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로마서 강해 -

로마서 강해 135강,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윤주만목사 2018. 9. 13. 06:14


로마서13:5절을 보겠습니다. (257)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악을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이 악에 대해서 정말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악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을 행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 스스로가 악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 것 같으면 구해달라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악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를 악에서 건져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 선을 행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악한 일인데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을 하면 그것이 선이 되니까 자기들은 악에서 구함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악에서 구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악합니까?

물론 그들도 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으로 보았을 때는 그들도 분명히 악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기도를 누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까?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서 그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 악에 빠집니까?

진짜 악한 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위에 있는 권세를 다 이루셨는데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선을 이루셨는데 그것을 거절하고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는 그가 악한 자입니다 또한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악한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사실 얼마나 우리에게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듣지를 못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어야 하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믿지 않는 그 자체가 가장 큰 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입니다

이 성경이 내게 대해서 기록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아니 소경이 되어서 그것을 못 보고 있다면 그는 아무리 핑계를 댄다 해도 악한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릅니까?

그것이 핑계가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복음을 가르쳐 주는 은사자가 없습니까? 그것으로 핑계를 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지혜를 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때 의문이 생기면 지혜를 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신사적입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그 말씀이 성경과 맞는가 하여 성경을 상고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말씀이 성경과 맞는가 하여 상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맞추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목사가 하는 말에 자기가 보고 있는 성경을 맞추려고 하고 있습니다.

진노하십니다.

자기를 내어 주시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을 하는 모든 구속의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심지어는 어떻습니까? 영화로 만들어서 보면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는 그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교회 안에서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오직 예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믿는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 그들이 성경에서 위에 있는 권세를 모르니까 그 권세를 거스리면서 교회 안에서 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이 악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진노하심을 스스로 자취를 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정말 많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악에 대해서 많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주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이 모두가 악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에 교회가 또 악에 빠질 것을 아시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로마서에서도 악에 빠지지 말라고 경계를 하면서 진노를 말씀하고 있지만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진노하심을 받습니다.

무엇 때문에 진노를 받습니까? 그 첫째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진노를 받습니다. 이미 우리가 로마서 4장에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단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반드시 진노를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율법을 지키면 진노를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두려워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가 하면 사람의 이성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백번 생각해도 옳고 그것이 선하다고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입니다 그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진노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르다보니까 위에 있는 권세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루신 모든 일이 위에 있는 권세입니다

이 권세를 거스리는 일이 악 합니다

그러니까 은사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믿지를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그것이 악한 일이고 주님께서는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을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을 하십니다.

누구에게 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위에 있는 권세를 거스릴 때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어야 하는데 영생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모르면 전혀 두려워하지를 않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든 두려워하지 않든 위에 있는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주님께서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을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진노를 두려워해서만이 아니라, 양심을 생각해서도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앞에 있는 말씀을 연결하는 부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우리에게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어떠한 선을 이루시는 분인가 하면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구속의 일을 이루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생을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나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시는 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전혀 해석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해석이 안 되다 보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권세를 거스리는 악을 행하면서도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을 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는데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진노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보응을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권세에 거스리는 자를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시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진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지를 않는 사람은 반드시 보응을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굴복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진노를 말씀을 하고 있고 또 보응을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선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인가 하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해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무 조건이 없이 은혜를 주었는데 그 사람이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합니다. 그래서 내가 대신 죽고 그 사람을 살렸습니다. 그런데 대신 죽은 그 사람이 한 일을 인정을 하지 않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보응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그 사람이 한 일을 인정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권세에 거스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이라고 해도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응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거스리면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은 전혀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담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선을 이루셨는데 그 구속의 일에 굴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1:9절을 보겠습니다. (343)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구원을 하셨는가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일들 그리고 주님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바리새인들과 어떻게 하셨는가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보고 있지만 성경에서 전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면 당연히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보이지가 않으니까 굴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알기만 하면 무조건 굴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굴복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혜를 구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량한 사람의 이성적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서 자기들 스스로가 지혜가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더 이상 구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늘 구하고 있습니다. 왜 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까? 저 역시 늘 성경과 씨름을 하고 있지만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성경을 풀다보면 전혀 다른 말씀으로 보일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정말 지혜를 구하면서 집중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실수가 없게 성경을 보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 쓰고 나면 다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성경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말씀들이 많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럼 그 말씀을 보았으면 다시 보고 또 보면서 그 말씀이 성경과 맞는가 하여 지혜를 구하면서 성경을 보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복음을 사모하지를 않으니까 성경을 보아도 복음이 안 보이고 그러다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게 되고 굴복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굴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면 어떻게 굴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알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러므로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굴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스리면서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들의 종교적인 의식에 의해서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고 하는 그런 행위들을 하면서도 그것이 행위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무엇인가를 모릅니까?

