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복음과 율법-설교2

제20강, 저주

윤주만목사 2018. 10. 21. 10:16


20, 저주​​

갈라디아서 3:12절을 보겠습니다. (305)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그 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믿음은 전혀 다른 본질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도 지키고 믿음도 갖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본질의 것을 합쳐서 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이기 때문에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율법을 지킨다.

이 말이 얼마나 비성경적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성도는 율법을 잘 지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는데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은 성경을 무시하고 있고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믿음이 좋아서 율법을 잘 지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믿음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꼭 이렇게 꼭 집어서 말씀을 드려야 압니까? 율법이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면 믿음도 역시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 초보에 머물러 있습니다.

초보입니다.

성경을 보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그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면 믿음도 역시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그렇다면 믿음이 있어서 율법을 지킨다는 말은 다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들으면서도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고 믿음이 있는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면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릅니다.

믿음과 율법은 그 기초가 다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율법은 믿음의 기초에 둔 것이 아니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근본이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율법과 믿음을 믹서에 넣고 아주 잘 썩어서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교인들은 믿음이 무엇인지 율법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기초의 말씀입니다.

율법과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성경적인 기초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계속 말씀을 드리지만 이 기초의 말씀을 흔들면 성경을 아무리 많이 보고 안다 해도 그는 진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이 세상 지식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과 믿음

성경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 국어를 알기만 해도 이 둘은 기초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법으로 정해 놓은 것을 사람이 그대로 지키는 것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성경에서 보고 알아 믿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둘이 같을 수 있습니까?

이 둘이 어떻게 다른가를 이미 창세기부터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율법이 기록이 되어 있고 믿음이라는 단어가 많이 있다고 해서 마치 이 둘을 함께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도 생명을 주고 믿음도 생명을 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생명을 얻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직까지 율법으로는 생명을 얻은 사람이 없고 아담도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진노를 이룬다는 것을 분명히 성경에서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분명히 율법 책에 기록이 된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키면 생명을 얻는 것은 분명하지만 반대로 못 지키면 진노를 받는다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가 율법과 믿음이 같다고 했습니까?

아니 믿음이 있는 성도가 율법을 지킨다고 누가 말씀을 했습니까?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은데도 사람들의 생각에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알고 있는가 하면 바로 거대한 종교에 의해 끊임이 없이 세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은 살고 죽는 문제의 것입니다, 누가 더 의롭냐 하는 계량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성경에서 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계량의 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성도로서 당연히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의 것이라고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다 지키면 그 행위로 산다는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서 삽니다.

그러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살고 죽는 문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면서 그 방법을 주셨는데 율법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다 지켜야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더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사는가를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은 누가 생명을 얻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3가지 비유를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비유들이 다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하면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살고 누가 죽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바리새인과의 대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버림을 받는가를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내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다 지키면 뭐 합니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볼 때 어려서부터 구원을 받을 만할 정도로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또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켜서 서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졌다고 말 합니다.

하지만 뭐 합니까?

그 율법의 의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은 지나가는 안개와 같고 사라지는 그림자 같습니다.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이고 싶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켜서 아직까지 그리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살 사람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정의입니다.

 

레위기18:5절을 보겠습니다. (174)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로마서3:19절을 보겠습니다, (243)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입니다.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이스라엘이 깨닫지를 못해서 결국에는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살리라고 하셨다고 해서 자기들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인 일입니까? 국어를 모르다 보니까 레위기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레위기의 말씀을 보고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레위기의 말씀을 보고 그저 살리라는 그 말씀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사는 것은 맞지만 이 세상에서 그로 인하여 산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도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해가 됩니다.

