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강, 은혜
고린도후서 8:9절을 보겠습니다, (신 294쪽)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인생은 다 가난합니다.
아무리 그가 욥과 같이 살았다 해도 역시 가난합니다. 왜 가난한가 하면 영생에 있어서 가난한 자가 쓸 것을 요구할 때 그것을 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율법은 분명히 육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은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림자가 걷혔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가난한 자입니다, 우리 인생은 다 가난한 자입니다 영생을 얻는데 있어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아무리 욥과 같이 살았다 해도 가난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보고 자기가 가난한 자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그 가난한 자가 요구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다 영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가난한 자가 요구하는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육체적으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 가난한 자인데 형제가 쓸 것을 요구하면 넉넉히 꾸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것을 고린도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케 하신 부요하신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위해서 가난한 자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가난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형제라고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형제가 가난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형제가 주님에게 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자기 부요하심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고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로마서 8:37절을 보겠습니다. (신 251쪽)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주셨습니다,
우리가 쓸 것을 넉넉히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케 하셨습니다, 부요하신 자라는 말씀입니다, 그 부요하심을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우리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율법을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육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성경을 보고 육에 일로 만들고 있습니다. 왜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는가를 율법을 통해서 알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 율법을 자기들이 지키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의를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겼습니다.
영생에 대해서 넉넉히 이겨서 이미 천국에 앉아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형제가 되어서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가 쓸 것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영생에 대해서 넉넉히 주셨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키시는 것임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인생들이 하지 못할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도리어 주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데 종교에 빠져 그저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정한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켰습니까?
절대로 우리 인생은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제가 아무렇게나 살라고 방종을 이야기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데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윤리와 도덕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율법을 왜 지킵니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데 왜 지킵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지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셨으니까 지킵니까? 그것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는 그것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밥을 먹습니까?
왜 물을 마시고 있습니까? 그것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밥을 먹어도 살 수 없고 물을 마셔도 살 수 없다면 우리는 굳이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먹으니까 나도 먹습니까? 그것처럼 어리석은 말이 어디 있습니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난한 형제에게 그 쓸 것을 요구하는 대로 꾸어 줄 수 있습니까?
율법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입을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초등학문을 가지고 자기들이 율법을 알고 있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들이 율법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몰랐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 그래서 지키라고 하는 그들이 율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알고 있으면 감히 자기가 가난한 형제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노숙자를 위해서 한 끼 식사를 제공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고 또 기독교인들이 유니세프 같은 기관에 후원을 하면서 마음으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분명히 사람의 이성으로는 옳은 일이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세상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일꾼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욥과 같이 그렇게 살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 24:17절을 보겠습니다. (구 299쪽)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
나그네, 고아, 과부,
하나님께서는 이 세 사람을 늘 생각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아카데미 강의 때 말씀을 드렸지만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요, 고아요, 과부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객이 누구고 고아가 누구고 과부가 누구라는 것을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재판했습니다. 이 율법 역시도 진짜 세상의 객과 고아와 과부를 말씀하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보면서 객과 고아와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지 않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부패한 재판부는 민심을 사기 위해서 이런 사람들 중에 송사가 걸리면 억울하지 않게 해서 자기들의 정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성경에 이 말씀이 있고 모든 사람들이 객과 고아와 과부가 얼마나 어려운 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정치가들은 자기가 얼마나 가난한 자를 위해서 민생을 살피고 있는 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아주 철저하게 그리고 공정하게 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봅니다.
그러면 그것을 문자적으로 보고 자기들이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이나 종교를 가지고 있는 법관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생활을 하고 있고 자기가 하는 그런 행위들을 통해서 심지어는 그 일을 할 수 있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법관으로 삼았다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정말 율법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아니 그것조차도 이 시대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율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성령이 오셔서 감동을 해 주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경의 감동을 받아 성경을 보는 사람이 지극히 적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객이 아닙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 객이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와서 우리나라에 머물고 있는 사람을 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객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고백입니다.
내 나그네의 생활이 험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닌 성도는 나그네의 생활이 험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나그네가 송사를 당하고 있습니다. 누구로부터 송사를 당하고 있는가 하면 이 세상의 주인으로부터 송사를 당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너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욥기 29:16절을 보겠습니다. (구 789쪽)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앞서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욥은 정말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생소한 자라는 말씀은 나그네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욥은 그 지방에서 족장이며 그 족장이 세력이 조금 더 커지면 왕이라고도 했습니다. 욥은 당시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송사를 판단해 주었습니다.
욥은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욥에게 와서 판단을 받았습니다. 욥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재판을 하는데 있어 자기가 처음 본 그 사람의 일도 사실 대로 판결을 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인척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소한 자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송사가 걸렸는데 욥은 자기 인척이라고 해서 그를 보아 준 것이 아니라 생소한 자가 바르다면 그 일에 대해서 사실대로 판결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이 시대 우리나라 법관들이 이렇게 판결을 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나라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제도 우연히 옛날에 상영이 되었던 영화를 잠깐 인터넷으로 보았습니다. 그 내용이 재판에 대한 결과를 가지고 복수를 하는 일인데 부자의 자녀들의 송사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조작을 해서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재판을 억울하게 해서 벌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영화입니다.
