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다윗왕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태복음 1:1-6절을 보겠습니다. (신 1쪽)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왕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인생은 약합니다.
그것을 아는 것부터가 신앙의 출발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강해지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내 연약한 모습이 드러나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감추려고 하고 있고 자기의 강한 모습을 내 보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입니다
인생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 지구 안에서 이성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뛰어 나다 해도 피조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 사람들보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더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내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을 할 때 내게 임하는 것이지 그 이상이 되려고 하는 순간에는 은혜는 사라진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인들이 가장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내가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입니다
사람은 사람다울 때 가장 사람답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답지가 않습니다. 자기들이 성도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너무 가식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볼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람의 이성적 지식입니다 그것을 버리지 않고 성경을 보게 된다면 그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뜻을 전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거기에 내 생각을 집어넣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나쁩니다.
그러나 성경이 선하다고 하면 선한 것입니다 왜 이것이 선하느냐고 따질 것이 아니라 왜 이것이 선한가를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가지고 나쁘다고 하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어떻게 하든지 자기 생각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생의 이성으로는 안 됩니다.
내 생각에는 아무리 그것이 옳다 해도 성경이 반대를 하고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너무 성경을 자기 이성적 지식으로 보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보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왜 이단이 생겨납니까?
그리고 그 이단에 새로운 책들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를 않고 자기들의 생각을 주장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분명히 나쁜데 성경이 선하다고 하니까 그것을 자기들의 이성에 맞추려고 하다 보니까 다른 책이 필요로 한 것입니다 정말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성경을 바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쓰레기입니다.
내가 신학을 공부를 했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도 그것은 이 세상의 라이선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이 오히려 자기를 강하게 만들고 있고 그런 강한 자들이 성경을 보다 보니까 은혜가 무엇인가를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귀를 막으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편143:2절을 보겠습니다. (구 906쪽)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없습니다.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없습니다. 하나도 없다고 성경이 분명히 정의를 내려 주고 있습니다. 의로운 인생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눈과 이성적 지식으로는 조금 더 의롭고 조금 덜 의롭게 보입니다.
그것을 보면 안 됩니다.
분명히 우리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절대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특히 교회 안에서 의로움을 내 보이려고 노력을 하고 있고 그것이 진리를 아는데 있어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의로워지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죄를 지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의롭게 보이려고 노력을 하고 있고 그것이 도리어 하나님 앞에 악이 되고 있는데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인생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도 이것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인물이 있다면 그 인물이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었다 해도 그 역시도 의로운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성경이 의로운 인생이 없다고 하니까 우리는 일단 그것을 기본 베이스로 깔고 성경을 보아야 하고 성경을 볼 때 의롭냐 아니냐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또한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죄인입니까?
사람의 이성적으로 볼 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죄인입니까? 그것을 성경에서 보고 있다면 여러분의 눈은 이미 소경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 죄인인데 누가 더 특별히 죄인으로 보인다면 성경 자체를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죄를 지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왜 중요하지 않은가 하면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에서 누군가 의롭게 보인다고 해서 대단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역시도 의로운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욥을 보았지만 욥 역시도 사람의 이성으로 볼 때는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사람 같이 보였지만 그 역시도 의로운 인생이 아니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의 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조금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죄가 있는 모든 사람은 사망의 독을 가지고 있고 그 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는 시각을 바꾸어야 성경 안에서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왜 성경이 죄인들을 기록했습니까?
그것도 율법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죄인들을 기록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주의 목전에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죄인을 기록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 한 사람 인생의 모습을 입고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목전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인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하고 있는 가를 우리가 성경을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 죄인이 어떤 죄인인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죄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어떻게 구원을 하시는 가를 깨달아야 하고 또 그 죄인이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밧세바입니다.
이 밧세바가 어떤 죄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밧세바가 죄인이라고 하기 보다는 다윗이 죄인입니다 밧세바가 죄를 짓고 싶어서 죄를 진 것이 아니라 다윗이라는 거대한 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든 내가 자의로 죄를 지었든 그 죄는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밧세바가 누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고 그녀가 어떤 죄를 지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가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왕의 권력이라는 것이 너무도 절대적입니다 왕이 나라고 또 왕이 법인 그런 때에 밧세바라는 여자가 과연 죄를 안 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살을 하지 않는 이상은 다윗이 밧세바를 청했을 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밧세바에게는 없었습니다. 근대사만 보아도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강했을 때는 그것이 누구라도 상관이 없이 밧세바와 같은 경우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나라로 망명을 가든지 아니면 이민을 가지 않는 이상은 절대적인 권력에 항거할 수 있는 힘이 연약한 여자에게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의 죄입니까?
