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방황하는 교인들에게

47강, 다말

윤주만목사 2019. 3. 28. 10:20


47, 다말의 구원

마태복음 1:1-6절을 보겠습니다.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왕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성경은 영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우리가 왜 보고 있는가 하면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분명한 목적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성경을 아무리 많이 보아도 성경을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때로 이해가 안 됩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성경을 주셨는데 이 성경에는 이스라엘의 족보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족보를 보면서 사람들은 상당히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의 역사를 배우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과연 이 성경을 보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예표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오히려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론 이스라엘의 족보 가운데서 오셨지만 이방의 빛이 되기 위해서 오셨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족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어떻게 섭리하시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반드시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아니었다면 다른 민족을 세워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보여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 예표를 보고 마치 이스라엘이라는 역사를 배우고 그 족보를 배우고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어떻게 구원을 하시는 가를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악을 행한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선택을 받은 그들이 오히려 악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또 인물들을 기록했습니다.

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에게 믿음을 주시는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창세기를 잘 보면 알겠지만 아브라함은 겁이 많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이 많았던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보다 더 두려움이 많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에게 믿음을 주시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이방에 객으로 살아가는 아브라함이 두려워했던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렇게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을 창세기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반대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믿음이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두려워합니다.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을 주시고 그가 두려운 마음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영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강한 사람은 사실 이 영생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부르시고 그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그렇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다말의 구원도 그렇습니다.

사실 다말이라는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가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이성적 상식으로는 설령 다말이 있다 해도 그 족보에서 슬쩍 빼 버리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 다말을 당당하게 족보에 기록을 하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아주 정상적으로 아내가 된 사람들은 기록을 하지 않고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여자들을 기록을 해 놓았습니다.

 

영생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다말이라는 여자도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구원을 받아서는 안 되는 여자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다말을 통해서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6절을 보겠습니다. (263)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고 능한 자가 많지 않고 문벌이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를 보면 사도 바울의 말이 무색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지혜가 있다고 하는 자들은 다 교회 안에 있고 또 능력이 있는 자들이 교회 안에 주류가 되어 있고 문벌이 좋은 자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한 말씀과 이 시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너무 지혜 있는 자들이 많이 있고 또 능력이 있는 자들이 많이 있고 문벌이 좋은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솔직히 조금 문제가 있다는 증거고 종교로 변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의 탄생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가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여자들이 몇 사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있는 이 여자들은 유대인의 율법에 비추어 볼 때 바른 여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3절에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기록된 4명의 여자들은 그들의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좋은 여자가 못 됩니다.

 

첫 번째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라합은 이방여자에다 기생이었습니다. 룻도 이방 여자에다가 전 남편이 있는 두 번째 여자입니다 우리아의 아내는 다윗이 간음하고 그 남편인 우리아를 죽이고 자기 아내로 삼은 여자입니다 정상적인 여자들은 기록을 안 했는데 하필이면 문제가 있는 여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족보가 어떤 족보입니까?

이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기록된 4명의 여자들은 있어서는 안 되는 삶을 살은 여자들인 것입니다 왜? 이 여자들을 기록했을까요? 첫 번째 여자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다말부터 성경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다말은 유다와 동침해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유다의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의 족보를 형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사람들 중에는 아들이 여럿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율법에 어긋난 여자들에게서 낳은 사람만을 뽑아서 기록해 놓았습니다. 다윗이 아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간음하고 살인한 후에 빼앗아 온 그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이 솔로몬입니다 왜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족보를 형성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속에는 진리가 숨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르는 족보에서 남자들만 기록된 사람은 정상적인 아내를 두었습니다. 율법에 비추어서 정상적인 여자들은 기록이 안 되고 율법에 어긋난 사람이었지만 4명의 여자는 영광스럽게도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갔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사실 이런 말씀들을 이해를 하지 못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보다가 더 이상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 안에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또 성경을 그저 그런 이 세상의 책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말이라는 여자를 성경에 기록을 했을 때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다말

종려나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는 대추야자라고 합니다. 대추 같은 열매가 많이 맺혀 있습니다. 다말이라는 이름의 뜻에서 이미 자손의 번성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로서 아들을 낳지 못했는데 첫째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또 둘째 아들이 죽었습니다. 다말이라는 이름의 뜻에서는 분명히 자손의 번성함을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려나무입니다

