 거의 바알에게 귀속이 되어 있는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야곱이 받고자 한 축복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복은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과 상관이 없이 이삭은 에서에게 다 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 이 세상의 축복을 주셨는가를 생각해 보시고 혹시 내가 에서와 같은 자가 아닌가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축복을 한 사람을 저주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저주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했기 때문에 그는 저주를 받게 될 것이요 만약 축복을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인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복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승리자입니다
이긴 자가 받는 복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성도는 만민이 그 발 앞에 굴복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야곱의 육체는 분명히 지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야곱에게 모든 사람이 굴복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은 당연히 복을 받고 하나님의 사람을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로마서8:31절을 보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대적을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시겠다는데 누가 야곱에게 저주를 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만약 야곱을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의 판단이 잘못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는 저주를 받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도 야곱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한 이렇게 축복을 받는 야곱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의 판단을 옳다하는 자임으로 그 역시 축복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복 너무 좋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하늘의 복을 받기 위해 우리는 침노하는 자가 되어서 야곱과 같이 어떻게 하든지 그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해서 그런다면 그는 야곱과는 전혀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그는 이 세상의 바알을 섬기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그는 야곱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주는 축복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입은 야곱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를 얻을 수 있게 생명의 양식을 하나님으로부터 달라고 하는 축복을 해 주었고 또한 그가 성령을 충만히 받아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영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축복을 했습니다.
이삭의 축복을 야곱은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이삭의 아들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옳다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런 야곱을 누가 저주를 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만약 야곱을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옳다하는 야곱을 저주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과 같이 되어 저주를 받게 되고 야곱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옳다하는 야곱을 축복했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야곱과 같은 성도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한 그 축복을 믿음으로 받은 성도입니다
그런 성도는 비록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의 세월이 험악할지라도 천국의 축복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기꺼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야곱과 같이 하늘의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아카데미 강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0) | 2016.02.18 |
---|---|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0) | 2016.02.18 |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0) | 2016.02.18 |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0) | 2016.02.17 |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0) | 2016.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