정말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국어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의 행위대로 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 행위를 함으로 해서 위에 있는 권세를 거스리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면 절대로 교회 안에서 그런 종교적인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안다면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는 그들이 실상은 이 은혜를 몰라서 권세를 거스리면서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모릅니까?

말로만 은혜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말로는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그런 상투적인 말로 그리고 감성적인 말로 은혜라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은혜의 국어적인 뜻도 모르는 그들이 은혜를 남발을 하면서 입에서는 늘 은혜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모르면서 은혜를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를 멸시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에게서 어떤 은혜를 받았는가를 알고 나서 은혜를 말해야지 그가 준 것은 이것인데 전혀 다른 것을 그가 주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하면 그것은 그를 멸시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의 이성으로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나에게 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가서 건강식품을 줘서 고맙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건강까지 챙겨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아무리 성인군자라 할지라도 마음이 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멸시를 하는 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면 굴복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면 굴복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굴복하고 싶다고 해서 굴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굴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은혜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너무 막연합니다. 아니 자기 마음에 와 닫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주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굴복할 수 있습니까? 그는 굴복을 하고 싶어도 굴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에서도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면 그가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었는가를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알면 굴복을 하게 되어 있고 이것을 모르면 굴복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성경이 내게 대해서 기록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목사들의 눈은 소경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보이면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안 보이니까 권세를 거스리면서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오직 예수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말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도 모르고 그저 남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하니까 교만하지 않으려고 아니 겸손하게 보이려고 아무 것이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9:30절을 보겠습니다. (182)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다 이루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도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가상칠언에 대해서 다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을 신학교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다 이루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말은 잘합니다.

자기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다 이루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구원에 대해서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 합니다 그런 그들이 위에 있는 권세를 거스리는 악을 행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문자를 압니까?

성경의 문자는 초등학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정말 지혜를 구하면서 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저 막연하게 구원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다면 그는 주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이 말씀만 바로 알아도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을 하고 권세에 거스리는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로는 다 이루었다고 하는 그들이 무엇을 다 이루었는지를 모르다보니까 권세를 거스리는 행위에 빠져 악을 행하면서도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선을 이루시는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무엇이 있는가 하면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도 다 이루셨습니다. 주님과 내가 하나라면 주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면 나 역시도 율법을 완전케 한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는 율법으로 하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죽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 이루어 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그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다면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굴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면 굴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사람들은 무시를 하고 있습니다.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씀은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에게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위에 있는 권세를 알면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굴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굴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굴복을 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에 대해서 굴복을 하지 않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로마서 13장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어느 누구도 바로 풀어서 전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세상 권세입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첨삭을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있는 첨삭을 보면 여러분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 권세로 보니까 아니 성경에 첨삭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고 세상 권세에 굴복을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니 이때는 이렇게 말을 하고 저때는 저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 이성적인 지혜를 신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성경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제까지의 신학자들이 왜 성경을 바로 풀지를 못 했습니까?

사람의 지혜입니다

그것을 마치 하나님의 지혜로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신학을 공부했다는 그것으로 마치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겨우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그리고 원문을 뜻을 아는 것으로 지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헬라어입니까?

히브리어입니까? 그것은 공부를 하면 됩니다. 솔직히 거기에 매달려서 공부를 하면 어느 정도 아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가지고 지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교 시간에 히브리어 헬라어의 원어의 뜻을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자기들이 지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교인들은 그런 세상의 지식을 이야기를 하는 목사를 마치 지혜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는 신학을 공부를 했습니다.

