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9:23절을 보겠습니다. (신 252쪽)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오래 참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지가 않다면 이 세상은 벌써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멸하시기로 준비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이 시대에 구원을 받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강퍅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행위로 겸손의 모양을 내면서 인간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되지도 않게 불교와 같이 해탈의 경지에 오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자체가 자기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본래 강퍅한 자입니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강퍅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복음이 계시가 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의지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충분히 계시를 해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려고 하기 보다는 종교의 학문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강퍅한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엿장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내가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 말씀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은혜를 받고 누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성경을 보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십계명을 지킨 사람이 없고 사람의 이성으로는 지킬 수 없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보았습니까?
그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나는 반드시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긍휼을 구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엿장수 마음대로 아무에게나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 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셨지만 그들은 주님이 오셨을 때 자기들이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십계명을 문자 적으로 다 지키면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셔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우리는 뼈 속부터 율법주의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진흙 한 덩어리로 천히 쓸 그릇을 만드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귀히 쓸 그릇이 아니라 모두가 천히 쓸 그릇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천히 쓸 그릇에 보배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그 보배를 주셨습니다. 그 보배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이 있는 성도를 하나님께서는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강퍅한 자입니다 또 우리는 진노의 그릇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그릇에 진노를 아직까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왜 보이지 않고 계시는가 하면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영의 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미건조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믿음으로만 역사를 하기 때문에 이 복음의 비밀을 안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시다가 천국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2000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사람의 시간으로는 정말 긴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직까지도 참으시고 있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까지 참으실 줄은 저 역시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표들을 보면 우리 시대에는 주님이 오시지 않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 설령 우리 시대가 지나가더라도 가까운 시간 안에는 주님이 오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게 오래 참으시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진리를 알고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분명히 수고와 고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까지 이 복음이 계시가 되었고 이제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하늘의 기업을 얻는 자가 되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자비의 대상들에 대하여 자기의 풍성하신 영광을 알리시고자 하셨더라도, 어떻다는 말입니까?”
모든 시간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그 시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깨달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진노의 그릇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시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해서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릇입니다
성경은 육과 영을 똑같이 그릇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1-22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그릇과 23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그릇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다른가 하면 우리 신체는 영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신체의 구원을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이 그릇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또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십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는 것은 우리 인생들 모두가 강퍅하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지 않아도 우리는 강퍅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퍅한 자에게 은혜를 주셔서 긍휼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긍휼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할 수 있습니다. 진노의 그릇은 멸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 진노의 그릇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기로 예비가 되어 있는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긍휼의 그릇입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가 긍휼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어도 그 긍휼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안에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 영이 거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씀으로 긍휼의 그릇이라고 하지만 이 긍휼의 그릇은 실제 그릇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긍휼의 그릇으로 말미암아 탄생이 되는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영입니다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긍휼의 그릇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 그릇이 변해서 긍휼의 그릇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멸하시기로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이지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그 그릇이 긍휼을 입어서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면 조금 더 쉽습니다.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자비의 대상들에 대하여 자기의 풍성하신 영광을 알리시고자 하셨다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릇이라고 하지 않고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자비의 대상들에 대하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그 영은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자비의 대상입니다
영광을 받기로 예비 된 대상입니다
누가 영광을 받는가 하면 진노의 그릇이 긍휼을 입어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씨가 거하시고 그 씨가 영광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영광을 받기로 예비 된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육체는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 그릇은 반드시 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그 죽은 신체가 다시 부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 신체는 진노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노의 그릇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영광을 받기로 예비 된 자가 우리 안에 거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2:9-10절을 보겠습니다. (신 265쪽)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입니다
같은 그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하는 그릇은 눈에 보이는 그릇이고 이제 이 그릇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릇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늘 느끼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정말 무미건조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영광을 받는 그 구원에 참예를 했다고 해도 그 기쁨이라는 것을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영의 일은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어떤 감정으로 느낄 수도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이 복음이라는 것은 아무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이 이해를 하고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이 영의 일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영광입니다
참 이 영광을 조금이라도 맛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 영광을 우리 인생들이 맛을 본다면 아마도 믿음이라는 것이 무의미해 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영광을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마음으로 감성적으로 느낄 수도 없다 보니까 종교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행위를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감정적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을 조금이라도 보고 듣고 느끼게 함으로 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맛보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행위가 나오기 시작을 했고 그것을 이 시대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귀로 듣지도 못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서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로 예비를 하셨는데 그것을 우리 사람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마음에서 감성적으로 느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을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것을 설명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기독교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것과 같은 예배를 드리고 또 찬송가를 부르고 성령의 은사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를 가진 마음으로 체험을 하고 느끼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 그대로 체험의 종교가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안에서 믿어지는 역사 밖에는 없습니다.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얼마나 영광이 넘치겠습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썩지 않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얼마나 영광이 넘치면 왕 노릇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 하는 것입니다
참 답답합니다.
저도 때로 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사람들과 만나서 전하고 있지만 그들이 제일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어떤 것이 보이고 또 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마음으로라도 느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도대체 무는 말을 하는지를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오직 성령으로 하나님께서 보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귀로 들을 수도 없습니다. 마음으로 감성적으로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령으로 우리에게 이것을 보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이셨습니까?
감동을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믿음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우리가 이 영의 일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큰가를 우리는 감히 상상도 못 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해서 천국에 가는 영광을 우리는 감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우리에게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시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고 하시고 있습니까? 오직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성경에서 이 복음을 보고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함으로 해서 그림자로 보고 있는 아니 청동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게 보이는 영의 영광을 알게 하시고 있습니다.
