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가상칠언
마태복음27:45-46절을 보겠습니다. (신 51쪽)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십자가
인류에 있어 전환점이 되는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 십자가가 의미하고 있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실제로는 십자가에 반하는 일들을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은 미디어가 발달을 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도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지고 가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도저히 받아들여지기가 않습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인류는 이 십자가의 사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면 아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수 없었다면 아담이 범죄를 했을 때 이미 인류는 그것으로 끝이 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만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하셨기 때문에 아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실 것을 아셨기 때문에 아담에 범죄를 했을 때 그를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 마다 십자가는 점점 더 하늘을 찌를 듯이 더 높이 세워지고 있고 한국의 밤하늘을 보면 시뻘겋게 수를 놓고 있지만 실제 십자가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십자가는 점점 많아지고 있지만 십자가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그런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슴이 벅차야 합니다.
보이는 십자가를 보면서 가슴이 벅찬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가슴이 벅차고 그 은혜에 찬송이 나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십자가에 대해서 말로는 너무 잘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그저 표적이 되고 있을 뿐입니다
부적입니다
교회에서 너무 외적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가지고 치장을 한다는 것은 부적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실제 여자들이 목걸이를 십자가 형상으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거의 부적과 같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자기 목에 걸고 있음으로 해서 스스로 안위를 삼으려고 하는 자체가 부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영의 일입니다
늘 제가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의 일에 대해서 믿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어떤 모양이나 행위로 나타내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교회 마다 십자가로 치장을 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자기들이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행위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지에 가까운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눈에 보이는 십자가가 있으면 어떻고 십자가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종교적 표식에 불과합니다. 마치 절에서 만(卍)자를 사용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 만자의 의미가 행복, 행운, 번영의 의미를 가지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걸고 또 십자가를 자기 몸에 지니고 다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 그 마음에서는 그런 샤머니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상입니다
십자가도 형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우상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가 육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이 십자가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 장로교가 태동했을 때는 이 십자가를 만들지 않았고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32:4절을 보겠습니다. (구 131쪽)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성경을 왜 봅니까?
성경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잘못 행했던 것을 우리가 경계로 삼고 그런 일을 되풀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왜 보는지 성경에 무슨 말씀이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있는 말씀을 너무 쉽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사십일을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가 안 내려오니까 이제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냈던 신을 만들자고 합니다. 지금 무엇을 만들자고 한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만들자고 해서 만든 것입니다
다른 신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성경에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만들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자기들의 생각대로 만들어서 형상으로 만든 것이 금송아지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 했습니까?
그들은 모세가 안 내려오는 것을 보고 모세의 신변에 무슨 이상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이제까지 모세의 인도를 받다가 막연해 지니까 자기들끼리 상의를 해서 애굽 땅에서 자기들을 인도했던 신을 만들어서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것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이 성경을 보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이 송아지 형상을 만든 이스라엘이 어리석어서 아니 모세가 죽은 줄 알고 그렇게 형상을 만들었다고 생각을 하면서 참 이스라엘을 보면 그 민족이 참을성이 없어 기다리는 것도 못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또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려고 했다고 비난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이 설교를 듣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행한 것을 보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이스라엘과 똑같이 십자가를 만들어서 교회에 내걸고 있고 자기 몸에 지니고 다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것은 우상이고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것은 믿음이라는 아주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십자가도 형상입니다
십계명에서 그렇고 또 율법에도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십자가의 형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은 것과 그 십자가의 형상과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생각부터 버리시기 바랍니다.
천주교를 무엇을 정죄를 합니까?
