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
신명기23:24-25절을 보면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
율법을 누가 지킵니까?
아마도 이런 질문을 하는 저를 더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질문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너무 율법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사람의 지혜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게 기록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영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육의 말씀으로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한 말씀이라도 그냥 무심히 보는 사람은 반드시 망하는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어렵고 오묘한가를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너무 쉽게 보고 있고 그것이 자기 스스로를 그물에 걸리게 만들고 있지만 이 시대는 이스라엘과 같이 그저 육적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율법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율법을 바로 알면 감히 지키고자 하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모르다 보니까 이 시대 역시 이스라엘과 같은 율법주의에 빠져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누가 지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지켰다고 하니까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오셔서 율법을 지키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일서에서도 주님은 죄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가 없다는 말씀은 주님은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 과연 율법을 다 지키셨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스스로 올무에 걸리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본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율법에 반하는 일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니까 모든 것이 다 용납이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문자적으로 지키는 율법으로 따지면 주님은 그 자체로 안식일을 어겼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안식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병자를 고치는 일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문자적으로 하면 주님은 이미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 정도면 다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렇게 주님은 율법을 어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병자를 고치셨다 해도 그것은 분명히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율법에 반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이스라엘이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반대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생각부터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은 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고 남이 율법을 안 지키면 죄를 범하는 것이고 남이 율법을 지키면 율법주의라는 생각부터 버리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감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반드시 법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습니다,
하지만 목사들이나 그리고 성경을 많이 본 사람들이라면 쉽게 이런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신 것 역시도 주님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율법에는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올 때 먼 길을 와서 제물이 상하게 되면 그것을 바꾸어서 흠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문자적인 율법을 지키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아니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니까 주님이 그런 문자적인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 안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모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는데 그런 문자적인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완전케 하러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병자를 안식일에 고쳤습니다.
이미 그 자체로 주님은 안식일을 범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볼 때 냉정해야 합니다, 주님이 병자를 고치셨다고 해서 마치 주님이기 때문에 용납이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은 주님이라도 반드시 율법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지키셨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분명히 주님은 안식일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식의 의미를 안다면 주님은 분명히 안식일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문자적으로는 안식일을 지켰을지 몰라도 안식일의 의미적으로는 그들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모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니까 육적으로만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적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어떻게 거룩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도 교회 안에서 거룩한 주일이라는 말을 자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거룩한지 아닌지도 모르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을 보고 그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다고 해서 거룩해집니까?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말씀을 하셔야 거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거룩한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육적으로 지켰던 그 안식일이 거룩합니까? 어떻게 지켜야 거룩한지도 모르고 그저 자기들의 말로 거룩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10-11절을 보면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누가 안식일을 어겼습니까?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어겼습니까? 주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안식일을 어긴 것입니까? 안식에 의미를 바로 알면 누가 안식일을 어겼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의 안식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안식일을 어긴 자들입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 병자를 물론 육적으로 고치셨지만 주님은 병자를 고치시면서 구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병자를 고쳐 주시고 그 병자가 주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자는 안식일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만 주의 깊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식에 들어가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킵니까?
그것을 평생 사는 동안 지키면 뭐 합니까? 이스라엘과 같이 그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주일을 지키지 않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는 자체가 그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느 한 날에 예배를 하는 것을 반대하고자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모두가 쉬는 일요일에 예배를 하는 것 역시 저도 찬성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에서 지키고 있는 주일이라는 날은 주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안식에 못 들어갔습니까?
그들이 지키고 있는 안식일이라는 날 때문에 들어가지 못 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주일이라는 날 때문에 그의 안식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안식일을 지키고 누가 주일을 지키는 자인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수많은 율법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율법을 지키신 분입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구원을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율법의 문자를 지키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의미를 아시고 율법을 지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보고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모르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셨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율법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그런 율법들을 지키고 있는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율법은 그림자라는 것을 모르고 그림자 뒤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모르다 보니까 주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고 그것이 믿어지지가 않으니까 자기가 또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모릅니다.
율법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모르는가 하면 거의 소경 수준으로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소경이 되어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의 문자를 보고 그대로 지키려고 했던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똑같은 일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안식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이 변해서 이제 주일이 되었다는 아주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 안식일이 변해서 주일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폐하여 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폐하여졌습니까?
문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폐하여 졌습니다.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다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폐하셨습니다, 하지만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이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어느 한 날에 예배하는 것을 제가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무교회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안식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 그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그런 주일이라는 것은 도리어 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일이라는 날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해가 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장합니다,
자기들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 합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그들은 절대로 율법을 지킨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의 안식에도 들어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표면적으로 하나님을 믿었던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지만 안식일이 변한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안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주일을 안 지킵니다, 아니 주일이라는 날 자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가 있는데 무슨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고 있습니까? 율법이라는 것은 그 의미를 모르면 자기 육체로 행하게 되고 있고 그것이 도리어 그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고 그것으로 사망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입니까?
