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라합
마태복음 1:1-6절을 보겠습니다. (신 1쪽)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왕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믿음이 무엇인가를 잘 모르고 있고 종교적인 행위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
그 자체가 심오합니다. 사실 이 세상의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이 믿음이라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이 믿음이 있는 자가 아주 적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종교적인 행위와 믿음에 대해서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고 자기들의 행위를 보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인생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인지상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세상은 자기를 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그것에 익숙해져 있는 인생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것을 교회 안에서 그대로 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보이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 너무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행위로 믿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야 하는데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있다는 믿음을 보이는 방법에 있어 너무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무엇을 보여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가 행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행위들을 통해서 자기의 믿음을 보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서 그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라합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문제를 오늘 배워야 합니다. 라합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것도 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라합이 어떻게 믿음을 보였는가 하는 것을 이 시대 성도들이 바로 알고 우리도 역시 라합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으면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이 어떻게 했는가를 성경이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 사람들은 이스라엘은 잘못을 했지만 자기들은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예표로 보여 주셨습니까?
그것은 우리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그렇게 되지 말라고 하는 경계를 보여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만이 그런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도 역시 그렇게 똑같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육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입니다 그들이 육적으로 죄를 지었다면 이 시대는 영적으로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경계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죄를 지었어도 자기들은 그런 죄를 안 짓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얼마나 무지 하느냐면 그림자로 보여 주신 이스라엘의 죄를 육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까 자기들이 그런 육적인 죄를 안 짓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과 가기들은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0:11절을 보겠습니다. (신 274쪽)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경계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왜 멸망을 당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만의 일이 아니라 이 시대도 역시 똑같이 그렇게 행하고 있다는 것을 경계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스라엘의 육을 보고 자기들이 그런 일을 안 하는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과 자기들은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 했습니다.
간음을 했습니다. 시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원망을 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만 하고 있는 일입니까? 이 시대 거의 모든 교회가 다 간음에 빠져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간음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스라엘과 같이 육적으로 간음을 안 하는 것으로 마치 자기들이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다면 이 시대도 역시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을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이 하고 있다면 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자기들은 안 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요 성경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광야라는 교회에서 다 멸망을 당했다면 지금 역시 교회 안에서 거의 다 죽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우리가 이스라엘과 같은 잘못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영적으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육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영입니다 그들이 육으로 죄를 범한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영적으로 그런 똑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경계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영을 모르다 보니까 그들이 간음을 한 그것이 우리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도무지 모르고 있습니다.
문자만 보고 있습니다.
그 간음이 어떤 간음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들은 우상숭배도 안했고 간음도 안했고 하나님을 시험하지도 않았고 원망도 안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교회 안에 이런 일들을 영적으로 다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 보니까 자기들의 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습니다.
이 시대는 믿음에 따르는 행함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행함이라고 하니까 자기들이 종교적으로 행하고 있는 그런 행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함이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행함이 없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으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는 악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적하고 있는 그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행위를 보고 믿음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 시대는 믿음에 대해서 거꾸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세상의 믿음을 그대로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와서 그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다 보니까 심각한 문제가 발생이 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런 이성적 믿음을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은 한 마디로 정의를 하면 불교에서 부처를 믿는다고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에게 주신 믿음은 이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믿음은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고 우리가 믿는 믿음은 내가 어느 경지에 올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를 해 주셔서 내가 그 경륜을 받아 들여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반드시 계시를 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이성적 지식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시를 해 주어야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 계시를 받지 않고 교회 안에서 믿는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에게 계시를 해 주시고 있습니까?
성경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더듬어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만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가 있다고 하는 사람도 성경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성령이 오셔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게 해 주셔야 우리에게 믿음이 있고 그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행함이 있는 믿음을 라합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라합이라는 인물은 넓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이방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는데 가장 처음에 만난 성이 바로 여리고 성입니다. 이 성에 있는 기생입니다.