사진으로 보면 그 열매가 얼마나 탐스럽게 맺히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야자수 같이 곧게 뻗어 있는 나무에 대추 같은 열매가 뭉쳐서 탐스럽게 맺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말은 그렇게 자손을 번성하게 하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92:12절을 보겠습니다. (871)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종려나무는 의를 상징하는 나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말이라는 이름의 뜻에서부터 의인을 번성시키는 이름의 뜻이 있습니다. 이 뜻 그대로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습니다. 다말은 의인을 번성시켜야 하는 여자로 이미 그 이름에서 정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실제 이 종려나무와 같이 의인들이 이 세상에 많이 있을 것을 예표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실제 다말은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지만 그 자손으로 하여금 다윗이 태어나고 또 그 자손에서 연결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이 번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인이 번성합니다. 그 족보를 이어주는 여자가 바로 다말입니다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 다말은 종려나무로서 의인을 번성케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다말이 낳은 베레스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족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다에게는 3아들이 있었습니다.

, 오난, 셀라가 있는데 큰아들 엘을 다말이라는 여자와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 큰아들이 하나님 앞에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죽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아들을 다말에게 다시 결혼을 시켰는데 그도 죽었습니다. 이제 아들이 하나 남았는데 그 당시 근동의 풍습으로는 그 3째 아들을 결혼을 시켜야 되는데 유다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창세기38:6-7절을 보겠습니다. (59)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장자 엘을 다말과 혼인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목전에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장자 엘이 왜 악한가를 성경이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말의 남편인 엘이 무엇을 어떻게 해서 악하다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지 않고 그냥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분대로 장자 엘이 악하다고 보시고 그를 죽이신 것이 아닙니다. 왜 악한가를 다말이라는 이름의 뜻에서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유다가 다말을 아내로 주었을 때는 다말을 통해서 의인이 번성케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26절을 보겠습니다. (44)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이미 강의를 했기 때문에 이 달란트가 무엇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악하고 게으른 종은 자기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 않은 종을 보고 예수님께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씀을 하면서 나는 심지 않는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데서 모으는 줄 아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엘에게 다말을 주었습니다.

그럼 엘은 빨리 의인을 번성케 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엘은 다말과 혼인을 하고도 다말을 통해서 의인을 번성케 해야 하는데 그 의무를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엘을 악하다고 말씀을 하면서 죽이셨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늘 강조를 드립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생명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보았지만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 않은 종을 악하다고 말씀을 하면서 바깥 어두운 곳에 쫓아내라고 하시고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말은 종려나무입니다 의인을 번성케 해야 하는 종려나무인데 엘은 그 종려나무에 의인을 번성케 하지를 않아서 하나님께서 보시고 악하므로 죽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엘이 왜 그렇게 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혼인을 하면 자기 부인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엘은 다말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신혼 초면 당연히 자기 부인을 사랑했어야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엘은 다말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비유입니다

다말은 교회를 예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엘은 그 교회의 남편으로 비유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남편은 주님이지만 디모데전서에서 감독 역시도 교회의 남편으로 비유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엘은 반드시 그 교회를 통해서 의인을 번성케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결과로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죽이셨습니다.

 

다말을 통해서 반드시 의인이 번성해야 합니다.

하지만 엘은 자기가 해야 하는 그 일을 하지 않아서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죽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가 개인의 생명이라면 다말은 의인을 번성케 하는 나무입니다 그것은 다말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엘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엘은 쉽게 말을 해서 교회의 감독이 되는데 그를 통해서 의인을 번성케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치 다른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때는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은 유다가 다말이라는 아내를 주었는데도 그 일을 하시 않음으로 해서 악한 자가 되어서 죽었습니다.

 

성경은 생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의롭고 선하게 산다 할지라도 그 안에 생명이 없다면 악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달란트의 비유에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엘에게 다말을 주신 것은 엘을 통해서 의인이 번성케 되어야 하는데 엘은 그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목전에 악하므로 죽이셨다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지방 풍습입니다.

근동 지방에서는 형이 아들이 낳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대신 형수를 취해서 아들을 낳게 해서 형의 자손을 잇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 풍습 그대로 유다가 엘이 죽자 그 동생 오난을 형수에게 들여보내서 형의 자손을 잇게 했습니다.

 

창세기38:8-10절을 보겠습니다. (59)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유다가 말 합니다.