유대교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지키는 것과 지금 기독교인들이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차이라면 누가 더 많이 지키고 누가 덜 지키느냐의 차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바로 알지 못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만큼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율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율법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제사법, 시민법, 도덕법으로 나누어서 연구를 하고 있고 그것을 아는 것으로 마치 자기들이 율법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입니다,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 말 것이요”
새번역입니다.
“당신들이 이웃 사람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먹을 만큼 실컷 따먹는 것은 괜찮지만, 그릇에 담아가면 안 됩니다.”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이 그림자를 모르면 다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이 그림자를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결코 은혜가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말라기서에서 이스라엘이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동문서답을 하는 것과 같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도 율법을 아는데 있어서 너무 어렵습니다, 정말 어느 율법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을 보고도 아주 쉽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런 율법들을 설교로 하는 목사가 거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율법을 설교로 들어보았습니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목사들은 율법을 보는 눈이 감겨져 있습니다, 소경이 되어 있습니다. 그 소경이 소경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의 실상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인도하는 소경도 모르고 인도를 받는 소경도 모르다보니까 주님의 말씀과 같이 둘 다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누가 지켜야 합니까?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는 사람은 자기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런 율법은 자기들이 이해가 안 되니까 제사법과 시민법은 폐하여졌다고 하면서 율법에 대해서 보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율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의 포도원입니다,
그 포도원에 들어갈 때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 사정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었다가는 이제는 고소를 당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께서는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율법대로 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마도 그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이것은 시민법이라서 율법이 폐하여 졌다고 말 합니다 성경 어디에 제사법과 시민법이 폐하여 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제사 제도에 대해서는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민법에 대해서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시민법이 폐하여졌습니까?
그리고 도덕법이 살아 있습니까? 그렇다면 시민이 폐하여 졌다는 성경적 근거를 말해야 합니다. 내가 폐하여 졌다고 해서 폐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아니 유명한 신학자가 성경을 연구해서 시민법은 이 시대와 맞지 않으니까 폐하여 졌다고 해서 폐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는 모든 것의 기준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폐하여 졌습니다.
제사법과 시민법만 폐하여 진 것이 아니라 도덕법도 폐하여져야 맞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은 폐하여 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성경을 보고 문자 그대로 알고 있는 계명의 율법이 바로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폐하여 졌습니다,
시민법이니 제사법이니 도덕법이니 그런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어디 그런 말씀을 있습니까? 의문에 쓰여 있는 모든 계명은 폐하여 졌습니다, 그러니까 이성이 있는 사람이 문자로 보고 아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은 폐하여졌다는 말씀입니다, 도덕법이 살아 있다는 주장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민법이 폐하여졌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에 이 율법이 기록이 되어 있어도 어느 누구도 이 율법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이스라엘의 시민에게 이런 법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에서는 남의 포도원에 가서 배불리 먹어도 되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2:5절을 보면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먹이다가 그 짐승을 놓아서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제일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제일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레위기 19:10절을 보면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참 이해가 안 됩니다,
출애굽기 22장의 말씀은 이미 설교로 올려 드렸습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를 보면 짐승이 먹으면 제일 좋은 것으로 배상을 하라고 하고 있고 사람은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다고 말씀을 하고 다만 그릇에 담지만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어떻습니까?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버려두고 말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신명기의 말씀대로 내가 가난하면 그냥 들어가서 배불리 먹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릇에 담지만 않고 배불리 먹으면 율법에 가하다고 말씀을 했으니까 그냥 아무 포도원에 들어가서 배불리 먹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율법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이성으로 보면 도무지 납득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와도 너무 맞지 않습니다. 누가 이 시대 포도원을 거두다가 남은 것을 그냥 두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모르시고 율법으로 정해 놓으셨습니까?
그림자입니다,
율법을 볼 때는 늘 그림자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왜 그림자로 보아야 하는가 하면 의문에 쓴 계명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미 폐하여졌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율법 하나하나를 우리가 바로 알아가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이 율법을 제정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으로 보고 그것을 자기 육체로 행하려고 하다가 모두가 저주에 빠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율법의 의미를 모르고 의문에 쓴 것으로 보고 자기 육체로 율법을 행하려고 하다가는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저 예수입니다.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예수만 알고 있지 전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림자 뒤에 감추어져 있는 예수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모르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다 그 의미가 있고 그것을 아는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의 포도원입니다,
지금 이 율법을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이스라엘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사단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네 이웃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을 정해 놓으신 것은 사단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키라고 하신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에게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배불리는 먹어도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1:33절을 보면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포도원의 주인입니다,
주님께서는 포도원을 지으셨습니다, 이 포도원은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되고 이방의 교회라고 해도 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포도원의 주인이라는 것은 성경을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사단에게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는 먹어도 가하고 다만 그릇에 담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포도가 누구입니까?