그들이 마리아 상을 만들어 놓은 것을 가지고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십자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마치 교회의 표시가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모르고 십자가의 형상을 만들어 가지고 있고 십자가의 형상을 보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지 말라고 한 형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형상입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어디에 십자가의 형상을 만들어서 교회에 걸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 없으면 그것은 가능한 안 하는 것이 유익입니다. 아니 자기 생명을 위해서는 성경에 없는 것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만들어서 걸고 지니고 다니라고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오늘은 가상칠언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에 대해서 아주 조금이나마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십자가의 형상을 만들지도 마시고 또 십자가를 바라보고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행위들이 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7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을 가상 칠언이라고 말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운명하시기 전에 몇 가지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물론 한마디 마다 분명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전체 가상 칠언에 대해 개략적인 것을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사실 이 말씀 하나하나가 다 한편의 설교가 될 수 있지만 오늘은 전체 가상칠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하셨던 기도입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6절부터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셨던 기도가 기록되었습니다. 힘쓰고 애써 기도하시니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를 하셨는데 그 기도가 응답이 안 되었습니다
간절한 기도가 응답이 안 되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기도가 응답이 안 되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므로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야 되겠습니까? 첫 번째 하신 말씀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뜻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3번씩이나 핏 땀을 흘리시며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내 잔을 내게서 옮겨지게 해 주시옵소서 그것은 예수님의 뜻 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왜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십니까? 라는 말씀입니다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은 예수님을 완전히 버리셨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 완전히 외면하시고 버리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았다면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가 와서 예수님을 만지지도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았다면 채찍으로 때릴 때 치지 못 하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그냥 두셨습니다.
왜? 예수님을 버리셨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버리셨습니다.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도 안 들어 주시고 채찍에 맞을 때 도와주시지도 않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을 때 까지 완전히 버리셨습니다. 버리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버리셔야 합니다.
안 버리시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인생들의 죄를 지고 가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셔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가를 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자기 독생자를 버리셔야 우리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기도가 완전히 외면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기도의 외면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외면을 하실 때는 분명히 뜻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시대는 너무 기도 응답 받는 것을 기뻐하고 있는데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도 응답을 너무 기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기도 응답을 받은 것을 보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구원의 사인을 보내 주신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 응답이 없는 그런 처절한 경험을 해 본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 역시 내 기도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당시에는 기도 응답이 없는 것을 보고 너무 안타깝고 가슴아파하고 또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사실 기도 응답이 없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또한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기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버림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상상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 세상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생들이라 보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실 것을 예언을 해 주셨습니다.
시편22:1절을 보겠습니다. (구 817쪽)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다윗의 시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달리실 때 어떻게 버림을 당할까를 예언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왕입니다 그리고 그 시의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또 이 말씀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는 말씀입니다
버리십니다.
성도는 이 세상 사람들이 보았을 때 아니 종교인들이 보았을 때 버림을 받은 자 같이 보인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가 너무 풍성해 지다 보니까 버림을 당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신 것과 같이 우리 역시 때로는 버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만 버리셨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세례 요한도 버리셨고 또 사도들도 대부분이 버림을 당해서 순교를 당했고 또 초대 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버림을 받아 사자 밥이 되고 또 십자가에서 화형을 당하는 끔찍한 일을 당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아니 믿음이 없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분명히 버림을 받은 것 같이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셨습니다.
예수 한 사람을 버림으로 해서 우리 인류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려졌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버림을 받아야 하는 것을 대신 받으시고 인류를 구원하는 길을 열어주시고 예수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위해서라고 고린도후서 5장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 왜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의 축복이 아닌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감당 하면서 다른 사람을 복음 안으로 인도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권리를 다 쓰지 않고 복음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알고 그 은혜 안으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고린도후서4:7절을 보겠습니다. (신 287쪽)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과 같은 우리에게 보배를 넣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보배 귀한 보배를 우리 질그릇에 담기 위해서 예수님을 완전히 버리셨습니다. 이 귀한 보배는 우리가 일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첫 마디가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육체를 버리실 줄 아셨습니다. 그 버리심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배를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보배를 넣어 주기 위해서 생명을 넣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셨다고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2언) 누가복음 23:34절을 보겠습니다. (신 138쪽)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두 번째 하신 말씀입니다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 하나이다
이 세상 죄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해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물론 십자가에 못을 박는 이스라엘에게도 하시는 말씀이지만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릅니다.
사실 우리도 복음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내가 죄인인지 아니면 의인이지를 몰랐습니다. 심지어는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 악에 더욱 열심을 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내어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예수가 누구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유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어도 아직 행위에 빠져 믿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 역시 모르기 때문에 종교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해서 그 십자가를 안다고 해서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아는 것도 내가 지혜가 있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아직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때로는 진리에 대해서 대적을 할지라도 그들이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고 더욱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서 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7:60절을 보겠습니다. (신 199쪽)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 집사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똑 같은 말을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에게 남겼습니다. 스데반뿐만 아니라 그 후에 죽임을 당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그와 같은 죽음을 당 했습니다 순교 자리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그와 같은 기도를 드릴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르고 그렇게 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핍박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안다면 핍박을 하겠습니까?
