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82강,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윤주만목사 2019. 5. 31. 06:05


82,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편 37:23-2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성경은 도덕 교과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도덕 교과서로 변질이 되어서 목사들의 설교가 거의 도덕 선생님의 가르침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가 한결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는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복음을 내 이웃에게 전할 수 있고 그 같은 행위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선에 대해서는 이미 학교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다 배웠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내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를 나오지 않더라도 아니 어느 종교를 다니지 않고 무교인 사람도 이것은 압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 사람들도 아는 아주 초보적인 것을 가르치고 마치 그것을 안 가르치면 몰라서 못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도적질하는 사람이 그것이 나쁜 일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아마 도적질을 해도 떳떳하게 할 것입니다 살인을 하고 강도짓을 해도 아주 떳떳하게 하면서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숨어서 하고 모르게 하고 또 붙잡히게 되면 어떻게 하든지 자기 얼굴을 안 나타내려고 가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몰라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도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데 어른이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제가 볼 때 정신이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를까봐 교회에서 매일 설교 때마다 나쁜 것과 좋은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을 다 전하기도 힘이 드는데 그런 도덕적인 것을 전하느라고 그것을 가르치느라고 온갖 세상 적인 책과 예화를 찾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죄라는 것을 알고 짓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일부러 짓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자구 흉악한 범죄자들이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일부러 죄를 짓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그냥 장난삼아서 아니면 죄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면 분명 율법주의 사고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런 범죄자들을 두둔하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단에게 집니다. 그것을 인정하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성경을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부터 보면 가인의 살인이 나오고 또 야곱의 딸이 겁탈을 당하는 것이 나오고 또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와 통간을 해서 두 아들을 낳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성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도덕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도덕 교과서를 만들어서 가르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스라엘이 철저한 율법주의가 된 것도 바로 그 율법이라는 도덕적인 것을 가르치려고 하다 보니까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죄를 일부러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죄를 짓고 난 후에 스스로 숨는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에는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일부러 짓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율법주의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과연 죄를 안 짓고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도 죄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루에고 수십 가지의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살아서 숨 쉬는 자체가 죄입니다.

 

일부러 죄를 짓는다고 하는 그 말은 자기 스스로를 정죄하는 말이고 그 정죄의 칼이 반드시 그 사람을 찌르고 말 것입니다 자기도 매일 죄를 짓고 있지만 그것이 떳떳하다면 모든 것을 다 밝히겠지만 가능한 자기가 한 일을 숨기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마 어떤 사람이라도 그가 하루를 산 것을 비디오로 보게 된다면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정죄의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을 보면 한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살인은 안할 수 있습니다.

도적질을 안 하고 간음을 안 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살인한 자는 도적질 한 자고 율법의 한 가지라도 범한 자는 모두를 범한 자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살인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도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정말 때로는 통곡을 하면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역시 또 다시 그 자리에 있는 저를 보면서 진토임을 깨닫게 되고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만약 제가 그런 부분을 이길 수 있었다면 지금과 같이 은혜를 구할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연약합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복음의 경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죄를 안 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리고 죄를 진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은 결단코 복음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인생은 넘어 집니다

넘어 진다는 말씀은 죄를 진다는 말씀입니다

안 넘어 질 수 있다고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죄를 안 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 인생이 넘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다 넘어 졌습니다.

다만 그 넘어진 것을 일일이 다 기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기록을 안 한 것이지 죄를 한 번도 안 져본 아담으로부터 해서 홍수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아를 비롯해서 믿음이 조상 아브라함 그리고 신약에 와서 사도 베드로까지 안 넘어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그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넘어 졌을 때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준다고 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웃는 모습을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이 본다면 아마 뭐 저런 사람이 있어? 하나님께서 주신 다는데 그것도 못 믿고 웃고 있네 하면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을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사라의 경수가 끊어졌는데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웃을 때 여러분이 보셨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시고 또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라는 것이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가르쳐 주는 귀한 말씀이지만 행위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브라함의 행위는 분명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 자기 아내를 빼앗깁니다.

자기가 연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두 번씩이나 사라를 빼앗기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 줍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그렇게 넘어 졌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칭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말씀을 하시니까 자기도 같이 죽겠다고 하던 그가 예수님이 잡혀 가시니까 세 번을 부인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다짐을 했지만 역시 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했던 그 베드로입니다 그런 그가 세상의 권력 앞에 무참하게 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후에는 그도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려 순교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넘어 졌습니다.

그 넘어 졌을 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을 하고 아주 저주를 하면서 부인을 하는 베드로를 지금 본다면 아마 저 사람은 안 돼 하면서 모두가 고개를 돌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럼 베드로가 성령을 받은 후에는 어떠했는가를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3절을 보면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역시 넘어 졌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는 성령을 받기 이전이니까 그래도 이해를 하겠지만 성령을 받은 이후에도 베드로는 역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육적으로 넘어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육적인 일은 기록을 안 했을 뿐이지 베드로도 역시 육적인 일에서도 계속해서 넘어지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러냐면 죄를 한 번도 안 져본 아담도 넘어 졌는데 죄악 중에 출생을 한 베드로는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죄를 많이 졌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죄를 안 짓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죄를 안 짓고 살았다고 하는 그 기준도 일상적인 사람의 눈으로 보는 기준이지 실제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그도 역시 더러운 옷을 입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생 모두는 다 그와 같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지만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의 의의 옷으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으로 차려 입습니다.

 

다 넘어 집니다

만약 안 넘어 지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고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 교사입니다 넘어지는 것을 인정해야지 그것을 부인하면 그는 복음을 전혀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육적으로도 넘어지고 영적으로도 넘어집니다.

