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방황하는 교인들에게

46강, 새 언약의 일군

윤주만목사 2019. 3. 28. 06:56


46,새 언약의 일군

 

고린도후서 3:6-9절을 보겠습니다. (288)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성경을 모르면 죽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성경에 있는 말씀을 바로 보고 있느냐 아니면 다르게 보고 있느냐에 따라 그 생명이 좌우 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참으로 난해합니다. 그래서 평생을 성경을 보아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일만 하다가 지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교회에 나와서 일을 하고 있으면 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 지금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우리가 자세하게 보면 그렇게 열심을 내고 일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버림을 받는 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일이나 다 가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일을 하면서 살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방해를 하는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그 시대 그 사람들의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이 시대도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악을 행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인들도 역시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했던 일을 육체로 똑같이 하지는 않지만 영적으로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겼습니까?

지금 이 시대 바알이라는 신이 있습니까? 육적으로 나타나는 바알은 분명히 한국에는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 혹시 누군가 바알을 섬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바알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보면 맞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표면적인 바알을 섬기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보면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바알이라는 우상은 분명히 표면적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바알을 섬겼던 이면적인 신앙은 그대로 이 시대에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들이 이스라엘이 섬겼던 표면적인 바알을 안 섬긴다고 해서 바알을 안 섬기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렇게 됩니다.

자기들은 지금 이 시대도 바알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표면적으로 바알이라는 우상이 교회 안에 없다고 해서 이스라엘만 바알을 섬겼던 어리석은 민족으로 생각을 하고 바알은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입니다.

여러 종류가 있지만 대표적인 바알은 인간의 몸에다 소의 머리를 형상으로 만들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바알을 이스라엘은 직접적으로 섬겼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왜 바알을 섬겼는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분복을 받아들이지를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분복을 주시고 있습니다. 또 어느 해는 많이 수확을 하기 하시고 또 어느 해는 가뭄이 들게 하시고도 합니다. 그런 것은 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욕심이 너무 가득 차 매년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면서 바알이라는 신을 섬겼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적인 풍요를 위해서 교회가 바알의 신전이 되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복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더 잘 살기 위해서 기복을 바라는 기도를 하고 있다는 자체가 바알에게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열왕기상 18:22절을 보겠습니다. (547)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

 

이해가 됩니까?

하나님께서 선택을 한 선민이 바알을 섬기고 있고 또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왜 그들이 바알의 선지자가 되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보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바알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바알이 없어졌습니까?

이 시대 교회는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 교회는 여러 가지 직분을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목사들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표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직분을 행하고 있는가 하면 바알의 직분도 행하고 있고 아세라의 직분도 행하고 있고 또 의문의 직분도 행하고 있습니다.

 