두려워서라도 못 할 것입니다
몰라서 핍박을 하니까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를 안다면 핍박 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하지도 않습니다. 이름만 안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속사가 믿어지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도 핍박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이 핍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지만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믿음이 있는 성도들을 더욱 핍박을 하고 있습니다.
정죄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만약에 알고 그렇게 한다면 정죄를 해도 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성도를 핍박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이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 같이 교회도 역시 성도들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목사라도 역시 모르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독교가 공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급속하게 타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중세 시대까지 교회 안에서 종교 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마녀 사냥과 같은 재판이 이루어지면서 성도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했습니까? 알고 한 것이 아니라 큰 음녀에 미혹이 되어서 성도들을 죽였습니다.
모르면 그렇게 합니다.
알면 두려워서라도 못 합니다. 그러나 모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그랬던 것과 같이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서 대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모르면 그렇게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을 하고 무엇이든지 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성도는 어떤 핍박이 와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르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1:13절을 보겠습니다. (신 337쪽)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러나 그도 역시 은혜를 얻지 못하고 있었을 때는 스데반이 죽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했고 또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열심을 냈던 사람이었습니다. 영의 비밀을 모르면 사람은 아무리 지적으로 똑똑해서 역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알지 못하고 그들을 핍박 했습니다
스데반의 기도가 응답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스데반을 죽인 후에 상당한 고민이 생겼을 것입니다 지금 까지 어떤 사람도 죽임을 당하면서 죽이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죽임을 당하게 되면 죽이는 사람을 저주 하면서 죽어가지 어떤 사람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환하게 빛이 났습니다. 어떻게 죽임을 당하면서 저렇게 죽을 수가 있을까 만약 자기 자신이 그와 같은 죽임을 당한다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기록이 안 되어 있지만 사도 바울이 스데반이 죽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메섹으로 가면서도 아마 그와 같은 고민을 하면서 갔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그는 기도를 하면서 갔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들이 믿는 예수가 정말 그리스도입니까? 정말 그리스도라면 나에게도 가르쳐 달라고 하면서 아마도 그런 심정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갔을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고 가고는 있었지만 사도 바울도 스데반의 순교를 생각하면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갈등을 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한편으로는 가지고도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 모두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서 그 마음에 분명히 감동을 받고 그가 정말 그리스도가 아닐까 라는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보고 저들이 알지 못하고 하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보면서 그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이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두 마음이 요동하면서 갔을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죽여야 히브리인들이 산다는 마음과 한쪽으로는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서 그 얼굴과 그 감동을 보면서 그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가 아닐까 그는 속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을 만큼 하나님을 잘 믿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저들을 죽여야 합니까 아니면 나도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이런 마음의 갈등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 하셨습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서 그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죄를 용서하시고 예수를 믿도록 하셨습니다.
알지 못하면 그렇게 합니다.
마음에 갈등을 느끼면서도 자기가 알고 있는 그대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왜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하는 가 너무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성경을 모르면 이스라엘과 같이 사도 바울이 이전에 그리스도인을 핍박을 했던 것과 같이 이 시대도 교회 안에서 그렇게 행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망합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 도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본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성경을 보았지만 몰랐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방에 복음이 전파된 후에 교회가 수도 없이 많이 생겨났지만 실제 그들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을 죽였는가를 교회사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육적으로 죽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고 영적으로 살인을 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육적으로 죽이는 것은 낫겠지만 영적으로 살인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훼방자입니다
핍박자입니다 포행자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알지 못하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은혜를 입지 못하고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고 그저 사람의 이성에 따라 행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똑똑하면 뭐 합니까?
세상에서 지적으로 뛰어 나면 뭐 합니까? 그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더욱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하고 지적인 수준이 높다 해도 영의 비밀을 모르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하나님의 비밀을 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모르면 사람의 이성에 따라 행하게 되어 있고 지금 이 시대도 그렇게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구하시기 바랍니다.
