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 7:9-14절을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합니다,
이 시대 종말의 때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7장2-14절의 말씀은 이미 구원을 받을 사람들은 다 받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말씀하면서 그들의 구원 받은 숫자를 십사만 사천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해가 안 될 사람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1700년이라는 기간이 흘렀습니다, 한 대를 사십년을 잡아도 엄청나게 많은 대를 지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만 해도 수백만 명은 될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구원의 숫자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앞에 말씀을 비유로 해석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십사만 사천 명은 비유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역시 그것이 비유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성경을 볼 때 이스라엘이 그 정도의 숫자가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주님이 오셨을 때까지입니다,
그것을 마태복음에서 42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엄청나게 많은 인구가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한 대의 사람들도 안 되는 144.000명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숫자가 굉장히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의 다 비유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저는 비유보다는 실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144.000명은 많습니다,
우리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부터 해서 이스라엘에 주님이 오셨을 때까지입니다, 그 이후에는 초대교회가 잠깐 있었습니다, 아마도 상당수가 초대교회에서 구원을 받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계산으로는 144.000명은 절대로 적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스라엘에 구원을 받은 사람이 숫자가 144.000명이라는 것에 대해서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거의 다 비유의 숫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지만 과연 이스라엘에서 144.000명이 구원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그래도 우리 이방인보다 더 많은 숫자가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그 수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장정의 숫자가 60만 명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단 두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광야에서 죽은 사람 중에는 구원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막을 지을 때 지혜를 주신 사람들도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숫자를 합친다 해도 아주 적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한 세대입니다, 20세부터 60세까지를 60만 명이라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몇 명이나 구원을 받았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몇이나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두 사람이 가나안에 들어가고 그 외에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해도 불과 몇 십 명도 안 되는 것으로 생각이 되고 있습니다,
144.000명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주님이 오셨을 때까지의 대수가 42대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44.000명을 42로 나누면 약 3430명 정도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한 세대에 3430명 정도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지나친 비약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몇이나 가나안에 들어갔는가를 생각하면 됩니다.
물론 세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느 세대는 많이 받았을 수 있고 어느 세대는 거의 없었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을 볼 때 3430명이라는 숫자는 결코 적은 수자가 아니고 또 144.000명이라는 숫자 역시 적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보다는 많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인구를 보면 더 많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게 본다 해도 역시 3430명이라는 숫자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대비가 꼭 맞는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스라엘에서 구원을 받은 숫자가 144.000명이 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를 보더라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내 주셔서 칭찬을 했습니까? 이스라엘의 수가 약 100만 명을 넘게 한 세대를 살았다 해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노아 때 단 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표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자기들은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때도 있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엘리야가 나만 홀로 남았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을 칠천을 남겨 두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 구원을 받은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남은 자를 구원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남겨 두었다는 말씀은 구원을 받을 사람이 칠천이라는 말씀입니다,
144.000명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한 대를 치더라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또 예레미야 때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을 할 때 진리를 구하고 공의를 찾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라기 선지자가 있은 후로 400년 동안은 암흑시대라고 성경학자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 시대 우리 이방인들을 얼마나 구원해 주시는 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예를 보더라도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한 세대에 3430명입니다, 이것은 평균의 값이기 때문에 어느 때는 많고 적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이상이 되기는 힘들다고 믿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 144.000명인지 아니면 비유의 숫자인지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적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도 역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 하면 2000년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이스라엘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조금 더 냉정하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수가 바다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역시 교회 안에 있는 숫자가 바다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시고 2000년이 지났습니다,
아직까지는 종말의 때가 아닌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저도 종말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징조들을 볼 때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4.000명이 적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를 생각하면 절대로 적은 숫자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먼저 복음이 전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방에 빛을 비춰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새번역입니다.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전 설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두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교회와 이방의 교회입니다, 144.000명은 분명하게 이스라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은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구원이 있은 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먼저 복음이 전파가 되었고 그 후에 우리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방인입니다,
앞에는 분명히 이스라엘이고 이제 이방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9절을 보면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피로 사셨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실제로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나라에 복음이 전파가 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방에 빛을 비춰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물론 구약의 이스라엘 역시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에 빛이 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을 이방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빛을 못 보고 살다가 죽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정말 이 시대는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성경이 들어 온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불과 100여년 조금 넘었습니다,