다 하고 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 노릇도 하고 있습니다. 또 아세라 선지자 노릇도 하고 있고 이스라엘과 같이 의문의 직분을 행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이 모든 것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고 목사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 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보아도 그들의 눈이 감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보이는 우상을 안 섬기고 있을 뿐이지 그 우상에게 빌었던 모든 것을 지금 교회 안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누구의 직분을 맡은 자로 일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교회 안에서 일하고 있고 이것은 목사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교인들 역시도 똑같이 그 직분을 행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이 말 자체가 바알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복이 아니라 이생의 복을 받는다고 하는 그 말이 사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바알을 믿고 있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병도 고침을 받고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를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누구의 직분을 행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알의 직분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예수를 전하고 있을지 몰라도 사실은 바알을 전하고 있는 것임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이 사실은 누구를 전하는 선지자인가 하면 바알을 전하고 있는 선지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 있으면 세상에 대해서 모두가 선지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직분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을 행하고 있다고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바알을 직분을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너무 가난했을 때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거의 바알과 함께 들어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실제 바알은 한국 기독교에 복을 많이 주어서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흥에 성공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불행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십일조를 내고 헌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 누구에게 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바알에게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내고 있는 십일조를 통해서 헌금을 통해서 복을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바알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바알의 직분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바알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사실 율법주의가 가장 성행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율법주의의 사상이 유대인들을 붙잡고 있었던 때에 주님이 오셔서 새 언약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는 율법주의를 따라가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직분을 행하고 있는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실 사람이 이 율법주의에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 합니다. 이 율법주의가 기복주의를 낳고 또 성화주의를 낳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사실 다 이 율법주의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 밖에 일이 아닙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일을 사도 바울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어떤 직분을 행하느냐에 따라 그 영혼이 생명을 얻기도 하고 또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직분을 맡았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버림을 받은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경계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일은 그들만의 일로만 생각을 하고 있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직분을 잘 행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직분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다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을 받은 자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알의 직분을 맡은 자도 있고 아세라의 직분을 맡은 자도 있고 또 신접한 자도 있고 의문에 직분을 행하고 있는 자도 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도의 직분이 무엇인가를 사도 바울이 자기가 어떤 직분을 맡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3:1절을 보겠습니다. (288)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직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을 맡은 자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정말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영의 직분을 행하는 영광의 직분을 맡은 자라고 하는 것이 내가 자화자찬을 하는 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 스스로 영광의 직분을 맡은 자로 일을 한다고 주장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화자찬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자기가 어디서 자기 혼자 공부를 해서 영광의 직분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자화자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그마나 듣기 때문입니다

 

내 스스로 하는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내가 잘 나서 이 직분을 행하고 있는 것인 줄 알고 있느냐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 나서 영광의 직분을 행하고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먼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 교회 안에는 너무 잘난 사람들이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겸손의 모양은 나타내고 있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너무도 잘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화자찬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내 스스로 영의 직분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공부를 많이 해서 그리고 내가 잘 나서 내가 이 세상에 어떤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어서 이 직분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과 같이 소개장을 가지고 있어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이 시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이 소개장이 없으면 복음을 전할 수도 없고 들으려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그 당시에도 지성인이었고 또 세상 적으로 볼 때도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을 말씀합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내가 목사라는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어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을 부정하고 싶어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그런 라이선스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도들로부터 사도라는 것을 인정받아야 합니까? 이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교단이라도 속해 있어야 그리고 그곳에서 안수를 받아야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그것을 사도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있어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또 내가 다른 곳에 전도를 하기 위해서 갈 때 여러분의 소개장에 있어야 합니까? 묻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씀하고자 합니까?

바로 의문에 직분을 행하는 사람들은 이미 대대로 율법에 의해서 정해져 있습니다. 레위 자손이라야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율법에 그렇게 되어 있다 해서 내가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는데 어떤 라이선스가 있어야 합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신학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학에서 복음을 바로 배우지 못한다면 그 신학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낫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저 이 세상의 지적인 수준을 높이고 도덕의 수준을 높이는 신학이라면 저는 반대를 합니다. 그런 신학을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생명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초등 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3:2-3절을 보겠습니다. (288)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여러분이야말로 우리를 천거해 주는 소개장이 아니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소개장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에 적혀 있습니다.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그것이 우리에게 소개장이 아니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복음의 직분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 않고 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을 받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바로 사도바울이 영의 직분을 행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편지라는 뜻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나타나고 있고 믿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리스도의 편지가 없는 가를 그 직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는 영의 직분을 행하고 있고 의문의 직분을 행하고 있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편지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의문의 직분의 영광을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까?

그렇다면 의문의 영광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먼저 알고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면 당연히 의문의 영광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뒤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이 누구의 편지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의문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으면 그는 의문의 편지입니다

 

분명히 하나만 되어야 합니다.

직분이라는 것은 두 개를 맡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직분을 맡아서 일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하나만 맡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어느 직분을 맡았는가를 분명히 구별을 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것을 작성하는데 사도바울이 헌신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도록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으로 돌 판에 쓴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에 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이냐 영이냐를 분명히 구별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영으로 썼습니다. 돌 판에 쓴 것같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돌 판에 쓴 것은 보이지만 영으로 마음에 쓴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3:4-5절을 보겠습니다. (288)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확신합니다.

