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71-2,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윤주만목사 2024. 11. 16. 09:18

고린도후서4:14절을 보겠습니다. (290)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주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믿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말 잘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문장 전체를 이해를 해야지 어느 한 절만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입니다

지금의 성경은 편찬하는 사람들이 장절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써서 보낼 때는 장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장절을 구분해서 보고 있습니다. 문장 전체를 보면 무엇을 말씀하는 가를 알 수 있지만 장절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로마서 말씀을 근거로 해서 신체의 부활을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내가 문자를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 그것이 도리어 진리로 가는 길을 막아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기초를 든든히 세워야 하고 또 성경 전체에서 영생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어떻게 살리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베드로전서318절에서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기초가 중요한가는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기초가 되는 말씀이 흔들려 버리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 모든 목사입니다

아니 이제까지의 모든 신학자들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 하면 신체의 부활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물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있고 또 성경의 장절을 보면서 마치 이 말씀과 저 말씀이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살리심을 받았습니까?

주님은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만 기억하고 있어도 로마서의 말씀을 보고 신체의 부활을 주장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의 말씀 따로 보고 있고 심지어는 바로 앞에 있는 로마서9-10절 말씀도 따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영은 의로 인하여 살았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반대가 되는 말씀을 문자만 보고 신체의 부활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영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신체의 부활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잘못 되었습니다. 주님은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이 영으로 살리심을 받아 신령한 몸으로 부활을 하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제자들이 보고도 알지 못 했습니다.

우리도 살리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리십니까? 예수와 함께 살리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으면 우리 역시 영으로 살리심을 받아야 예수와 함께 살리시는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는데 우리는 신체로 살리심을 받는다면 예수와 함께 가 아니라 따로 가 됩니다.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오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에서 주 예수를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신체가 다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같은 단어를 쓴다고 해서 같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희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시는 것이 우리의 신체라면 로마서89-10절 말씀을 11절에서 뒤집어 버리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제까지 모든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신체의 부활에 대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몸입니다

그 단어를 보고 신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니 너희 죽을 몸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더욱 신체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이 몸이 우리 신체를 말씀하고 있다면 신체의 부활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로마서89-10절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기록해서는 안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또한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십니다. 예수와 함께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살리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똑같이 살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떻게 살리심을 받았는가 하면 영으로 살리심을 받아서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을 하셨습니다.

우리 죽을 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으면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예수가 아니면 우리는 몸이 없습니다. 지금 잠시 보이는 이 육신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 몸과 다를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우리는 죽었습니다. 우리 신체의 몸을 살리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15:44절을 보겠습니다. (283)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학자들이 신체의 부활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체의 부활을 말해야 사람들에게 조금 더 극적인 부활을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천국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성도들끼리도 서로 만나서 무용담을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너희 죽을 몸에는 두 가지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죽을 몸은 우리 실제 몸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살리는 몸은 우리 신체가 아니라 신령한 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죽을 몸이라고 할 때는 실제 우리 육신을 말씀하고 있고 살리시리라고 할 때는 그 몸이 아니라 신령한 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다시 사는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를 해야 합니다. 아니 성경이 우리가 어떻게 다시 사는 가를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죽을 몸이라고 할 때는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육의 몸이 맞습니다. 그러나 살리시리라는 말씀은 그 몸을 살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살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문자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 영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으로 살리심을 받습니다. 그런데 영으로 살리심을 받을 때는 신령한 몸을 입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에서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정말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살리시리라

미래형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살렸다는 것이 아니라 살리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은 지금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을 몸을 말씀을 하니까 신령한 몸을 말씀해야 하는데 그 신령한 몸은 언제 사는가 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살리십니다.

죽을 몸입니다

물론 미래형입니다. 그러나 살리시리라는 말씀은 그보다 더 미래형입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은 산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몸을 입는 것은 앞으로 살리시는 것입니다.