그 결말은 모두의 복수로 끝을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의 송사에서 거짓 증언을 함으로 해서 그 가족의 복수심 때문에 모두가 더 불행한 일이 발생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돈이 있으면 재판도 자기 마음대로 유리하게 했습니다, 더구나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과 생소한 사람의 재판이라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욥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무리 자기 곁에 있는 친척이라고 해도 또 설령 자기 가족이라고 해도 욥은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 하여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 욥기를 볼 때마다 욥은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세상을 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 욥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기 위한 예표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객과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욥은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 하여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욥이 율법을 지켰습니까? 지금 신명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율법을 지켰느냐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신명기의 말씀과 욥기를 본다면 거의 모든 사람이 욥은 율법을 지켰다고 말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율법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문자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그대로 행하는 것을 보면서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바로 알지 못하면 이렇게 세상 초등학문에 빠져 율법을 지켰다고 하고 있고 욥도 율법을 지켰으니까 자기도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 초등학문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은 다 망하는 길로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욥이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다고 해서 객과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지 않게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 사상에 빠져 있는 사람이고 그는 율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 중에서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메시아인가에 대해서 요한복음 7장에서 서로 변론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고 말을 하고 있고 어느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 자리에 주님께 왔던 니고데모도 있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저희가 율법을 알지 못한다고 말을 하면서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를 향해서 저주를 받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저주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율법을 모릅니까?
욥과 같이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는 사람이 율법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까? 제가 욥이 한 그 행위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이 시대 법관들은 욥과 같이 고아와 생소한 자의 일을 억울하지 않게 하고 사실하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했다고 율법을 압니까?
그것은 율법을 아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물론 문자적으로는 율법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율법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율법도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율법을 인생이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는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은 율법을 지킨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율법은 지켰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계명은 지키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은 사람의 계명을 지킨 것이지 율법을 지킨 자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신명기의 율법을 보고 욥이 한 말을 들으면서 마치 율법을 지킨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지킬 수 있는 율법입니까?
사실 율법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아예 지킬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율법 자체를 우리 인생들은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육체적으로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마치 율법을 지킨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진짜 율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8:33절을 보겠습니다. (신 250쪽)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과연 인생 중에 누가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답을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의 송사를 풀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송사입니까?
의롭다 하는 송사입니다. 사단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가지고서 객과 고와와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객과 고아와 과부를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의롭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객이 고아가 그리고 과부가 지키지 못한 율법을 다 이루시고 부요하게 해 주셨습니다.
욥이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습니까?
그것으로 신명기에서 말씀하는 율법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어느 누구도 송사하지 못하게 하시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객과 고아와 과부의 가난함을 아시고 그들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셔서 그들이 믿음으로 부요하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들이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면서 객과 고아와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보고 있는 문자적인 율법을 가지고 객과 고아와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면서 저렇게 하나님을 믿어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정죄를 해서 정죄에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내가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객과 고아와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인생들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못 지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내가 선지자나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율법을 완성케 하러 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완성케 해서 이 세상에서 객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리고 고와와 과부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부요하게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송사를 억울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체질을 알고 그를 지으신 분 만이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욥이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다 해도 그것으로 객과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지 않게 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억울하지 않게 하는 것은 그를 구원해 주어야 합니다,
영의 일입니다.
육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이 육의 일을 알게 하는 말씀입니까? 여러분이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등의 모든 도덕법은 이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는 법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어떻게 하라는 것 또한 이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는 법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으로 지혜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이 세상의 책입니까? 하나님이 인생입니까? 왜 인생의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인생을 통해서 배운 그것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서 율법을 지키려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율법 중에서 사람이 진짜 지켜야 하는 율법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지켜야 하는 율법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느 누구도 못 합니다.
객이 어디로 가고 싶어 합니까? 고아가 누구를 만나고 싶어 합니까? 과부가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이 송사를 억울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말을 하고 있고 또 그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율법을 아담이 못 지켰습니다.
그것을 아담의 자손인 인생들이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니 사단은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율법을 지키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 자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도리어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 사망의 길로 가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0:10절을 보겠습니다. (구 177쪽)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십계명에도 있는 율법입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간음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십계명이 살아 있다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약에 그들의 말대로 문자 그대로의 도덕법이 살아 있다면 간부와 음부는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십계명이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말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간음을 하지 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는가 하면 십계명이 살이 있기 때문에 간음을 하지 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간음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십계명에는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제 그 십계명에 따르는 율법에서는 간음을 하면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도덕법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를 바로 깨닫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 앞에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이 시대 십계명의 살아 있다고 하는 그들에게 묻겠습니다, 도덕법이 살아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법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저 말로 살아 있다고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계명이 살아 있다면 주님은 반드시 간음하다 현장에서 끌려 온 여자를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여인을 죽이지도 않았고 정죄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시대 십계명이 살아 있다고 하는 그들에게 있어 주님께서 이미 십계명을 어겼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구체적인 율법에 간음을 했으면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돌로 쳐 죽이지 않으면 그 사람도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옳습니까?