오난에게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고 말 합니다. 그런데 오난이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자기 아들이 되지 않고 형의 아들이 되는 것을 싫어해서 땅에 설정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다말은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그 이름의 뜻이 의인을 번성케 해야 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장자 엘도 그렇게 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악하게 보시고 그를 죽이셨는데 동생 오난도 역시 자기 아들이 안 되고 형의 아들이 되는 것이 싫어서 땅에 설정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말을 통해서 의인의 씨가 번성케 되기를 바라셨지만 엘과 오난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들의 생각대로 하다가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다말을 유다의 며느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다말을 통해서 종려나무와 같이 의인이 번성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유다의 며느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그 일을 하는 것을 게을리 했습니다. 더구나 동생 오난은 자기를 통해서 의인이 번성케 될 수 있는데도 그것이 형의 아들이 된다고 해서 땅에 설정을 했습니다.

 

형입니다

이제 동생과 형이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이라고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형은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동생이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동생들은 형의 자녀가 있게 해 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율법에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난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땅에 설정을 했다는 말씀은 생명에 대해서 전하지 않았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형의 아들 그러니까 하늘의 생명이 있어야 하는데 오난은 그 일을 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를 죽이십니다.

 

생명입니다

창세기를 통해서 그냥 우리 육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반드시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일에 있어서 형 엘은 게을리 했습니다. 아니 생명이 있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 자체가 악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동생 오난은 형의 아들이 되는 것을 싫어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생명이 있는 것을 싫어했음으로 해서 그도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의인이 없습니다.

당연히 다말을 통해서 의인이 태어나야 하는데 유다의 아들들은 그 일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악하게 보시고 두 아들을 다 죽이셨습니다. 유다는 이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들이 죽는 것을 보고 왜 죽는지를 모르고 이제 마지막 남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 아들을 통해서 자기 씨를 남기기 위해서 다말에게 친정에 가 있으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남은 아들입니다

마지막 남은 아들을 다말에게 들여보냈다가 그 아들도 죽으면 자기 씨가 남지 않을 것을 염려해서 유다가 다말에게 친정에 가 있으면 셀라가 장성을 하면 아우의 본분을 행하게 하겠다고 하면서 보냈습니다.

 

창세기38:11절을 보겠습니다. (59)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유다는 셀라마저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고 다말에게 수절하고 기다려라 셀라가 장성하면 아우의 본분을 행하게 할 테니까 친정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유다는 셀라를 다말에게 줄 생각에 없었습니다. 아마 누구라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다말하고 결혼해서 벌써 두 아들을 잃었는데 마지막 남은 3번째 아들을 다말과 결혼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말에게 셀라가 장성해서 크면 너에게 줄 테니 친정에 가서 기다리라고 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 이었습니다 결혼만 시키면 죽는데 어떻게 그 남은 아들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수절해야 합니다.

만약에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셀라가 장성하면 아우의 본분을 행하게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다말은 다른 사람에게 시집도 갈 수 없습니다. 다말이 오래 기다려도 셋째 아들이 장성했음에도 결혼을 안 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셀라가 장성을 했는데도 아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창세기38:12-14절을 보겠습니다. (59)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혹이 다말에게 고하되 네 시부가 자기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유다가 양털을 깎으러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말이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고 유다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들을 안 낳고 말지 굳이 시아버지인 유다를 유혹해서 아들을 낳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습니다.

창세기부터 읽어가다가 이 부분에서 막힙니다. 그래도 성경인데 어떻게 며느리가 자기 남편의 아우인 셀라를 주지 않는다 해서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아들을 낳을 수 있는가 하면서 도저히 이해를 못 합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보면서 다말의 행동에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의 상식입니다

차라리 과부로 사는 것이 낫지 시아버지의 아들을 낳겠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교회에는 반드시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말을 통해서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다말이 낳는 아들은 그냥 이 세상의 아들이 아니라 영의 생명이고 의인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려나무입니다

종려나무에서는 반드시 의인이 번성케 된다고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씨를 통해서 낳기만 하면 의인을 낳는 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하든지 아들을 낳고자 자기를 창녀로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종려나무이기 때문에 유다의 아들이든 유다든 그 씨를 통해서 아들을 낳으면 의인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과부입니다

셀라를 주지 않으면 아들을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셀라가 장성을 했는데도 주지를 않고 있습니다. 만약에 다른 사람에게서 아들을 낳았다가는 유다가 반드시 죽입니다.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셀라를 통해서 아들을 낳는 것인데 시아버지가 셀라를 안 주니까 다말이 자기를 창녀로 꾸며서 유다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다말이 창녀같이 꾸미고 길가에 있다가 유다를 만납니다.

