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복음과 율법-설교2

제1강, 교회

윤주만목사 2018. 10. 16. 08:32


1, 교회

에베소서1:23절을 보겠습니다. (311)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교회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교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제목에서 알고 있듯이 고린도교회, 갈라디아교회,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일곱 교회가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지금과 같이 장로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그런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과연 이런 교회들이 합당한 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지역 이름을 따서 교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이 교회가 하나만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 교회들의 이름이 갈라디아교회가 아닙니다, 성경에 교회의 이름을 마치 사도들이 이름을 지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고 이 시대 너도나도 다 이름을 짓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교회를 개척하거나 할 때에 이 교회의 이름을 짓느라고 고민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에서는 주님의 아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내 아내입니까? 주님의 아내입니까? 내 아내라고 해도 아내의 이름을 내가 짓지를 않습니다. 하물며 주님의 아내인 교회를 자기가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왜 교회가 종교가 되었는가를 이 한 가지만 보아도 압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지금과 같이 보이는 유형의 교회가 아니라 무형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을 분별하기 위해서 그 지역의 이름을 따서 갈라디아교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그 교회를 갈라디아교회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라 지역을 구분하기 위해서 편리하게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여러 교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만 보아도 교회의 이름이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에 여러 교회가 있었습니다. 지금과 같이 그 교회 각각에 이름을 붙였던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이름에 대해서 바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지방의 인구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오늘날과 같이 대중교통이 발달을 하고 대형교회가 세워졌다면 하나의 교회로 통합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그렇게 교류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지금과 같이 대형교회가 아니라 어느 가정에 세워지고 또 그곳에서 주의 만찬을 나누었던 그런 교회들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왜 교회에 자기들이 만든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교회에 이름을 붙인 교회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그 지역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은 지역의 교회를 분별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또 지금과 같이 문명이 발달을 하지 못하다 보니까 한 지역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나면 거의 교류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다녔습니다.

그리고도 문제가 생기니까 지금 이 갈라디아서처럼 사도 바울이 서신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우리나라도 작은 나라지만 사투리도 다르고 또 풍습도 약간씩 다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2000년 전이라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어느 지역에 가면 그 지역만의 특성이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교통과 미디어가 발달을 한 시대가 아니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로 다녔을 때는 정말 수 백 킬로를 걸어 다녀야 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다 보니까 에베소 교회와 갈라디아교회가 서로 다른 모양들이 나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서신이고 또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에 주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일곱 교회에도 그냥 하나의 교회라고 하지 않고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2000년 전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도 전라도와 경상도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언어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지역을 따라 그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지칭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은 잘못된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있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은 다 종교가 되어 있는 집단이라고 보아야 하지 사도들이 세웠던 교회와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또 장로교 안에서도 자기들이 교회를 세우면 그 이름을 짓고 있습니다. 물론 사회가 발달을 하고 있고 인구가 도시에 집중이 되니까 어쩔 수 없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하나의 핑계에 불과하고 서로 다른 자기들의 종교를 만들어 가고 있는 현상이라고 보면 맞을 것 같습니다.

 

교회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장로교라고 하는 것도 그리고 또 그 장로교 안에 사랑의 교회라고 하는 것도 모두가 사람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교회가 주님의 교회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지을 수 있습니까?

 

교회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교회에 대해서 정말 바로 정립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종교화가 되어 있는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보고 있는 건물을 보고 또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교회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런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닌 자기들의 교회가 되어서 건물도 짓고 이름도 짓고 자기들 마음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서1:1-2절을 보겠습니다. (35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시대가 변한 것 인정합니다.

그리고 도시화가 되어서 인구 밀도가 높아진 것 역시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바른 정의를 하지 않고 교회에 나가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사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안타깝게도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내 이성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하고 만약에 그것이 아무리 이성적으로는 사소할지라도 그것으로 영혼이 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삼가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이미 2000년 정도 내려오다 보니까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상적인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주님의 아내인 교회에 대해서 세상적인 지혜로 생각하고 있다면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아내이기 때문에 너무도 중요하고 또 교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바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건물을 짓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성도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그들이 주의 만찬을 나눌 수 있는 건물이 필요하다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세의 천주교회나 지금 이 시대 우리나라에서 세워지고 있는 교회라는 건물은 솔직히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종교입니다.

이미 그들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깊이 빠져 있고 그 종교의 법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운영이 되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우리가 무심히 보고 있고 당연히 생각하는 교회가 어떻다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자기가 음녀에게 들어가 있는지 아니면 주님의 교회에 들어가 있는지를 모르게 됩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빌레몬의 집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아무리 작은 개척교회라도 해도 교회라는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우선 건물을 얻어야 하고 또 그 건물 안에는 모든 교회가 갖추어 놓은 여러 가지 기구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교회라고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아카데미를 하고 있습니다.

