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사람의 본분
전도서 12:13-14절을 보겠습니다. (구 960쪽)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본분
본래의 직분에 따른 책임이나 의무를 말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책임과 의무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본분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고 이 본분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의 본분
아마도 다 각자의 생각이 다를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 아프리카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생각하는 사람의 본분과 뉴욕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생각하는 사람의 본분과 또 우리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의 본분은 다 다릅니다. 아니 우리나라 안에서도 불교인과 유교인과 기독교인과 천주교인이 생각하는 사람의 본분은 또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 해도 그렇습니다.
저 시골에 있는 기독교인과 대도시의 대형교회에 있는 기독교인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의 본분은 다 다르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각자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본분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입장에서 생각을 합니다.
누구는 할 수 있는 것을 누구는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이 본분을 모른다고 말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생각하는 사람의 본분은 각자의 지적인 수준과 또 한경과 종교 등을 통해서 다르게 생각이 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본분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은 그렇게 삽니다.
누구나 자기의 본분을 알고 그것을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본분을 행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각자의 처지와 형편에 맞게 사람의 본분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본분 때문에 율법주의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들어가면 사람들은 성도로서의 본분을 생각하게 되어 있고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연결이 되느냐면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하는 것들을 먼저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배운 것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자기가 사람의 본분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의무를 행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당연히 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에 들어오기 전부터 의무를 행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 안에 들어오면 자기가 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의무가 무엇입니까?
바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면 교인들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배우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는 것을 의무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일을 지키는데 있어서 아주 열심을 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인들의 의무가 되다 보니까 당연히 교인으로서 지켜야 하는 본분이 되고 있습니다.
다 그렇습니다.
일단 행동으로 자기의 의무를 다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 살아왔기 때문에 당연히 교회 안에서도 자기들의 본분이 그렇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아주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의무와 본분을 지키기 위해서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생각하는 사람의 본분입니다
그것이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자기의 본분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저 이 세상의 지식을 따라 사람의 본분을 생각하고 교회 안에 들어와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또 그런 자기들의 모습을 보고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분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람의 본분이라고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는 단 한 구절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자기들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의 본분에 대해서 바로 가르쳐 주고 있는 사람이 없다 보니까 그저 이 세상에서 행하던 그대로 사람의 본분을 하면서 살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모든 말씀을 다 하고 나서 그 결론이 무엇이냐면 사람의 본분이 이것이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도 자기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신명기 17:18-19절을 보겠습니다. (구 289쪽)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형제 중에 누군가 왕이 되면 그는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를 해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 율법서를 평생을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경외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을 쉽게 보다가 이런 말씀으로 인하여 자기들이 율법을 보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는 자기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 율법의 모든 말과 그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는 말씀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이 연결이 되어 있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배우는 것과 이 율법의 모든 말과 그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율법의 모든 말과 그 규례를 지키는 것과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는 것과는 다른 일입니다 성경에 한 구절에 이 말씀이 같이 있다 보니까 마치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주의 깊게 보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서를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우려면 평생 이 율법서를 읽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서를 읽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과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 하나를 잘못 이해함으로 해서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오히려 본분을 망각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것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지키게 했는가 하면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그것으로 끝이 나는 이스라엘의 의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통해서 실체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절기가 있습니다. 절기에 대해서 강의를 해 드렸지만 그 절기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표입니다. 그 절기를 지켜 행함으로 해서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의 시간표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유월절이 지나갔다고 해서 안 지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압니다.
그러나 내 자손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 율법을 몸으로 지킴으로 해서 그들이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표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지키라고 했지만 이스라엘은 행위에 빠져 그저 그것을 자기 육체로 지키는데 열심을 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그 그림자를 통해서 우리가 실체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율법을 보아야 하는가 하면 율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스라엘과 같이 실제 육체로 지켜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보았습니다.
아니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율법의 말과 규례를 통해서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그 율법을 안 지켜도 율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율법을 폐하신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기 때문에 굳이 율법을 안 지켜도 우리는 유월절이 무슨 의미고 또 맥추절을 알고 수장절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매년 지킴으로 해서 그 의미를 알게 하셨지만 매년 지키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의 행위에 점점 빠져 들어가 율법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서를 평생 읽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서를 읽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가를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5:39절을 보겠습니다. (신 151쪽)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이 성경이 무엇입니까?