이것은 밧세바의 죄라기보다는 다윗의 죄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밧세바라는 여자는 그저 다윗이라는 막강한 권력에 의해 굴복이 되어 함께 죄를 짓게 되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어느 여자라도 밧세바의 처지가 되었을 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죄를 안 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무엘하11:2-5절을 보겠습니다. (구 478쪽)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인이 잉태하매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하니라”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밧세바는 자기를 너무도 사랑하는 우리아가 있습니다. 또 우리아가 얼마나 성정이 바른 사람이라는 것을 성경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아로부터 끔찍이도 사랑을 받고 있는 밧세바가 지금 다윗이 오라고 하니까 마치 그냥 간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마치 그렇게 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밧세바는 분명히 자기가 유부녀라는 것을 말했을 것입니다.
자기 남편이 지금 전쟁에 나가 있다고 분명히 다윗이 보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거절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람을 보내서 왕궁으로 들어오라고 하니까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없어서 다윗과 간음을 하고 잉태를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죄를 진 것입니까?
아마도 사람들은 밧세바와 다윗이 마치 정분이 나서 눈이 맞아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다윗이 사자를 보내 밧세바를 자기에게로 데려오라고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거의 강압적으로 밧세바를 데려왔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간통을 한 죄는 다윗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보면 맞습니다.
유부녀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간통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우리아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여자입니다. 사실 밧세바가 자의적으로 했다고 하기 보다는 다윗이 강압적으로 해서 밧세바는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지켜 주는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다윗의 뜻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레위기20:10절을 보겠습니다. (구 177쪽)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율법입니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을 하는 자는 곧 이웃의 아내와 간음을 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이라고 율법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 율법을 몰랐겠습니까? 또 밧세바가 이 율법을 몰랐겠습니까?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율법인데 다윗은 자기의 권력을 이용을 했고 밧세바는 그 권력에 굴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 죄는 다윗으로 말미암은 죄이지 사실 밧세바는 어쩔 수 없이 다윗과 함께 간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이 되었고 또 이 밧세바로 인하여 솔로몬이 탄생이 되고 그가 왕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죽어야 하는 죄인입니다.
자기 자유의지에서 했든 아니던 밧세바는 간음을 했기 때문에 율법에 의하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죽어야 하는 밧세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물론 밧세바라고 직접적으로는 올라가 있지는 않지만 우리아의 아내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라는 말씀은 다윗의 부인이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밧세바가 잉태 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전쟁에 있는 우리라를 불러 밧세바와 잠을 자게 하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관계를 통해서 얼마나 비열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이면서도 자기가 범해서 잉태한 여자를 지켜 주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우리아를 전쟁에서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사무엘하11:8-9절을 보겠습니다. (구 478쪽)
“저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 주의 신복들로 더불어 잔지라”
참 대단합니다.
우리아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무도 사랑하는 아내 밧세바가 있었지만 아직 전쟁 중이라서 왕의 명령이라 해도 자기 집으로 가지를 않고 왕궁 문에서 잤다고 합니다. 아마 전쟁 중에 잠시 어떤 일로 집근처에 왔다면 더구나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면 어느 누구라도 집으로 가서 잤을 것입니다
더구나 왕이 허락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아는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잤다고 말씀합니다. 다윗이 그 소식을 듣고 다음 날도 우리아를 청해서 이야기를 듣고 집에 가서 자라고 했지만 역시 우리아는 똑같이 왕궁 문에서 잤습니다. 이 밧세바의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의미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아가 어떤 사람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가 또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사무엘하11:10절을 보겠습니다. (구 478쪽)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우리아가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그 안에 있는 영의 일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가 성경을 보나마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안에 있는 영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면 그저 문자적인 지식이 되고 그 지식이 자기를 사망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밧세바입니다.