유다는 이 여자가 창녀인줄 알고 동침을 하였습니다. 그 여자와 동침하려 하니까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냐고 묻습니다. 유다가 염소새끼 한 마리를 주겠다고 말 합니다. 염소새끼가 지금 없으니 그것을 가져 올 때 까지 약조 물을 달라고 말 합니다 유다가 그 약조물이 무엇이면 되겠냐고 하니까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끈과 도장과 지팡이를 달라고 요구 합니다 그것을 주고 동침한 후에 돌아가서 친구에게 염소새끼를 보내어 약조 물들을 찾으려 했지만 그 여자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소문에 들리기를 당신의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여 잉태 하였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유다가 다말을 불살라 죽이려고 찾아 갑니다 다말이 죽게 되었을 때 가지고 있던 끈과 도장과 지팡이를 내놓으면서 약조물의 주인으로 잉태 하였다고 말하니까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그 약조물이 자기 것이기 때문에 다말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다말이 살아났습니다.

과부가 잉태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데 다말이 과부로 잉태하고도 살수가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다말이 살아난 이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말이 살아난 것은 가지고 있던 약조 물 때문에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꼭 죽어야 할 사람이지만 증거품이 있었기에 살아 날수가 있었습니다.

 

증거품은 법정에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죄가 있다 없다고 판단 할 때 증거품을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에 대해 뉴스를 보면서 그 사람이 범죄 했다고 모든 사람이 생각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언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또한 증거가 확실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도 살아납니다.

 

영화에서 보면 자기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데도 살인자로 몰려서 잡혀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잡혀갈 때 보면 자기가 사람을 안 죽였다고 아무리 말로 호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전에 어떤 소설을 보면 살인자가 아니지만 누명을 쓰고 사형까지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억울하지만 당하는 사람들은 증거가 없기에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이 사람이 살인자가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만 나오면 그는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증거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다말이 그 증거품으로 인해서 살아났습니다. 오늘 우리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증거만 확실하면 살아 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말은 과부이기 때문에 잉태를 하면 유다가 와서 불에 살라 죽일 수 있지만 증거품이 있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38:17-19절을 보겠습니다. (59)

유다가 가로되 내가 내 때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그것을 줄때까지 약조 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가로되 무슨 약조 물을 네게 주랴 그가 가로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 하였더라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면박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다말의 증거품은 도장과 끈과 지팡이였습니다.

그 증거품으로 인하여 다말은 살아 날수가 있었습니다. 이 증거품들은 하나님께서 그 뜻을 보여주기 위하셔서 기록된 것입니다 다말이 세 가지 증거품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다말과 같이 증거품이 있으면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될 것입니다

 

자기를 창녀로 취급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잉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잉태된 일로 인하여 유다가 자기를 죽이려고 할 때 다말은 자기에게 있는 증거품을 내 보이면서 그것으로 인하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선은 증거품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다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적인 교훈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장을 알아보겠습니다.

도장은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장은 이것이 내 것 이라는 주장을 할 때 찍어 놓는 것입니다 유다가 다말에게 증거품으로 도장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도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도장이 있는 사람은 살아 날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볼 수 없지만 외국은 많이 하고 있습니다.

땅이 넓은 외국에서 소나 양들을 방목을 해서 기를 때 목장에서 인을 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쇠로 도장을 만들어서 그것을 불에 달궈서 소나 말의 궁둥이에 찍으면 그 자리가 털이 나지 않으므로 표시가 됩니다. 방목을 하게 되면 소들이 섞이게 되기 때문에 누구 소유의 소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표시를 하고 있습니다.

 

방목을 합니다.

그것을 하루 이틀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 몇 달을 방목을 하고 심지어는 1년이 넘게 방목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방목하다가 주인들이 자기 목장으로 돌아갈 때 그 화인을 보고 찾아 갑니다 많은 소가 무리 지어서 모여 있으면 소들이 주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자기가 찍어 놓은 화인을 보고 소들을 구분해서 목장으로 끌고 갑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보았습니다.