이방 여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했던 일은 기생입니다 그런 라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를 하고 있는가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에 들어가면 모든 사람을 진멸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기생 라합도 반드시 진멸을 받아야 하는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그녀가 어떻게 구원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호수아2:4절을 보겠습니다. (구 321쪽)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기생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좋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번역에는 거의 다 창녀로 번역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좋게 말해서 기생이고 나쁘게 말하면 창녀입니다. 이 창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가 있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이방의 창녀였고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멸하라고 말씀을 하셔서 반드시 죽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정탐꾼을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신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 지금 이 시대에 교회 안에 창녀가 들어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 아마도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하면서 그녀를 반기겠지만 실제 그들의 마음에서는 창녀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리고에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창녀인 라합만이 정탐꾼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 인생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 가를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반드시 진멸을 당해야 하는 여리고 성에 있는 사람 중에서도 가장 천한 창녀가 그 생명을 구원받았습니다.
사람은 육체를 봅니다.
그가 무엇을 하는 가를 보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육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창녀가 되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라합입니까?
그것은 바로 창녀이기 때문에 더 라합을 통해서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이방 여인에다가 창녀인 그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를 하고 있는 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라합이라는 인물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통해서 우리는 그녀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정탐꾼을 영접했습니다.
물론 뒤에 말씀에서 나오고 있지만 라합이 왜 정탐꾼을 영접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기생이다 보니까 이미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올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하는 소문을 많이 들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기생이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을 접하게 되고 그때마다 하나님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정탐꾼을 영접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정탐꾼을 영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녀가 누구를 영접 했는가 어떤 마음으로 영접을 했는가를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20절을 보겠습니다. (171쪽)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누가 보냈습니까?
이 정탐꾼은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여리고 성이 굳게 닫혀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여호수아 2장1절에서 여호수아가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누구를 영접했습니까?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누구를 영접했는가 하면 하나님을 이미 영접을 하고 이 정탐꾼을 맞아 들였다는 말씀입니다 라합은 그냥 정탐꾼을 영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접하고 있었습니다.
죽어야 하는 죄인입니다
그 죄인이 살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라합이 자기 육적인 생명을 얻기 위해서 정탐꾼을 영접한 것은 이 시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했는가를 이미 여리고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고 도리어 대적을 하고 싸우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다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내주시는 사자를 영접하는 사람이 있고 영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2:9-11절을 보겠습니다. (구 321쪽)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심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을 때 행했던 역사를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그리고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그들을 진멸시킨 일을 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고 있습니다.
그것도 교회 밖에서 듣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 듣고 있기 때문에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소문을 들을 때 바로 들어야 하는데 잘못 듣고 있습니다.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냥 아무 말이나 들으면 안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들어야 합니다. 라합이 들은 것이 무엇인가를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무엇을 했다는 것을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들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듣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듣고 있다 보니까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행한 것을 듣는 것은 절대로 믿음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전혀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탐꾼을 영접을 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영접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들어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데 전혀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무엇을 들었습니까?
홍해를 마르게 하신 것을 들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홍해를 마르게 하신 일이 무엇이기에 그 말을 듣고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할 수 있었는가를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냥 기록이 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1-2절을 보겠습니다. (신 274쪽)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라합이 지금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면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은 세례를 예표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세례를 지금 이 시대 물 세례로 받고 있습니다. 그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3:27절을 보겠습니다. (신 306쪽)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스라엘은 육적인 세례입니다
이 시대 물 세례를 받는 것을 예표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그들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보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홍해를 건너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물론 이 세례는 물세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세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이 천국 백성이라는 것을 라합은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가나안에 살던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는 그 모든 것을 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생각을 했지 하나님을 영접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진멸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를 보면 기생 라합에 속한 모든 사람이 살았고 또 기브온 백성도 살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지만 이스라엘과 대적을 하는 것은 결국 진멸을 당하게 되고 그들을 영접하면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누구를 대적하는 일입니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듣고도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진멸하라고 말씀을 하셨을지라도 그들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소문을 듣고 영접을 했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살려 주셨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살려 주시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진멸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싸움이 안 됩니다.
그러면 항복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그 당시 가장 강대국인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또 가나안 목전에서 아모리 사람을 진멸한 것을 듣고도 대적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진멸이 되었습니다.
라합은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듣고 살 수 있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정탐꾼을 영접하는 일입니다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 주고 그들을 영접해서 자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11:31절을 보겠습니다. (신 366쪽)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생 라합이 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의 말씀대로 나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기생이고 이방의 여인이지만 그녀는 소문만으로도 하나님을 믿고 영접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은 분명히 행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탐꾼을 영접하는 것은 율법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 율법의 예대로 하면 사실 라합은 자기 나라를 배반한 사람입니다. 라합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를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 행위를 보고 믿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에 반하는 일을 했는데 그것을 보고 믿음으로 영접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탐꾼이 왔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까? 율법의 예대로라면 반드시 여리고 성에 보고를 해서 잡아가게 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이해를 잘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는 일이라면 무조건 그것이 어떤 일을 해도 좋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 시대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진리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했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냥 정탐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단지 정탐꾼을 영접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나라의 법에는 어긋나지만 자기 육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정탐꾼이 오자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믿음입니다.