세상에서 다른 공부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가 그를 따라갈 수 있습니까? 법을 공부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법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 많이 알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법을 공부한 사람에게 들어도 그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굴복하기 싫어도 굴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면 그는 굴복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가 가면 진리의 성령이 너희에서 오셔서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령도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이 시대는 완전히 종교적인 샤머니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니까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없고 그런 그들이 어떻게 권세에 굴복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복음을 듣고 있는 성도들은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성령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시고 있습니다.

굴복,

복종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는 복음을 듣고 믿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선지자들이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듣는 성도는 당연히 굴복하고 복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듣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평생을 악만 행하다가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5:6절을 보겠습니다. (315)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진노입니다

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까? 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권세를 거스리면서 악을 행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에베소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칭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전한다고 하면서 헛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이미 거대하게 커져 있습니다.

그 안에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가 아무리 세상에서 난다 긴다 해도 교회에 들어오는 순간 소자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목사에게 비하면 그는 소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신학교의 졸업장과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은 그 말에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입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내가 한두 해 공부를 해서 성경을 알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더구나 성경은 비유와 은유 그리고 예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어렵습니다. 그것을 일반 교인들이 자기가 성경을 보아서 깨닫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교인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가 생업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성경만 보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사실 성경만 보아도 평생 성경만 연구를 해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복음입니다 정말 아무 것도 안 하고 성경에만 집중을 해도 성경에서 복음을 본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성경을 보고 있고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사람인지라 잘못 성경을 풀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일을 하면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합니까? 물론 하나님이 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더라도 선지자들은 오직 말씀에만 집중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사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은혜대로 주십니다. 그러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일만 해야 합니다. 다른 일을 하면서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서 장막을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해서 이 시대 일부의 목사들이 자기들이 세상일을 하면서 목회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치 못하시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못 합니다 아니 세상일을 하면서 강해를 쓰고 설교를 쓰고 한다는 것이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만 보아도 이 성경을 바로 푼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그들을 위대한 신학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다른 일을 했습니까? 오직 성경을 보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성경만 보는 사람도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종교적인 자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이 어떻습니까? 그 모든 글들이 다 헛된 말입니다 제가 칼뱅의 말을 그리고 웨슬레의 말을 헛된 말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고 반대할 사람도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왜 헛된가는 십계명을 문자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한 가지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진노를 받습니다.

그런 헛된 말로 인하여 진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 헛된 말로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장로교의 목사면 다 칼뱅의 주석을 보고 있습니다. 그 주석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헛된 말이 되어서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지 못하게 하고 있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진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진노를 하신다는 것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의 문자는 제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이 시대 교인들은 솔직히 저보다도 더 많이 잘 알고 있습니다.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진노를 받는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진노를 받는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굴복을 하는 것은 그 진노가 무서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진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누가 지옥에 가는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진노가 무서워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을 사모해서 믿는 것이지 영생을 위해서 믿는 것이지 진노가 두려워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은사자들로부터 복음을 들은 각 사람입니다 그들이 진노를 두려워합니까? 이 시대 교인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갈까봐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알고 있는 성도는 지옥을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지 성경에 진노를 말씀하고 있어서 그것을 안 받기 위해서 믿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에서 진노에 대한 말씀이 얼마나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다 진노를 당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어도 진노를 당할 불순종의 아들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 다 순종하는 아들들이고 교회 밖에나 이단에 있으면 불순종의 아들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불순종의 아들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자기들의 편리에 따라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듣고도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로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진노를 하신다 해서 그 진노가 두려워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위해서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진노를 받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불순종의 아들들이 진노를 받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굴복을 하는 것은 그 진노를 받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진노를 받지 않기 위해서 굴복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굴복합니까?

그에게서 칭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 칭찬을 받는 것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굴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각 사람에게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제가 복음을 전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굴복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은혜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았다면 제가 아무리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해서 말씀을 전한다 해도 성도님들이 권세에 굴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23:1절을 보겠습니다. (228)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양심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사전적인 뜻으로 양심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무슨 양심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은사자들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을 12장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사자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이루신 하늘의 권세 생명을 어떻게 얻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듣지 않은 사람에게는 양심을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행위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양심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양심을 따라 하라고 하면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줄을 전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복음을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내가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양심을 따라 행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이성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 먼저 복음을 들은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대해서 이제 알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복음도 듣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양심을 인하여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양심이라는 것은 반드시 내가 옳고 그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선인가 무엇이 악인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음에 대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리고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양심을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우리가 수사 드라마 같은 것을 봅니다.