늘 깨어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마치 자기가 다 아는 것으로 착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또 지금까지 있었던 교회가 수많은 사람들을 종교 재판이라고 하면서 죽였습니다. 그 종교 재판에 죽은 사람이 적어도 수천만 명이 되는 것을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하지만 역시 영적으로 살인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3언) 누가복음 23:43절을 보겠습니다. (신 139쪽)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세 번째는 옆에 있던 강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있던 강도에게 구원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은 후에 이제 천국 문이 열려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도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낙원을 천국에 들어가는 대기소라고 말을 하고 있고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은 마치 죽으면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을 말씀을 하는 것이지 천국에 들어가는 대기소도 아니고 또 강도가 오늘 죽어서 바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날 낙원에 들어가셨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 죽어서 무덤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완전히 죽은 상태로 무덤 속에 있었습니다. 부활하기 전 까지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육체를 입고 오신 그대로 죽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가시지도 않았고 그 육체가 무덤에 그대로 죽어 있는 상태로 있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이 말씀은 강도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언제 낙원에 갑니까? 언제 천국에 가는 것입니까? 말씀을 받는 순간 천국에 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천국에 가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즉석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은 즉각적인 것입니다 옆에 강도가 믿어서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가 아니라 영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죽은 후에는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은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강도는 분명히 오늘 낙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셔서 하늘에 함께 앉히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앉아 있지는 않지만 구원을 얻는 그것은 하늘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누가복음7:50절을 보겠습니다. (신 103쪽)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언제 구원하셨습니까?
나중에 입니까? 아니면 죽을 때 입니까? 아닙니다. 그 시간에 이루어 졌습니다. 믿는 그 시간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으니” 믿음과 구원의 역사는 시간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믿는 그 시간에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는 순간 즉시 구원받고 믿는 순간 즉시 하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낙원에 있습니다.
낙원에 있는 것입니다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은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즉시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내 안에 믿음이 있으면 그때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날 죽으면 잠자는 자가 되고 또 시간이 정지된 상태에서 마치 한 잠을 자고 일어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접해 주시면 바로 그날 낙원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낳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천국에서 사는 생명이기 때문에 오늘 낙원에 있는 것입니다 육의 상식적인 생각을 가지고는 영의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육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그러나 영은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영의 비밀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강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안에 하나님께 로서 난 생명이 탄생이 되었습니다. 그 생명은 잠자고 있다가 바로 오늘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에서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것을 인생의 시간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에게는 강도가 죽은 지가 벌써 이천 년이 지났지만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육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지만 하나님의 시간이 영원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천 년이라는 것은 겨우 하루와 같이 점에 불과 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을 모르고 또 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설령 이 강도가 천국에 갔다 해도 그것은 하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천국은 우리 인생의 생각으로는 상상도 안 된다는 것을 먼저 이해를 하고 이런 말씀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부활은 우리 육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정말로 신령한 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천국은 해와 달이 없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해와 달이 있어야 시간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고 어린양이 등이 된다고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지구에서 보는 우주와 우주에서 보는 지구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이런 말씀들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입니다
인생의 이성적인 오늘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이 년도가 오늘이 됩니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그것은 어제가 됩니다. 그리고 또 오늘 내일이라고 했던 날이 오늘이 됩니다. 또 그 오늘이 지나고 나면 그것 역시 과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지구에서 보고 있는 시간이지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는 구원의 시간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절기를 배웠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절기를 매년 그 날짜에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절기는 매년 지키는 절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이루시는 시간표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유월절이 지나갔고 이제 맥추절과 나팔절을 보내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의 시간에서는 그것을 매년 지켜야 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밤이 없습니다.
그럼 내일이라는 날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오늘 내일이라고 하는 것은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고 하는 것을 가지고 오늘 내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등이 되시고 있다면 절대로 밤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21:25절을 보겠습니다. (신 422쪽)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거기는 밤이 없습니다.
밤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일 이라는 날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지구라는 시간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밤이 없기 때문에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는 것입니다
다 오늘입니다
영의 시간에서는 다 오늘입니다 그것은 천국에는 밤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밤이 없기 때문에 다 오늘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육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게는 과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구원을 이루시고 있습니다. 아담을 구원한 것도 오늘이고 아브라함을 구원한 것도 오늘이고 또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구원한 것도 오늘이고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를 구원한 것 역시 오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가 잠을 잔 후에 구원을 받는 것 역시 오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언제 천국에 갑니까?