도덕법이 살아 있는 것이 옳습니까? 그 도덕법을 지키지 않은 주님이 옳습니까? 누가 옳은지는 제가 굳이 말씀을 안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알아서 판단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덕법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법입니다.
그것을 주님은 다르게 우리는 다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도덕법이 살아 있다고 하는 사람은 주님을 율법을 어긴 자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들이 믿는 주님을 율법을 어긴 자로 만드는 것이 바로 도덕법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것임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법이 살아 있다면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이 여인을 반드시 돌로 쳐 죽였어야 합니다.
성경은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때는 이렇게 말하고 저때는 저렇게 말을 하면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아니 성경이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도덕법이 살아 있는데 어떻게 현장에서 간음을 하다 끌려 온 여자를 죽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또 사랑입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같다 붙이면 됩니까?
십계명이 살아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계명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누가 간음을 하다 세상에 알려 졌어도 돌로 쳐 죽입니까? 율법에 반드시 죽이라고 했으면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남의 아내가 누구입니까?
네 이웃의 아내가 누구입니까? 이것이 육적으로 정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입니까? 그리고 내 이웃의 아내입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육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고 진짜 남의 아내 이웃의 아내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도덕법이 살아 있다고 하면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남의 아내와 간음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의 도덕이기 때문에 성도들도 가능한 지키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이런 도덕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성경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아마도 불경에도 되어 있고 이 세상 모든 종교가 그렇게 말을 하고 있고 또 세상의 법도 분명히 남의 아내와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초등학문입니다.
이 세상 종교에도 있고 그리고 법에도 있어서 누구나 그것이 법을 어기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초등학문입니다, 성경은 그런 육적인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설령 간음을 했다 해도 그 죄를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지고 가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얼마나 잔인합니까? 간음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죽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이성으로도 너무 잔인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보면 이슬람 국가에서는 실제 간음을 한 사람들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그렇게 잔인하신 분입니까?
왜 그렇게 합니까?
법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해서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간음을 하지 않는 것으로 마치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분명히 간음을 하지 않은 사람이 의롭습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율법입니다,
그것은 다 영의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에서 죽이라고 말씀을 한 것으로 그 육체를 죽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간음을 하면 영혼이 죽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짜 내 이웃의 아내와 간음을 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5:32절을 보겠습니다. (신 316쪽)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교회입니다.
주님의 아내라고 에베소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난 이후에 그것이 무엇에 대해서 말씀을 했는가 하면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라고 말씀합니다.
남의 아내입니다
이웃의 아내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율법의 예표를 바로 알지 못하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아내이지 내 아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남의 아내도 되고 또 내 이웃의 아내도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와 간음을 할 때는 주님과 내가 남이 되기 때문에 남의 아내가 되고 이웃의 아내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모임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음녀로 변한다는 것을 성경에서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음녀로 변해서 간음을 하게 되면 남의 아내가 되고 이웃의 아내가 된다는 말씀이며 그렇게 남의 아내와 간음을 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음부를 죽이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큰 음녀의 받을 심판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의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에 남의 아내와 간음하면 그 간부와 음부를 다 죽이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거치는 율법이 되고 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그 영혼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간음하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이라고 하고 또 저기서는 간음을 했는데도 살려 준다면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볼 수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을 볼 때 이것이 영의 말씀인가 또 무엇을 예표하고 있는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문자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문자로 보니까 이런 말씀이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지만 문자로 보면 그것이 서로 반대가 되는 말씀으로 변하고 맙니다. 정말 이런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면 그가 아무리 세상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목사라 해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목사라 해도 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간음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이 주님의 아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아내가 간음을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교회와 어떻게 육적으로 간음을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교회와 간음을 하면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교회와 간음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간음을 합니다,
어떻게 간음을 하고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간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라고 하고 또 교회와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십계명도 잘못되었고 또 신명기의 율법도 잘못 기록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까?
문자적으로 내가 남의 아내 내 이웃의 아내와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욥이 처녀에게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는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다 지킨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것이 그것이 진짜 내 이웃의 아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혼인을 하고 한 번도 그런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보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것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율법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만이 범하는 죄입니다, 육적인 죄가 아니라 영적인 죄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주님의 아내와 간음을 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간음에 대한 말씀은 그리스도편지 설교에 올려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을 안다고 말 합니다.
그런 그들이 실제 율법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사단은 지금도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미혹해서 주님의 아내인 교회와 간음을 하게 해서 그 영혼들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설령 내가 남의 아내 이웃의 아내와 간음을 하지 않았다 해도 그것으로 율법을 지켰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 그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복음과 율법-설교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5강, 율법 (0) | 2018.10.19 |
---|---|
제14강, 진노 (0) | 2018.10.19 |
제12강, 의인 (0) | 2018.10.18 |
제11강, 외식 (0) | 2018.10.18 |
제10강, 할례 (0) | 2018.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