누구의 아내입니까? 마태복음 족보에서 왜 밧세바라고 하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라고 했는가를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다른 세 여자는 그 이름을 말씀을 하고 있는데 밧세바만은 그 이름을 올리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볼 때는 이 사건은 다윗의 간음 사건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강압에 의해서 밧세바는 어쩔 수 없이 다윗과 간음을 하게 되고 그 일로 인하여 잉태를 하게 되고 그 일로 인하여 결국에는 자기 남편까지 잃게 되는 사건입니다 밧세바에게는 두 남편이 있는 것입니다 그 첫째 남편이 바로 우리아입니다
거듭 말씀을 드립니다.
죄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다윗이 한 죄를 보아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뜻을 전혀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윗이 어떤 죄를 지었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 영적인 의미를 모르고 그저 다윗이 지은 죄를 보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게 됩니다.
다윗의 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남편이 있는 유부녀를 거의 강제로 취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강제라는 단어가 없다 해도 혼자 있는 유부녀에게 왕의 사자가 왔다면 그 자체가 강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강제로 밧세바를 취해서 잉태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여자의 남편이 누구냐면 자기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의 아내였습니다.
얼마나 충성된 신하입니까?
전쟁 중에 왕궁에 왔는데도 왕이 또 그 아내와 함께 쉬다가 전쟁에 다시 가라고 하는데도 그것을 거절할 정도로 충성된 신하입니다 그 아내가 바로 밧세바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다윗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진 것입니다 아니 비난을 받아도 됩니다. 그렇게 충성된 신하의 아내를 취해서 잉태를 하게 만들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우리아를 불러 밧세바와 잠자리를 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어야 합니다.
다윗이 지은 죄를 생각하고 이 말씀을 보면 아니 밧세바에 대해서 알려고 하다가는 전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이미 세 여자에 대해서 강의를 해 드렸습니다. 그 세 여자는 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형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밧세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형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네 여자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형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다윗이 어떤 죄를 지었는가는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 보아야 합니다. 다윗이 누구고 우리아가 누구고 또 밧세바가 누구인가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아는 자기 집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다윗이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아가 자기 집으로 가서 밧세바와 잠자리를 가졌어야 정상인데 우리아가 얼마나 충성된 신하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아에게 다윗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11:11절을 보겠습니다. (구 478쪽)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왜 안 갔습니까?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쟁을 하고 있고 한참 전쟁을 하고 있는데 언약궤가 있고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신복들이 바깥에서 자고 있는데 내가 어찌하여 내 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잠을 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야가 다윗에게 대답하였다. "온 이스라엘 군과 유다 군이 야영 중입니다. 법궤도 거기에 있습니다. 제 상관 요압 장군이나 임금님의 부하들도 들판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만 집에 가서 편히 쉬며 먹고 마시고 아내와 더불어 밤을 지내다니,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법궤가 있습니다.
그 법궤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요압이 군대 장관으로 지금 암몬과 전쟁 중에 있는데 거기에 가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도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 하는데 왜 법궤가 지금 거기에 가 있습니까? 사울이 전쟁에서 어떻게 이겨야 하는 것을 모르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역시 똑같이 지금 전쟁에 법궤를 메고 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다윗이 전쟁에 나간 것은 아니지만 지금 법궤가 전쟁을 하고 있는 장소에 가 있습니다.
법궤가 있습니다.
그 법궤가 있는데 자기가 어떻게 내 집에 들어가서 내 처와 같이 자겠느냐고 다윗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우리아는 무슨 남편이냐면 바로 율법의 남편을 예표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아는 법궤가 없는 전쟁을 하고 있지 않는 그 장소에 있기 때문에 자기 처와 같이 자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성경에 문자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죄를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아의 충정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너무도 중요한 영적인 의미를 도저히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아는 지금 밧세바의 첫 남편입니다 그 첫 남편이 법궤가 있는 곳에서 왔지만 밧세바와 같이 자는 것 까지도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법에는 없습니다.