그것은 그 편지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영으로 마음에 쓴 편지는 안 보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돌 판에 쓴 것 같으면 그것을 보고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마음에 쓴 편지이기 때문에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로서 확신을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나 돌 판에 썼으면 누구나 그것을 쉽게 분별을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십계명이 돌에 쓰여 있습니다. 그러면 그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돌 판에 쓴 것을 행하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확신입니다

눈으로 보고 확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확신을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 것을 보면서 확신을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해서 너희가 그 복음을 믿고 있는 그것으로 확신을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육의 심비에 서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 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를 씁니다.

그것이 사람에게서 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사람이 신학을 공부를 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신학을 부정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자격은 하나님께서 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 당시에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자격을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목사입니다

목사라 해도 그리스도의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그리스도의 편지를 쓸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은 내가 공부를 해서 똑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자격을 주셨기 때문에 너희에게 그리스도 편지를 쓸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만족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에게 그리스도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로서 났다고 말씀을 하면서 그 만족이 하나님께서 왔다는 것을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만족이라는 것은 구원을 가르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그 자체를 만족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91:16절을 보겠습니다. (871)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을 보인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그리스도의 편지를 써서 구원을 받게 한 것이 하나님께 로서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지만 그 만족이 하나님께서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만족은 돌 판에 쓴 것이 아니라 영으로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 돌 판에 쓴 것으로 보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너희는 우리가 쓴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을 하면서 그것은 영으로 육의 심비에 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마음으로 믿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과 육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육의 직분이 있고 영의 직분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영의 직분을 맡은 자로서 사도 바울이 영으로 육의 심비에 써서 그들이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그것이 구원을 얻는 것으로 확신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3:6절을 보겠습니다. (288)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일군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만족케 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그 자격의 직분으로 함으로 해서 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새 언약의 일군의 자격을 주셨는데 그 일을 함으로서 구원을 이루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새 언약의 일군으로 삼으셨는데 만족을 하신다는 말씀은 새 언약의 일군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11:25절을 보겠습니다. (277)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옛 언약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과 하나님께서 피로 맺은 언약입니다 율법을 주셨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우리가 이것을 다 지켜 행하겠다고 언약을 했습니다. 그 언약이 바로 의문에 쓴 언약입니다 모세가 문자로 기록을 한 그 언약을 이스라엘이 다 지켜 행하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지키지를 못 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지킬 수 없는 것을 모르고 하나님과 언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성막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새 언약을 예표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실 것을 성막의 제사 제도를 통해서 모두 예표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문자 그대로 자기들의 직분을 행하다가 결국에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새 언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새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그것을 문자 그대로 다 지키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옛 언약도 피를 요구하고 있고 새 언약도 피가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옛 언약을 지킬 수 없어 모두가 사망에 이르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 하셨습니다.

 

그리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언약의 피를 마시는 자는 살리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옛 언약을 폐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시고 우리에게 그 새 언약에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그 언약의 피를 우리에게 마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새 언약의 일군으로 만족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새 언약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의문에 쓴 것으로 하지 않고 새 언약을 통해 만족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새 언약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의문에 쓴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의문이냐 영이냐를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문이냐 영이냐 둘 중에 하나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입니다

이 두 가지는 일군입니다. 성경은 어느 일군으로 일을 하고 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의 일군은 의문으로 하지 않고 오직 영으로 하나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군이라고 하면서 의문을 하고 있다면 그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의문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6:63절을 보겠습니다. (155)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사도 바울도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은 죽이는 것입니다. 왜 죽이는 것입니까? 그 의문은 무익하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이라는 것은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내 육체로 하는 것이 바로 육이고 의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육은 무익합니다.

