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사도행전15:6-11절을 보면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신앙은 분명한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교리를 모르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헛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차라리 교회에 안 들어오고 세상에서 사는 것 보다 못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는 일방통행이 되어서는 반드시 타락을 합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또는 몇 사람이 말씀에 대해서 일방통행을 하고 있다면 그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 한사람이 성경에 대해서 바로 해석을 하고 있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교회사를 통해서나 성경을 통해서 보면 반드시 타락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더 합니다
교회는 공동체가 되어야지 어느 사람이든지 독점을 하게 되면 그 순간에 타락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을 하고 있고 현재 독점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목회자들은 거의 니골라당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니골라당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사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세상 적인 문제로는 참으로 많은 토론을 하고 있지만 진리를 지키겠다고 하는데 있어서는 금기시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교회는 분명이 니골라당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며 그 안에서 진리가 바로 설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치 다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반대의 의견을 제시를 하면 그가 이단에 속해서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지키기 위해 힘쓰는 성도들을 이단으로 정죄를 하고 심지어는 그 교회에 출석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교회 안에서 목사의 말에 조금이라도 토를 단다면 아마 이 시대는 무조건 신천지로 몰아버리려 할 것입니다 실제 목사들 중에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인터넷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올린 글에 대해서 반박을 하면 마치 그가 이단에서 와서 분열을 시키려고 하는 것 같이 몰아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면 자기가 정통이 되어 정당성을 가지는 아주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진리에 접근할 수도 진리를 알 수도 없습니다.
물론 성경이 다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자기 편리대로 해석을 하기 때문에 답을 찾지 못하고 서로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는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기초가 되는 것에 대한 바른 정립이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초를 모르면 오해를 하게 됩니다
또한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게 되어 있고 그런 한 말씀으로 인하여 성경 전체에 있는 구원론이 심각하게 침해를 받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기초가 되는 말씀을 먼저 기둥으로 세우고 나서 집을 지어야 하는데 기초가 되는 말씀을 기둥으로 세우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성경 전체가 다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습니까?
너무도 쉬운 이 문제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고 있고 이 기초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자기가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시편14:3절을 보면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히브리서13:16절을 보면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야고보서4:17절을 보면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의 말씀을 보면 아니 성경에 여러 곳에 있는 말씀을 보면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선을 행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고 자기의 행위를 보면서 마치 선을 행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선에 대한 가장 기초는 시편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선에 대한 정의입니다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었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는 이 말씀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고 이 문제는 결국 구원론까지 영향을 주어 그 영혼이 사망에 이르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어느 누구도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 기초 석이 되어서 말씀을 쌓아 올려야 하는데 이런 기초를 다지지 않고 다른 말씀들을 보게 되면 마치 자기가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게 되고 자기를 스스로 선한 자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심각한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내리기를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시는데 자기는 선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서라도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어야 하는데 실제 이 시대 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기 행위를 보면 분명히 선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자기가 선을 행하고 있다고 오해를 하게 되어 있고 사람들도 역시 내가 하고 있는 행위를 보면서 선한 일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말들이 복음에 얼마나 정면으로 위배가 되는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기초를 모르면 그렇게 됩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하는 행위를 다 부정하고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을지라도 아니 내가 하는 행위가 선이 아니라고 정의를 할지라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만약 그것까지도 부정을 하게 된다면 그는 영지주의 사상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그것이 분명히 선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선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 그러냐면 성경이 그렇게 정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정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선을 행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서 다른 말씀들 중에서 선을 행하라고 행하고 있다고 말씀을 할지라도 그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제가 아는 지혜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가장 기초가 되는 말씀을 거절하면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죄인은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선을 행하실 분은 선하신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성경이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신앙생활을 마치 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한 마디로 성경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기초가 되는 말씀을 기초 석으로 쌓아 놓지 않고는 신앙 전체에 심각한 문제가 야기되고 그것은 구원과 직접적인 상관이 있게 됩니다.
기초가 흔들리면 다 흔들립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모든 것이 다 옳아 보인다 해도 가장 기초가 되는 말씀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지 않으면 모두가 흔들리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기초적인 말씀들이 많이 있으며 그런 기초를 든든히 다져 놓지 않으면 여러분은 이스라엘이 실패를 한 것과 같이 똑같은 처지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여기서 말씀을 하는 장로들은 이 시대의 장로들이 아니라 실제 말씀을 가르치는 이 시대 목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서 말씀의 기초를 다지는 일을 했습니다. 물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기초를 놓을 수 있는 교리를 체계적으로 기록해 놓았고 이 시대 우리가 그것을 성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도 노회에 참석을 합니다.
침례교나, 감리교, 성결교에서는 지방 회라고도 하는데 어찌 되었든 그런 노회를 매월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회를 참석을 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노회를 통해서 목사들이 성경의 기초를 다지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도 전혀 그렇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치열한 난상토론이 될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한 영혼을 생각한다면 정말 목사들이 모여 있는 그런 자리에서 성경의 기초를 쌓아 올리는 그런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정기적으로 세미나가 있지만 그것 역시 하나의 발표고 서로의 입맛게 맞추고 있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습니다.
거의 친목회 수준입니다
그저 한 날 정해서 만나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고 또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 그 한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하려고 해도 참석을 할 때마다 회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복음을 다 알고 있는 듯이 아니 자기들만이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왜 모입니까?