전쟁에서 왕이 불러서 자기 아내와 같이 자지 말라고 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아는 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법궤가 전쟁을 하고 있는 암몸 땅에 있는데 자기가 어떻게 자기 처와 함께 잠을 자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입니다
밧세바의 첫 남편은 누구를 의미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율법의 남편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남편이 법궤가 전쟁이 있는 그곳에 있기 때문에 밧세바와 잠을 자는 것을 거부를 하고 있습니다. 법궤가 있기 때문에 밧세바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법궤가 전쟁 중에 있는데 어떻게 자기가 자기 아내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무엘하11:12-13절을 보겠습니다. (구 478쪽)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우리아가 그 날에 예루살렘에 유하니라 이튿날 다윗이 저를 불러서 저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때에 저가 나가서 그 주의 신복으로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
다시 다윗이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역시 그 다음날도 집으로 가지 않고 주의 신복들과 함께 잤습니다. 지금 우리아는 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자기 마음에 법으로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것을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법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왕이 그에게 권해도 법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술이 취했는데도 법은 그렇게 자기가 생각하는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 왕이 불러서 집으로 가서 아내와 자라고 했으면 그렇게 해도 되는데 법에 한번 매여 있는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를 못 합니다. 우리아는 율법의 남편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랑합니까?
우리아가 죽고 난 후에 다윗에게 나단이 와서 우리아가 그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아지만 법에 있으면 절대로 그 법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보다 법이 더 우선인 것이 법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법은 그렇습니다.
법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은 그렇습니다. 사랑을 위해서 법도 때로는 무시를 해야 하는데 법궤가 전쟁 중에 나가 있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아내와 같이 자는 것 까지도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법은 사랑도 안통하고 오직 법대로만 하는 것이 법입니다 밧세바에게 우리아는 바로 율법의 남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아가 참 대단한 사람과 같이 보입니다.
사람의 이성적 지식으로 보면 우리아는 너무도 본받고 싶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도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영생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밧세바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밧세바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무엘하11:14-17절을 보겠습니다. (구 478쪽)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의 있는 줄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참 다윗은 나쁜 사람입니다.
충성된 신하의 하나 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내와 간음을 해서 잉태를 하게 한 것도 모자라서 이제 그 남편을 전쟁에서 죽이라고 합니다. 이 다윗의 편지대로 요압은 전쟁에서 우리아를 맨 앞에 세워서 적군에 의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 해도 이렇게 까지 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간음을 해서 밧세바가 잉태를 하니까 그것을 감추려고 우리아를 불러 같이 자게 하려고 했는데 우리아가 그 말을 듣지 않으니까 이제 편지를 써서 요압에게 보내 우리아를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너무도 중요한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영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생의 이성적 생각은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 말씀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나쁜 사람이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사건은 밧세바를 어떻게 구원하는 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밧세바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서7:2-3절을 보겠습니다. (신 247쪽)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비유입니다
로마서에서 율법을 한 남편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또 다른 남편으로 비유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매인바 되나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있습니다.
남편이 있으면 다른 남자를 만나면 안 됩니다. 율법에 그 음부와 간부를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남편이 있으면 그 남편에게 매인바 되어 다른 남편에게 시집을 갈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주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야 이혼을 하면 다른 남편에게 간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남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의 남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으로는 도저히 잉태가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그 남편은 생명을 주지 않는 남편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자기 집으로 가서 아내와 같이 자라고 했지만 우리아는 거절을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보면 우리아라는 율법의 남편은 밧세바에게 잉태를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아가 다윗의 청을 거절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지만 율법의 남편이 있는 한 밧세바는 절대로 잉태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잉태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영적으로 자기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안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안 잡니다.
왕이 자라고 해도 안 잡니다 율법은 절대로 우리에게 생명을 잉태케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말로는 법궤가 아직 전쟁을 하는 그것에 있고 주의 군사들이 아직 전쟁 중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말로 율법으로는 절대로 잉태를 하지 않는 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합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아가 정말 밧세바를 사랑했다면 아무리 전쟁 중이고 더구나 왕이 그것을 허락 했다면 밧세바와 자서 잉태를 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남편은 너무 냉정해서 절대로 같이 자지를 않습니다.
사무엘하에서 그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율법이 남편으로 있는 밧세바는 율법으로는 절대로 잉태가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왕이 아무리 간청을 하고 그 마음을 풀어 주며 같이 술을 마시면서 좋게 해 주었지만 율법의 남편은 절대로 같이 자지를 않아서 잉태를 하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표로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실제 전쟁에 나가기 전에 우리아는 밧세바에게 잉태를 하게 했으면 아마도 이런 일이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 여자입니다
그 여자가 아이가 있는 것과 아이가 없는 것은 너무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아는 전쟁에 나가기 전에 얼마든지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할 수 있는데도 밧세바가 혼자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남편은 의의 생명을 절대로 탄생하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간음을 했습니다.