의문은 육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다 해도 그것을 육을 통해서 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익한 것이 되고 결국에는 자기를 죽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육체로 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요 그것이 결국에는 죽이는 것이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 문자입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은 문자입니다 그 문자를 그대로 행하려고 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고 그것을 행하고 있는 것이 의문으로 하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얼마나 많은 의문을 육체로 행하고 있습니까?

 

의문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 의문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죽이는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행하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영이 무엇인지 의문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결국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14절을 보겠습니다. (326)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안 믿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분명히 기록을 하고 있는데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계명의 율법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의문의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이셨는데도 이 시대는 의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죽습니다.

영으로 하지 않으면 반드시 죽습니다. 영이라는 것을 이해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영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마음으로 믿어 받아들이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일을 이루시고 구원해 주시는 일이 바로 영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도 의문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의문으로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의문으로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 직분이냐 의문의 직분이냐를 말씀하면서 의문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6:54절을 보겠습니다. (1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의문은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계명의 율법입니다

그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자기 육체로 하는 것이 바로 의문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안식일을 지켜라 했으면 그것을 문자 그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바로 의문입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안식일을 지키고 있으면 의문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고 하면서 주일을 자기 몸으로 지키는 것이 바로 의문입니다 이렇게 의문으로 하는 것은 죽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느 한 날에 예배를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주일이라는 날은 안식일과 같은 의문이 되어 있고 그것을 자기 육체로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의문이 되고 그것을 행하고 있으면 죽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영은 무엇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이루신 일이 바로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못 박아 죽이신 것이 영입니다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사도 바울이 너희의 심비에 새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이 살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는 것이 영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계명을 못 박아 죽이셨는데도 그 의문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며 영의 직분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문의 직분을 행하고 있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십계명에 있는 돌 판에 쓴 의문입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간음을 자기 육체로 하지 않는 것은 의문입니다 제가 육체적으로 간음을 하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이 두 남편입니다. 이 두 남편을 함께 섬기고 있으면 간음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으로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간음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문과 영입니다

똑같이 성경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의문으로 간음을 하지 않고 있고 한 사람은 영으로 간음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문으로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영으로 하는 성도는 산다는 것을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함께 말씀을 하면서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거의 전부 의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으로는 간음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과 영을 모르게 되면 결국에는 죽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의문으로 하는 사람은 자기 육체로 간음을 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영으로 하는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을 간음을 하지 않은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영으로 하지 않으면 절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성경을 교회 안에서 보고 있지만 누구는 의문으로 하고 있고 누구는 영으로 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이렇게 의문으로 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의문에 의해서 죽게 되고 영으로 하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있기 때문에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간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문으로 하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영으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불행하게도 자기들이 간음을 하고 있으면서도 의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간음을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가 간음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간음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가 실제로는 영으로 간음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의문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 그 의문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이 살고 죽는 것에 있어서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인을 하면 국가가 구속을 해서 죽이든지 감옥을 살게 하든지 하고 있습니다. 의문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니까 마치 살인을 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아주 무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문은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율법을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영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고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믿기 때문에 산다는 말씀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을 해도 의문의 직분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그들에게 아직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의 일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이런 말씀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2:35절을 보겠습니다. (169)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어두움이 붙잡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 이 어두움에 붙잡혀서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의문으로 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어두움에 붙잡혀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진리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영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일입니다. 그것을 육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참 빛을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두움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어두움에 붙잡혀서 의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있고 그것을 자기 육체로 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율법에 붙잡힌바 되면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역사를 해 주셔야지 의문에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밧세바에 대해서 강의를 들어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율법의 전 남편에게 매여 있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랑으로 강권을 하셔서 빼내 주시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릅니다.

어두움에 다니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어두움에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두움에 거하더니 자기들이 가는 길을 모르고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내려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의문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율법입니다

모든 종교와 국가가 다 율법입니다 사실 그렇게 율법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이 그것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들어와서도 역시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의문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한번 붙잡히는 순간에는 그것으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자기가 붙잡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누구의 일군입니까?