아직까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가 기록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되고 누구라도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율법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이방에게는 신약 성경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구약을 따로 보고 신약을 따로 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말씀이 없다 보니까 그들이 이 말씀을 보고 이를 행해서 살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방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도 성경을 모르다 보니까 아니 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다보니까 그저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말씀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는 그 말씀만 생각합니다. 만약에 이를 행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리 말씀을 드렸지만 사람이 왜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인 화성에 가지 못하는가 하면 죽기 때문입니다, 아니 인류가 거기까지 지금의 과학으로는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태양계를 벗어나서 우주로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못 갑니다, 가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못 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그로 인하여 삽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으로는 살 수 없다면 율법을 폐해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이 없고 범함이 없으니까 믿음으로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러면 온 율법을 항상 다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율법을 지키지 못 합니다. 아니 단 한 가지도 율법을 지키지 못 합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진노를 받습니다.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못 지켜서도 이 말씀을 하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이미 그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순간에 율법을 범하게 되기 때문에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삽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할례라는 율법을 자기 몸에 했습니까? 그것으로 율법을 지켰다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사람의 이성으로는 할례라는 율법을 지킨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할례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율법이 다 살아나서 율법을 지키는 자는 결국에는 율법을 범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모든 입을 막고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율법은 계량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더 많은 율법을 지켰는가 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율법을 항상 다 지켰느냐 아니면 단 하나의 율법이라고 범해서 율법을 범한 자가 되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경중을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법정은 경중에 있습니다. 어느 법을 어겼을 때는 간단하게 벌금만 내면 됩니다, 그러나 어느 법을 어겼을 때는 구속이 되기도 합니다, 구속이 되어서도 법의 경중에 따라 어느 사람은 오랜 세월을 감옥에 있어야 하고 어느 사람은 금세 풀려나오기도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 법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벌금을 냈습니까? 그도 율법을 범한 자입니다, 한 달을 감옥에 있었습니까? 그도 율법을 범한 자입니다. 또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까? 그도 율법을 범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범한 자는 율법을 범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지키고 싶습니까?

우리가 율법을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율법이 없어야 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율법 잘 지킵니까?

그런 환상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잘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율법을 항상 다 지켜서 율법으로 살아야지 잘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감성적인 생각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단은 그렇게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율법을 잘 지키는 자기를 보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잘 지키는 것은 안 됩니다.

성경은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지키는 것과 사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욥과 같이 아무리 잘 지켜도 살지 못한다면 그가 지키고 있는 율법이라는 것은 사라지는 안개와 같고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신명기30:15절을 보겠습니다. (310)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이스라엘입니다,

그들 앞에는 생명의 복과 사망의 화가 있습니다. 지금도 역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복과 사망의 화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그 말씀을 보고 내가 생명을 얻었다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까?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기까지 애굽에서 광야에 나온 20세 이상의 장정들은 다 죽고 말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왜 죽었는가 하면 히브리서에서 저희가 믿지 아니함으로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모든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지를 않아서 천국의 모형인 가나안에 들어가지를 못 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화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생명의 복과 사망의 화를 누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생명의 복을 주고 이방인들에게 사망의 화를 준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들은 이스라엘에게 네 앞에 생명의 복과 사망의 화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보라 네 앞에 생명의 복과 사망의 화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화가 있습니다.

이 화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화를 누가 당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방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화를 당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화로 다가오는 그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입니다,

율법 613가지를 다 지키는 것도 율법 아래입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단 한 가지를 지켜도 역시 율법 아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에서 단 한 가지 할례라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는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는 이같이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단 한 가지가 율법 아래가 되고 있습니다.

사망의 화입니다.

그리고 저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온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율법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13절을 보겠습니다. (30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는다는 분명한 성경 말씀을 보고도 너무 담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율법을 지키면 어떻게 되는 가를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지혜를 구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거짓 형제에 속아서 다른 복음을 들으면서 사망의 화를 당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정말 그 이름만 생각해도 내 가슴이 벅차야 합니다, 그 이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짐승보다 더 못한 삶을 살다가 사라지고 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율법으로는 우리는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 저주에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왜 저주를 받으셨는가 하면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저주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나는 복음을 듣고 율법을 안 지켰습니까?

물론 그렇게 주장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이 범죄 할 때 이미 율법 아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율법 아래서 저주를 받아야 하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은 자가 되어 죽으셨습니다.

율법의 저주입니다.