이제 다윗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보면 다윗이 참으로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다윗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우리아가 나쁜 사람입니다 분명히 아이를 갖게 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아는 율법의 남편이라서 밧세바에게 아이를 갖게 하지를 못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윗이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으면 음부가 됩니다. 밧세바가 음부가 되어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밧세바를 살리려 하니까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는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아를 죽이지 않으면 밧세바는 잉태를 한 것으로 인하여 음부가 되어 반드시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어디에서 우리아를 죽였습니까? 사무엘하에서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최전방에 서게 해서 죽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그림자이고 예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2:15절을 보겠습니다. (신 312쪽)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원수입니다
첫째 남편은 원수입니다 그래서 그 남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밧세바에게 우리아는 남편이었지만 그 안에 생명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원수입니다. 밧세바와 동침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가 어떻든 간에 우리아는 밧세바를 사랑했다면 당연히 같이 자야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잤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같이 자지를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잉태시키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생명을 잉태시키지를 못 합니다. 그런 남편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전 남편이라는 것을 로마서에서 가르쳐 주고 있고 그 남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다.
전 남편을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밧세바는 음부가 되어 죽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위해서 전 남편 우리아를 죽인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의 전 남편인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다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우리아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율법을 반드시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자기 육체로 의문의 계명에 속한 율법을 폐하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 새 생명이 잉태가 되어 하늘의 생명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만약에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전 남편인 율법에 의해서 진노를 받아야 합니다. 세상에 어느 사람도 이 전 남편에 매인바 되면 절대로 살아 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일인데 이 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전 남편이 살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 남편이 있으면 절대로 잉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밧세바를 잉태하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같이 자는 것을 거부를 했습니다. 그것은 같이 자면 밧세바가 잉태할 것을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이 자면 잉태를 하니까 이유를 대면서 같이 안자는 것입니다
왕이 자라고 해도 안 잡니다.
하나님께서 부탁을 해도 안잡니다. 율법의 남편은 절대로 밧세바와 같이 자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그 남편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죽이지 않으면 밧세바는 음부가 되어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율법에 음부를 돌에 쳐 죽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밧세바를 살리기 위해서는 전 남편을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아를 죽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폐하는 것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전 남편이 살아 있으면 음부가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에베소서에서는 그 전 남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이제 그 남편이 죽으니까 자유 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우리아가 살아 있다면 밧세바는 자유 하는 몸이 될 수 없고 반드시 음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에게 율법이 살아 있으면 반드시 음부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밧세바의 배는 점점 불러올 것이고 우리아는 자기가 같이 안 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죽이려 할 것입니다.
전 남편이 안 죽어 있습니다.
전 남편이 살아 있으면 반드시 음부가 되에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 만약에 우리에게 전 남편이 살아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음부가 되어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전 남편을 다시 살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이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를 죽이면서 전 남편을 죽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전 남편을 다시 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육체를 죽이면서 율법을 죽이셨는데 이 시대는 그 율법을 다시 살려서 섬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됩니다.
전 남편이 살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밧세바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밧세바라는 것을 알아야 그 전 남편을 죽일 수 있는데 자기가 밧세바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아직도 율법의 남편을 섬기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율법의 남편으로는 우리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니 이 율법의 남편이 있는 한 절대로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이 율법의 남편을 섬기고 있습니다. 두 남편을 함께 섬기고 있으면서 음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배가 불러 잉태한 것이 보이기 시작을 하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04쪽)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의 남편 보기에는 참 좋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성경이 분명히 정의를 내려 주고 있습니다. 밧세바가 의롭다 함을 받으려면 그 율법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너무 사랑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율법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 율법을 믿음이라고 하면서 까지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율법으로는 자기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데도 그 율법을 변호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율법이라고 하지 않고 믿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단에게 미혹이 되면 사람들이 그렇게 이성을 잃게 됩니다.
밧세바가 잉태가 되려면 누가 있어야 합니까?
반드시 다윗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아는 절대로 밧세바에게 잉태하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 남편을 너무 사랑하고 있고 그 남편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죽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이 살리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잉태하게 하지도 못하는 아니 같이 자려고도 하지 않은 그 남편을 너무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밧세바와 같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 밧세바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윗이 전 남편이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사무엘하11:26절을 보겠습니다. (구 479쪽)
“우리아의 처가 그 남편 우리아의 죽었음을 듣고 호곡하니라”
호곡합니다.