다만 어느 사람은 그것이 겉으로 보여 지고 어느 사람은 그것이 감추어져 있을 뿐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은 절대로 이웃이 넘어지는 것을 판단하지 않지만 그것이 감추어져 있는 사람은 이웃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율법의 잣대로 판단을 합니다.

 

로마서 7:19절을 보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순간순간 육적으로도 또 영적으로도 죄를 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복음의 비밀을 다 알고 있는 사도 바울도 영적으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고 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탄식입니다.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 사도 바울이지만 또 수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서 복음을 위해 수고를 했지만 자기 자신을 돌아보니까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고 탄식을 합니다.

 

사람은 약합니다.

아니 완전하지 못 합니다

그런데 이 세대는 해탈의 경지에 오르려고 하는지 거의 모든 설교가 복음은 가르치지 않고 도적적인 말로 가득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설법이나 지금 기독교에서 말하는 설교나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단지 한 가지 다른 말이 있다면 립 서비스로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는 그 한마디 말이 다릅니다.

 

자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모르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바동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어진다고 말씀을 하는데 그럼 쉽게 넘어지고 털털 털고 일어나면 되는데 넘어지지 않으려고 바동거리다가 넘어지면 그것으로 끝이 나버립니다.

 

죄를 마음 편하게 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죄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정말 마음으로 탄식을 하면서 이것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또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넘어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안 넘어지려고 버티다가는 결국 아주 넘어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유도에 낙법이 있습니다.

남이 나를 넘어뜨리려고 할 때 넘어져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데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결국 넘어지게 되면 그 충격이 너무 커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냥 넘어뜨리면 넘어져 주면 되는데 그것을 안 넘어지려고 버티다가는 그 충격이 몇 배 이상으로 와서 다시 일어서지를 못하게 됩니다.

 

다칩니다.

안 넘어지려고 하다가는 잘못 하면 뼈가 부러질 수도 있습니다.

뼈만 부러지면 그나마 다행인데 목이 꺾여서 사망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국 교회를 보면 아주 위태위태하게 버티고 있어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자기 힘이 부치면 넘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도 억지로 안 넘어지려고 자기 존재가 양인데도 사자와 싸우려고 자기 주제를 모르고 덤비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넘어진다고 했으면 그냥 편하게 넘어지는 것이 자기를 위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안 넘어지려고 버티다가 결국 복음을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연구를 해서 안 넘어지려고 하다가 율법주의에 빠져 완전히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왜 율법을 그렇게 연구 했습니까?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안 넘어지려고 했기 때문에 연구를 해서 심지어는 안식일에 얼마를 걸으면 죄가 된다고 까지 하고 전등불까지 켜지를 않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율법으로 안 넘어지려고 했지만 결국 복음의 돌에 부딪쳐 아주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넘어지는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복음 안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넘어지는 사람을 보면서 정죄를 하지마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권면은 할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정죄를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넘어지는 것을 보면 아! 저가 지금 넘어지고 있구나 하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도 인정을 하는 넘어짐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넘어지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데 사람인 내가 더구나 나도 역시 똑 같이 넘어지고 있는 주제가 그것을 판단하고 정죄를 한다면 그는 율법주의 적 사고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면 내 안에 율법주의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넘어지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고 있다면 안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의롭게 산 욥도 하나님께서 넘어지게 만들어서 고난을 당하게 하셨고 그 넘어짐이 있은 후에 하나님께서 오른 손으로 붙들어 주셔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자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넘어짐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주의에 빠져 모퉁이 돌에 부딪쳐 아주 깨져 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다가는 아주 깨져 버리는 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잠언 24:16절을 보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섭니다.

그러나 악인은 한번 넘어지게 되면 아주 깨져 버린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 넘어진다는 말씀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믿음이 있는 성도는 반드시 다시 붙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의인은 아주 넘어지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넘어지는 것 같이 보여서 저가 무슨 구원을 받을 수 있겠어 하고 판단을 하지만 의인은 하나님께서 강한 오른 손으로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반드시 다시 일어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지금 넘어져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시고 그 환난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사단과 나는 상대가 안 됩니다. 싸우면 무조건 넘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일어설 수 있었고 나도 역시 일어서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하나님께서 내 길을 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넘어지는 것도 또 다윗이 넘어지는 것도 베드로가 넘어지는 것도 지금 내가 넘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내 길을 기뻐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넘어 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더욱 은혜가 되어 넘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넘어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그 사람의 길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고 또 내가 의지하는 그 믿음을 기뻐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잘 되는 것만 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가는 순간 매일 넘어져서 무르팍이 다 깨지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내가 죄 없다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안 넘어져서 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 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내가 어떤 선한 일이나 잘하는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있는 그 자체만으로 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도 아이가 다 컸습니다.

아마 모든 부모의 마음이 같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아이가 무엇을 잘 해서 기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아이를 보는 것만으로 기쁜 것입니다 때로는 말썽을 피우고 또 실수를 해서 마음을 상하게도 하지만 그래도 역시 그 아들을 보는 자체만으로도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우리의 체질도 아시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너무도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자기 아들을 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큰 기쁨인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들이 되냐 안 되냐 하는 것이 문제지 무엇을 잘하고 못하고는 사실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잘 넘어진다는 것 또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나를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잘 해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토라는 것을 아주 잘 아시면서도 기뻐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 놀라운 섭리는 그 은혜가 가슴속에 새겨져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내가 잘 해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아들이기 때문에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입니다

내가 넘어져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 내가 율법의 의가 없어서 가난하여 애통하는 마음을 주신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라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내게서 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 스스로 정죄에 빠지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넘어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는 성도는 반드시 일어나게 되고 또 그런 성도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있습니다.

 

내 모든 걸음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이 사실을 믿을 수 있으며 또 자기가 넘어지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일어서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