영은 산 것입니다

우리의 영은 그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에 산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씀 그대로 영입니다. 육과 영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다 느끼고 알고 있습니다. 그 몸은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 것이 되어있는 영이 신령한 몸을 입을 때는 살리심을 받아 느끼고 알고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면 절대로 풀어지지가 않습니다. 아니 그 이성으로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앞에 있는 말씀과 전혀 연결이 안 되는데도 사람들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해서 신체의 부활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전혀 모릅니다. 오직 믿음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의 일이 믿어지고 있습니다. 영이지만 분명히 생명은 있습니다. 그래서 영은 산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영은 산 것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성경 아래를 보면 생명이라고도 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을 우리가 느끼고 알고 인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은 산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 죽을 몸은 실제 죽을 몸을 말씀하고 있고 살리시리라는 말씀은 그 죽을 몸을 살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역사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영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역시 그 영이 산 것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산 것이 되었는가 하면 그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시기 때문에 산 것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입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너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살아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 살려주는 영이 있는 성도는 신령한 몸으로 살리심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비밀입니다

우리는 이 영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세의 일은 모릅니다. 사실 영이라고 하니까 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 안에 이 영이 거하시고 있지만 느끼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신체의 부활이 아닙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신체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다가 그렇게 정의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영으로 살리심을 받아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을 한다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는 천국입니다. 그곳에서 이 세상의 것이 다 생각이 나고 보여 지고 있다면 그곳이 천국이 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여러분이 잘 살았습니까?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천국이라면 저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부활의 형상을 알아야 합니다. 나만 내 과거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내 과거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만 알면 그마나 다행입니다.

그런데 나 혼자만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도 알고 또 부활을 한 모든 성도들이 다 알고 있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가 파노라마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펼쳐진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은 절대로 천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 영원히 살 바에는 차라리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신체의 부활을 해서 나를 인지한다는 것은 내가 세상에서 산 모든 것이 인지가 되고 또 그것을 나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보다 더 죄를 많이 지어서가 아니라 저는 그런 천국을 원치 않습니다.

살리십니다.

무엇을 살리십니까? 영이 산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산 것이 되었습니다. 그 영에 생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생명이 있는 영을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 신령한 몸으로 살려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체의 부활은 이 세상 모든 종교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 뭐가 다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우리 신체가 부활을 하는 것과 불교인이 윤회를 하다가 성불이 되어서 신체의 부활을 하는 것과 이슬람에서 자기들이 행한 것으로 신체가 부활한다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 시대 기독교는 이미 세상 종교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세상 종교에 너무 많은 사람이 빠져서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로마서8:12절을 보겠습니다. (24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육신에 빚을 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십니다.

어떻게 살리시는가 하면 영으로 살리셔서 그 영이 생명이기 때문에 주님이 오실 때 하늘의 신령한 몸을 입혀서 살리십니다. 신체의 부활과 영의 부활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신체의 부활을 주장하는 한 율법주의는 교회에서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신체가 부활을 하니까 율법적으로 잘 살아야 천국에서 그나마 고개를 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의 부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성경은 우리 영의 부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 그자체로 부활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이 생명이 있는데 그 영이 주님이 오시는 날에 하늘의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부활을 해야 천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신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리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리심을 받습니다.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이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정말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율법이 무엇이라는 것을 말씀을 했고 우리는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고는 살 수 없어서 사망에 이르러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영의 생각을 하게 함으로 해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빚진 자입니까?

구원에 대해서 빚진 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말씀을 합니다. 이 생명은 우리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영의 생명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우리가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입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하지만 실상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았다고 하는 그들이 수많은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율법의 행위를 하는가 하면 혹시라도 모를 일에 대해서 보험을 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에 가서 더 칭찬을 듣고 싶어 합니다. 다른 하나는 보험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만 실제 성경을 보면 성도들이 행해야 하는 일들이 많은 것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고 그것을 문자적으로 보는 순간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을 것 같으니까 지키고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킵니까?