아주 슬피 웁니다. 율법의 남편이 죽었다고 하면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호곡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께서 죽었다 해도 그렇게 호곡을 하지 않을 그들이 율법에 대해서 너무 사랑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남편이 죽는 것을 너무 슬퍼하고 있습니다.
죽이지를 못 합니다.
제가 율법이 폐하여 졌다고 말씀을 하면 사람들은 거의 멘탈(mental)이 붕괴가 되고 있습니다. 너무도 사랑하고 있고 그 남편이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그림자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배워야 합니다. 구약의 그림자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율법주의에 빠져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11:27절을 보겠습니다. (구 479쪽)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우리아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사를 마치니까 다윗이 사람을 보내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왔고 그 이후에 잉태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실제 육적으로 있었던 일입니다 육적으로 그 일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소위가 악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는 악합니다.
그것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육적으로 볼 때 정말로 악한 사람입니다 남편이 있는 여자와 간음을 해서 잉태를 하게하고 또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 남편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 일은 육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악한 육적인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악한 일을 왜 그냥 두셨는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 하는 몸이 되어서 이제 다윗이 밧세바를 데려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육적으로는 분명히 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에서 영적인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밧세바에게 우리아라는 전 남편이 계속해서 살아 있었다면 절대로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밧세바입니다.
갈라디아서 3:23절을 보겠습니다. (신 305쪽)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우리 인생입니다
모두가 이렇게 밧세바와 같이 율법의 남편에게 매인바 되었습니다. 율법의 남편이 죽기 전까지는 그 남편에게 매인 사람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렇게 태어나면서부터 율법의 남편에게 매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와도 믿음의 비밀을 알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보면 맞습니다.
율법의 남편에게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남편에게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정말 우리가 지금 복음의 은혜를 나누고 있지만 이 믿음의 비밀이 계시가 될 때까지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시기 전까지는 우리도 역시 율법 아래 매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당연합니다.
밧세바에게 우리아라는 전 남편이 있는 것과 같이 우리 역시 이렇게 율법의 전 남편에 매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스스로 벗어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왜 사무엘하에서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을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밧세바는 절대로 스스로는 전 남편 우리아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다윗이 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람의 이성으로 볼 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을 영적으로 보면 다윗이 아니었으면 밧세바는 전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한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구속을 하시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자기가 율법의 남편에 매여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기 때문에 더욱 자기가 율법의 남편에 매여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믿음이 오기 전까지는 율법에 아래 매인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매여 있습니다.
그런 밧세바를 구원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자유하게 해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 밧세바와 다윗의 간음을 한 사건을 통해서 밧세바가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밧세바를 어떻게 구원해 주시고 있는 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올 때까지는 전혀 모릅니다.
밧세바는 그저 전 남편인 우리아의 아내로 살다가 죽었을 수 있습니다. 전 남편 율법으로 사랑을 받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그 남편으로 인하여 잉태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자기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안 되어서 사망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밧세바의 처지가 그렇다는 것을 성경이 예표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믿음이 오기 까지는 전혀 모릅니다. 남편이 잘 해주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율법의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 안에 생명에 대해서 깨닫지를 못합니다. 믿음이 오기 까지는 생명이 잉태가 안 되기 때문에 절대로 생명에 대해서 생각도 하지를 않습니다.
다윗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잉태 되었습니다.
물론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간음에 의해서 생명이 잉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잉태 되고 보니까 자기의 전 남편인 우리아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만 알았는데 왕의 명령이 있어도 잠을 자는 것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밧세바를 강제로 데려와서 동침을 했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이 안 되어 있지만 분명히 왕이라는 신분으로 사자를 보냈으면 강제로 데려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느냐 하면 우리가 율법의 남편에게 매여 있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자를 보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10:3절을 보겠습니다. (신 203쪽)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에게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사무엘하 11장4절에 다윗이 밧세바에게 사자를 보냈습니다.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고넬료에게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 주신 것과 같이 율법의 남편과 살고 있는 밧세바에게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궁으로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거듭 말씀을 드립니다.
