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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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윤주만목사 2016. 2. 17. 16:08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고린도후서3:12-18절을 보면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와 싸웠습니다.

아니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율법주의와 싸웠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깊이 율법주의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이 강하게 전파되는 그 시점을 빼고는 다시 율법주의로 회귀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늘 두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3장도 역시 어떤 영광에 있을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특히 고린도후서3장은 우리가 어떤 직분에 있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직분에 있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영의 직분에 있을 것인가를 비교를 하면서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군대에서는 경계를 섭니다.

경계를 서는 군인이 자기 직분을 모르게 된다면 그것은 그 군대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싸움에서 실패한 병사를 용서가 되어서 경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가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경계가 중요하고 또 자기가 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면 자기 뿐 아니라 그 부대가 싸움도 하기 전에 지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 있으며 군대 생활의 반은 경계 근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근부만 서다 오는 군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직분을 모르면 안 됩니다.

내 적이 누구인가를 모른다면 그는 경계를 서나마나 한 것입니다 병사가 자기 적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그저 막대기를 세워 놓은 것 같이 경계를 서고 있다면 잘못하다가는 큰 낭패를 보게 됩니다. 경계를 서는 병사의 직분은 혹시 모를 적병의 침입을 막아 주는 것입니다 모두가 잠들어 있거나 쉬고 있는 시간에 경계를 잘 서야 부대가 안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의 일군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시대 교회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의 일군인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들은 자기들이 세워 놓은 교회의 일군이고 또 율법의 일군이 되어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그들은 예수의 일군이 아니라 교회라는 조직의 일군으로 전락을 해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열심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심지어는 빚을 지기도 하고 또 자기의 노동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하면서도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그렇게 하는 자신이 너무도 대견스럽기만 합니다. 밖에서 보면 안타까울 정도로 거의 반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자기 직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모든 생활이 그들에 의해 짜여 지고 있고 그들이 하는 그대로 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열심을 내지 못하는 자기를 자책하기도 하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제가 아는 지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이가 있는 권사님인데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교회에 내고 그 교회에 들어가서 평생을 헌신하면서 살고 싶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 처음에 그 헌금을 했을 때는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로 칭찬을 받겠지만 나중에는 그 교회에서 천덕꾸러기로 변할 것이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직분을 모르는 사람들은 교회라는 것에 너무도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직분을 모릅니다.

제가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반드시 재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물론 바나바와 같이 모든 재산을 바치고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지만 그러나 보통의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복음전하는 자를 도와야 합니다.

 

바나바는 특별한 경우입니다

모두가 바나바와 같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나바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가 다른데도 마치 자기를 사도바울과 같이 바나바와 같이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의 일과 육의 일을 모릅니다.

제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늘 강조를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대분의 일들이 사실은 영의 일이 아니라 육의 일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직분도 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의 직분이 무엇인지 육의 직분이 무엇인지를 분별을 못하고 있고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종교는 안 됩니다

성도는 믿음이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지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 직분을 망각하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직분을 망각했을 때 그리고 자기가 무슨 직분을 가졌는가를 모르게 되면 그 피해가 어떻게 되는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구원의 종교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내세가 없다면 우리가 믿는 믿음은 모두가 헛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직분을 모르고 일하는 사람은 결국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되고 그것이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까지 그 피해가 고스란히 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내가 어떤 직분을 가졌는가를 늘 생각하고 그 직분에 맞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에게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없어질 곳에 대한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영원히 있을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없어질 것에 대한 영광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없어질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광은 없어질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작금의 교회를 보면 없어질 것에 대한 영광이 빠져 있고 그것에 너무 취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영원히 있을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없어질 것의 영광은 내가 교회 안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없어지지 않는 소망이 있는 영광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내가 무엇을 행해서 나타나는 영광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타나는 영광입니다 내 몸으로 내가 교회 안에서 행한 모든 영광은 모두가 없어질 것이고 우리가 받는 영광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아직 이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성도는 없어질 것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도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로서 난 그 영광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내려온 후에 그 얼굴에서 광체가 났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 광체를 보고 그 얼굴을 감히 보지를 못하고 모세의 얼굴에 수건을 가리고 난 후에 모세와 마주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모세의 얼굴을 통해 본 그 영광이라는 것이 영원히 있는 영광이 아니라는 없어질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34:29-30절을 보면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가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올 때 그 얼굴에 광체가 났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돌판이 무슨 직분을 가졌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3:9절을 보면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이 십계명은 정죄의 직분을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교회 안에 십계명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십계명이 살아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고 오히려 십계명이 죽었다고 하면 이단시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모세가 가지고 내려온 그 십계명이 정죄의 직분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정죄의 직분입니다.