이것에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생은 모두가 율법의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율법 아래 있었든지 율법 아래 없었든 우리 인생 모두는 율법을 범한 자이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의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그 죄를 속량해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속량은 몸값을 받고 놓아준다는 사전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 모두는 율법의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몸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놓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속량하셨습니다,

율법으로는 분명히 우리는 모두가 다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놓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율법의 값은 다 지불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율법을 다 지킨 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으로는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우리가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몸값을 지불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율법은 우리를 저주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율법 아래 있었고 율법으로는 반드시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죽어야 하는 값을 지불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몸값을 지불하셨으면 더 이상 율법은 우리를 저주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저주하지 못 합니다.

또 율법으로는 우리가 이미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죽은 자가 다시 율법을 지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는 다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습니다. 아니 죽은 자는 더 이상 율법이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형수입니다

그가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이 되어서 죽었습니다. 이 죽은 자가 다시 극악무도한 죄를 지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영의 일을 믿는 것이라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무엇에 의해서 저주를 받았는가 하면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저주를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저주해서 죽게 하기 때문에 율법을 에베소서에서 원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원수를 다시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완전히 다시 죽여 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육체는 율법의 저주를 받아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은 바로 이 일을 이루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 육체가 죽었는데 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가 죽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또 저주를 받으면 그 영이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저주를 받아 죽었기 때문에 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그 영혼이 살 수 있는데 저주를 받는 율법을 지키니까 영혼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5:2절을 보겠습니다. (314)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이 오신 목적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고 또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부터 예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셨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드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를 위하는가 하면 우리는 모두가 율법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율법을 잘 지켜서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 모두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모릅니다.

아니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제물과 생축으로 드리셨는데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무엇을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는가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저주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율법의 저주를 받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이 세상의 어느 한 사람이라도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다면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는데도 이 시대는 원수 된 그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죽었습니다.

이제 또 율법을 지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것을 믿지 않겠다는 자기 행위의 표현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떠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사람의 이성에 따라 그것이 의롭게 보이니까 잘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잘 지키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데 주님께서 우리가 받을 저주의 값을 지불하시는 놀라운 영의 일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성도라면 당연히 이제는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이 시대 성도가 있습니까?

물론 아주 적은 숫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행위로는 복종치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을 저주를 속량 하신 십자가를 믿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율법이 주는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종교인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다가 저주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구속의 일을 거절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모든 치욕을 받으시면서 십자가를 지졌는데 지금 이 시대 교회는 주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의 저주입니다.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제물과 생축으로 드리셨습니다. 우리를 저주하는 원수 율법에서 속량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교회만 들어오면 율법을 잘 지키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보면 뭐 합니까?

그리고 자기가 이성적 지식으로 성경을 많이 알면 뭐 합니까?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에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의 무엇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모르면 그는 아무리 주여 주여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할지라도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욕을 보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마침이 되었습니다.

그 마침의 방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가 아무리 주님의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 뭐 합니까? 교회 마다 십자가를 걸어두면 뭐 합니까? 그리고 여자들은 십자가의 형상으로 된 것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면 뭐 합니까? 그리고 교회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게시물에 십자가의 형상을 그려 넣으면 뭐 합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십자가의 형상도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시대는 십자가가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종교의 표식이 아닙니까?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그 십자가의 형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초대 교회는 십자가를 만들 수도 없었습니다. 만약에 그들의 교회에 십자가의 형상을 걸었다면 아마도 성도들의 씨가 말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십자가의 형상을 걸어 논다고 해서 그것이 정통입니까? 십자가에서 주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도 모르고 율법을 지키면서 교회에 십자가를 걸어 논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고 율법에서 자유하게 하셨는데도 그 십자가를 모르고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10절을 보겠습니다. (39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우리를 속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야기가 하는 그들이 십자가에서 하신 그 일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믿지를 않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그냥 죄인이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욕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율법에서 속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킨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단 한가지의 율법이 주님의 십자가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율법을 지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있다면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라고 하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면서 주님이 하신 구속의 일이 아무 의미가 없게 만들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면 얼마나 부끄러우시겠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주님을 그렇게 부끄럽게 만들고 있는 그 율법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초대교회에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 할례를 받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할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색해 졌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를 갈라디아서 3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 안에는 많은 구속의 일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으로 저주를 받았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값으로 사셨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았는데도 사람들은 왜 주님이 저주를 받으셨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십자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라고 하고 있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아주 작은 지식을 가지고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행위로 부인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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