농장이 얼마나 넓은지 사람이 도저히 그 소들을 다 관리를 할 수 없습니다. 말이나 차로 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헬리콥터로 소를 보고 소 때를 몰아서 농장으로 데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방목을 할 때는 자기네 소라는 표시를 하고 방목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7:1-3절을 보겠습니다. (405)

이 일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사람들은 마치 마지막 때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도 물론 있지만 지금 이때는 절대로 마지막 때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볼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고 자기들의 이성에 따라 단정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리석음에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말에 대한 말씀입니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에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으면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과 7장은 전혀 다른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71절과 2절부터의 말씀은 전혀 다른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71절은 6장의사건 이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2절은 또 보매 라고 시작을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은 장절이 구분이 되어 있지만 원래 성경은 이렇게 장절이 구분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먼저 이해를 해야 합니다. 장절이 있다 보니까 사람들은 그것이 한 장에 있다 보니까 연결이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72절의 또 보매 부터 81절 까지는 연결이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6장에서 71절까지 연결이 되고 그리고 81절로 연결이 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연결이 되는 과정에 전혀 다른 환상을 보고 사도 요한이 또 보매 하면서 새로운 환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바로 이해를 못하고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 전혀 다르게 해석이 될 수 있고 그런 해석으로 인하여 마치 종말에 십사만 사천 명이 인침을 받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천지의 대표적인 해석이기도 하며 기존 정통의 교회도 거의 다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72절부터 8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하시고 난 후부터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인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때까지라고 단정을 지을 수 없고 재림의 때까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인침을 받고 있는 때라고 보면 맞습니다.

 

그리고 9절에 다시 이후에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셨을 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을 하시고 난 후에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정말 바로 해석하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부분은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다말의 말씀이니까 이 정도만 언급을 하겠습니다.

 

마지막 때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때라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는 인침을 받고 말 것도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인침을 받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사만 사천은 싱징적인 숫자로 보시면 됩니다. 이단들이 이런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서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하면서 십사만 사천 명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해석입니다. 십사만 사천 명은 우리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이렇게 인을 치고 있습니다. 구원의 상징적으로 숫자가 인을 맞기 까지 천사들이 성도들을 인을 치고 있다고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라고 도장을 찍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인을 볼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인친 소나 양은 푸른 초장에서 어디를 다니더라도 괜찮습니다.

결국은 그 주인이 와서 찾아갑니다. 소나 양이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주인은 찾아와서 자기소나 양을 찾아 갑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을 그렇게 인을 쳐 놓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영접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인을 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다 이 인을 받을 때 까지 땅과 바다나 나무를 해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성도들에게 인을 쳐서 구원을 이루실 때까지는 종말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도장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 이마에 인이 쳐 있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인을 누가 줍니까?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인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죽어야 하는 죄인입니다

 

다말은 죽어야 합니다.

과부가 잉태를 했으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도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아버지 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이 다말은 간음을 해서 잉태를 했기 때문에 불에 살라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도장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인을 치는 가를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인을 친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우리 성도들을 어떻게 인을 치고 있는 가를 알아야 자기에게 도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을 통해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1:13절을 보겠습니다. (310)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 심을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 심을 받았습니다.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으니까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 심을 받았습니다. 진리의 말씀인 구원의 복음은 성경 전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안에서 구원의 복음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인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본다 해도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지를 않고 있다면 그는 진리가 그 안에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본다고 해서 다 진리를 볼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반드시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셔야 성경에서 진리를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무조건 예수라고 외친다고 해서 다 예수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말하고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문자적으로는 절대로 오직 예수가 안 보입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 그리고 성경말씀을 들으면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경을 그렇게 많이 보고 연구를 했지만 그들이 진리의 말씀을 전혀 몰랐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이스라엘만 그렇습니까?

교회사를 보더라도 수많은 교회들이 정통이라고 주장을 했지만 역시 그 안에는 진리의 말씀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이 없었다는 것을 교회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라고 다를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로마서1:2절을 보겠습니다. (239)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예수님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 하신 것이 복음입니다

그 약속은 아담이 범죄 한 후부터 선지자를 통해서 오실 예수를 말씀하셨으며 또 이제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복음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아들의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말 합니다

 

복음에 대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이 복음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복된 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입술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율법 이 단 한 가지만 보아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셨는데 그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부터 출발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믿었을 때 약속의 성령이 인쳐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성령이 우리 안에 임재를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우리 안에 임재를 해서 역사를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확실해야 합니다.