사도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직접 전도를 하고 복음을 가르쳤던 그 교회에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더욱 더 타락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의가 의문으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천국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문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못 갑니다. 실제 지옥으로 가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가는 길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의문에 더욱 열심을 내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이 의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의문의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종교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3:7절을 보겠습니다. (288)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돌에 써서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입니다

바로 십계명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이 십계명으로 문제가 심각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십계명을 의문에 쓴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도로서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면서 문자 그대로를 보고 있습니다.

 

영광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돌에 써서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 돌에 써서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은 사람의 눈에 영광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육의 사람들은 그 영광을 보고 그것을 따라가고 싶어 합니다. 만약에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이 영광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쉽게 그 의문을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영광스럽습니다.

지금도 자기들이 십계명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못할 상황에서 주일을 지키면 얼마나 영광이 되겠습니까? 모두가 신상에 절을 하고 있는데 자기만 신상에 대해서 절을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경험 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애국가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이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는 하나님이 보우하사라고 했는데 언제부터 종교적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이라고 바꾸어 부르기 시작을 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45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저도 학교에 들어가 애국가를 부를 때 꼭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부르면서 마치 하나님께 대단하게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의문에 쓴 계명이 이렇습니다.

돌에 써서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이렇게 자기 가슴이 벅찰 정도로 영광을 돌렸던 것을 아마 누구나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바로 이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일을 안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 주일을 지키면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게 보이겠습니까?

 

모세의 얼굴을 주목하지 못 했습니다.

분명히 잠시 후에는 없어질 영광이었지만 그 영광을 이스라엘이 주목을 하지 못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도 의문의 직분을 행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 영광을 너무도 좋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눈으로 보고 있는 의문의 직분의 영광이 죽게 하는 직분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없어집니다.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의문의 영광은 반드시 없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의문에 쓴 것이 없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죽게 하는 의문에 직분으로 일한 것을 가지고 천국에서 더 큰 상급을 받는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에 직분으로 일한 것은 없어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의문의 직분을 잘 행해야 천국에서 더 큰 상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상이 더욱 의문의 직분으로 일을 하게 만들고 있고 그것이 죽게 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3:8절을 보겠습니다. (28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넘쳤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의 직분은 눈으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있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이지가 않습니다. 아니 영광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맞습니다.

 

영광이 보입니까?

영의 직분은 영광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의문의 직분은 죽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죽이는 것도 그렇게 영광이 넘쳐서 사람들이 주목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살리는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직분의 영광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죽이는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없어질 영광입니다. 그 영광도 사람들이 볼 때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이는 영광입니다 그 영광도 사람이 주목을 하지 못할 정도로 빛이 나고 있는데 하물며 영의 직분이 영광이 더욱 넘치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이는 것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리는 것은 영광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죽이는 것의 영광도 사람들이 볼 때는 정말 영광스러운데 하물며 살리는 영의 직분의 영광은 그것에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을 하지 않고 그냥 보라고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영광을 모르다 보니까 의문의 영광을 비교를 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안 보입니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은 보이는 영광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행하고 있는 거의 모든 행위들이 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영광을 보고 다 눈이 멀어 있습니다. 그 영광에도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빼앗기고 있는데 하물며 영의 직분이 어떻겠느냐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9절을 보겠습니다. (288)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율법은 정죄를 합니다.

모두가 주일을 지키는데 어느 한 사람이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저렇게 주일도 안 지키면서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겠느냐고 하면서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또 누군가 도적질을 합니다. 그럼 의문은 반드시 도적질을 하지 말라고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직분도 영광이 있습니다.