그 율법과 상관이 없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 성도는 절대로 율법을 안 지킵니다. 그러나 구원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하는 행위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영향을 준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실제 달란트의 비유를 보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해서 자기가 무엇인가를 해서 남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빚을 지고 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에 대해서 빚을 진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육신의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게 해 주셔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에 대해서 빚진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우리가 육신에 빚을 진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것은 육신에 빚을 진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서 빚을 진 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신명기24:10-13절을 보겠습니다. (299)

무릇 네 이웃에게 꾸어 줄 때에 네가 그 집에 들어가서 전집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섰고 네게 꾸는 자가 전집물을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여든 너는 그의 전집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

영의 생명입니다

그것을 구원이라고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이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이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이 생명에 대해서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구원은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이 났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 단회적인 사건이 임한 성도는 성경에서 이 구원에 대해서 끝까지 보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은 구원이 단회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이용을 해서 이제 구원은 자기에게 임한 것으로 알고 그 다음부터는 육신으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영생을 얻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시면 믿음으로 해서 누구나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고 있다면 그는 속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영생이 단회적인 사건은 맞지만 성경은 이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영생에 관한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복음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그 종교 안에서 여러 가지 행위를 하는 것으로 자기 구원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에서 이 영생에 관한 말씀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는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빚을 지었는가 하면 구원에 대해서 빚을 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빚진 자인가 하면 우리 인생들 스스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형제들아 우리는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다수의 사람은 이미 부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는 순간 세상에 대해서 이미 부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가난하다는 것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께 부요하심을 꾸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킵니까?

그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꾸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래서 빚진 자로 살아가라고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자기가 가난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꾸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생명에 대해서 꾸어야 합니다. 내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부요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꾸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로마서를 보면서도 자기가 얼마나 빚을 지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에 속아서 마음에서 부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꾸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하는 그들이 자기들이 어떠한 은혜를 받았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릇 네 이웃에게 꾸어줄 때

사람들은 율법을 보면서 자기가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이렇게 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이 세상에서 조금 더 많이 있는 재물이라든지 그 어떤 것이 있을 때 없는 사람에게 꾸어 주면서 이 말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기본적인 생각을 바꾸고 보지 않으면 여러분은 절대로 이 율법에 대해서 깨달을 수 없고 또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키는 것임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지키려고 하는 순간에 율법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지키시는 율법입니다

그것을 지금 신명기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왜 우리가 빚진 자인가 무엇에 대해서 빚진 자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꾸어 줍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꾸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꾸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다 가난한 자입니다. 자기가 가난한지 부자인지도 모르고 성경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이며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 꾸어야 합니다. 영생에 있어서 우리는 가난하기 때문에 꾸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율법대로 꾸어 주셨습니다.

우리 가난한 자들에게 꾸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 우리는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가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자기가 무슨 빚을 지었는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의 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죄를 십자가에서 지고 가셔서 우리가 빚진 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는 포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빚은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는 그 말씀에 대해서 빚진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꾸어야 합니다.

율법에 꾸라고 할 때는 무조건 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가 꾸어 주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꾸어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주님께 꾸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입니까?

사도 바울입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믿음의 선지자들은 이 율법대로 주님께 꾸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꾸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영생에 있어서 우리 인생이 주님께 꾸지를 않고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렇게 율법에 정해 놓으심으로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전집물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옷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겉옷이라는 것은 구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꾸어 주고 있는가 하면 생명을 꾸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에 대해서 꾸어 주실 때 우리의 구원을 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 집에 들어가서 전집물을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꾸어 줄 때 주님께서는 우리 집에 들어와서 전집물을 취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옷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밖에 서 계시다가 우리가 그 전집물을 내어 주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난하고 우리가 입을 수 있는 옷이 그것 하나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돌려주시고 있습니다.

해 질 때까지입니다.