정말 이 시대는 진리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믿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해서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누가 인치고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도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을 보내 땅 끝 해 돋는데서 부터 구원을 받을 성도들을 인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그렇게 인을 쳐 주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도장도 한번 찍으면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그리고 그 도장 찍은 것을 무효화 할 수 없습니다. 도장을 찍으면 다시 다른 도장이 찍히기 까지는 그 도장이 유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번 찍은 도장을 누구도 다시 찍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수로 도장을 찍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실수로 도장을 찍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을 치면 그 사람은 어느 누구도 다시 다른 도장을 찍을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시대 이 인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실수를 하지 않고 또 한 번 약속을 한 것을 변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도장이 일반 도장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찍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말씀이 여러분 마음속에 확신이 되는 것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믿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는다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인치시므로 믿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주라 시인할 자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믿으려 해도 안 믿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진다는 자체가 기적이고 복 인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은 표적을 쫒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진 그 자체가 말할 수 없이 큰 표적입니다 사실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잘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전까지 다 예수를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을 듣고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고 은혜라는 것을 구원의 복음을 들은 성도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인치시고 보증까지 해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1:22절을 보겠습니다. (287)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생명을 인치시고 보증을 주심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요동치 않게 해 주셨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곁길로 가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보증이라는 것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나 보증이 될 수 없습니다.

거지가 우리를 보증하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그것을 보증이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능력도 안 되는 거지가 자기가 보증을 해 주겠다고 하면 그것이 내 마음에서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보증은 불안 합니다. 보증도 능력이 있는 자가 서 주어야 든든하지 능력도 안 되는 자가 보증을 서면 늘 불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보증을 섭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 안에서 보증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보증이 되고 있다면 그보다 더 든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증이 되어 주시는데도 그것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께서 보증이 되는데도 못 믿겠다면 어느 누가 보증을 서도 안 됩니다.

 

영의 일입니다

이것을 육의 생각으로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의 생각을 하고 있는 성도는 이 보증이 얼마나 든든한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에 있는 사람은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어도 도대체 자기 마음에 감동이 없기 때문에 늘 불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생명에 대해서 확신이 안 서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인가를 해야 그래도 조금 안심이 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보다 더 든든한 것이 없지만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을 쳐 주신 성도는 이렇게 성령이 우리 안에 임재를 해서 보증을 해 주심으로 해서 구원에 대해서 든든하게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끈입니다

다말이 유다에게서 받은 것이 끈입니다 이 끈을 가지고 있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과부입니다

수절을 하고 있어야 하는 과부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가 잉태를 해서 배가 불러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잉태를 해서 배가 불러오게 되면 과부는 당연히 초초해 지고 또 자기 배가 불러오는 것으로 인하여 죽을까봐 불안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죽어야 하는 수절을 하고 있는 과부가 전혀 불안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해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말은 자기가 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배가 불러와도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보였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말에게 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20:37절을 보겠습니다. (1180)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언약의 줄로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백성을 매어 놓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언약의 줄로 우리를 매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으로 들어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말과 같이 꼭 죽어야 할 사람들을 언약의 줄로 매어 놓았기에 살아 날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은 마치 줄로 매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언약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할 때 약지 손가락을 겁니다. 부부가 혼인을 할 때 우리는 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동 지방에서는 옛날에 끈으로 서로의 옷을 묶었습니다. 언약은 이렇게 끈으로 묶는 것과 같이 한번 언약을 하면 절대로 그것을 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생각을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이렇게 언약의 줄로 묶었습니다.

 

누가 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약의 줄로 매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우리를 묶어서 구원을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언약에 묶여 있는 성도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매여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매여져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매어 놓은 언약의 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증거품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구원 시키시겠다는 약속에 줄로 매어져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줄로 우리를 매어 놓으셨습니다.

 

호세아11:4절을 보겠습니다. (1266)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하나님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사랑의 줄로 묶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줄로 우리를 매어놓았다는 것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사랑의 줄로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끈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사랑의 줄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피로 언약을 삼으셨습니다. 성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끈이 있는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끈이 있는 줄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4:3절을 보겠습니다. (31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평안합니다.