이제까지 믿음은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라합의 행위를 보고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말씀을 바로 이해를 못하다 보니까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믿음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라합이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이 아닙니다.
정탐꾼을 영접한 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이것을 율법에다가 연결을 시켜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왜 이것이 믿음이냐 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는 어떻게 해도 우리가 진노를 받게 되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믿음이라고 하면 그 행위를 통해서 생명을 얻어야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갈라디아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믿음이 아닙니다.
잘 이해를 하시지 바랍니다. 라합이 한 행위는 율법을 따라 한 행위가 절대로 아닙니다. 율법을 따라 한 행위는 절대로 믿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 시간에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어디에도 율법을 행한 것을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의 행위는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그림자입니다
라합의 육적인 생명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영의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라합이 육적으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정탐꾼을 영접한 것은 우리가 지금 영의 생명을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예표로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라합은 자기 생명의 구원을 위해서 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했습니다.
믿었습니다.
정탐꾼을 영접하면 자기 생명이 구원을 받을 것으로 믿고 영접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라합은 절대로 정탐꾼을 영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행위입니까? 이제 믿음으로 라함이 정탐꾼을 영접했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리라 믿습니다.
생명입니다
생명을 위해서 정탐꾼을 영접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율법의 행위를 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라합이 자기 생명을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정탐꾼을 영접하는 길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라합이 다른 것으로 생명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창녀로 살던 것을 청산하면 생명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이스라엘과 같이 안식일을 지키면 생명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십일조를 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 어떤 행위를 한다 해도 라합은 자기 생명을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키는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 해도 그녀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라합을 잘 배우시기 바랍니다.
라합의 믿음이 무엇인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율법적으로는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으로 치면 그녀는 가장 천시를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정탐꾼을 믿음으로 영접을 했다고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생명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생명과 연결이 안 되어 있는 것은 믿음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믿음을 말씀할 때는 그것이 생명과 연결이 되어 있어야 믿음이라고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를 가지고 믿음이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너무도 무식한 말입니다 생명과 연결이 안 되어 있는 행위를 가지고 믿음으로 했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내가 믿음으로 행했다고 할 때는 반드시 생명이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그것을 우리에게 라합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생명과 연결이 안 되어 있는 행위를 가지고 믿음으로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은 자기 생명을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했는데 그것이 내 영혼이 구원을 받는 일이라면 그것은 믿음으로 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과 상관이 없는 일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종교적인 행위지 믿음이라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말을 할 때 정말 주의를 해야 합니다.
믿음이 아닌 것이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자기 행위를 보고 믿음으로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자기 생명과 연결이 되어 있지 않다면 어느 것이라도 그것을 믿음이라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5:4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통해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율법은 생명과 절대로 연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모릅니다.
이 시대는 율법을 율법이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이 무엇이냐면 삼가 지키고 그것으로 정죄를 받고 하고 있다면 그것이 율법입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은 삼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또 그것으로 정죄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 나라에게서는 정죄를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삼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십일조 율법입니다
주일 율법입니다. 그리고 절기 다 율법입니다. 이 시대 지키고 있는 절기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송구영신예배, 등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절기들 다 율법입니다. 그리고 정해서 내고 있는 모든 헌금은 다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직접적으로 내 영혼의 생명과 연결이 되어 있다면 믿음으로 했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의 생명과 연결이 안 되어 있다면 그 말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인들은 믿음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가지고 믿음으로 했다고 하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심합니다.
믿음의 증표라고 까지 합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라합을 통해서 정말 바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 행함이 있는 믿음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위해서 행하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행위가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라합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것도 가장 천한 이방의 창녀를 세워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창녀를 보고 누가 행위가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런 창녀를 세워서 우리에게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 멸시 합니다.
