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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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윤주만목사 2015. 7. 29. 16:22

그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2:18-25절을 보면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 시대는 문자에 너무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단이 무엇을 가지고 미혹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단은 성경을 가지고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성경을 가지고 미혹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미혹에 다 넘어가고 있고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저주를 받았습니까?

그들은 성경의 문자에 사로 잡혔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데 성경을 너무 문자로 보다가 결국에는 율법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방의 교회 역시도 그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이 되기 시작을 하는 그 시점부터 성경을 문자로 보기 시작을 했습니다.

 

2000년 가까이 됩니다.

그렇게 성경을 보면서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대 교회에서 배우고 있는 교리라고 보면 맞습니다. 제가 모든 교리가 다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리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서 만들어 졌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비유와 은유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분명히 메타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저 쉽게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오묘한가 하면 문자로 보아도 이 성경이 그대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은 쉽게 문자로 보고 있고 이제는 오히려 그 안에서 메타포를 찾고 비유와 은유로 보는 것을 거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백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성경을 보고 해석을 하고 그런 설교들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이제는 어느 누구도 이 문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성경에서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보화를 찾아야 하는데 이 세상 초등학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초등학문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으로 보고 있는 것이 초등학문입니다. 다른 것이 초등학문이 아니라 성경을 이 세상 사람이 이성적 지식과 학문으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그것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초등학문을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목사가 성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보고 그것을 그대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초등학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는 정도 학문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비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초등학문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그 설교들을 예수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그대로 이해를 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들으면 이해가 안 되고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어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그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그렇게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자적으로 보는 것을 이제 막 교회에 나온 사람도 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기 까지는 수많은 설교를 들어야 그것이 겨우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은 교회에 겨우 몇 주만 나와서 들어도 자기가 마치 다 아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쉽게 받아들이고 이제까지 이 세상에서 다 알고 있었던 이야기들에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그 말을 더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

 

초등학문입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그 말 한 마디를 더하고 있습니다. 그런 정도로 성경을 아는 것으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하나님의 경륜을 사람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깨달아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문자적으로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저 이 세상에 좋은 책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그 보다 못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는데 성경을 보면서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사람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성경을 열심히 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하면서 살았지만 주님께서 그를 모르신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씀들을 보면서도 그저 그것은 남의 일이고 자기는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다수들이 당할 일인데도 그것은 남의 일로 치부를 하고 자기들이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굳게 맹신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2:14절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는 육에 속한 사람이 더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교회 안에 육에 속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교회에서는 그것을 전혀 가르쳐 주지 않고 있습니다.

 

왜 안 가르쳐 줍니까?

모두가 육에 속하게 해서 죽이려고 하니까 누가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릅니다. 자기가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부르고 하는 그것으로 감동을 받으면 마치 자기가 영에 속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두는 다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수십 년 이상을 성경을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계속해서 보고 그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어떤 행위가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하는 것이 바로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만찬이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문자적으로 보고 성찬이라고 하면서 하고 있다면 그는 육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문자적으로 보고 그것을 자기 몸으로 그대로 행하고 있다면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성찬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 주의 만찬은 있어도 성찬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의 만찬을 자기들의 언어로 만들어서 성찬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그대로 자기들의 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주교는 화체설이라고 자기는 기념설이라고 하면서 서로 잘못 되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화체설이 무엇이고 기념설이 무엇입니까?

 

둘 다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있는 어떤 행위를 그대로 육체적으로 하고 있다면 그는 무조건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아무리 주님이 하셨다 해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면 그것은 육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 영의 일을 도무지 깨닫지를 못 합니다

 

다 육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니라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자기들의 몸으로 그대로 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육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 중에서 어느 단 한 가지라도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절대로 영의 일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아직 그에게 오시지 않아서 그렇게 육에 속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육이 무엇인 줄 모릅니까?

내 육체로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다 육입니다. 그것을 하면서도 자기가 영적인 성도라고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육의 사람이지 영의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지키고 있고 또 성찬을 기념한다고 하면서 모형으로 하고 있는 그 자체가 육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것은 오직 내 마음에서 믿어지는 역사입니다. 아무 것이나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들이 믿어지는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믿어지니까 육에 속한 사람이 되어서 자기들의 육체로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고 성찬을 한다고 하면서 육체로 모양을 내고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육체로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어느 행위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다 육에 속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주의 복음을 모르기 때문이며 주님의 복음에 순복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모르는 것이 문제고 모르다 보니까 그것에 순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로마에 인정을 받기 시작을 하면서 육체로 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 동안에 한 번도 하나님의 징계가 있은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뭐가 다릅니까?