분명히 그 사람이 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심을 따라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여러 가지 정황상 범인으로 지목이 되면 그 양심이라는 것이 통하지가 않습니다.

다 모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양심이라는 것이 통할 수 없습니다. 또한 어느 지극히 일부의 사람만 알고 있어도 그 양심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전적인 뜻에서 보아서 알겠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타당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가 그것을 모르게 되면 양심이라는 것은 받아들여지지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다수의 사람은 복음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다수입니다

그들이 볼 때 우리가 믿는 복음은 너무 허황되어 보입니다. 아니 우리가 믿는 이 영의 일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서 우리 마음에서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을 통해서 성령의 감동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양심을 인하여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이 복음을 전혀 듣지도 못했고 또 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양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는 것을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고 그리고 전했는데 그것을 자기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양심적입니까?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이 볼 때는 전혀 양심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알고 있는 그러니까 옳고 그름과 선과 악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분명히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이 복음을 들은 성도들 역시도 양심을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양심입니다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그에게 양심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은사자들을 통해서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위에 있는 권세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복음을 안 그 사람은 양심을 따라서 복음에 복종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르면 양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가를 모르고 있는 사람은 양심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1:19절을 보겠습니다. (338)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디모데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서신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디모데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그 말씀을 다 들었습니다. 또한 성령이 디모데에게도 오셔서 이 모든 일들에 대해서 확증을 해 주고 있고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디모데이기 때문에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었고 알고 있는 디모데에게 그것에 대해서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습니다.

아니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전하는 복음이 어떻다는 것을 여기에 있는 성도님들은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제를 하고 난 이후에 어떤 이들이 양심을 버리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안 들었으면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주 잘 듣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미혹을 당해서 양심을 저버리는 것을 볼 때마다 참 답답하지만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그저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한 자리에서 복음을 듣고 있어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모르면 양심을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서 어떻게 양심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선이 무엇인가 악이 무엇인가를 이제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심을 따라 굴복을 하지 않고 도리어 양심을 저버리는 사람들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심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솔직히 이 시대 누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아니 이제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 남겨 놓은 글들 중에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듣고 있는 복음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제 개인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도님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복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듣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볼 때 우리는 정말 손톱의 때만도 못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 시대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알고 있는 성도가 양심을 따라 복음에 굴복을 해야 하는데 양심을 저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믿음과 착한 양심입니다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을 착한 양심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양심을 버리게 되면 그 믿음에 관하여서는 파선하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양심을 버리면 그에게 믿음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초대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에서 지면 그가 아무리 복음을 들었다 해도 결국에서는 그 믿음에 관하여 파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알아야 이 싸움을 할 수 있는데 이 시대는 그 기회조차도 주어지지가 않고 있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양심을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심을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왜 양심을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하면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를 알고 있고 선이 무엇인가 악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모릅니다.

그 사람에게 무슨 양심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가 있어서도 아니고 우리가 특별해서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셔서 긍휼히 여겨주시고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물론 하나님께서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 양심을 따라 지키는 것은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알게 하시고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정말 이 믿음을 위해서 선한 싸움을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는 모두가 미혹을 당해서 그 싸움에서 지고 있습니다.

로마서13:6절을 보겠습니다. (257)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같은 이유로, 여러분은 또한 조세를 바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들로서, 바로 이 일을 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성경 참 어렵습니다.

정말 지혜를 구하지 않으면 로마서13장의 말씀도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아니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지도 않고 성경의 문자를 보고 사람의 이성으로 억지로 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억지로 풀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로마서13장은 시작하면서부터 성경에 첨삭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과 세상 권세라는 제목이 너무 강하게 임팩트가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은 성경을 문자로 보고 있고 마치 성경이 세상의 일을 말씀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세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의 일은 얼마든지 세상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을 굳이 성경에 기록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그 말씀을 기록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굳이 세상에서 공부를 하면 배울 수 있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세상일을 말씀을 하겠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을 보는 시각부터 바꾸지 않으면 성경에서 복음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의 모든 성경은 우리의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아니 이제까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사람의 지혜로 보고 억지로 풀고 있습니다.

3절과 같습니다.