오늘 갔습니다. 인생의 시간에서는 오늘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오늘 갔습니다. 한편 강도가 오늘 주님과 함께 낙원에 간 것같이 우리도 역시 오늘 천국에 들어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시간을 모르면 구원에 대해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육의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천국에 가 있습니다. 내가 가 있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영혼이 천국에 간다는 말씀입니다 내 안에 새롭게 탄생이 된 영이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바로 하나님께 로서 왔습니다. 그 영이 하나님께 로서 와서 다시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에 신령한 몸을 입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 영의 비밀입니다
이 영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아니 죽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에 이런 영의 비밀을 믿지 못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영이 강도 안에 탄생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이 성립이 됩니다. 이미 강도는 하나님께 로서 난 자가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8:48절을 보겠습니다. (신 105쪽)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언제든지 즉시 네 구원이 이루어 졌다고 말씀합니다.
만약 그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죽은 후에 오리라는 말씀을 반드시 하셨을 것입니다 이 여자에게 죽은 후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해야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구원이 이루어 졌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평안히 가면 됩니다.
이제 이 여자가 어떻게 살든지 이미 구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이 여자가 행위가 좋냐 나쁘냐는 문제가 안 됩니다. 만약에 이 구원이 죽은 후에 이루어진다면 절대로 평안히 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직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평안할 수 있습니까?
부정한 여인입니다
율법에 이 여인을 부정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정하다는 것은 구원을 못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이 없다면 어떻게 이 여인이 평안하게 갈 수 있겠습니까? 죽어야 하는 죄인입니다. 그 죄인이 구원이 없이 평안하게 갈 수 있습니까?
물론 육체적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평안히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이 여인이 고침을 받은 것은 부정한 여인이 깨끗해 졌다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는 부정한 여인이 깨끗함을 입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깨끗함을 입었기 때문에 이 여인이 평안히 갈 수 있었습니다.
구원은 미래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이미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이 말씀은 우리 인생의 지식으로 실제를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비밀로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이미 천국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강도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가 아닙니다.
영이 그렇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이 이렇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지 모르면 이런 말씀들이 걸림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밤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 오늘 천국에 들어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제4언) 누가복음 23:46절을 보겠습니다. (신 139쪽)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네 번째 하신 말씀입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기도를 드렸는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기도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와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이것은 아버지를 신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신뢰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고 여호와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너희 행사를 주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우리 영혼도 하나님 손에 달린 것입니다 내가 잘하면 구원을 받고 못하면 버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자기 영혼을 부탁을 했습니다.
에베소서 1: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11쪽)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능력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능력을 믿고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부탁하면서 운명을 하셨습니다. 사실 능력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것이 쉽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조건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서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그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부탁할 수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부탁하지 못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부탁할 때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부탁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 갈 때도 우리가 어떤 부탁을 할 때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부탁을 하는 것이지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 부탁을 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거지에게 내가 필요한 돈을 부탁할 수 없습니다. 또한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부탁할 수 없습니다. 설령 내가 부탁을 한다 해도 그가 들어 주지를 않습니다. 반드시 나를 사랑하고 또 그 능력이 있어야 부탁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그가 아무리 돈이 많이 있다 해도 부탁을 할 수 없습니다.
나를 사랑해도 안 됩니다
그에게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나를 사랑해도 부탁을 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가 아무리 자녀를 사랑해도 그 부모의 능력이 안 되면 부탁을 해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부모가 능력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 자녀도 부모에게 부탁을 하지 않습니다. 부탁이라는 것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생명입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부탁을 들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부탁을 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죽는다 해도 우리 역시 하나님께 우리 영혼을 부탁을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실 것을 믿을 수 있게 보여 주셨습니다.
안전합니다.