우리는 죽어야 하는 죄인이지만 이 끈이 매여져 있으면 평안합니다. 성령이 평안의 줄로 우리를 매고 있습니다. 비록 잉태해서 배가 불러와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죄인은 겉으로 잘 표현이 안 되지만 실제 그 마음은 늘 불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평안의 줄로 매여 있으면 다말과 같을지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평안의 줄로 매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 자는 이렇게 평안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줄로 우리를 매어 놓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평안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서 걱정을 하지 않아도 성도는 평안합니다.

아이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빠가 사랑을 듬뿍 주면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고 있는 아이는 어떤 위험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빠가 노심초사 하고 있지 사랑을 받고 있는 아이는 아빠가 자기를 지켜 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걱정을 하고 않고 아주 평안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을 줄로 매어 놓고 우리가 평안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해 주고 있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의 줄로 매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 나왔어도 절대로 평안하지가 않습니다. 설령 배가 불러와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다 해도 사랑의 줄로 매여 있는 성도는 평안합니다. 우리가 죄를 져서 법에 의하면 반드시 죽어야 하지만 사랑의 줄로 매여 있는 성도는 늘 평안합니다.

 

다말이 걱정했습니까?

다말은 배가 불러와도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배가 불러오면 올수록 더 평안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주 평안하게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 죄가 겉으로 드러난다 할지라도 평안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를 안 져서 평안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죄를 안 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죄를 안 짓는 것으로는 절대로 평안하기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죄를 안 질 수도 없고 죄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언약의 줄로 매여 있는 성도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죄를 안 져서 평안한 것이 아니라 내 죄를 다 지고 가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평안합니다.

 

지팡이를 주었습니다.

 

시편 23:4절을 보겠습니다. (818)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지팡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말이 가지고 있었던 지팡이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하면 안위를 해 주는 지팡이였습니다. 다말은 분명히 잉태가 되어 배가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다말에게 지팡이가 없었다면 다말은 자기 몸과 마음을 평안하게 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팡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약조물로 있는 지팡이가 있었기 때문에 배가 불러오는데도 그것을 전혀 감추려 하지 않고 아직 초기인데도 모든 사람들이 알아보고 그것을 유다에게 전해서 다말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아마도 그에게 지팡이가 없었다면 다말의 배가 불러오고 있는 것을 감추었을 것이고 또 아무도 모르게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심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그것은 다말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릴 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것은 주의 지팡이가 나를 평안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팡이입니다

그것은 나를 보호하는 지팡이입니다. 시편23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의 목자가 지팡이를 가지고 지키고 있기 때문에 다말은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팡이는 다말에게 있어 목자가 자기를 지켜 주는 그런 지팡이였다는 말씀입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목자가 지켜 주고 있다면 다말은 전혀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법입니다

그 법으로 하면 분명히 다말은 불살라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있는 지팡이가 있기 때문에 불살라 죽어야 하는 그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데도 전혀 걱정을 하지 않고 몸과 마음이 안심을 하고 있고 오히려 자기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그대로 보이고 있습니다.

 

이 지팡이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비록 죄인으로서 율법의 요구에 따르면 분명히 죽어야 하지만 내 손에 지팡이가 있다면 걱정을 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내가 율법의 예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팡이가 내 손에 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평안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자기 죄가 보이기 시작을 하면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말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임신 초기인데도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것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지팡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릴 지라도 나를 안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팡이는 이렇게 우리를 안위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왜 두려워합니까?

인생은 반드시 한번 죽는 것이 정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죽음에 대해서 늘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릴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목자입니다

양은 목자가 지팡이를 가지고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목자는 이 세상을 이긴 목자입니다 사단과의 전쟁에서 이긴 목자가 가지고 있는 지팡입니다 나를 안위해 주고 있는 이 지팡이가 있다면 불살라 죽어야 하는 죄가 드러나도 몸과 마음이 평안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안위의 지팡입니다.