먼저는 세상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세상일을 비유로 해서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3절에서 관원들은 선한 일에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된다고 먼저 말씀을 하고 나서 영의 일을 말씀을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6절과 7절을 같은 비유의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바로 알지 못하면 전혀 다른 해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늘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장절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보냈을 때는 장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하나로 되어 있었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보기 편하게 장절을 붙였습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성경을 보는데 있어서 방해를 하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아마도 정절이 없고 첨삭이 되어 있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로마서13장을 보면서 더 생각을 했고 지혜를 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1장에서부터 성경이 바로 풀리지가 않으면 13장에서 와서도 역시 마찬가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무엇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3절의 비유에 이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절 앞부분에서 세상의 일을 가지고 비유로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3절 후반부부터 5절까지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비유입니다

그것을 이어서 똑같이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관원들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들에게 공세를 바치고 있습니다. 왜 공세를 바치고 있는가 하면 그들이 정치를 함으로 해서 세상 일로 선한 일에 대해서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해서 두려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 공세를 바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관원이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그들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이 공세를 내고 있습니다. 왜 공세를 내고 있는가 하면 세상이성으로 선한 일과 악한 일을 그들이 분별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선하게 살면 그들이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자에게는 두려움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6절 앞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6절 뒤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비유로 해서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6절에 같이 있다고 해서 마치 같은 말씀을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 연결을 해서 성경을 풀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관원은 비유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 때 관원이 어떻게 하는가를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 권원에게 왜 공세를 바치는가 하면 그가 선한 일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관원들에게 공세를 바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세금을 내고 있습니까? 세상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 선한 일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해서 그 관원들이 두려움이 되어서 악한 일에 대해서 잘 판결을 해 달라고 관원들에게 공세를 내서 세상이 조금 더 선하게 바뀌기를 바라고 내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일은 굳이 성경에서 말씀을 안 드려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이 시대 역시 관원들은 그렇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오묘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가를 우리는 다시 한 번 깨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지극히 당연하게 하고 있는 일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2:15절을 보겠습니다. (344)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관원이 있습니다.

그에게 사람들이 공세를 바치고 있습니다. 왜 공세를 바치고 있습니까? 세상에는 선한 일도 있고 악한 일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관원에게 공세를 바치는 일은 세상에서 선하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관원들이 그 일을 해 주기를 바라면서 세금을 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관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일군이 있습니다. 세상의 관원은 세상을 선하게 유지를 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나쁜 일을 해서 지탄도 받고 있지만 그러나 사람들이 세금을 낼 때는 가능한 선한 일을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세상의 일 때문에 공세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관원이 선한 일에는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하나님께서 은사자들에게 복음을 주신 것 역시 영의 일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왜 은사를 주셨습니까?

선한 일을 하라고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12장의 은사를 주신 것은 선한 일을 하라고 주셨지 그것으로 악한 일을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관원이 선한 일에 대해서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해서 되는 것과 같이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일군들도 영의 일에 있어서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정말 잘 보아야 합니다.

아니 억지로 풀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비유의 말씀을 전혀 모르고 이제까지 신학자들이라는 사람들은 이것을 그저 세상의 일로만 치부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 관원도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공세를 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아닙니다.

비유입니다 영의 일을 말씀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일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일군들을 세우셨는가 하면 마치 세상의 관원들이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이 생각하는 선과 악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선과 악이 있는데 그 일에 대해서 은사자들이 항상 힘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선을 모릅니다. 그리고 악도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의 관원이 선을 모르고 악을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그 나라는 국민들이 아무리 세금을 잘 내도 금방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권원들이 선한 일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어야 하는데 악한 일을 하는데도 두려움이 없다면 그 나라는 망하는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누구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디모데후서에서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관원과 같이 선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없고 악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되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일군입니다

시키는 자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됩니다. 일군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일군이 아닙니다. 일군은 반드시 시키는 자의 명을 따라 해야 합니다. 관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왕이 없지만 왕이 있다면 왕이 시키는 일만 해야 합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선이 무엇인가 악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일군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한 일에 대해서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해서 두려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일군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은사자들은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일군은 압니다.

자기 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일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일을 한다면 그는 일군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사자들을 통해서 선한 일을 그리고 악한 일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일군은 마치 세상 관원과 같이 선한 일에 대해서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해서 되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옳게 분별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선한 일이 무엇인가 악한 일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군이라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관원이 생각하는 그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선을 그리고 악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입니까?