바로 율법서가 포함이 되어 있는 구약 성경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아직 신약 성경이 기록이 안 되었던 때입니다 율법서를 상고하면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율법서를 평생을 읽고 있었지만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지 못 했습니다.
예수를 발견하지 못 했습니다.
성경을 보기는 보았어도 이스라엘은 성경을 통해서 자기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 가를 배우기만 했지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구약을 보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행하는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율법서를 보면서 다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영생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 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것을 아주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서는 양면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율법주의가 되기도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기도 합니다. 이 양면의 얼굴을 모르고 그저 문자에 갇혀서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의 행위를 너무 열심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자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그 얼굴이 전혀 다르게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고 성경을 보는 것은 성경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것과 같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보고 그 율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사람들은 이 성경을 보고 악을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사람들은 율법의 행위를 따라 하면서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저도 율법을 다 해석하지는 못 합니다. 그러나 그 율법 하나하나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평생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냥 읽지 마시고 정말 지혜를 사모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율법서를 통해서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배우게 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잠언1:7절을 보겠습니다. (구 911쪽)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성경을 어려서부터 보았지만 지식이 없어 망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호세아서에서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 도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율법서를 읽고 살았지만 그들에게는 지식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지식이 없는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욥과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같이 살았지만 그들은 지식이 없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이 지식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가 되어도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는 지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율법서를 보면 뭐 합니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지식을 얻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이 세상의 좋은 책을 보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도 성경을 그렇게 세상의 좋은 책으로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이유는 이 안에서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배워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너무 잘 압니다.
솔직히 저는 머리가 나빠서 성경을 잘 외우지를 못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보면 성경을 너무 잘 외우고 있습니다. 어디에 무슨 말씀이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지식이 아니라 이 세상의 지식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의 지식입니다.
성경의 문자를 그대로 아는 것은 사람의 지식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지식을 공부하듯이 성경을 아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의 지적인 능력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율법이라는 그림자를 통해서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그저 율법의 문자를 보고 자기가 그것을 많이 아는 것으로 지식이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율법서를 통해서 우리가 평생 읽으면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잠언2:1-5절을 보겠습니다. (912쪽)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닫기 바랍니다.
잠언에서 어떻게 해야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을 수 있는 가를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잠언 말씀만 바로 알아도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면서 사람의 본분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아는 성도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아들은 나의 말을 받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내 말을 받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신명기 32:2절을 보겠습니다. (구 313쪽)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맺히는 이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슬을 내려 주시고 있는데 그 이슬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 이슬 이것으로 채소를 자라게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채소는 비가 없고 이슬이 없으면 자라지 못 합니다.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려면 반드시 하늘로부터 단비가 와야 하고 또 비가 안 오더라도 이슬이 내려 주어야 채소가 자랄 수 있습니다. 이슬은 은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받으면 복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서에서는 받아들이고 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내 말을 받아들이고 이 말씀은 은혜를 받아들이면 이라는 말씀입니다 가장 먼저 은혜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 은혜를 모릅니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려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갚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은혜는 우리가 갚을 수도 없고 갚으려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를 그냥 받아야지 내가 그것을 갚으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냥 받기만 하라고 주시고 있는데 인생들이 그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자꾸 갚겠다고 합니다. 채소위에 내리는 이슬과 같은 은혜를 우리는 받기만 하면 됩니다. 채소는 이슬을 받기만 하면 좋은 채소를 낼 수 있는 것이지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그냥 받아들이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낼 수 있고 그런 성도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거저 받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성도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계명
이 단어만 나오면 무조건 율법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계명 하면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율법서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을 하니까 계명 하면 무조건 율법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또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입니다
“아이들아, 내 말을 받아들이고, 내 명령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여라.”
개역성경에는 계명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번역에는 이렇게 명령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계명이냐 명령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깊이 간직을 하고 있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계명이 아닙니다.
이 계명이 만약에 율법이라고 하면 반드시 지키라고 말씀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간직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계명을 지키려고만 하고 있지 그것을 간직하려고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니 계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3:23절을 보겠습니다. (신 391쪽)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계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우리 안에 간직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성도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믿음이 없습니다. 아니 믿음에 대해서 바른 정립이 안 되어 있다 보니까 자기가 하는 행위를 보면서 믿는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인 행위의 그런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깨달을 수 있다고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는 행위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종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믿음은 내가 믿는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셔야 내가 믿을 수 있습니다.
