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시편 4:1-8절을 보면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셀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다윗은 왕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왕이기도 합니다, 그가 기록한 시편을 보면 대부분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은 말 그대로 시입니다, 시라는 것은 비유와 은유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시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시로 표현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시가 사라졌습니다, 초대 교회에 잠깐 보였던 시와 찬미는 종교가 되기 313년 이전에 벌써 사라졌던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데도 시가 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바로 찬송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감성이 아닙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시를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를 보면 거의 다 감성적인 언어로 그저 매끄러운 말로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시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이성적인 매끄러운 언어가 아니라 얼마나 그가 지혜가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시편을 감성적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시를 보면 정말 그가 얼마나 믿음에 서 있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시편을 그저 언어로 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이 시편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어떠한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고 있지만 성경을 육의 말씀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영혼의 일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지 우리가 육으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 모든 말씀은 은유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들을 시로 표현을 했습니다, 이 시편을 보면서 그저 다윗이라는 왕이 시를 썼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시편의 거의 모든 시를 그가 기록한 것은 맞지만 그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쓴 시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의 시입니다,
인간적으로 쓴 시는 물론 다윗과 우리 인생들을 은유로 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시는 일들을 시로 표현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과 같이 역시 시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발견이 되어야 합니다,
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으로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감성적으로 감동에 빠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시편을 노래로 해서 부르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노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시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뜻을 모르고 그저 노래를 한다는 것으로 성경을 알고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또 세상 초등학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발달이 하고 있고 또 스마트폰이 나오다 보니까 사람들이 그저 성경의 어느 구절을 그대로 문자로 보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교제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말씀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다 해서 다른 사람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아니 내가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성경을 보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 뜻을 깨달아 질 때 믿음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알아야 합니다,
문자를 아는 것이 아니라 뜻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은 이 세상에서 지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안다고 해서 마치 자기에게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들을 알아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보화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보화를 찾는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보화를 찾지 못하고 있고 그저 성경을 문자로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보화를 발견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면 그 분이 어떠한 일을 하셔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구약 성경에 그림자와 비유와 은유로 기록이 되어 있고 신약에서는 어느 정도 밝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아는 것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성도는 늘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볼 때도 그분을 찾기 위해서 보아야 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어느 한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지혜가 합쳐져서 찾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있어 더욱 더 종교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새번역입니다,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내가 곤궁에 빠졌을 때에, 나를 막다른 길목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다윗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왕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가 시편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저 다윗이라는 왕의 시로 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시편의 말씀대로 하셨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다윗 왕입니다,
그가 왕이 되기까지 그리고 왕이 되어서도 모든 나라를 평정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싸움에서 이기기까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위를 이어 오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지만 그러나 또한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입고 오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의 육적인 싸움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싸우시는 영적인 싸움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한 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똑같이 하셨다는 것을 시편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하나님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수많은 예표와 비유 그리고 직접적으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은유로 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분향단을 통해서 늘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도를 하면 들어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을 보고 다윗과 같이 이렇게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를 하면 들어주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편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기도입니까?
다윗을 통해서 주님이 하시는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복음서에서 알고 있듯이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하나님께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는 오직 주님의 기도만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도 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해도 그것을 들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다윗의 왕위를 이어서 오신 주님께서 하시는 기도 그 기도를 다윗을 통해서 시편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2:27절을 보면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주님의 기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주님의 기도가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17장은 주님의 기도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하시고 그 기도를 들어 주실 줄을 믿고 있습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통해서 주님이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곤란 중에서 기도를 했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셨습니다,
이 기도를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을 받으려고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서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해 달라고 하고 있고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해 달라고 나를 긍휼히 여겨서 기도를 들어 달라고 진심으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진심을 제가 폄하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 기도를 다윗을 빌어서 기도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곤란 중에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길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주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마치 우리가 이렇게 기도를 하면 들어 주시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이런 기도를 모르고 그저 이 말씀을 단어적으로 알고 자기가 부를 때에 응답해 달라고 하면서 간절하게 기도를 하면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만을 응답해 주시고 있습니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셀라)”
공동번역입니다.
“너희, 사람들아! 언제까지 나의 영광을 짓밟으려는가? 언제까지 헛일을 좇고 언제까지 거짓 찾아 헤매려는가? (셀라)”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는 모든 말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들이 주님의 영광을 얼마나 욕되게 하고 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0:29절을 보면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주님의 영광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의 행위를 보면 얼마나 욕되게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단번 속죄도 믿지를 않고 있고 아직도 자기들의 죄가 생각이 나서 그것을 고백하는 회개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허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시편2편1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허사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허사가 무엇입니까? 사전적으로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가 다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하신 명령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는 그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구원과 아무 관계가 없는 율법의 행위에 빠져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을 하고 있고 그것으로 구원을 받지 못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욕되게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 합니다,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간사스럽고 교묘한 일을 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교회 안에서 궤휼을 구하고 있습니까?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거짓 일군들이 의의 일군으로 가장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의의 일군과 거짓을 분별을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런데 관명의 천사로 가장한 거짓의 일군들이 자기의 의를 가지고 교묘하게 일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육체의 모양을 가지고 자랑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육체의 모양을 자랑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욕되게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시편의 말씀과 같이 교회는 서로 자기들의 행위를 자랑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허사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하는 모든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구원과는 아무 소용이 없는 육체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행위고 또 신앙생활의 모든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그렇게 만듭니까?
거짓 선지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만들어서 궤휼에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허사를 좋아하면서 그것으로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만들고 그것을 자랑함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욕되게 하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인생들아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그 헛된 영광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영생을 이미 얻었다고 하지 마시고 우리는 성경에서 늘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은 하지 않고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의 삶입니까?