솔직히 천주교나 기독교나 차이가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말하는 약간의 교리적인 차이는 있어도 이 두 집단은 다 똑같이 육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종교화가 되어서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떤 짓이라도 하는 것이 지금 이 시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리가 조금 다릅니까?

그것으로 서로 이단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둘 다 똑같이 육에 속해 있습니다. 천주교도 육에 속해 있고 기독교도 육에 속해 있어서 사실 종교개혁이라는 것은 무색한 말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잘못된 종교개혁을 해서 그것을 이제는 어느 누구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성도들만이 이 두 교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는 그것이 영의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영의 일을 모르고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는 다는 그 행위를 하는 것으로 자기가 영의 일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입니다.

 

비유입니다

거의 모든 성경은 다 비유라고 보시면 됩니다. 문자적으로 되어 있는 말씀은 아주 지극히 적습니다. 성경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아시고 정말 깨어 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사환들아

누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사환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이 세상에 직장에 취업을 하거나 누구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제가 처음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렇게 보고 있다면 그는 아직 초등학문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사환입니다.

우리 성도는 다 주님의 사환입니다. 꼭 복음을 전하는 자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은 사환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베드로는 그것을 지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육적으로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보다가는 이 말씀을 전혀 이상하게 해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이 시대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교훈을 주는 말씀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환들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 사환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 세상의 사환들은 정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민주 사회가 되어서 그런 일이 별로 없지만 성경이 기록이 될 당시만 해도 사환들이 얼마나 주인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겼는가를 역사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순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는 사환입니다 그러면 주님께 순복을 해야 합니다. 순복을 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 줄을 모르고 있으면 안 됩니다. 무엇에 순복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그저 육체로 순복하려고 하고 있다면 그 역시도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환들은 순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의 복음을 바로 전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고 있는 대표적인 사환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세가 사환이고 또 사도 바울이 사환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그 주인에게 순복을 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두 가지 모습으로 우리의 주인으로서 사환으로 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때로는 선하고 관용을 하고 있지만 또 때로는 아주 까다롭게 우리에게 사환으로서 살아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교회 안에 그저 교인 하나 끌고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복음의 일군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아주 까다로운 일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주인이 시키는 그 일을 바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지금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까다롭습니다.

오직 믿음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조금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믿음이라는 것을 이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관용과 너그럽기도 하지만 또 까다롭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새번역입니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복음을 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그 영혼을 위해서 전하고 있지만 받아들이는 상대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말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사환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때로는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참 복음을 전해본 성도만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성도가 얼마나 귀합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하지만 복음을 전하면 이 시대 역시 억울하게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율법주의자들에게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잘못 되었는데도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그 율법의 행위에 취해서 어떻게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내지 말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당장에 고난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지 말라고 하는 것이 너무도 성경적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는 것인데도 육에 속한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를 못해서 애매히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단의 새끼라고 하면서 핍박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참고 있습니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들과 싸우고 싶지만 그래서 결론을 내리고 싶지만 역시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이 뭐라고 해도 그대로 참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슬픔을 참으면서 견디면 이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애매히 고난을 받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진리를 바로 전하고 있지만 육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도무지 이해를 못해서 고난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천국을 생각하면서 참으면 아름답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리스도편지에서 설교를 보고 그것을 전하시는 모든 분들이 이와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른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성도들을 핍박하게 되고 그것이 고난이 되어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으면 아름답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일에 성도는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새번역입니다.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죄가 있습니다.

지금 사환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무슨 죄를 짓겠습니까? 이 세상의 율법적인 죄가 아닙니다, 그 죄는 누구나 다 짓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을 매를 맞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것으로 우리가 매를 맞는다면 아마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의 죄로는 매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죄를 지면 맞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택하신 자들을 반드시 구원하시기 때문에 그가 혹시 몰라서 아니면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면 그때는 아주 무섭게 때립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영혼을 구원해 주십니다. 사실 이 시대는 이렇게 매를 맞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선을 행한다고 하니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사실 진리를 바로 전하면 고난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진리를 전해서 받는 고난은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고난입니다.