유다서1:3절을 보겠습니다. (신 397쪽)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단번에 주셨습니다.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신 믿음이라야 합니다. 그러나 이 단번에 주신 믿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믿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인으로서의 믿음이지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신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단번에 주셨습니다.
그래서 동일한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이나 사도 바울에게 주신 믿음이나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내 믿음이나 동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나에게서 나왔다면 동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이나 우리의 믿음이나 모두가 동일하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을 동일한 믿음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있는 성도는 그것을 간직하려고 합니다. 다른 것 보다 내게 주신 그 믿음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믿음을 간직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간직합니까?
나쁜 것은 굳이 간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보배롭기 때문에 성도들은 이 믿음을 간직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 믿음을 보배롭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배롭기 때문에 간직을 하지 이 믿음을 보배롭게 생각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간직을 하지 않습니다.
모릅니다.
이 시대는 이 믿음이 얼마나 보배로운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니까 그냥 쉽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믿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믿고 있으니까 이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주 흔합니다.
아니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믿음이 얼마나 보배로운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발에 치이는 흔한 돌과 같이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보니까 그것이 얼마나 귀한가를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간직하려고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 가치를 아는 성도는 간직할 것이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마치 길거리의 흔한 돌멩이 취급을 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자기들이 지혜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지혜가 무엇인가도 모르면서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종교적인 행위를 보면서 이 세상 사람들보다는 자기들이 지혜가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2:6-8절을 보겠습니다. (신 265쪽)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지혜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만세 전에 미리 정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지혜를 몰라서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스라엘만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히브리서 6장6절에 타락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이 시대도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혜를 모르니까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습니다.
귀를 안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혜를 들으려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의 문자적인 것을 듣는 것을 가지고 자기들이 지혜를 듣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도 이 세상의 지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밀한 가운데 있는 지혜를 모르면 성경을 아는 지식도 이 세상의 지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비밀입니다
그리고 감추었던 것입니다 이 지혜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아무리 교인들이 많다 해도 이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경 말씀을 듣는다 해서 마치 이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 3:18절을 보겠습니다. (구 913쪽)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서도 이 구원에 대해서 보고 있지를 않습니다. 구원을 얻으려고 성경에서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복을 누리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지혜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정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은 성도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 성도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사람은 그가 외적으로는 아무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실제 경외하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스스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지혜는 내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십니다.
귀를 기울이면 반드시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가 아는 아주 적은 성경적인 지식을 가지고 지혜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지혜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마음에 명철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반드시 마음에 명철을 두어야 합니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아 아는 것이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우리에게 없다면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9:24절을 보겠습니다. (구 1066쪽)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시는 줄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아는 명철이 없다면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라기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그렇게 묻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함께 살고 싶어 하는 만큼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영의 비밀을 모르고 그저 육을 보면서 자기가 평안하면 하나님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자기가 고난 중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공평하신 분입니다
공평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지혜가 있는 자나 무식한 자나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공평을 공평하지 않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힘써 지킨 그 율법을 보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과 같이 취급을 하면 공평치 못하다고 말 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은 분복입니다 그 분복을 받은 것을 가지고 구원의 잣대로 삼는다면 절대로 공평하지 못 합니다. 고아도 과부도 그리고 부자도 할 수 있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공평입니다. 이 믿음을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공평치 못하다고 말 합니다.
정직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절대로 변개치 아니 하십니다. 우리 인생들에게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어떻게 지키시는 가를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어떤 약속을 하셨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지켜 주시고 있습니다.