물론 이 복음이 유럽에서 1500년 동안이나 정체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미주와 남미로 이주를 하면서 성경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성경이 들어 온지가 100여년 조금 넘었습니다, 정말 이 시대 복음을 듣고 있는 성도들은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피로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큰 무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의 무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큰 무리라고 하니까 실제 엄청나게 많은 무리라고 생각하는데 이스라엘을 보더라도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이미 구원을 다 받은 것을 미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각 나라입니다,
그리고 족속입니다, 그리고 언어입니다, 아직까지 물론 모든 나라에 성경이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거의 다 들어갔다고 해도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어차피 중동은 이슬람교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유대교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도 안타깝게도 기독교라는 종교로 거의 다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3:5절을 보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흰 옷입니다,
사람들은 비유로 보아야 하는 것은 문자로 보고 문자로 보아야 하는 것은 비유로 보고 있습니다, 구원을 상징하는 옷이지 실제 옷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종말론자들은 실제 이런 흰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말씀입니다
흰 옷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입는 진짜 천으로 된 옷입니까? 성경은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흰 옷을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는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이스라엘에 인 맞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흰 옷을 입은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흰 옷은 이기는 자가 입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누구인가 하면 요한일서에서 우리의 이김은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조상부터 이제 이방의 각 나라와 족속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긴 모든 성도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는 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롭다 함을 얻은 성도는 흰 옷을 입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으로 흰 옷이라고 하는 말씀이지 실제 흰 옷이 아닙니다,
흰 옷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저 흰 색깔의 옷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을 보면 마치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흰 옷은 구원을 상징하는 비유로 아니 우리가 부활을 했을 때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으니까 비유로 흰 옷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20“12절을 보면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사도행전1:10절을 보면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요한계시록4:4절을 보면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흰 옷입니다,
누가 흰 옷을 입었습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흰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장사 지냈던 무덤에 있었던 두 천사를 보고 흰 옷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때 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흰 옷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천사가 사람의 형상으로 보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의 환상입니다,
이십사 장로가 흰 옷을 입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영의 일입니다, 그리고 천사입니다, 이 천사를 우리가 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여 졌습니다, 그것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다 보니까 흰 옷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흰 옷입니다,
환상과 실제로 본 모습을 다 흰 옷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이라는 것을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실제 흰 옷이 아니라 부활의 형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흰 옷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우리가 입는 흰 옷이 아닙니다,
이 흰 옷을 말씀하는 성경을 찾아보면 이것이 실제 흰 옷이 아니라 부활의 형상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 보니까 흰 옷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실제 흰 옷으로 형상화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중에 부활을 할 때는 자기들이 그림을 그렸는데 거기서 보면 거의 다 흰 옷을 입고 올라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모르면 문자를 보고 그 문자 그대로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천사가 흰 옷을 입고 있고 이십사 장로가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흰 옷은 부활의 형상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내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음대로 상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 언어로는 표현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마 그것을 표현할 수 있었다면 천사가 그대로 보여 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형상을 실제로 우리가 본다고 해서 그것을 우리 인생들의 언어로는 표현이 안 되기 때문에 흰 옷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샤머니즘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의 것을 표현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사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으면 흰 옷을 입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흰 옷으로 보여 졌을 것이고 또 사도 요한도 흰 옷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실제 흰 옷을 본 것이 아니라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까 흰 옷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형상입니다,
이 세상의 언어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영의 말씀들을 오해하다 보니까 교회에서 마치 흰 옷을 입는 것 같이 천국을 묘사할 때 흰 옷을 그림으로 그리는데 그것을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실제 흰 옷을 입은 것을 본 것이 아니라 하늘의 형상을 보았고 그것을 우리 언어로 표현이 안 되니까 흰 옷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깨끗한 형상입니다,
그러니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늘의 형상을 입은 것을 말씀하고 있고 이 형상은 썩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부활을 해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에 아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시편37:39절을 보면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빌립보서3:20절을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구원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다윗은 구원은 여호와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구원 하시는 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각각의 위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믿고 있습니다,
구원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셨고 신약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하셨습니까? 참으로 이 문제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교회에 큰 걸림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니 이 교리 하나 때문에 모두가 사망의 길로 간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입니다,
땅이나 하늘이나 바다에 있는 아무 것이라도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라는 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만들어 낸 형상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는 것을 수도 없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미 아카데미 강의에 올려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지 마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각각의 위로 하나가 아니라 그냥 하나라는 것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복음과 율법에서 삼위일체에 대하여 설명을 했습니다.