아마 이 시대도 누군가 창녀가 되어서 몸을 팔고 있다면 아무도 상대를 안 하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비웃음을 살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서 그리고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천하게 생각을 하는 라합을 통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가 창녀를 보고 행함이 좋다고 말하겠습니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창녀를 보고 행함이 좋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율법적으로나 이 세상의 도덕적으로나 행함을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라합을 통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라합과 같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는 성도가 아주 적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수아2:12-13절을 보겠습니다. (구 322쪽)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정탐꾼을 영접했습니다.
영접을 한 이유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살려 주었으니까 너희도 내 아버지 집을 선대해서 나의 부모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합이 단도직입적으로 정탐꾼들에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도 살려 주었다
그러니까 너희도 우리를 살려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 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명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라합이 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했는데 그것은 자기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행위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까?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거의 모든 행위는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라합과 같이 자기들이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한 행위를 믿음으로 행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생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행위들을 하면서 그것을 믿음과 연결을 시키고 있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진멸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죽어야 하는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자기 생명을 구원 받기 위해서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자기 생명을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는 행동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주일을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구원을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내고 주일을 지키고 하는 이 모든 일도 다 사실은 의롭다 하려고 하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의로워집니다.
육체적으로 의로워집니다. 십일조를 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 주일을 잘 지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분명히 율법으로 비교가 되어 누구는 의롭게 보이고 누구는 의롭지 않게 보입니다. 그러나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은 그렇게 의롭게 보이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가 바로 이 문제에 다 발목이 잡혀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보고 마치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생각을 하고 그 율법에 더 열심을 내다 결국에는 율법주의가 되어 율법에 의해 진노를 받게 되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12절을 보겠습니다. (신 142쪽)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합은 영접을 했습니다.
여리고에서 가장 천하게 여기고 있는 창녀 라합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영접을 하느냐 아니면 행위에 빠져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접을 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행위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접하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과 상관이 없습니다.
창녀가 무슨 율법을 잘 지켰습니까? 이 세상 도덕으로도 창녀는 율법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정탐꾼을 영접한 것을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야고보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반드시 생명에 대한 표를 요구를 해야 합니다. 그 표가 있어야 여러분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라합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하고 그 정탐꾼의 생명을 구해주었으니까 너희도 내 생명을 구원할 표를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보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라합이 무슨 율법을 지켰습니까? 라합은 단 한 가지도 율법을 지키지 않았지만 야고보서에서 그녀를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행위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영혼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얻어야 영접을 한 성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명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는데 영접을 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로 맹세하라고 말 합니다.
라합은 사람의 맹세를 믿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명세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맹세를 하시면 변개치 아니하신다는 것을 믿고 여호와로 맹세를 하라고 정탐꾼들에게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명을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맹세를 원하고 있습니다.
시편110:4절을 보겠습니다.(구 886쪽)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라합의 믿음입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정탐꾼들에게 여호와로 맹세를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명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여호와로 맹세를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 여인이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듣고 여호와로 맹세를 하면 자기의 생명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른 것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맹세를 해 주시면 우리는 반드시 구원을 받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맹세로 보증을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비록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통은 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정탐꾼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여호와로 맹세를 하면 절대로 변치 아니하시고 자기의 생명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맹세로 보증까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성도가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맹세를 하시고 보증을 해 주시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진실한 표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라합을 통해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라합의 모든 행동은 믿음에 따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고 그것은 라합이 자기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4:6절을 보겠습니다. (구 135쪽)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진실을 달라고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진실 된 표를 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실 된 표가 있으면 자기는 분명히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이런 말씀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아니 우리도 라합과 같이 진실 된 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맹세로 보증을 하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 진실 된 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진실을 행하여 주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이방 여인이었고 창녀였지만 자기가 살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2:18-21절을 보겠습니다. (구 322쪽)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이 붉은 줄을 매라고 합니다.