명철을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이 세상에 행하시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성도만이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을 수 있고 또 그런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소리를 높이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무식합니다. 생각하는 이성이 있어서 사람들은 자기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지식도 없고 또 명철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그것을 불러 구하지도 않고 있고 또 소리를 높여 얻으려고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지식을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육체의 것을 구하기 위해서 부르고 있고 육체의 정욕의 것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을 구원해 주시겠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이것은 사람의 분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부르고는 있지만 지식을 위해서 부르지 않고 있고 소리를 높이고는 있지만 명철을 위해서 하지 않고 있고 자기들의 육체의 것을 위해서 그렇게 부르고 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이제까지는 그래도 쉽게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제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 나왔습니다.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바로 알아야 성도가 여호와를 경외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0:12절을 보겠습니다. (구 129쪽)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인구 조사를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명령을 하시고 인구 조사를 할 때는 그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 인구 조사를 하는데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이스라엘에 온역이 생겨서 백성들이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리고 인구 조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인구조사를 하려면 반드시 그 생명을 속하는 속전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서 인구조사를 해야 그 백성 중에 온역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그래서 인구 조사를 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거의 모든 왕이 인구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인구조사를 했습니까?
사무엘하 24장을 보면 다윗이 인구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면서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생명의 속전을 드리지 않은 이스라엘에 온역이 발생했습니다.
사무엘하24:15절을 보겠습니다. (구 507쪽)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인이라”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인구조사를 할 때는 반드시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려 온역이 없게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무엘하24장에 있는 말씀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지금은 속전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실제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였는데 이스라엘에게 온역이 발생했습니다.
사무엘하 24장 1절부터 보시면 어디에도 하나님께 생명의 속전을 드렸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언약을 이스라엘은 지키지 않아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발생해서 칠만이 죽었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고 백성이 죽은 것을 가지고 여러 가지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단 한 가지 이유는 속전을 안 드렸기 때문입니다.
칠 만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모두가 죽었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인구 조사를 하려면 반드시 생명을 속하는 속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면서 그 생명의 속전을 드리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체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속전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사무엘하 24장에는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아서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생겼다고 직접적으로 기록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치 다른 이유로 요압이 인구 조사를 진실 되게 하지 않아서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내린 것처럼 기록이 되어 있으나 실제는 인구조사를 하면서 출애굽기에서 명령하신 생명의 속전을 드리지 않아 말씀하신 그대로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내린 것입니다
다 죽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셔서 상징적인 숫자의 인구를 죽이셨지만 실제적으로는 이스라엘 인구 전체가 죽은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속전이라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바로 그 생명의 속전이 은입니다
출애굽기 30:13절을 보겠습니다. (구 129쪽)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세겔은 은의 단위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든지 인구조사를 하면 성소의 세겔대로 반 세겔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십 세 이상 모든 사람은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이 성소의 세겔대로 반 세겔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사람은 온역이 발생해서 죽음을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던 이스라엘에 인구조사가 시작이 되면 모든 이스라엘 사람 이십 세 이상은 하나님께 생명을 속하는 속전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온역에서 피할 수 있고 자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예외가 없이 모두가 반 세겔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을 사무엘하에서 다윗이 인구조사를 할 때 실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할 때 이스라엘이 칠만이나 죽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생명을 속하는 속전 반 세겔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모두가 온역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상징적 숫자가 바로 칠 만입니다.
출애굽기30:14-15절을 보겠습니다. (구 129쪽)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 곧 이십 세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생명의 속전을 내는 기준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간난한자와 부자와 차이를 두셨지만 이 생명의 속전만은 하나님께서 부자라고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해서 덜 내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속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만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제사나 규례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를 두시고 힘이 안 되면 그것을 감해 주셨지만 생명을 속하는 속전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반드시 반 세겔을 내게 하셨습니다.
생명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부자의 생명이나 가난한 자의 생명이나 차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부자라 해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 해서 덜 내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는 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부자라 해서 넘치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미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가난해도 반 세겔을 낼 수 있게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너무 가난해서 반 세겔을 낼 수 없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구약의 생명의 속전은 그림자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반 세겔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신약에 가서 보면 우리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누가 도와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도와 줄 수 없고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반 세겔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자라 해서 더 낼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떤 일을 더 하면 구원이 더 커질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속전은 반드시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반 세겔을 드려야 합니다.