겨우 얼굴이나 보고 서로 유대감을 갖기 위해서 모인다면 이 세상 모임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최소한 진리에 대해서 가르치고 진리를 사수하기 위한 목사들의 모임이라면 사도들과 장로들의 모임과 같이 교리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장로교라고 하지만 사실 장로교의 교리 조차모르는 목사들이 태반입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최소한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은 자기들이 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서 교리적으로 치열하게 싸움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과연 교리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리의 기초가 되는 사상은 이미 신학에 머물러 있고 신학을 벗어난 사람들은 교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등과 장로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차이냐 하면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서로 이단이라고 공격을 했는데 지금은 서로가 정통이라고 말하고 있고 서로가 교제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초가 되는 교리가 다른데도 이 시대는 서로가 정통이 있는 교회라고 서로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교리는 왜 있습니까?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른 교리가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15장1-5절을 보면 할례 문제가 대두 되었고 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로 인하여 이 변론이 있게 되었습니다. 할례가 구원과 상관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은 구원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이런 변론이 있었느냐면 바로 구원 문제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할례 문제를 변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이 무엇이냐면 이런 할례나 모세의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런 것이 구원을 받는데 있어 장애가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행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이지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교회로 사람들을 부르신 이유는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할례나 모세의 율법은 안 됩니다
이런 기초가 바로 서야 믿음을 가질 수 있는데 이 시대는 이런 기초가 허물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니 기초가 무엇인지 모르고 율법도 지켜야 하고 예수도 믿어야 한다는 아주 이상한 교리가 세워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율법주의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만약 이 시대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한다면 베드로는 사도행전의 말씀과 같이 하지 않고 할례도 받고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도들과 장로들의 결론은 오직 믿음이라는 것에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동일한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하시고 믿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동일한 성령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스라엘과 같이 동일한 성령이 아니라 동일한 율법의 모양을 내려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모양을 내려고 할례를 받은 것 같이 율법의 모양을 낸 것 같이 이 시대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하는 행동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같은 성령 안에서 역사를 하십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통일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그 마음을 같게 하시고 있습니다. 율법의 모양으로 증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오신 성령이 증거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람들은 종교화되기 시작을 하면 어떤 모양을 가지고 서로 그 모양을 냄으로서 서로가 같다고 인정을 하려 합니다. 특히 모세의 율법은 겉으로 보기에 서로의 동질성을 찾기가 너무 좋습니다. 할례를 받고 또 안식일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하는 그런 행위는 서로가 같다는 동질성을 찾는데 너무도 좋은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그런 모양으로 자기 믿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 모양 때문에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서로 동질성을 찾게 하는데 있어 너무도 좋은 수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도 율법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동질성을 찾고자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안식일 교회나 하나님의 교회 같은 경우 자기들이 지키는 유월절의 특별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런 율법의 증거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임재 해 있는 성령을 통해 증거를 삼고 있습니다. 사도들이나 장로들이 받은 성령이나 그 당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받은 성령이나 동일하고 그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믿음으로 깨끗이 하셨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승천하시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은 율법의 행위로 자기들을 깨끗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실제 그들은 자기들의 흠 없는 율법의 의를 말하였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도 자기들이 지켜온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 깨끗해지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율법에 의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겉이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온전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입니다 믿음으로 마음이 깨끗해 져야 하는데 아직도 이 시대는 율법의 행위로 깨끗해지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또 그들은 어려서 할례를 받았고 아직도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고 여러 가지로 이방인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분간치 아니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겉모습이나 율법의 행위로는 분명히 사도들과 이방인들과는 분간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으로 사도들과 이방인들을 분간치 아니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사도들의 믿음이나 이방인의 믿음이나 동일하게 보셨습니다.
만약 사도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나 당시 믿었던 이방인들이 가졌던 믿음이 달랐다면 지금 이런 변론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단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서로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은 그것으로 분간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 이런 변론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할례를 받게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시험을 하는 것이냐면 이스라엘 조상들도 능히 메지 못했던 멍에를 메게 하는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안 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그 율법의 멍에를 지게 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지키고 있는 단 한가지의 율법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는 율법으로 깨끗해 질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하나님을 시험하여 그것으로 깨끗해 질 수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못 합니다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깨끗해 질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의 변론에서 결론이 났는데도 아직도 율법의 의로 깨끗해지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가 하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율법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제가 늘 강조를 드리지만 지금 방종을 하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저는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이 선하고 의로운 것이 세상의 기준이고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이 내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이 멍에를 지지 못 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이외는 이 율법에 대해서 멍에를 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아직까지도 이 율법이 살아 있고 율법의 멍에를 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이 율법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자유하지 못 한다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율법의 행위로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은혜로 말미암아 동일하게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그리고 부활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은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미치는 은혜입니다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여기서 누구 죄는 빼고 지고 가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지고 가셨습니다. 누가 율법을 더 잘 지킴으로 해서 그 은혜를 더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는 상관이 없이 믿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은혜를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직까지 율법의 멍에를 메고 있다면 이 은혜를 거절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은 모세의 율법으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받는 동일한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동일하게 받는 은혜를 거절하고 있고 율법의 모양을 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 입니다.
이 믿음만이 예수 안에서 동일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율법의 행위는 분명히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모든 믿음이 있는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임하실 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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