하나님께 부탁을 하면 확실하게 안전합니다. 비록 육체는 사망을 당하더라도 그 영혼만은 반드시 다시 살리시는 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안전하다는 것을 믿어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부탁을 하는 모든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과 같이 살려 주시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입니다
예수께서 그 영혼을 부탁해서 살아 나셨다면 우리도 역시 부탁을 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한 몸이라는 것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을 믿는 그 믿음으로 우리 영혼도 살아납니다.
하나입니다
예수와 나는 하나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말로는 하나라고 하지만 실제 그들은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와 내가 하나라면 예수께서 이미 부탁을 해서 다시 살아나셨으면 나 역시도 살아난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부탁할 수 있습니다.
제5언) 요한복음 19:26-27절을 보겠습니다. (신 182쪽)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다섯 번째는 요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옆에 있는 어머니 보고 아들이니다 말씀하시고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독생자 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네 어머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있으면 그들에게 말을 해야 하는데 요한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모든 사람들이 연구해야 할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시면서 자기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응낙하고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처럼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시는 순간까지도 부모 공경을 잊지 않으시고 그 부모를 요한에게 부탁했습니다.
어머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야 할 것은 교회 안에서 나이 드신 분들을 모두 어머니 같이 섬겨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 부모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심에 따라 자기 부모 같이 섬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자들 가운데 나이 드신 분들은 우리의 어머니요 우리의 부모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노인을 섬기고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진실 된 모습이기도 합니다.
디모데전서5: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40쪽)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성경은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인들은 늙은이들을 자기 부모 같이 섬겨야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쿼바디스를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의 박해를 피하여 도망가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로마로 가서 순교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모두가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당시를 기록한 역사책도 있고 외경도 있고 위경도 있습니다.
그런 책들 가운데는 인물들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한 책들이 있습니다. 쿼바디스라는 이 말도 성경에는 없지만 그런 책의 기록을 인용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역사서를 보면 성경 외에도 기록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과 반대되는 역사는 받아 들일수가 없습니다. 성경과 일치하는 역사는 성경을 반대하지 않는 역사는 우리가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로마를 벗어나다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다시 돌아와서 죽은 것은 사실 그대로입니다 이것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런 것 가운데 마리아에 대해서 기록된 책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성경이 아니라 역사라는 것만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고 말씀 하시고 어머니에게도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 처음에는 그 형제들도 그를 믿지 않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믿지 않으니까 내 말을 듣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내 어머니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 형제들이 믿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야고보서가 바로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분명히 성경에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친 아들이 있었다면 요한이 아무리 예수님이 제자라 해도 마리아를 데려간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 아들들이 반대를 하면 할 수 없는 그 일을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 하시고 요한은 자기 집에서 마리아를 모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한 것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 볼 때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친 아들이 있다면 아무리 그의 제자라 해도 그에게 네 어머니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그렇게 했다 해도 아들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마리아를 네 어머니라고 하셨는가를 정확하게는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냥 받아들여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시어머니도 부모입니다 자기를 낳은 부모는 아니지만 분명 부모입니다 공경해야 합니다. 계명을 보면 첫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첫 계명은 영적 부모인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말씀이고 두 번째 계명의 첫 계명은 세상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는 생명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물론 성도는 이 세상의 생명보다 하늘의 생명에 대해서 더 중요하게 생각을 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이 육체의 생명을 주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과연 하늘의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어떻게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성도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육신적으로는 부모입니다
이제 그 부모가 약해서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모를 모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라고 믿고 있다면 그것이 누구의 부모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나이가 들어서 의지할 곳이 없는 부모를 정말로 잘 모셔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6언) 요한복음 19:28절을 보겠습니다. (신 182쪽)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십니다.
예수님은 신 포도주 맛을 보시고 마시지 않았습니다. 신 포도주는 마취제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고통을 덜 받으면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안 드셨습니다. 성경으로 응하게 하시려고 신 포도주를 받지 않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운명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하다 보니까 육체적으로 너무도 목마르셨던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 가는 순간에는 너무 목이 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낮에는 더위가 엄청 심해 그냥 살아 있는 사람도 견디기 힘이 드는데 십자가에서 죽어 가면 얼마나 목이 마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목이 마르셨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스스로 운명하시기 위해서 목이 말랐던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말라야 하는 목을 예수님께서 대신 목이 마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죽음에 이르기 까지 목이 마르셨던 것은 우리로 하여금 목이 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계시록7:16절을 보겠습니다. (신 406쪽)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다시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목말랐습니다. 내게 물 좀 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연인에게 네가 주는 물은 먹어도 목마르려니와 내가 네게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은 목마른 물과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과 바꾸었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목마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주시기 위함 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이것을 성령을 가르쳐 하신 말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목이 마릅니다.