아주 적은 숫자지만 그 안에서 주의 만찬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편지 사무실이 아니라 남이 사용하는 사무실을 아카데미 할 때만 빌려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름도 없습니다.

그리고 간판을 내 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 시대의 교회의 모습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저 의자와 탁상들이 있고 그 안에 앉아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성도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아니 더 좋은 장소를 달라고 한 번도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안에서 복음의 교제를 할 수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교회를 보고 그리고 간판이 내 걸린 교회를 보고 한 번도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교회를 잘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무엇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상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아세라가 지금 이 시대 세워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들의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헌금을 해서 그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지금 교회가 크냐 작으냐 를 논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나온 산물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교회가 어디에 속해 있고 또 자기들의 교회에는 반드시 이름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과 같은 시대에 교회의 이름을 안 짓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동네만 해도 교회가 수백 개 가까이 되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에게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교회의 이름을 지었다면 굳이 이렇게 말씀을 하지 않고 예를 들어서 사랑의 교회, 아니면 순복음 교회라고 지칭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에서는 교회에 이름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는 로마의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은 로마에 의해서 육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회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빌레몬에게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꼭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대해서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비록 빌레몬의 집에 있었지만 그 교회는 정말 진리로 서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지금과 같은 대형교회는 아니지만 그 교회에는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참 교회의 모습입니다. 작은 교회로 가라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교회는 사도바울과 형제가 있었습니다.

진짜 형제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동역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비록 이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이 교회 안에는 성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지칭하는 이름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성도의 모임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과 같은 건물을 지어 놓고 이름을 붙이는 것도 아니고 또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간판을 내 걸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안에 성도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교회는 세상에 나타나지를 않는다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교회를 세상 사람들이 알았습니까?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과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는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교회를 세상에 더 많이 알리고자 더 크게 그리고 더 높이 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아카데미를 하고 있지만 이 교회가 커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 사람들은 아니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편지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종교와 교회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1절을 보겠습니다. (334)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입니다.

골로새서 416절에서는 라오디게아인 교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라고 지칭을 할 때는 지역이 다르거나 또 민족이 다를 때 분별하기 위해서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식으로 지금과 같이 여의도순복음교회라든지 사랑의 교회라든지 하는 이름을 쓴 것이 아니라 지역과 민족을 구분해서 사용을 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까?

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교회는 자기들의 교회지 그것이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건축을 하고 그리고 그 안에서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이 실제 보이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중요합니다.

그 교회에서 주의 만찬을 나눔으로 해서 성도가 탄생이 되기 때문에 교회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교회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실제 교회의 전도지나 그리고 그 교회를 알리고자 하는 모든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알리고 있는 것이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고 있습니까?

 

우리나라는 대도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교회는 이미 종교가 되어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교제하는 교회가 아니라 자기들의 이성적인 신앙에 어느 정도 생각이 같으면 모였다가도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고 그 교회의 교인들이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에서 보고 있는 교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 자체가 이름입니다. 그 앞에 이름을 붙이는 자체는 이 세상적인 생각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아내인 교회를 자기들 마음대로 그렇게 부른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기 보다는 사람의 교회라고 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

 

성경입니다.

그것이 모든 답입니다. 그 답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이성에 따라 교회를 부르고 있다면 그 자체가 악을 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니 그 교회는 이미 교회라고 하기 보다는 음녀라고 해야 하고 또 짐승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그 교회 안에 있으면 자기가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영의 일입니다.

육의 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설교나 강해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교회가 육의 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사람의 보는 눈과 이성과 그리고 감성 이것으로 성경을 알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없는 교회는 수십 만 명이 있다 해도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 성도라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구원을 받은 성도인가 아닌가도 모르고 그저 종교에 미혹이 되어서 사망의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24-25절을 보겠습니다. (315)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교회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먼저 그 남편에게 복종을 해야 합니다. 교회의 남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해야 교회라고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복종하라고 하니까 그저 교회 안에서 목사가 시키는 행위를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행위에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복음에 복종을 해야 합니다. 복음에 복종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 교회가 주님께 복종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악을 행하는가를 알 수 있는 기초가 바로 율법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육체로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 안 됩니다. 남편이 이루신 일에 복종을 해야 교회라고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는 얼마나 많은 율법들을 지키고 있습니까? 아니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것을 율법이라고 하지 않고 있고 도리어 믿음이라는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라고 하는 곳은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지키고 있다고요? 그것이 믿음이라고요? 그런 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고 또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면 다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십일조 율법입니다.

예배, 기도, 찬송, 각종 헌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송구영신예배. 그리고 각종 예배와 형식 등이 다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안에서 파생이 되고 있는 수많은 율법들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율법을 안 지키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예배를 하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것이 다 율법화 되어 있습니다.