이 세상은 다 율법주의자라고 보면 됩니다. 그 수많은 율법주의 자 중에서 진리를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연히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고난이 따라 오게 되고 그 고난을 참고 견디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는 말씀입니다. 내 육체의 고난이 아니라 진리를 전함으로 받는 고난에 성도는 참고 견뎌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선을 행하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면서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성도들을 부르셨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도는 아주 적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마치 광야에 홀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수와 다른 말씀을 전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성도들에게는 고난입니다.

 

주일을 다 지킵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하지 말라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행위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지금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은 저 사람이 정신이 이상한 것 아니가 하면서 쫓아 낼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런 고난을 당하면서 참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고 또 우리로 다른 영혼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고난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은 주님을 핍박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고난을 참고 견디신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시고 있습니다.

실제 초대 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그 자취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좋은 시대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교회 안에서 진리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육체의 고난은 있을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그 자취를 따라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가 고난을 당 합니까?

이 시대는 교리에 대한 치열한 싸움이 없습니다. 그저 정통이라고 하면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아주 작은 틈에서 벌어지게 되어 있는데 이 시대는 다 똑같은 교인들만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정통이라고 인정하면서 싸우고 있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 치열한 싸움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고난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모든 것이 다 가한 시대입니다.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몇 가지 교리에 벗어나지 않으면 그리고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하고 있으면 모두가 정통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전하시기 위해서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이 시대는 다 율법주의자들이 되어 성도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고난이 없습니다.

진리를 전하는 성도가 있어야 고난이 있는데 있어도 그 숫자가 너무 미미해 그들에게 영향을 줄 정도가 안 되다 보니까 고난이 없습니다. 아마 그리스도편지에서 전하는 설교를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면 고난이 시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대적을 하게 되어 있어서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정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예수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 죄를 십자가에서 지고 가셨다는 아주 초보 적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 자기가 마치 예수를 잘 아는 것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요한일서에서 저는 죄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우리 죄를 대신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죄가 있다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속죄 제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부터 흠 없는 어린 양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율법으로 정해 놓으셨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 입에는 궤사가 없으십니다.

그러니까 거짓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진리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 이신 주님 자체를 증거 해 주셨습니다.

 

진리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이 진리라는 것은 그저 문자적으로 알고 있지만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난 후에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시고 있지만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진리에 대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로 이 세상에 오셔서 거짓이 없으신 오직 참 만을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욕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땅에 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님을 영접하기 보다는 오히려 주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어떻게 하든지 욕을 보이려고 시험도 하고 또 온갖 것으로 꼬투리를 잡으면서 욕을 보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자기를 모욕하는 이스라엘에게 의해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받은 고난은 너무도 큰 것입니다 그들은 때로 돌로 치려고도 했고 또 붙잡아서 자기들의 율법대로 처치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주님이 천사들을 부르셨다면 아마도 그들은 그 자리에서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을 하지 않고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지금 사도베드로는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 사환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환들도 그렇게 주님의 자취를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도는 죄에 대해서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의에 대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주님께서 우리로 앞서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모두 이루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로 이제 의에 대해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의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보다 한술 더 떠서 은사까지 성행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그 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고난입니다.

주님께서 그 자취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육체로 당하는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고난은 저 아프리카나 독제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받고 있습니다. 성도는 의를 위해서 사는 그것으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의를 전하니까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의입니다. 이 두 의는 서로 대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율법의 의를 배설물과 같이 그리고 쓰레기와 같이 이야기를 하면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참지를 못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에 대해서 살면 성도가 당연히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입니다.

다 양 같이 길을 길고 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 줄을 모르고 그저 세상을 따라 그리고 다수를 따라 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역시 그들도 길을 잃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제 그들은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이 어떠한 결과는 가져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자취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고난은 당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그런 고난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더욱 진리에 견고히 서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사도 베드로가 성도들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이제 우리는 목자 되시는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 그 은혜의 복음을 깨달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의에 대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성도가 되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영접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Jesus Christ, Letters 아카데미 강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