다말과 같이 우리에게도 이 안위의 지팡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는 설령 자기가 율법의 예로는 분명히 죽어야 하지만 몸과 마음이 평안할 수 있다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안위가 여러분에게 반드시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6:18-20절을 보겠습니다. (35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다말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는 너무도 큰 안위를 받게 하는 지팡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지팡이의 주인인 우리의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휘장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 휘장안으로 들어가신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튼튼하고 견고하느냐면 배가 불러오는 상태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나의 목자입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의 주인인 나의 목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께서 우리의 영원한 대제장이 되셔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말은 유다의 지팡이를 가지고 안위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심으로 우리가 안위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인들을 보면 자기에게서 죄가 조금이라고 보이면 아주 불안해하고 있고 그것을 울며불며 밤을 새워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안 질 수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비록 진토와 같은 인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얼마나 튼튼하고 견고한 가를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말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이고 또 내가 이 시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그것입니다.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의지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지를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말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는 다말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지팡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훔 1:7절을 보겠습니다. (1299)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뢰하는 자들을 아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말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는 바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지팡이였다는 말씀입니다 다말이 배가 불러 환난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뢰하는 줄 아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팡이가 있어야 합니다.

다말이 가지고 있던 그 지팡이가 지금 우리의 마음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지팡이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기 때문에 환난 날에 그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습니다. 아니 지팡이를 증거물로 가지고 있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생은 환난이 옵니다.

어느 누구도 이 환난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늘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망의 골짜기를 다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의 지팡이가 있는 성도는 안위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지팡이가 산성이 되어 튼튼하고 견고하게 나를 지켜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26:3절을 보겠습니다. (996)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평강으로 지켜 주십니다.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를 의뢰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냥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말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는 이와 같이 자기를 의뢰하는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으로 지켜 주시고 있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있어야 합니다.

마치 힘이 없는 사람이 그 지팡이를 의지해서 걷고 있는 것과 같이 주를 의뢰함이 그래야 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 지팡이를 가지고 있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를 의뢰하기 보다는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율법의 의를 보면서 스스로 의뢰를 삼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애굽은 상한 갈대 지팡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것을 의지해도 그것은 상한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애굽과 같은 강한 나라도 상한 지팡이가 되어서 그를 의뢰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직 주의 지팡이만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말은 종려나무입니다

그를 통해서 반드시 의의 자손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의 장자와 차자는 그것을 싫어해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함으로 해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영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말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반드시 우리를 통해서 의의 자손이 나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육은 우리의 영입니다

다말은 실제로 의의 자손을 낳기 위해서 자기를 창녀로 취급을 하면서 까지 유다와 관계를 가져 베레스와 세라라는 의의 자손을 낳았습니다. 그냥 아들을 낳고 안 낳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아들을 안 나면 어떻습니까?

 

아들을 안 난다고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말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그것은 실제 다말이 낳은 베레스와 세라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의의 자손이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종려나무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의의 자손이 탄생이 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낳아야 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를 창녀와 같이 취급을 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신약에 보면 자기를 그와 같이 취급을 해서 구원을 받은 여자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5:27절을 보겠습니다. (26)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가나안 여자입니다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해도 주님께서 들은 척을 하시지 않으니까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하니까 이 여자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대답을 합니다. 이 대답을 듣고 주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 하시고 그 딸의 병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종려나무입니다

우리는 의의 자손이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냥 탄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다말과 같이 자기 안에 의의 자손이 탄생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창녀의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라도 우리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말은 나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다말은 자기 안에 유다의 씨로 말미암아 의의 자손을 탄생을 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창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을 잉태를 하고 자기가 살기 위해서 유다로부터 증거품을 요구 했습니다. 그 증거품이 끈과 도장과 지팡이라고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증거품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도장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지팡이가 있어야 합니다. 다말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과부였지만 그 증거품으로 인하여 살았습니다. 다말은 자기 안에 의의 생명을 잉태를 하고 그 생명이 의의 생명이라는 증거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새 생명이 의에 생명이라는 증거품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어야 하고 또 성령의 인치심이 있어야 합니다. 또 내가 주를 의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품이 있는 성도는 반드시 자기 안에 의의 생명을 잉태해서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증거품을 모두 가지고 있는 줄 믿습니다.

이 증거품을 자기고 있는 사람은 성령의 감동으로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고 복음을 듣고 믿기 때문에 족보에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증거품이 있어야 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말은 우리의 모형과 교회의 모형을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말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 안에 의의 생명이 탄생이 되기를 바라는 성도는 자기를 창녀와 같이 취급을 하면서도 그 은혜를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입은 성도를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구원해 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셔서 천국에서 영원히 축복을 누리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은혜가 되어 넘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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