우리 인생들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씀을 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그 포도원에 들어갈 때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를 죽여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사단이 죽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배불리 먹어도 가하다는 것을 보면 우리 성도가 사단에게 잡혀 먹어도 된다는 것과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포도입니다,
그것은 육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포도원의 포도는 우리 영혼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육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단에 우리 육체를 죽이는 것은 가하다는 말씀입니다. 실제 초대 교회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영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포도원입니다,
사단은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사단이 보이는 포도원에 들어가 포도를 먹은 것입니다, 사단에 의해서 그 영혼이 사망을 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먹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의 교회사를 보면 순교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22절을 보면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사단은 이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교회라는 포도원을 만드셨습니다. 그 포도원에 들어가 사단은 포도를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육체로 죽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에게 성도를 육체로 죽이는 것은 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진노에 그릇에는 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단이 이웃의 포도원 그러니까 주님의 교회에 들어와서 포도원의 포도를 배부르게는 먹을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 육체를 사단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성도들을 다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대로 이미 사단은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릇에는 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그릇이 무엇인가 하면 진노의 그릇이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육체는 먹을 수 있지만 진노에 빠뜨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단이 우리 성도의 육체는 죽일 수 있어도 우리는 진노의 그릇에는 담을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 성도들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율법으로 정해 놓으시고 사단으로 하여금 진노의 그릇에 우리를 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는 사단이 원하는 대로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배가 부를 정도로 우리 성도들을 죽였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단은 지금도 포도원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배부르게 먹고 있습니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배가 불러서 못 먹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대 교회에 수많은 순교자들과 그 이후에도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 육체는 사단이 배가 부를 정도로 먹어 버렸습니다. 왜 초대 교회에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허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진노의 그릇에는 담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을 진노에 빠뜨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이미 율법으로 정하셨습니다. 사단은 우리 육체를 죽일 수는 있어도 영혼을 진노에 빠뜨리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지만 이 율법을 모르다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진노의 대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진노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만 하시는 일입니다, 사단에게는 진노를 하지 못하게 율법으로 정하셨습니다. 만약에 사단이 포도원에 들어가서 진노의 그릇에 담으면 이 세상은 벌써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진노의 대접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에 진노의 대접이 사단에게도 있다면 이 세상을 종말이 왔습니다. 사단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다 진노를 받게 되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멸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죄에 빠져 사망에 이르게는 해도 진노를 줄 수 없다는 것을 율법으로 정하셨습니다.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찌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당신들이 이웃 사람의 곡식밭에 들어가 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먹는 것은 괜찮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됩니다."”
곡식입니다,
우리를 곡식으로 비유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곡식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또 구약의 수장절이 그 곡식을 거둬들이는 절기로 예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오실 때 곡식을 창고에 들이는 것을 수장절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24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우리는 곡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밭에 곡식을 뿌려 놓았습니다, 그 곡식이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 성도들을 주님께서 이 세상에 뿌려 놓으셨고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바로 그 곡식입니다, 이 곡식을 이미 구약에서 율법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좋은 씨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가 아닙니다. 이 시대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좋은 씨가 아닙니다, 우리 육체는 아담의 씨로서 반드시 썩어야 하는 씨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썩어야 하는 씨는 사단에게 먹어도 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손으로 그 이삭을 따는 것은 가합니다,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곡식을 손으로 따도 가하나 낫은 대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율법은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보고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이스라엘과 같이 세상 초등학문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30절을 보면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곡식에 낫을 대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뿌려 놓은 좋은 씨가 있습니다. 그 씨가 있기 때문에 곡식에 낫을 대어서는 안 됩니다. 낫을 댄다는 것은 이 세상에 종말이 온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종말의 때는 분명히 하나님의 권한에 있는 것이지 사단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지 못하도록 율법에 정하셨습니다.
사단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이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릴 수 있는 자입니다, 천사가 얼마나 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정해 놓지 않았다면 사단은 언제든지 낫을 들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베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낫을 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추수 때는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하실 일입니다. 아직은 우리에게 추수 때가 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오래 참으시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까지 오래 참으시고 있지만 인생들은 더욱 더 타락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곡식을 잘라서는 먹었습니다.
그러나 낫은 댈 수 없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으로 보고 있고 그것이 초등학문이 되어서 사망에 이르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율법을 의문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와는 너무 맞지 않습니다. 남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배불리 먹었다가는 고소를 당합니다. 그리고 남의 곡식밭에 가서 그것을 따고 역시 고소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율법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 마시고 그 의문에서 그림자를 걷어내고 율법의 의미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 가를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비밀을 알아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되어서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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