이 반 세겔을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구약에 생명의 속전을 드리는 반 세겔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같이 우리는 신약에 생명을 속하는 속전 은을 구해야 합니다. 만약 그 은이 여러분에게 없다면 여러분은 모두 온역에 걸려 사망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은 반 세겔이 없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온역에 걸려 죽습니다. 온역에 걸려 죽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도 이 은 반 세겔을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 생명에 관한 일인데도 교회에 나온 사람들은 이 은을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거짓된 고운 것을 그리고 헛된 아름다운 것을 쫓아서 그것을 추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식이 없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을 구원해 주시겠습니까? 성도라면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을 구하지는 않고 고운 것과 아름다운 것을 보며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은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반드시 내 생명을 속할 생명의 속전 은 반 세겔을 구해서 인구조사를 할 때 그 속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는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을 조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천국 백성의 인구를 조사하는 것임을 예표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천국입니다
그 가나안에 사는 사람은 반드시 인구조사를 하면 자기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 천국 백성이 되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생명의 속전 반 세겔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은 반 세겔은 세상 모든 사람이 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은을 찾지 못해 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은이 있어야 인구조사 천국 백성을 조사할 때 생명을 속하는 속전을 내야 하는데 은이 어디 있는지 조차 모르니까 속전을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솔직히 이 은을 구하려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저 고운 것과 아름다운 것에 눈이 미혹이 되어서 그것을 가지려 애를 쓰고는 있어도 정말 중요한 자기 생명을 속하는 생명의 속전 은을 구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하는 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이 은을 구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2:6절을 보겠습니다. (신 338쪽)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 할 것이라”
육적 이스라엘은 반드시 자기가 은 반 세겔을 드려야 했습니다.
자기 생명을 속하기 위해서는 천국 백성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은 반 세겔을 자기가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영적 이스라엘인 지금의 성도는 이 생명의 속전을 예수님께서 모두 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드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 있는 우리가 죽어야 하는 것을 죄 없는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육적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설령 인구조사를 한다 해도 우리는 속전을 낼 수 있는 입장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방인입니다 그런 이방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속전이 되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가 아니고는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이방인은 어떤 방법으로도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인구조사를 할 때 생명의 속전으로 드렸던 그 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모든 사람의 속전을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보배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이 보배를 찾아야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이 보배를 찾지 못하면 그는 어떻게 해도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2:6-7을 보겠습니다. (신 378쪽)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믿는 우리에게는 보배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버린 돌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저 자기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갖추어야 하는 모양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만 볼 수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이 보배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사람에게는 그저 흔한 돌멩이 같이 보여 버리게 되어 있고 어느 사람은 그것이 너무 귀해서 그것을 찾으려고 오늘 이 시간에도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있어 절대로 보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배를 그렇게 함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신문 기사를 보았습니다. 호주의 아마추어 탐사가가 금괴를 발견했습니다. 5킬로그램이 넘는 금덩어리를 찾았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금이 있다고 확신을 한 사람은 그렇게 금을 찾아다닐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왜 봅니까?
미리 말씀을 드렸지만 성경을 보는 이유는 그 안에 보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보배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고는 있지만 보배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문자가 갇혀서 성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 성경을 읽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지만 솔직히 그렇게 많은 지식이 오히려 그들에게 덫이 되어 있다는 것을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것 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르면 차라리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자기에게 지적인 능력이 있다 해서 그냥 성경을 보는 것은 스스로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지적인 능력이 너무 높다 보니까 누구나 성경을 자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문자에 갇혀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 어떤 말씀을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보배를 못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이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 어떻게 하든지 그 보배를 찾으려고 하지만 건축자들에 의해서 이 보배가 버린 돌이 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는 이유입니다
그 안에서 도덕 선생이 되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보배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 보배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보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생명을 얻어 여호와를 경외하려면 당연히 이 보배를 찾아야 합니다. 이 일을 게을리 하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사는 날 동안 늘 깨어서 부지런히 이 보배를 찾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 이것보다 더 큰 보배가 없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찾을 것이고 그것이 별로 그렇게 보배롭지 않은 사람은 자기 곁에 있어도 버려 둘 것이 분명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사람은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기 마련입니다. 성경에서 보배를 찾은 성도는 그것에 온 마음을 두고 그것을 찾으려고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생각하는 보배가 딴 곳에 있는 사람은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자기 마음에 있는 그것을 찾으려고 하고 있을 뿐입니다
경외하는 일입니다.