라합이 그 말을 듣고 정탐꾼들을 무사히 보내고 나서 자기 창에 붉은 줄을 매어 달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이 말한 그대로 진실 된 표를 믿고 자기 창문에 붉은 줄을 매어 달았습니다. 그 붉은 줄을 매어 달아서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이스라엘에게 진멸을 당할 때 그녀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합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자기 집 창에 붉은 줄을 매어 달고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그 안에서 계속해서 창녀를 하고 있든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하든지 그녀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창에 붉은 줄을 매어 달아 내리는 것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붉은 줄을 매어 다는 것은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집안에 있는 것 역시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녀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율법의 어느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정탐꾼의 말을 믿고 그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에게 라합을 보여 주시고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녀가 율법의 행위로 무엇을 잘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또 그녀의 행함이 있는 믿음은 율법의 어느 것을 행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라합이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행했으면 이야기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라합이 율법의 어떤 모양도 행한 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구원의 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어떠하다는 것을 거의 모든 사람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마치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라합을 구원하시면서 그녀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우리에게 자세히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 합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녀는 율법을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은 라합의 말씀을 아무리 보아도 그 뜻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라합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너무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붉은 줄이 무엇을 의미 합니까?
출애굽기25:5절을 보겠습니다. (구 120쪽)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성막입니다
성막의 덮개를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덮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성막의 모든 기구 하나하나는 또 그곳에 쓰였던 것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를 하고 있습니다.
표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입니다 정탐꾼들이 진실 된 표를 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의미하는 붉은 줄을 창에 매어 걸어 내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율법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방여자입니다 그리고 더구나 그녀는 창녀입니다 그러나 정탐꾼으로부터 진실 된 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입니다
이 십자가의 피가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무슨 이스라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이방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라합과 같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라합에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입니다 그 피를 상징하는 붉은 줄을 자기 집 창문에 매어 달아 내려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막의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덮어 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안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안 믿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누구인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이스라엘이라고 하니까 마치 자기들이 육적으로 이스라엘이 된 것 같이 그들과 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를 모르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마치 예수를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들이 라합과 같은 이방 여인이라는 것을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자기가 창녀와 같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라합의 믿음을 모르고 있습니까? 그것은 성경을 보고 문자에 갇혀서 율법을 지키고 있고 그 율법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은 절대로 라합과 같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다 죽습니다.
그러나 다 죽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진멸을 당해야 하는 사람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깨끗하여 진 성도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방인이면 어떻습니까? 창녀면 어떻습니까? 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편 강도면 어떻습니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중요하지 않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을 하면서 거기에 다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라합에게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명세의 보증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중요하지 않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여호수아6:25절을 보겠습니다. (구 327쪽)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라합은 믿었습니다.
그녀가 어느 정도를 믿었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정탐꾼을 보내고 나서 그녀는 자기 집으로 아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 들였습니다. 그 아비의 가족과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 들였습니다. 사실 이 말을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지금은 전쟁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멸하라는 말씀을 듣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래서 그 성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간담이 녹아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라합의 집에 들어가면 살 수 있다고 할 때 그들이 사실은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확신을 했기 때문에 자기 집에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있는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살았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믿는 모든 사람은 살 수 있습니다. 라합이 어떻게 전했겠습니까? 봐라 정탐꾼에게 진실 된 표를 달라 해서 이렇게 붉은 줄을 매어 달아 내리지 않았느냐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입으면 살 수 있다고 라합이 전했을 때 그 아비의 집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라합의 집으로 들어와 그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는 집은 절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생 라합이 이렇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기생 라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기생 라합과 같은 이방인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하고 우리 역시 기생 라합과 같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2:25절을 보겠습니다. (신 373쪽)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 있는 믿음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모르기 때문에 다 율법주의에 빠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마서가 믿음의 기초 교리를 말씀을 했다면 야고보서는 그 믿음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로마서의 믿음은 쉽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행함이 있는 믿음은 어렵습니다.
아니 이 시대 사람들이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바로 안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가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이 있다 하고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다면 그는 죽은 믿음이라고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라합을 통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이 기록이 되어 있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선진들을 일일이 거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씀을 하면서 누구를 말씀하고 있는가 하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과 그리고 이방 여자이면서 창녀인 라합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기생 라합을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믿음의 선진들 모두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표하는 인물로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정직하고 의롭게 산 사람도 아니고 창녀인 그녀를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창녀입니다
그녀가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녀가 십일조를 냈습니까? 그녀가 주일을 지켰습니까? 아니 율법에 나오는 도덕법도 잘 지키지 않은 그녀를 보고 하나님께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녀가 무슨 도덕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율법으로나 도덕으로나 행함이 있는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 바로 성경을 깨달아야 합니다.