구원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각각의 위로 있는 하나님에게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있습니까? 아니 이 시대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하니까 그럼 성령에게도 구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구원이 성령에게 있다는 말씀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믿고 싶어 하는 그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맞는 다면 구원은 각각의 위의 하나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도 구원은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말씀합니다, 만약에 성령이 하나님이고 또 우리를 구원해 준다면 사도 요한은 구원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과 그리고 성령에게 있다고 했어야 맞는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새번역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영의 일입니다,
아니 내세의 일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영의 말씀은 그 이상을 상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그대로 보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이렇게 표현을 했다고 믿으시면 됩니다,
모든 천사가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이 일은 이제 천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아직까지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7장에서 그것을 앞서서 되어 질 일을 미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순서대로 한다면 거의 끝에 나와야 하는 말씀이지만 왜 지금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그 이전에 이미 구원을 받을 성도가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 휴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입니다, 성경은 휴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휴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 거짓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부활의 형상을 이미 성도들이 다 입고 있다는 것을 요한계시록 7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들이 하나님 보좌에 엎드려 경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후로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을 하면 이 세상에 구원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새번역입니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 하고 말하였습니다."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사실은 이 환상은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고 난 후에 보여 져야 하는 환상입니다, 하지만 왜 지금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시간의 차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다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는 이런 시간 개념 자체도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지금 이 세상의 언어로는 어느 것 한 가지도 표현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천사들이 하나님께 경배를 하면서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이라고 합니다,
그대로 되어 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이 영의 신비로운 일을 사람의 이성으로 다 설명을 드릴 수 없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에 있는 이 말씀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아니 천사들도 이제까지는 누가 악한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단이 악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이심으로 해서 천사들이 하나님께 경배를 하면서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비밀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장로입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장로가 누구라는 것을 아무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 살았던 장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지금 보고 있는 모든 환상은 천국의 일입니다,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지금 이 말씀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십사 장로입니다,
저도 이 장로가 누구인가를 모릅니다. 하늘에 있었던 장로인가 아니면 구원을 받은 자 중에 장로인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사도 요한이 보고 있는 환상의 천국의 일입니다, 이십사 장로가 요한계시록에서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천사가 있고 생물이 있고 장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구원을 받은 자는 아니라고 봅니다,
하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상이 어떠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장로도 흰 옷을 입고 있다고 하고 있고 금 면류관을 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내세의 말씀은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 이상을 상상하지 말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것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저도 모릅니다,
아니 굳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생물이 있고 이십사 장로가 있고 그 주변을 천천의 천사와 만만의 천사가 둘러 진을 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으니까 그 형상이 어떠한지는 저 역시도 모르는 일입니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새번역입니다,
“내가 "장로님,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 흰 옷을 입은 셀 수 없는 무리가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도 요한이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언약의 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성도들이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가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 교회는 환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종교의 자유라는 명목 아래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환난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종교인은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아주 적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은혜를 입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피로 옷을 씻어 희게 되었다고 하니까 마치 이 세상의 옷을 씻어서 희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 하늘의 생명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씻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옷을 씻는 어떤 행위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흰 옷은 부활의 형상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 깨끗한 영이 탄생이 됩니다, 그 영이 주님이 오시는 날에 부활의 형상을 입는 것을 흰 옷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합니다,
물론 아직은 종말의 때가 아닙니다, 종말의 때에는 구원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습니다, 휴거라든지 이상한 말에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부활의 형상을 입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군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누가 구원을 합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시고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부활의 날에 흰 옷을 입고 천국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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