먼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성경에서 선한 일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악한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세상 관원과 같이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다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도 모르고 악도 모르는 그들은 하나님의 일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입니까? 세상 관원이 선한 일에는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되는 것과 같이 성경에서 진리를 분별해서 선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되게끔 하는 일군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은사자입니다

먼저 내가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선이 무엇인가 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교회 안에서 영의 일로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 안에는 그런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일에 항상 힘씁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대로 주신 은사를 받은 성도는 이 일에 항상 힘쓰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육체를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는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가 왜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은사자가 선이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은사자가 하는 말이 두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영생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사자는 분명히 이 두 가지를 다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시기 바랍니다. 심판에 대해서 두려워하겠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그는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물론 그들이 겉으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모든 일이 영의 일이기 때문에 아니 아직 양심을 따라 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을지라도 분명히 심판에 대해서 두려움이 되고 있습니다. 자기는 모를지라도 막연한 두려움이 그에게 항상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면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왠지 모르게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명확하게 모르니까 진리에 대해서 모르니까 막연한 두려움이 그에게는 있기 마련입니다

로마서13:7절을 보겠습니다. (25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에게 의무를 다하십시오. 조세를 바쳐야 할 이에게는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바쳐야 할 이에게는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해야 할 이는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이는 존경하십시오."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의 일을 비유로 해서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말씀은 육의 일을 말하고 있고 뒤에 있는 말씀은 영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한 절에 기록이 되어 있다 해도 비유를 바로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육체로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육체는 어느 나라에 속해 있고 그 나라의 법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세상 법을 어겨가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성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을 보면 자기들이 특별한 사람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이성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모르는 그들이 무슨 진리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먼저 세상의 이성이 바로 서 있어야 진리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은 마치 자기들이 치외 법권적인 사람이 되는 것으로 알고 그 권리를 누리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육체에 속해 있으면 세상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공세가 있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공세를 내야 합니다. 국세가 있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국세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온갖 편법을 다 동원하면서 그렇게 하지를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세금도 내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 안에서 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거의 세금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일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 때 성도라 할지라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라 해서 공세를 내지 않고 국세를 내지 않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국가에서 요구하는 세금을 내야 합니다.

세상의 이치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세상의 이치를 비유로 해서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배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그 세상의 이성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공세를 내는 것, 그리고 국세를 내는 것은 굳이 성경이 아니라도 세상의 학교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왕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성경을 기록했을 때는 거의 모든 나라에 왕이 있었던 때입니다 그 왕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바치고 있습니다. 꼭 두려워해서만 아니라 그 왕이 정치를 잘 해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면 존경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왕은 없을지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을 뽑으면 그가 왕과 같은 입장에서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정치를 잘하면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다 존경을 받는 것은 아닐지라도 존경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습니다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일군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때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말씀을 듣는 사람은 그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는 관원과 같이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되지 않지만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말씀을 전합니다.

듣기에 좋은 말씀만 하고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아도 그렇고 신약에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을 보아도 듣기 좋은 말보다는 책망과 경계의 말씀을 더 많이 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는 말씀을 이스라엘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그대로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서 복음을 전할 때는 영의 일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하는 그 말씀대로 되어 진다면 내가 혹시라도 악을 행하고 있다면 그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영생의 문제입니다

세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영혼을 생각하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적으로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이 일에 대해서 항상 힘쓰고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두려워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그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관원과 같이 선한 일에 대해서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해서 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일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이 일에 항상 힘쓰고 있다면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하면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행한 그대로 심판이 임하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조차도 없어서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5:17절을 보겠습니다. (341)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잘 다스리는 장로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대로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교회 안에서 잘 다스리고 있습니다. 이 다스리는 은사에 대해서는 로마서12장에서 말씀을 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생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은사자가 영생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를 존경을 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존경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사를 주셔서 가르치게 함으로 해서 각 사람에게 위에 있는 권세가 전해짐으로 해서 영생을 얻었다면 존경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해서 전하는 자를 존경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존경을 나타내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를 따져도 그렇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세상 관원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7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는 것과 같이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그들을 세상의 관원들과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관원은 육체의 일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일군은 영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일군이라는 의미에서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그 다음 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