그것이 허사이고 궤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구원을 받은 성도는 절대로 그런 허사를 좋아하지도 않고 궤휼에 빠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는 오직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에 힘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까? 사람이 평생을 성경을 보면서 그것만을 알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얼마나 오묘한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가라지는 자기가 다 알았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허사를 좋아해서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율법을 지키고 또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성도는 다릅니다.
절대 게으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 구원을 받기 위해서 늘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본을 보여 주신 것이 바로 주의 만찬입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는 늘 모일 때마다 주의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주의 만찬은 사라졌고 그저 허사를 좋아하는 이야기만 난무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새번역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을 각별히 돌보심을 기억하여라. 주님께서는 내가 부르짖을 때에 들어 주신다.”
경건한 자입니다,
성경에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할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데반집사가 순교할 때 경건한 사람들이 크게 울었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경건한 자입니까?
로마서 4:5절을 보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을 아니할지라도
이 말씀은 율법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셔서 그를 경건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경건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거의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사람은 경건한 자가 아닙니다, 반드시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일을 하지 않을지라도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셔서 경건하다고 인정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경건한 자를 주님께서 부를 때에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율법 허사입니다,
그리고 궤휼입니다, 이제 성도는 그것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경건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미 시편에서 누가 경건한 자인가를 말씀을 해 주고 있고 그런 경건한 자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실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경건한 자가 된 성도를 위해서 주님께서 기도해 주시고 있습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공동번역입니다,
“무서워하여라, 다시는 죄짓지 마라. 자리에 누워 반성하여라, 고요를 깨지 마라. (셀라)”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아는 성도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두렵고 빌립보서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룹니까?
사람의 이성으로는 복음에 복종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늘 우리는 보이는 영광 율법에 의해서 미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허사를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허사를 보면서 늘 속히 다른 복음에 미혹되기 때문에 늘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의 문자 그대로를 범하는 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죄입니까? 허사를 좋아하는 죄를 그리고 궤휼을 구하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그리고 행위를 하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떤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있습니다. 제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죄라고 하면 오히려 저를 비난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가 허사라는 것을 아는 성도는 절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이 이루시는 구속의 일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떠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얼마나 요란을 떨고 있습니까? 그러한 모든 것들이 다 영적인 죄를 짓는 일이며 그런 죄를 짓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공동번역입니다,
“제물을 바쳐 죄를 벗어라. 그리고 여호와만을 의지하여라.”
제물입니다,
의의 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문자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까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성경을 도무지 모르고 있습니다. 의의 제사라고 하니까 자기들이 의롭게 제사를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의의 제사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 속죄 제물이 되어서 단번에 드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의 제사는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드릴 수 있고 그 제사를 이미 2000년 전에 드리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 우리는 다시 제사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의의 제사가 무엇인지도 그리고 그 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이 시편의 말씀을 보고 자기들이 더욱 정성스럽게 제사를 드리려고만 했기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스라엘은 그림자였기 때문에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밝히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의의 제사를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의의 제사를 믿는 성도가 여호와를 의뢰하는 성도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제사를 안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는 가라지에 불과합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새번역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큰 복을 내려 주십시오."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며 불평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의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 주십시오.”
고린도후서4:6절을 보면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선을 보일 자 누구뇨
이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선을 보일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선한 일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선하다고 할 수 있지만 선이라는 것은 반드시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을 보였습니다.
그러면 그 선으로 생명을 주어야 그 선을 보는 사람이 생명을 얻어야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선을 보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춰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 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춰주셨습니다, 이 시편의 말씀 그대로 주님이 오셔서 비춰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이 이렇게 신약에 와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교회 안에서 허사를 좋아하고 있고 그 허사를 한 것으로 가지고 간증이라고 하면서 서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이 오셔서 진리로 인도를 하고 있지만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릅니다,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문자적으로 자기가 조금 알고 있는 세상 지혜를 가지고 마치 대단한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취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우리 마음에 비춰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성막에서도 예표를 해 주셨습니다, 등대를 통해서 우리에게 비춰 주실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셔서 우리 성도들이 이 시대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기쁨을 다윗이 시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 내 마음에 두신 기쁨입니다,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마음으로 믿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어느 것으로도 이 기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은 성도만이 알 수 있는 기쁨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성도가 그에게 붙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 영의 부활의 신비로운 일을 아는 성도만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누리는 기쁨보다 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 가졌다 해도 구원의 기쁨에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성도는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에 빠지고 있습니다, 성도는 자기 영혼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 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허사로 인하여 궤휼에 빠지고 있습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공동번역입니다,
“누운즉 마음 편하고 단잠에 잠기오니, 여호와여, 내가 이렇듯 안심하는 것은 다만 당신 덕이옵니다.”
7-8절은 다윗으로 돌아 왔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도 평안히 누워서 잠을 잤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서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이제 다윗이 자기가 평안히 죽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선이 바로 우리의 부활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잠잡니다,
성도는 죽는 것이 아니라 잠을 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을 보여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평안히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평안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잠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평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선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붙은 자도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부활을 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저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아는 것으로 마치 자기들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믿는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허사를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궤휼을 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금도 나를 위해서 기도하심으로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말씀을 바로 알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복음과 율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스기야 왕의 기도 (0) | 2019.02.07 |
---|---|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0) | 2019.02.07 |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0) | 2019.02.05 |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0) | 2019.02.05 |
너는 내 말로 고할찌어다 (0) | 2019.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