십계명은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십계명은 지금도 사람들을 정죄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십계명의 직분은 정죄를 하는 직분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그 직분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는데도 그 정죄의 직분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고 그 기준을 가지고서 정죄를 일삼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단순하게 지킨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순간 나는 그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정죄하게 되어 있고 나도 역시 정죄에 빠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정죄에 빠지게 되면 그 정죄를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아직도 초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 합니다 도적질을 해도 되고 살인을 해도 되느냐고 말 합니다.

 

정말 어린아이입니다

그런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그런 일을 해서 되겠습니까? 우리는 십계명이 그것이 있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 법에 그리고 우리 양심의 법에 살인을 해서는 안 되고 도적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데 내가 복음을 전하면 누가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십계명을 모르는 우리 조상들은 성경에 나오는 부모 공경 보다 더한 공경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심지어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멍석말이를 해서 그를 바로 잡으려고 공동체가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정죄의 직분입니다

그것을 아직도 지키겠다고 주장을 하는 것은 사람들을 정죄를 하겠다는 뜻이며 스스로도 정죄에 빠지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정죄를 해서도 안 되고 또 스스로도 정죄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아직도 십계명의 직분을 행하고 있으면서 정죄의 직분을 행하고 있고 그 정죄에 스스로 올무가 되어 빠져 들어가기도 합니다.

 

로마서8:1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아주 정점을 찍어 놓고 있습니다.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십계명의 직분을 사용하면서 아직도 도덕법으로 정죄를 일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표준새번역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정죄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받아서도 안 되고 정죄를 해서도 안 됩니다 만약 내가 십계명을 가지고 정죄를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십계명을 가지고 의문에 쓴 율법을 가지고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정죄를 하고 있고 내가 그 정죄에 빠져 있다면 나는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법을 가지고 정죄를 하면 그는 정죄의 직분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를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잣대로 정죄를 한다면 그는 의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라 정죄의 직분으로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이 초등학문에서 벗어나지를 못한 율법주의자라고 보시면 확실합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구약을 읽을 때 아직도 정죄의 직분을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데 아직도 십계명이 그래도 살아 있어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막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천국을 소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막 살고 싶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차라리 교회에 나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정죄의 직분을 가지고서 자기들과 같아지지 않으면 마음대로 정죄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멸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까지 수건이 벗겨지지 않아서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죄의 직분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 수건은 없어져야 합니다.

정죄의 직분으로 영광이 나타나 그것을 주시하지 못하고 모세의 얼굴을 가렸던 그 수건은 벗겨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의문에 쓴 율법이 더 이상 정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 수건을 벗겨도 모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십계명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다 지고 가신 것을 믿는 성도는 십계명이 아무리 정죄를 하더라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더 이상 정죄를 못 합니다

십계명이 더 이상 성도를 정죄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십계명이 아무리 정죄를 하려고 해도 더 이상 정죄를 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방종을 하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설령 제가 방종을 이야기 한다 해도 여러분의 양심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방종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살인해도 괜찮다고 한다 해서 여러분이 살인을 하겠습니까?

물론 살인을 것과 천국에 가는 것이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살인을 해도 도적질을 해도 괜찮다고 한다 해서 여러분이 그렇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절대로 아니 한 사람도 그렇게 할 사람이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정죄의 직분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살인을 하고 도적질을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못 합니다.

그러나 수건이 벗겨지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안 가르치면 타락을 한다고 가르치고 율법을 강조를 안 하면 성도가 타락을 한다고 그럴싸하게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의 교육을 통해 무엇이 나쁜 것인가 좋은 것인가를 알고 있고 그것은 누가 시키고 안 시키고를 떠나 좋게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모세의 글이 무엇입니까? 바로 율법입니다

오늘날 까지 그 율법을 보면서 정죄를 하기도 하고 또 스스로 정죄에 빠지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정죄의 직분을 보고 그 수건을 벗지 못한 것과 같이 오늘 날까지도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보좌 우편이 앉아 계신 지금까지도 수건이 벗겨지지가 않고 있습니다.

