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복음과 율법-설교2

제33강, 할례​​

윤주만목사 2018. 10. 23. 19:53


33, 할례​​

로마서 4:11절을 보겠습니다. (244)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와 너희 중에 있는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로 정하셨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은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 할례라는 것이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는데 있어서 아무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후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할례는 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라고 신명기에서 이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몸에 할례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사실 성경을 본다는 것이 힘들어서 할례에 대해서 어느 한 부분을 인용을 하면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무할례가 또 무엇입니까? 정말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율법을 가지고 다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런 것이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을 보았습니다.

누군가 이 시대 방언은 100% 거짓 방언이고 마귀의 장난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방언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벌떼 같이 달려들어서 그 글에 방언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방언을 하면 뭐 합니까?

또 방언을 안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집니까? 그것을 가지고 논쟁을 한다는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런 것이 다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은사를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시대하고 있는 방언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아니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중요한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전혀 모르고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그들이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은사

절대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쓰레기와 같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중요한 것에 마음을 다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중요하지도 않고 아니 무익한 것을 가지고 누가 옳은가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항상 다 지킬 수 있습니까?

내게서 은사가 나타나는 것이 구원의 표징이라도 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치열한 논쟁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그런 것은 다 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중요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마치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것은 내가 의롭지 못한 인생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반드시 의로운 사람만이 갈 수 있는데 오직 예수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의롭다 함을 얻지 못 합니다, 그러나 의인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 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하면 우리 육체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탄생이 되는 영으로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의 일입니다,

내 육체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내 육체는 이미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망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죽은 이유는 내가 죽음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탄생이 되고 그것을 의롭다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나 무 할례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아무 효력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아무 효력이 없는 율법을 가지고 다툼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것이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그 율법을 보고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합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반드시 율법책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키지 못하면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안 지키고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그 안에서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그 외에 모든 것은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내 생각을 가지고 성경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 마시고 성경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면 그것만을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3:16절을 보겠습니다, (14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모든 성경을 함축한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316절 말씀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어떻게 사랑하시는 가를 이 말씀만으로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또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말로는 너무도 잘합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을 할 정도로 이 사랑을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독생자를 보내 주셔서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왜 구원을 못 받는가 하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성경의 문자를 보고 자기들이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주님 앞에 나온 부자 청년도 자기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가 정말로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까? 표면적으로는 혹시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이면을 알고 나면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의 행위로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고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할 수 없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고아도 할 수 있고 과부도 할 수 있고 나그네도 할 수 있는 저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 하시고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보고 믿는 역사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 중요한 것을 모르고 그저 성경에서 문자적으로 율법을 보고 그것을 아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를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입니다.

율법으로 흠이 없으면 뭐 합니까?

이스라엘이 그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다가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멸망하지 않는 성막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지만 그들은 성막을 보고도 그저 제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그렇다고 율법을 버렸다고 해서 구원을 받습니까?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할례나 무 할례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서 율법을 폐하는 것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효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눈으로 보았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믿는 믿음이 내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역시 효력이 없습니다.

성도는 당연히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있는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중요하지 않은 것은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을 아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 것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하지도 않고 효력도 없는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중요한 것을 지나치고 있습니다.

유다서1:20-21절을 보겠습니다. (398)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입니다,

유다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믿음이 주어지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정말 이 믿음의 도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는 믿음의 도가 무엇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건축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건축합니까?

성전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을 건축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다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갈라디아에서는 사랑으로써 역사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식이 병이 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자기들이 아주 조금 아는 지식을 가지고 마치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복음과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할례나 무 할례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아무 효력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킵니까?

그것으로는 반드시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안 지킨다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유다서에서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써

사랑 안에서, 같은 말씀입니다, 정말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있어 역사를 함으로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는 그것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있습니까?