보배가 무엇이냐에 따라 경외하는 성도가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똑같이 보고 있지만 실제 보배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적습니다. 늘 그래왔지만 실제 이 보배를 찾고자 지혜를 구하는 성도는 늘 아주 적은 무리였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잠언 2장1-4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바로 깨닫는 성도만이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말씀대로 하고 있는 성도는 이미 여호와를 경외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아는 성도만이 사람의 분분을 다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종교인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늘 종교에 빠져 스스로 죽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큰 음녀는 종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정통이라는 교회도 역시 이 음녀에게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하고 그런 성도만이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깨달아 사람의 본분을 다 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무엇이 주어지는 가를 보겠습니다.
성경을 찾아보기만 하겠습니다. 이미 복음 안에 있는 성도님들은 이 말씀을 한 번씩 읽기만 해도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굳이 그 내용을 일일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시편 25:14절을 보겠습니다. (구 819쪽)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그 언약을 보이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우리에게 일방적인 언약을 해 주셨습니다. 그 언약을 보여 주셔서 죄 사함을 받고 있습니다.
시편34:9절을 보겠습니다. (구 825쪽)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구원을 받는데 있어 우리는 전혀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해서 부족하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103:13절을 보겠습니다. (구 877쪽)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불쌍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말라기4:2절을 보겠습니다. (구 1331쪽)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치료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성도를 주님께서 구원해 주셔서 천국에서는 슬픔과 아픔이 없이 살아가게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시편145:19절을 보겠습니다. (구 908쪽)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갈렙의 소원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입니다 오직 천국을 소원하고 살아가고 있는 성도에게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잠언14:27절을 보겠습니다. (구 926쪽)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생명 샘입니다.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아야 하고 그런 성도만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사람의 본분을 지키려 하지 마시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사람의 분분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여호와를 경외할 수 있고 그렇게 경외하는 성도들에게 구원을 보여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자기들의 행위로 보이려고 하고 있고 그것이 얼마나 악한 일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도서12:13절을 보겠습니다. (구 960쪽)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는 사람의 본분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사람의 분분을 지키는 것과 같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에는 보배가 있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어려운 이 세상의 사람의 본분을 지키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사람의 본분을 지키면서 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는 사람의 본분을 지키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아주 쉬운 일인데도 그들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고 보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2:50절을 보겠습니다. (신 170쪽)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그의 명령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명령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성도와 같이 보인다 할지라도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 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가르쳐 줍니다.
바로 이 영생입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는 성도들이 영원히 축복을 누리는 천국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를 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명령을 모르고 있고 종교인들이 되어서 스스로 올무에 갇히고 또 포승에 메여서 끌려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경외를 하는 성도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깨달은 성도만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면 그리고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하지 못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아도 할 수 있고 과부도 깨달을 수 있는데 이 시대는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목사들도 이것을 깨닫지 못해서 도리어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깨닫게 해 주셔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게 인도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만세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륜을 하셔서 우리에게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닫게 해 주셔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사람의 본분을 다 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믿지 않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행위로 하나님을 경외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쉬운 방법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셨고 또 그로 인하여 명령을 지켜 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하시고 있습니다.
전도서12:14절을 보겠습니다. (구 960쪽)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사람의 본분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을 하시겠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하건 악하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을 은밀한 것까지 다 심판을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선을 행할 수 없고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행위는 다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본분을 행한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나아가야 합니다. 심판대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아무 것도 안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행위에 빠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행위에 빠지지 말고 또 은밀히 행하지 말고 사람의 본분을 지켜 여호와를 경외해서 그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심판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심판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성경이 마치 성도도 심판을 받는 것같이 기록이 되어 있지만 우리 성도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성도는 이미 은혜를 얻어 그 보좌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심판을 받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악을 행하고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선악간에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생은 어느 누구도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시편에서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행위와 은밀한 모든 일은 다 악이 되어서 심판을 받는 것이지 그 심판대에 서면 선을 행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이 심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깨닫고 또 그 명령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성도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전도서의 마지막 절은 성도들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닫지 못하고 또 그 명령을 지키지 않고 행위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본분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세상의 생각으로 사람의 본분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본분대로 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무수한 사람들이 있지만 이 사람의 본분을 지켜 행하고 있는 사람이 지극히 적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그것입니다. 그렇게 경외를 하고 있는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영생을 얻었습니다. 사람의 본분을 지켜 행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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