무슨 해입니까? 하루의 해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죽는 것을 말씀하기도 하고 있고 또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을 말씀하기도 합니다. 어떤 것이든지 해가 진다는 것은 개인이 종말을 맞이한다거나 이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 질 때에 가지고 자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그 옷을 반드시 돌려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옷을 반드시 돌려주라는 이 말씀 그대로 주님께서는 반드시 돌려주시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 인생의 종말이 오기 전에 그리고 이 지구의 종말이 오기 전에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어서 그 옷을 입고 자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습니다.

그것을 잠을 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기 전에 반드시 구원의 옷을 돌려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율법을 자기들이 육신으로 지키다가 죄를 져서 스스로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입니다. 생명에 대해서 주님께 반드시 꾸어야 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꾸지 않고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꿀 때 그 전집물을 취하고 자지 말고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생명이 죽기 전에 그것을 반드시 돌려주어서 구원을 받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꾸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꾸지를 않고 있습니다. 꾸지도 않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꾸어서 그 전집물을 입고 자야 은혜를 받은 것이 될 수 있는데 꾸지도 않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옷을 입고 자야 합니다.

우리는 죽기 전에 반드시 그 옷을 입어야 합니다. 어떻게 입어야 하는가 하면 주님께 꾸어서 입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 스스로는 그것을 입을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꾸어서 입어야 하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반드시 꾸어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하는 그들이 꾸지를 않고 있습니다.

노래를 합니다.

그리고 늘 자기가 가난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 그들이 무엇이 가난한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말을 하는 그들이 도리어 부자가 되어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무엇이 가난한 가를 알아야 하는데 세상에 대해서 부자가 되어 있는 그들이 입으로만 가난하다고 말을 하고 있고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율법에 정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빚진 자라는 것을 율법에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빚을 진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문자를 아는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문자가 도리어 사망의 길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얻는 생명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헌금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 것이 다 이것을 사기 위해서 하는 행위임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입니다

율법의 행위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0 그래서 우리는 빚을 진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빚진 자가 되기보다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 이 시대 교인들은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무엇을 꾸어야 하는 줄을 모르게 만들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꾸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꾸라고 했으면 꾸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말로는 가난하다고 하지만 자기가 무엇에 대해서 가난한지를 모르고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얼마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율법에 의해서 부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로 가난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마치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나는 가난하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마찬가지로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 교회는 그래도 자기들이 부자인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이 부자가 되어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가난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와 같이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갑부는 아닐지 몰라도 다 나름대로는 율법을 지키면서 부자가 되어서 주님께 꾸지를 않고 있습니다.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부자가 되기 위해서 율법의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로마서7:23절을 보겠습니다. (248)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무슨 빚을 지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에 대해서 꾸어 주셔서 우리가 구원의 옷을 입고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순전히 주님께서 우리에게 꾸어 주셨기 때문입니다0 사도 바울은 신명기의 말씀을 보고 자기도 꾸었기 때문에 형제들아 우리는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빚진 자입니다

이제 구원의 옷을 입은 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를 보더라도 다 육신에 져서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면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들이 이겼는지 졌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이 시대 교인들은 자기들이 이겨서 율법을 잘 지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의 행위를 보면서 이긴 자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빚진 자입니다

주님께서 꾸어 주셔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벌써 육신에 져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대로 사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도리어 교회 안에서 육신대로 사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사는 사람들이 육신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자기들은 육신대로 살지 않고 세상 사람이 육신대로 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형제들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에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 안에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사는 사람이 벌써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그때에 벌써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사는,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는 성경이 풀어지지가 않아서 육신대로 모두가 살고 있으면서도 육신대로 살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그 육신이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정말 육신으로 단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이렇게까지 간곡하게 형제들아 우리는 빚진 자로되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꾸어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이제 절대로 육신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성도는 육신대로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게 성령이 감동을 해 주고 있습니다.next 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