구원에 대해서 목이 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을 사모하고 사는 성도는 어떻게 하면 천국을 얻을 수 있을까 늘 성경을 보면서 목이 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난 후에 천국에 올라가시고 우리에게 보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하시려고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셔서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전혀 목말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지도 않으면서 전혀 목말라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에 대해서 목말라 하고 있는 그들이 영혼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목말라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을 구하지도 않고 마치 자기들이 성령을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목이 말라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목이 말라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보혜사가 오셔서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목이 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목이 말라서 스스로 운명을 하셨습니다.
모든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스스로 죽으시는 일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시기 위해서이고 그럼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지금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성도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목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이 시대 목이 말라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단에 갑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구원에 대해서 목이 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단이라고 정죄를 하고 있는데도 그들이 가는 이유는 거기에는 잘못되었을지라도 구원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은 물을 찾아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면 절대로 목이 마르지 않을 텐데도 사람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단에 쉽게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이 구원의 확신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이 확신이 없는 사람은 지금 이 시간에도 물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재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물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있는 사람들이 전혀 목말라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면서 목말라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천국을 보고 있습니다.
가나안을 보고 있는 갈렙은 절대로 목말라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이스라엘과 같이 목이 말랐지만 가나안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육체에 목이 마른 것은 견딜 수 있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목전에 있는데 왜 목이 마릅니까?
기업입니다
그 기업을 얻은 성도는 절대로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믿고 있는 성도는 절대로 목이 마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목이 말라 물을 찾고 있는 것이지 사실 기업을 얻은 성도는 목이 마르지 않습니다.
제7언) 요한복음 19:30절을 보겠습니다. (신 182쪽)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최후에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어야 할 구속사를 다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창세기부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루실 일들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이제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너무 모르고 있고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에 있어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루어야 하는 것이 너무도 많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면서 율법의 행위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6:23절을 보겠습니다. (신 247쪽)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영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스스로 운명을 하심으로 해서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영생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이 세상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단번 속죄를 이루심으로 이루셨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내 영생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을 하시기 직전에 가장 마지막에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영생에 대해서 믿어야 합니다. 만약 영생이 아직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영생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하나님 앞에 가려면 반드시 율법이 있는 법궤를 지나가야 합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아니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한 사람은 율법이 피를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니까 그저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것을 가지고 다 이룬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속죄를 했다는 것은 다른 말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것을 받아 들어야 합니다.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의인으로서 우리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지 만약에 예수님께서 죄인이었다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가 없습니다.
그 말씀은 다시 말해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죄가 없는 의인이 우리 죄인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제물이 되신 것이지 만약에 예수님께서 죄가 있다면 절대로 우리 죄인을 위해 속죄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흠 없는 어린양을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흠이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해도 그에게 죄가 있다면 절대로 우리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아담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다고 요한일서 3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62쪽)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흠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흠이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도 운명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알고는 있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의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면 우리는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이 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안 해도 이미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누가 다 이루었습니까? 예수님께서 구원에 대해서 다 이루었습니다. 그럼 예수님과 내가 한 몸이라고 믿는다면 나 역시도 다 이루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다 이룬 것은 내가 다 이룬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에 아직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그것을 이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것을 다 이루시고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신 그 은혜를 세상에 전하는 것이 성도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어떻게 하든지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정말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슬기롭게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성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입니다
복음이 있는 성도가 가장 경계를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영지주의입니다. 율법주의 그리고 은사주의와 내 자신이 처절하게 싸워서 이겼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단은 우리 성도가 가진 복음을 영지주의로 빠지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을 하시기 전에 십자가에서 말씀을 한 가상 칠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운명을 하셨습니다. 성도는 그 은혜에 참여를 한 사람입니다 이 십자가를 바로 알고 또 그 은혜에 참여를 해서 이 세상에서 영생을 얻은 자로서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아 구원을 받아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천국에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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