저 역시 예배를 하는 사람이고 또 기도를 하고 있고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외식으로 하고 있는 그리고 정해서 하고 있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자기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이런 모든 행위들이 다 율법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 교회는 음녀가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을 사랑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랑이 말씀으로 전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믿어져야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성립이 될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의 사랑이 정말 교회 안에서 전해져야 합니다. 그저 자기들의 말로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교회 안에 구원을 이루시는 놀라운 은혜가 전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두 가지 조건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사실 성경에서 너무 벗어나 있습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교회를 세우기도 하고 그 교회에 자기들이 좋아하는 이름을 붙여 놓고 또 그 교회를 자기들이 사랑하고 있고 그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주여 주여 하고 있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그들이 거짓말만 난무하고 있고 주님의 사랑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습니다.

 

구원이 없습니다.

영생이 없는 교회는 교회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교회라고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교회라는 단어를 다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들만 주의 깊게 보아도 교회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교회를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교회라는 단어로 기록된 것도 있지만 사실 비유로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교회들을 바로 알지 못하면 결국에는 음녀에게 그리고 짐승에게 사로잡혀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절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은혜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은혜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은혜라는 단어를 남발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아닌 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2절을 보겠습니다. (384)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은혜가 어떻게 주어집니까?

그냥 말로 은혜가 아닙니다. 반드시 성경에서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알아야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내가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앎으로 해서 은혜가 우리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알고 있습니까?

이 시대는 성경을 거꾸로 보는 재주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저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은혜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이성적 사고는 다 버리고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그것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이 시대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 안에서 어떠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은혜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모든 일을 알아야 우리에게 은혜가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은혜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생명을 얻을 때 그것을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아닌 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욕보이는 말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그것이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고 있는데 교회 안에서의 자기들의 행위를 보면서 은혜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무엇이 은혜입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 감으로 해서 내 영혼이 구원을 받는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욕보이는 말입니다. 주님이 주시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이 좋아서 하고 나서 그것을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이상한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한 사람이 사과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사과 외에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받은 사람이 사과를 준 사람에게 가서 나에게 사과 외에 많은 것을 주셔서 내 가슴에서 진심으로 은혜를 받았다면 하면 그 사람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자기가 주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서 은혜라고 하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모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은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 교회 안에서 내가 하는 거의 모든 행위는 다 사단이 주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성도는 주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이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안 주셨습니다.

그것을 내가 교회 안에서 행위로 나타내면서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주님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 주님께서 어떻겠습니까? 아마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별 미친놈이 다 있네 하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주지도 않은 것을 자기가 받았다고 하면서 은혜를 입었다고 하면 상대에게 모욕을 주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은혜라는 단어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노아의 홍수 때 세상에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명에 대해서 은혜를 입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설령 성경에 다른 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했을지라도 그것은 다 생명에 대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의 은혜가 있는 자입니다, 이 말씀은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은혜가 나에게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아무 것이나 가지고 은혜라는 말을 남발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주님을 얼마나 모독하는 말인가를 모르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잠언 3:17절을 보겠습니다. (913)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내 아들아 아비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명령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해서 은혜를 입는 그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입은 성도를 구원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이 이 시대 교인들보다 율법을 잘 못 지켜서도 아니고 그들이 진심이 없어서도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을 안 믿어서도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 교인들보다 그들은 정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성경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 시대 목사들이 성경 보았다고 하지만 그들과는 게임도 안 됩니다.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면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었고 외울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그렇게 했을지라도 그들은 행위에 빠져 마귀의 자식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원입니다.

내 안에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평강이 있습니다. 이 평강은 육체적인 평강이 아니라 내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자기 육체가 평안하고 또 자기 교회가 평안하고 하는 것으로 평강이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슨 평강입니까?

내가 구원을 받은데 있어서 평강입니다. 아무 걱정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내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졌을 때 일어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믿음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있는 성도는 내가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하려고 자기 행위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가 무엇이 부족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이성입니다.

율법을 안 지키면 왠지 모르게 찜찜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율법을 하나도 안 지켜도 평강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것을 지켜야 자기가 하나님의 성도인 것으로 생각이 되기 때문에 평강이 없어서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도는 자유 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자유하지를 못 합니다. 율법을 안 지키면 구원을 받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 모든 종교와 그리고 국가의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교회 안에서 율법을 하나도 안 지켜도 평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행위라도 해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믿음이 없는 것 같아 행위에 집착을 하고 있고 그것을 보면서 마음에서 안도를 하고 있습니다.

 

평강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은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마음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으려고 해서는 절대로 누리지 못하고 반드시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만이 이 평강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평강하려면 반드시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조금 아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은혜가 평강이 있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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