라합과 같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다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라합과 같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다면 여러분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하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율법을 잘 지켜서 입니까? 아니면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산 것입니까? 정말 우리는 성경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를 늘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것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라합이 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자를 접대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무사히 다른 길로 갈 수 있게 했는데 그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에 있는 것입니까? 율법에는 사자를 접대하라는 것도 없고 또 사자를 다른 길로 가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율법이 아닙니다.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율법을 따라 행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자를 왜 접대를 했습니까? 미리 말씀을 드렸지만 자기 생명을 구원을 받기 위해서 사자를 접대 했습니다.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을 때 자기에게 찾아온 사자를 접대해서 그가 안전하게 갈 수 있게 해 주고 자기 생명을 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사자의 생명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자기 생명을 살려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자를 안전하게 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생명을 얻기 위해서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생명만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곧 전쟁이 나면 자기는 반드시 죽는 다는 것을 알고 그 생명을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사자를 접대하고 다른 길로 가게 한 것은 생명을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생명을 얻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을 행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강해를 올려 드렸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자세하게 강해를 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그것을 다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야고보서를 강해를 보시면 자세하게 아실 수 있습니다. 오늘은 라합의 구원에 대해서 그리고 라합이 어떤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였고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을 말씀하겠습니다.
율법이 아닙니다.
도덕이 아닙니다. 제가 도덕적으로 창녀같이 살아도 된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필이면 창녀인 라합을 통해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 우리는 극단적으로 그런 도덕도 우리에게서 다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 그 도덕이 율법이 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도덕이 율법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라합을 통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율법을 하나도 안 지켰고 또 도덕적으로도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게 취급을 받던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입니까?
자기 생명에 대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비록 율법을 모르고 또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는 창녀였지만 그녀는 자기 생명을 구원받기 위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여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라합과 같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생명을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나라를 버렸습니다. 정탐꾼은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볼 때는 라합은 죽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이 일이 발각이 되면 라합은 그 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사자를 접대했습니다.
법대로 했으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라합은 법대로 하면 반드시 정탐꾼을 자기 나라에 고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탐꾼이 왔을 때 숨겨 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법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을 살기 위해서 그 법을 버리고 생명을 살 수 있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 행함을 보고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믿습니까?
그 이유는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살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왜 믿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2:26절을 보겠습니다. (신 373쪽)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영혼 없는 몸은 죽은 것입니다
살아 있습니까? 그리고 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찾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그러나 영혼이 없다면 그 몸은 이미 죽은 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육체는 이미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살아 있다고 해서 자기가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살아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죽어 있습니다.
아니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허무하게 죽으면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아니 미물 보다 더 못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혼이 없다면 그 몸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문 밖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그와 같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믿음이 있다고는 하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명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라합은 자기 생명을 위해서 사자를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명을 그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명세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진실 된 표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라합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라합이 법을 지켰다면 반드시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나오는 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죽고 말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법을 따르면 죽습니다.
내 생명이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알고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너무 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를 죽이는 것인 줄을 모르고 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성경에 왜 라합과 같은 사람을 기록하고 또 그녀를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가를 바로 깨달아야 우리도 역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러나 귀신들도 믿음이 있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아니 지금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다면 그들의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 행함이 있는 믿음은 율법을 행하는 것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자기 생명을 살기 위해서 행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라합은 육의 생명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의 생명입니다. 라합이 법을 버리고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의로다 함을 얻었습니다. 우리 역시 영혼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법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법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생명을 따라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3:2절을 보겠습니다. (신 335쪽)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오직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보아도 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행함이 없는 믿음을 행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살 수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율법의 행위에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라합이 누구인가만 알아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가만 성경을 통해서 바로 알아도 행함이 있는 믿음을 어느 정도는 깨달을 수 있는데 성경을 자세히 보지 않고 있습니다.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갔습니다.
그녀가 그 족보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어서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역시 라합과 같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율법을 행하거나 도덕적으로 의로워지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기 위해서 행하고 있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세요.
믿음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와 있다고 다 믿음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가 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안일한 생각이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는 줄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합입니다.
나 역시 라합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방인이고 반드시 진멸을 당해야 합니다. 또 도덕적으로 볼 때 창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자기가 어떻게 살 수 있는 가를 깨닫게 됩니다. 자기를 모르면 살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에게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살 수 있는 방법만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어야 하는지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간절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라합을 통해서 우리에게 행함이 있는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니 행함이 있는 믿음이 이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행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는 라합과 같이 생명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라합과 같이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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