다윗이 간음을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것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육적으로 간음을 한 것은 다윗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어서 그 죄에 대해서 보응이 따르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밧세바의 사건은 영적인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전 남편에게 있는 밧세바에게 다윗이 사자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밧세바와 같이 율법의 남편 아래 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히 아름답게 보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음을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남편에게 있는 우리에게 사자를 보내주셔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넬료에게 사자를 보내서 베드로를 청해서 복음을 듣게 하신 것과 같이 이 시대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의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는 절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율법의 남편에게서 스스로 벗어 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아도 자기 스스로 율법의 남편에게서 벗어났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자를 보내 주셔서 우리로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 율법의 남편을 폐하신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밧세바라는 인물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히 전 남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시고 있는 가를 다윗을 통해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밧세바에게 잉태를 하게 하지 않고 있는 전 남편 우리아에게서 밧세바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4절을 보겠습니다. (신 291쪽)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고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보니까 심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다윗이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 밧세바에게 사자를 보내 궁으로 오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들을 심히 사랑스러워 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게 하시고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사자를 보낸 것은 강권입니다
밧세바는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힘에 굴복을 해서 다윗의 사자를 따라 갔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랑으로 우리를 어떻게 강권을 하시고 있는 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밧세바라는 여인인 우리가 율법의 남편에게 매인바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강권을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복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복음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심히 아름답게 보시고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자를 보내면 우리는 사자를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그 사자를 거절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밧세바를 통해서 그것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남편이 있는 밧세바가 왜 다윗이 사자를 보냈을 때 아무 말도 안 하고 따라 갔는가 하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을 하면 역시 복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밧세바를 통해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심히 사랑스럽게 보고 있기 때문에 강권을 해서 사자를 보내 주시고 있습니다. 고넬료에게는 천사가 찾아와서 그에게 복음을 듣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역시 사자를 보내 주시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 아래 있다가 은혜 아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자를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8:23절을 보겠습니다. (신 294쪽)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이 시대도 사자를 보내 주시고 있습니다.
그 사자가 고낼료에게 보낸 천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일수도 있습니다. 이 사자를 보내 주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복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자를 왜 보내 주십니까?
율법의 남편에게서 여러분들을 빼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율법의 남편에게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해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맞이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을지라도 복음을 전하는 사자를 보내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율법의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교회입니다
밧세바는 그 안에 있는 여자입니다 그 여자에게 다윗이라는 왕이 사자를 보내니까 그 사랑이 강권을 하니까 이 여자가 사자를 따라 다윗에게로 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어도 역시 율법의 남편에게 매인바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남편에게 매인바 되어 있는 바세바에게 사자를 보냈습니다.
사자가 와야 합니다.
목사를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내가 전도를 받아서 교회에 들어왔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는 율법이라는 남편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 안에 있는 우리에게 사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강권을 하면서 그리스도에게로 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전도를 받아서 교회 안에 들어왔다고 마치 사자를 따라 온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자를 따라 가게 되면 그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밧세바와 같이 교회 안에 있으면서 율법의 남편 우리아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우리아는 정말 사람의 이성으로 볼 때 너무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율법이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왕궁에 왔는데도 그 율법의 남편은 자기 아내 밧세바와 잠을 같이 자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의미로 밧세바에게 잉태를 하게 해 주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율법의 남편으로는 우리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아를 통해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를 보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이 우리아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으로 만족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자를 보내 그 사랑을 강권하고 있지만 따라가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자를 보내 주셔도 사람들은 이 율법의 남편이 너무 좋아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을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사자가 아닙니다.
그에게 새 생명이 있는 사람이 사자입니다 생명을 줄 수 없는 사람은 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시대 많은 목사들이 있지만 생명을 주지 않고 있다면 그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안 되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밧세바에게 생명이 잉태된 것과 같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어야 합니다.
사무엘하12:15절을 보겠습니다. (구 480쪽)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일일이 다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육적인 문제에 있어서 다윗에게 나단이 찾아와서 그 육적인 간음을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자기 잘못을 인정을 하고 자기가 범죄 했다고 하니까 나단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해 주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는 죄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다윗은 반드시 밧세바를 율법의 전 남편에게서 빼내 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강권을 해서 밧세바가 전 남편에게서 나올 수 있고 이제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전 남편이 죽으니까 새 남편 다윗에게 시집을 와서 같이 살고 있습니다. 이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고 있습니다.