그것을 잘 지키는 자들에게는 분명히 영광이 있습니다. 그런 직분도 영광이 있는데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의 직분과 영의 직분이라고 말씀을 하다가 이제는 정죄의 직분과 의의 직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의문은 정죄를 하는 것이고 영은 의를 베풀어 준다는 말씀입니다

 

새 번역입니다

유죄를 선고하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으면, 의를 베푸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의를 베푸는 직분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하는 직분이 더욱 더 영광이 넘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의를 베푸는 직분을 행하고 있는 사람은 아주 적고 오히려 정죄의 직분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의 직분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0-11절을 보겠습니다. (289)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우리가 그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이제 과거에 있었던 의문의 영광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믿음이 있는 성도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임재를 하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의문에 영광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믿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육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의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육의 사람은 자기 눈으로 보이는 의문의 영광을 보게 되어 있고 영의 사람은 그 없어질 영광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더 큰 영광을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실제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죽이는 그것에 비할 바가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더 큰 영광입니다

보이는 것은 아주 작은 영광입니다 그 영광은 우리를 죽이는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를 살리는 영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살리고 죽는 것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것도 생길 때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 지킬 때에 잠이 영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영광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영원히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영광과 영원히 있을 영광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영의 비밀을 모르다 보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눈에 잠시 보이는 영광을 더 따라가고 있습니다.

 

아니 그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안 보이면 마치 하나님을 안 믿는 것과 같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그 영광을 버리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그 영광을 보다가는 반드시 죽음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우선은 자기 눈에 너무 좋게 보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육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의문의 직분 나를 죽입니다.

그러나 영의 직분은 나를 살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의 직분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되다 보니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의문의 직분을 더 좋아하고 있고 어떻게 하든지 그 직분을 맡아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의문의 직분은 죽이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2절을 보겠습니다. (289)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에게 이 같은 소망이 있습니다.

영의 직분은 영원히 빛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직분은 우리를 만족케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일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확신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확신이 없으면 못 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그 영광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영의 일은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비록 육체의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은 영광이 보이지는 않지만 확신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직분은 사실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영의 직분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담대하게 말을 한다는 말씀은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담대하게 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어 구원을 받아 소망을 가지고 있는 성도만이 담대하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영의 직분 실망할 수 있습니다.

아니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이 어떻게 담대하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영의 직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소망이 있으니까 담대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도 담대하게 일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3절을 보겠습니다. (289)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새번역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얼굴에 너울을 썼지만, 그와 같은 일은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좀 쉽게 번역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얼굴의 광체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얼굴에 수건을 썼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하지 않습니까? 영의 영광은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수건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직분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굳이 영광을 가리고 말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볼 때는 이 세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서 보게 되므로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것과 같이 수건을 쓸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바울을 통해서 영광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자기 얼굴에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 얼굴에 영광이 안 나타나기 때문에 굳이 수건을 쓸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을 우리는 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영광을 나타내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수건을 쓸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의 직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4절을 보겠습니다. (289)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아직까지 구약을 읽을 때 그 수건을 벗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영의 직분을 주시고 그 의문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버리셨는데도 이스라엘은 아직까지도 구약을 볼 때 그것을 문자 그대로 보고 있고 그것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을 보면서 아직까지 수건이 벗겨지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해서 그렇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완고한 자들이 많아 구약을 읽을 때 수건이 벗겨지지 않아서 의문의 직분을 행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수건이 벗겨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담겨져 있는 뜻을 모르기 때문에 아직까지 수건을 쓰고 있고 그 말씀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수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비로소 벗겨 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에 매인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3:15절을 보겠습니다. (289)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역시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직도 정죄의 직분을 행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그 수건이 벗겨지지가 않고 있습니다.

 

마음을 덮어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수건이 마음을 덮고 있습니다.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수건이 벗겨지지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건이 벗겨지지 않다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체를 보지 못하고 있고 아직도 의문의 직분을 행하면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없어질 영광입니다

그 영광 때문에 영원히 있을 영광을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수건으로 덮은 것과 같이 마음을 덮고 있기 때문에 도무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수건으로 덮어져 있는 사람은 빛이 그 마음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안타까운 현실은 자기들의 영적인 상태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의문의 영광을 눈으로 보다 보니까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그 눈으로 보는 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수건으로 덮어져 있지만 사람들은 영의 일을 모르고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행위들을 마치 영의 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덮어집니다.