듣고 믿었습니까?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까? 그것 역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일이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내게 임해야 합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율법과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서 율법을 안 지키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안 지킨다고 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단번에 주신 믿음입니다,

유다서에서는 그것을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에서 자기를 지켜야 합니까? 오직 믿음을 방해하는 행위에서 나를 지켜야 합니다,

육체의 행위입니다,

거기서 나를 지켜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역사하는 힘으로 나를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믿음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믿음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중요하지도 않은 것으로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율법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이 싸움은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사람의 감성은 계속해서 나를 미혹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미혹에서 내가 이겼다고 해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내 안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의 비밀을 모르고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논쟁을 아직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도 무할례도 효력이 없고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7절을 보겠습니다. (308)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잘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여러분을 가로막아서,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였습니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서냐는 그 말씀대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은 듣고 믿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달음질을 했습니까?

영생입니다,

성도는 늘 이 영생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면서 오직 영생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생에 대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종교적인 행위나 율법의 행위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는 일에만 열심을 냈습니다.

성도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디로 가기 위해서입니까? 성경은 천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천국이 없다면 우리 성도들처럼 불쌍한 자가 없다고 저 역시도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종교인으로서도 그리고 세상 사람으로서도 살지 않고 오직 영생을 위해서 모든 고난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오직 영생이라는 그것 하나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부활의 신령한 몸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축복을 받는 그 상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실 성도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종교인들과 같이 율법을 지켜서도 안 되고 또 은사를 나타내서도 안 되고 성화가 되려고 하는 모양을 내서도 안 됩니다,

속된 말로 유령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성령으로 난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율법의 행위를 버리고 은사를 나타내지 않아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를 죽이는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는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도 같지 않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허무맹랑해서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내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율법주의자처럼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그런 예배를 드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찬송을 부르면서 감격해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사실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잘 달려 왔다고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달음질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여러분이 이제까지 잘 달려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9:24절을 보겠습니다. (27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왜 달음질을 합니까?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상을 얻기 위해서 달음질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영생이고 또 천국이라는 것을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가 율법을 안 지키고 듣고 믿음으로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영생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해서 받았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듣고 믿었습니다, 듣고 믿는 것을 달음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상이 없다면 정말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인정합니까?

세상에서도 버린바 된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종교적인 외식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듣고 믿고 있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타낼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성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이 세상에서 아주 큰 분복을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보아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이 보아도 우리는 도무지 구원을 받을 사람과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달음질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하고 있습니까? 진리의 성령이 우리 안에 임재를 해서 성경에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종교인이 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복음을 전하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실 복음이 있는 성도만이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정말 고독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싶을 때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아니 아주 작은 것 하나만이라도 해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죽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고 오직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제 뼈 속까지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마찬가지라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선지자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큰 복을 누리며 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영생을 바라면서 살아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상입니다.

그렇게 사는 이유가 단 한 가지 우리에게는 상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고 성령이 우리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서 상을 받기 위해서 달음질을 하고 있지만 우리 성도는 보이지 않은 천국의 상을 위해서 달음질을 하고 있습니다.

더 힘이 드는 일입니다,

사실 복음을 바로 전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교회가 이렇게까지 부흥이 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는 바알이 그대로 들어와 있어서 자기들이 잘 믿으면 세상에서 복을 누린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고 교회 안에서 실제 그러한 일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열심을 다 해서 달음질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다릅니다.

이미 내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한 마디로 죽은 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을 굳게 세우는 것이 우리의 달음질이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9:25-27절을 보겠습니다. (274)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이기기를 다투고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 이기기를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썩을 것을 얻기 위해서 달음질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썩을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의 육체는 다 썩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달음질을 하는 사람이 있고 썩지 아니할 것을 위해서 달음질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썩을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육체로 행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그것은 다 썩을 것이라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행위가 다 썩는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 썩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것이 다 썩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달음질을 하는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 상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육체의 썩을 것을 위해서 달음질을 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썩을 면류관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이 세상에 있는 교회에서 마치 구원을 받은 성도와 같이 면류관을 씌워 주는 것과 같이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것을 위해서 달음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달음질이 율법의 행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도의 달음질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달음질을 잘 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복음을 듣고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달음질을 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합니까? 세상의 면류관을 얻는 그들도 절재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절제를 하는 것과 같이 우리 역시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달음질 잘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위해서 달음질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목표를 정하고 달음질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남들이 뛰니까 다수의 무리를 따라 뛰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의롭다 함을 얻어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달음질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뭐 합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줄을 모르고 마치 방향을 모르고 뛰는 사람과 같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에 굳게 서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달음질을 하고 있습니다.