 

법을 보면 정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 법을 보고도 자유 함이 있어야 하는데 자유하지를 못하고 아직까지도 정죄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법을 보고도 정죄함이 없어야 하는데 법을 보면 정죄를 받으니까 아직까지도 수건을 쓰고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상의 뿌리가 바로 율법주의에서 나온 것이며 내가 지키고 있는 단 하나의 율법이 나로 하여금 수건을 벗겨 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십계명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아마 제 글을 안 보다가 이 글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저를 보고 이단이라고 공격을 할 것입니다 십계명이 폐해 졌다고 하면 당연히 이단으로 공격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배워왔고 또 정죄의 직분을 행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그 직분이 폐해졌다고 하면 가만히 안 있고 흥분을 하면서 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아직도 정죄를 하고 있습니까?

그는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고 있는 사람이고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그저 교회라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주께로 돌아온 성도는 그 수건이 벗겨져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얼굴을 똑 바로 볼 수 있습니다.

법을 지켜서 얻는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을 얻은 성도는 그 법의 영광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알고 있습니다. 더 큰 영광을 얻어서 그 영광을 누리고 있는 성도는 절대로 작은 그 영광에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또 더 이상 법에 의해서 정죄를 당하지도 않습니다.

 

수건을 벗으시기 바랍니다.

구약을 보면서 아직도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면 그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교회라는 건물에 들어와 종교인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 불교나 천주교나 같이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죄의 직분을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정죄를 하는 자가 아니라 이제 또 다른 영광의 의를 가르치는 성도입니다 법의 잣대로 사람을 보고 또 그것을 가지고 정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진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법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믿음을 가르쳐 주는 성도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주는 영이십니다.

아직도 정죄에 빠져 있는 그 직분 육에 있는 사람은 영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습니다. 성도는 주의 영 성령이 계신 성령의 전입니다 성령의 전인데 아직도 육체에 따라 정죄를 하고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6:19절을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성령의 전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우리 육체는 이제 정죄의 직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 구약을 볼 때 수건을 벗어버리고 이제 더 큰 영광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정죄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 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정죄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직 구약의 율법을 보면서 정죄를 받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의 안에는 주의 영이 없다는 말씀이고 성령이 아직 임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하고 있지만 보혜사가 임하시지 않아 아직도 구약의 율법이 보이고 그 정죄의 직분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해서 자유 함이 있습니다. 이 자유는 살인을 하라 도적질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이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겠지만 정죄의 직분을 위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 하는 가운데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정죄의 직분에 매여 있는 사람은 절대 자유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는 정죄의 직분의 영광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수건을 벗는다 해도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또 그것으로 인하여 정죄의 직분에 대해서 거리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환하게 보고 그것은 정죄의 직분의 영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광을 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영광을 봅니다.

이제 정죄의 직분의 영광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그 영광을 보는 성도는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죄의 직분 율법을 지킨 그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주의 영광을 보고 주와 함께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주의 영광으로 말미암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영광의 직분은 내가 무엇을 행해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주의 영광으로 영광이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영광이 성도님들에게 있어야 하고 이렇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성도만이 후에 주님께서 오실 때 영광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내가 율법을 지켜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설령 율법을 아주 잘 지켜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낸다 해도 그 영광은 반드시 없어질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없어질 영광에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아직 영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정죄의 직분 초등학문에 매여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죄의 직분은 내가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광의 직분은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내가 믿음으로 받게 되는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지금 눈에 보이는 정죄의 직분의 영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수건을 벗어 버리고 주의 영광을 보면 됩니다. 그런데 이제 선생이 되어야 함에도 아직도 정죄의 직분을 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은 아직도 수건이 벗겨지지가 않아서 율법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율법의 어느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주의 영이 여러분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주의 영이 계시려면 반드시 정죄의 직분인 수건이 벗겨져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구약의 율법을 보면서 정죄를 하고 있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면 주의 영이 여러분 안에 계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정죄를 하는 율법이 없이도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선하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면 절대로 법에서 자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율법을 보면서 그 영광을 보고 수건을 쓰는 그런 구약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수건을 벗고도 얼마든지 더 큰 영광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영광이 없어질 그 영광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알아야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자유하세요

법 앞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성령이 임하시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이 내 안에 임하시게 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으로 화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에 이르는 그 직분을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