의문의 영광이 눈에 보이는 사람은 마음에 수건이 덮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복음을 전해 보아서 잘 알겠지만 이미 의문의 직분을 따라 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복음을 전해 보았자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포기하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과 같이 처음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영혼의 생명이 결정이 된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순전하게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 중에서 의문의 직분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지금과 같이 복음이 사라져 있는 시대에서는 말을 해서 무엇을 하겠습니다. 복음을 바로 전해도 주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쉽지 않은데 조금만 잘못 전하면 그 영혼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고린도후서3:16절을 보겠습니다. (289)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안 벗겨집니다.

그러나 주님께로 돌아가면 비로소 이 수건이 벗겨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께로 돌아간다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두 직분이 있습니다.

의문의 직분이 있고 영의 일을 하는 직분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렇게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직분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사도 바울이 의문의 직분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께로 돌아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에는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지만 아직도 의문의 직분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있는 그때도 의문의 직분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모두가 의문의 직분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의 직분의 일을 하고 있다는 말씀은 이스라엘과 같이 모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단 한 가지라도 의문의 일을 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 주께로 돌아온 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직분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에게서 단 한 가지라도 의문의 일이 나타나고 있고 그 영광을 눈으로 보고 있다면 그는 아직 주께로 돌아온 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너무도 율법이 성행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들이 의문의 직분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잠언 1:24절을 보겠습니다. (912)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돌아오지를 않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돌라오라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그들은 의문의 직분으로 일을 하면서 영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 역시 그렇게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의문의 직분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를 싫어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의 직분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미 하나님께 돌아와 있다고 생각하지 때문에 도무지 이 말씀이 이해가 안 됩니다. 지금도 돌아오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3:17절을 보겠습니다. (289)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

 

주는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서는 자유 함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문의 직분은 자유 함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 사람들이 의문의 직분을 행하면서 자유 하는 마음으로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모르기 때문에 자유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왜 오셨습니까?

의문에 매여 있는 우리를 자유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의문을 일을 하면서 자유 하는 마음으로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면서 자유 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25절을 보겠습니다. (372)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이 말씀을 바로 해석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면 맞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이미 강해를 해 드렸기 때문에 여기서는 자세하게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이루신 율법의 요구를 믿음으로 내가 한 것으로 가져왔습니다.

 

그것을 듣고 잃어버리는 자는 아직도 율법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행을 하는 자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이렇게 자유 함이 있는데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다 보니까 성경 자체를 바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의문의 직분의 일을 하면서 자유 한다고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영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내가 가면 너희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보혜사가 오신 성도는 주의 영이 그 마음에 계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성도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보고 듣고 잃어버리지를 않고 실행을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의문의 직분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말씀을 거꾸로 알고 있고 오히려 의문의 직분의 일을 하면서 자유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자기가 무슨 직분의 일을 하고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런 행위를 보고 마치 영의 직분의 일을 하고 있는 줄 알고 열심을 내고 있는 그 일들이 사실은 다 의문의 직분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가 가는 길을 모르고 사망의 길로 아주 열심을 내면서 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3:18절을 보겠습니다. (289)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영의 직분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수건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보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의 영광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이루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형상을 이루려면 반드시 영의 직분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합니까?

주의 영이 내 안에 임재를 해서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를 해서 내가 영의 직분의 일을 하게 됨으로 해서 주님의 형상으로 화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하느냐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내 안에 계시면 주님의 영이 이것을 이루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의 직분의 일은 내가 합니다.

영의 직분의 일은 내 안에 주님의 영이 오셔서 그 영이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영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령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고 마치 교회 안에서 주님을 믿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성령이 오신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영이 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영의 직분의 일을 할 수 있게 주님께서 역사를 하고 있다고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일은 주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셔서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주님께서 보내 주시는 성령으로 영의 직분의 일을 해서 천국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면서 모든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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