방향을 모릅니까?

아니 내가 가야 하는 목적지를 모르고 있습니까? 차라리 뛰지 않는 것이 그에게 더 유익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자기들이 무엇을 위해서 달음질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디가 목표점인지도 모르고 있고 어디로 뛰어야 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종교라는 거대한 힘에 휩쓸려서 가고 있습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시기 바랍니다,

어디에 그렇게 합니까? 율법에 그렇게 하지 마시고 복음에 내 몸을 쳐 복종시키시기 바랍니다, 사실 율법을 지키는 일보다 율법을 전혀 안 지키는 일이 더 힘이 듭니다, 물론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가 몇 가지 율법을 지키는 일은 사실 더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율법을 안 지킵니다,

몇 가지 자기들이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지키는 일보다는 율법을 아예 안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늘 정과 혈과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음질을 잘 해서 천국의 상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1:22절을 보겠습니다, (378)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진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순종이라는 단어만 보지 마시고 어디에 순종해야 하는가를 바로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한다고 하면서 율법을 너무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할 때도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겠다는 말을 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고 행위를 하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순종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입니다, 성경은 다른 것에 순종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순종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만 해도 진리에 순종하면서 달음질을 아주 잘 했습니다.

그렇게 진리에 순종하여 영혼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진리에 순종하면서 영생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디에 순종해야 하는 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저 순종이라는 말의 뜻이 좋다 보니까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순종한다고 하면 다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그 순종이 사실은 다 악한 행위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 진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순종을 자기 행위로 나타내려고 하고 있고 자기들이 어떻게 순종했는가를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 다른 사람도 자기들과 같이 그렇게 종교에 순종하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두 남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생명을 얻는데 있어 두 남편과 같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하나가 율법이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한다는 말씀은 교회 안에서 어떤 행위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아들에게 순종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만 해도 그들은 정말 순종하면서 살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잘 달음질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떠나고 나자 진리에 순종하던 그들을 순종케 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달음질도 잘하는 사람이 없고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그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듣고 믿는 것이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순종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이 시대는 불행합니다.

분명히 종교적으로는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와 같이 핍박도 없고 고난도 없습니다, 그러나 거짓 형제들로 인하여 다른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2000년 가까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종교가 되어서 이제 신학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그 학문을 배운 사람들이 자유롭게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신학이 아닙니다,

솔직히 저도 신학을 공부 했지만 그러나 거기서는 제가 진리를 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이 시대 어느 신학도 진리에 순종하게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혹시 개인적으로 목사는 있을지 몰라도 신학교는 아예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복음이라고 하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달음질을 하고 말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순종해서 달음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에 순종을 하면서 달음질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들의 달음질이 진리에 순종치 않게 하는 것임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진리에 순종치 않게 하는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14:1-2절을 보겠습니다. (21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사도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그들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마음을 선동하여 악감을 품게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입니다.

제가 계속해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라고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앞에서 미리 말씀을 드렸지만 정말 교회에 대해서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진리에 순종치 않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표면적인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며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니까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악감을 품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모르면 가만히 있는 것이 중간에라도 간다고 말 합니다, 하지만 율법주의자들은 이렇게 그 율법에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 저주를 자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복음에 순종치 못하게 하는가 하면 바로 율법주의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도 율법을 지키는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서 진리에 순종치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게 하는 사람이 진리에 순종치 못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수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뭐 합니까?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차라리 세상 죄인으로 사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유대인들이 무엇으로 진리에 순종치 않았는가를 성경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습니다.

이 세상 죄인이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진리에 순종치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저주를 받습니다. 성경에서 유대인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할례를 받는 너희는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누가 너희를 막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달음질을 잘하고 있었는데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에 순종치 않게 했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이제까지 갈라디아서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유대로부터 온 거짓 형제가 할례를 받게 한 그것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그것을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진리에 순종치 않는 사람입니다, 율법 전체가 아니라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진리에 순종치 못하게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율법의 제3용도를 이야기 하면서 율법을 지키라고 하면서 진리에 순종치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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