간음을 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새 생명이 탄생이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율법의 남편을 섬기고 있습니다. 두 남편이 살아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자기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죽이셨습니다. 우리가 간음을 해서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생명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죽이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지금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자기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또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율법이라는 전 남편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간음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완전한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간음 중에 탄생이 되어 있는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 전 남편과 새 남편 둘을 모시고 있으면서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예표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믿고 있다 해도 전 남편이 있는 상태에서 탄생이 된 아들은 반드시 죽입니다. 그것은 간음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죽인 것입니까?
태어난 아들을 죽이셨지만 실제로는 밧세바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 남편이 있는 상태에서 잉태된 아이는 반드시 죽이십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말씀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간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육을 통해서 우리의 영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간음을 하고 있으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는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고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실제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생명은 하늘로부터 온 생명이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믿고 있는 가상의 생명이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사무엘하12:24-25절을 보겠습니다. (구 481쪽)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전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간음 중에 잉태된 아이도 죽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밧세바를 위로해서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솔로몬입니다. 이제 밧세바에게 평화가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전 남편이 죽고 다윗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이 탄생이 되었는데 그 이름이 평화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 다윗으로 말미암아 탄생이 된 생명을 하나님께서 사랑을 하시고 있습니다. 율법의 남편이 반드시 죽어야 다윗으로부터 아들을 낳을 수 있는데 그 아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도 역시 율법의 전 남편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받아 우리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되는 그 생명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생명이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탄생이 된 영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께서 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로서 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밧세바를 통해서 우리에게 정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밧세바
그 이름의 뜻이 맹약의 여자입니다 그 약속 그대로 솔로몬이 왕이 됩니다. 다윗이 늙어서 총기가 살라지고 있을 때 아도니아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고 선포를 하고 많은 장관들이 그에게 가서 왕으로 삼고자 할 때 밧세바가 다윗에게 들어가 말을 합니다. 예전에 왕께서 솔로몬으로 왕이 되게 하신다고 하시지 않았느냐고 말 합니다. 그리고 나단이 들어와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맹약을 이루었습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 평화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하늘에서 평화를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그 생명이 천국에서 왕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밧세바는 그 이름의 뜻대로 다윗으로부터 맹약을 받아 솔로몬이 왕이 되게 했습니다.
밧세바는 다윗으로부터 맹약을 받은 여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언약을 받은 사람입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듯이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새 생명이 천국에 들어가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밧세바를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이 말씀을 보면서 다윗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고 또 밧세바 역시 다윗과 함께 간음을 한 여자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성경에는 분명히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다윗이 이 죄를 인하여 잉태한 아이가 죽는 아픔을 겪게 되고 또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이 죄로 인하여 기록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시편에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한 죄에 대해서 얼마나 가슴 아파 하고 있는 가를 시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은 이 사건을 보면서 육적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밧세바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밧세바는 남편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남편이 있습니다. 밧세바의 남편은 우리아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있는 율법의 남편을 예표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남편과 살고 있지만 밧세바는 잉태를 하지 못해서 아이가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우리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안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밧세바를 구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다윗 왕을 통해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게 사람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 발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밧세바라는 여자를 통해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주시는 가를 보여 주시는 놀라운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다윗을 통해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율법의 남편에게 매여서 잉태를 못하고 있는 밧세바에게 사자를 보내 다윗에게 오게 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두 남편을 섬기는 모형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두 남편을 섬기고 있는 상태에서는 반드시 밧세바가 율법으로 죽게 되어 있자 다윗이 전 남편인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고 있지만 우리 역시 전 남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를 죽이면서 까지 우리를 전 남편에게서 찾아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적 전쟁에서 십자가에서 자기 육체로 율법을 폐하시면서 전 남편을 죽게 했습니다.
전 남편이 죽자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왔습니다.
우리의 전 남편인 율법이 죽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게 하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하면 바로 우리의 전 남편으로는 우리가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전 남편을 죽이고 우리를 그 남편에게서 자유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 생명이 탄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솔로몬입니다
다윗의 맹약을 받은 밧세바는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하늘로부터 온 생명이 천국에서 왕 노릇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예표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역사 가운데서 일어났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밧세바입니다
마태복음1장에서 밧세바라고 하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율법의 아내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우리아의 아내인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심으로 우리 안에 영의 생명이 탄생이 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그 사랑을 강권하시는 역사입니다
밧세바와 같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사랑을 하셔서 율법의 전 남편을 죽이시고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탄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밧세바와 같이 율법의 남편에게 매여 있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있는 가를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 지금 우리를 강권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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