희미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내세의 일은 사실 희미합니다. 왜 희미한가 하면 우리의 언어로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희미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희미하게 보이고 있지만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우리가 그 영광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진노의 그릇입니다
이 그릇이 영광의 부요함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시대 천국에 대해서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사람의 말로 미사여구를 써 가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언어로는 표현이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그릇을 빨리 멸하시지 않고 그 그릇이 긍휼을 입고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알게 하시고 있습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긍휼을 입게 하셨다 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말을 할 수 없는가 하면 성경에 성령을 구하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을 안 보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자기가 듣고 있는 말씀이 도무지 성경과 다른 것 같은데도 그냥 무심히 넘어가고 있습니까? 막연하게 나만 잘 믿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시대는 성경을 안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조금 이해가 안 되는 말이 있어도 그냥 지나쳐 버리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늘 보아야 합니다. 저 역시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 역시도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혹시라도 실수를 하면 여러분은 지체 없이 저에게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나만 잘 믿으면 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5:4절을 보겠습니다. (신 382쪽)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이삭과 같은 약속의 씨입니다.
반드시 우리 안에는 그 씨가 있어야 합니다.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이 씨가 있어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씨가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다고 사도 베드로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광입니다
우리 육신은 절대로 이 영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 육신이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것이 더 인간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영광은 주님이 나타나실 때 받는 영광입니다
이 세상에서 입니까?
우리는 그 어떤 영광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제가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분복을 받았다면 이 세상의 영광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광을 바라는 자가 아니라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다고 사도 베드로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노의 그릇이지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우리가 영광을 받기로 예비가 되었고 그 영광의 부요함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하심으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 영생을 얻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힐문합니까?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힐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진흙 한 덩어리로 천히 쓸 물건을 만들었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뭐냐고 합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느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왜 따집니까?
구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영광의 부요함을 모르기 때문에 힐문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긍휼히 여김을 받아 그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 자가 되었다면 절대로 하나님을 힐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저 역시도 그것을 말로 다 표현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희미하게라도 보고 있지만 늘 아쉬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그 정도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을 고린도전서13장에서 이미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신체의 선택을 주장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대해서 무슨 말을 하겠느냐고 하면서 자기들은 택하심을 입은 야곱과 같은 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이 시대는 이삭이 없습니다. 또 리브가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없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모르기 때문이면 성경을 보고 문자적으로는 알아도 믿지를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대해서 약속을 해 주시고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은 육신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육신의 자녀가 누군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을 보고 자기들이 생각하는 대로 자기들은 이삭과 같은 약속의 씨가 있는 자녀라고 하면 마치 그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자녀로 교회 안에서 육신으로 죄의 법을,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육신의 자녀가 누군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뢰아 사람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은 신사적이어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이 성경과 맞는가 하여 성경을 상고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모두가 거짓을 전하고 있는데도 그 목사들이 전하는 말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무슨 말 하리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경을 성경으로 안 보고 있습니다. 목사들부터가 이미 자기들이 신학에서 배운 것을 기초로 해서 성경을 보다 보니까 그 안에서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9:24절을 보겠습니다. (신 252쪽)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유대 사람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셨습니다.”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입니다
우리는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 그릇입니다 이 그릇에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영광의 부요함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으로 감성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영광을 받기로 예비 된 그릇입니다 그 그릇이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시대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영의 일에 대해서 거의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의 일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는 영의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고 다 육신의 자녀가 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 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부르심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부르신 자가 거의 없습니다,
교회에 나왔습니까?
나를 부르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주셔야 합니다. 그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가 누군가 하면 십계명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어린 아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입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해서 다 부르심을 입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부르심을 입은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보고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말씀을 하면 무조건 자기는 부르심을 입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막연하게 나를 부르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내가 부르심을 입은 자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 역시 성도들을 부르시고 있지만 사람들은 막연하게 자기들을 부르셨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02쪽)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우리입니다
누구입니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 시대 부르셨습니까? 성경은 막연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셨으면 반드시 누가 부르심을 받은 자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 목사가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이방인 중에서 부르셨다고 하면 자기들을 부르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포승으로 완전히 묶여서 자기 이성까지도 내어 주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종교입니다
사람의 이성까지도 묶어 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종교에 들어가는 순간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가 있고 명망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어린아이가 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이미 2000년 가까이 거대한 세력을 키워왔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들의 교리에 반박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갈라디아에서 우리를 은혜로 부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뭐합니까? 은혜로 부르신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은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모릅니다.
거저 주시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사전적인 뜻은 사랑으로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도무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면서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종교가 아니라 믿음은 마음으로 믿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마음으로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습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가를 성경에서 알아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입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거대한 종교의 포승에 묶여 있다 보니까 이렇게까지 말씀을 드려도 감히 그 종교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로 부르셨지만 사람들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막연하게 은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데 이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그는 부르신 자가 아닙니다. 반드시 이 은혜가 나에게 있어야 부르신 자라는 말씀입니다
부르셨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에서 구원을 받았어야 합니다. 이 구원이 없다면, 약속의 씨가 여러분에게 없다면 여러분은 은혜로 부르신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교회 안에만 있으면 부르신 자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에서 속히 떠나가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에 빠지면 그는 부르심을 입은 자가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부르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다른 복음을 좇고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복음도 모르고 다른 복음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복음이라고 하면 그것이 복음이 되고 다른 복음이라고 하면 그것이 다른 복음이 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강해를 했습니다.
이미 다른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다른 복음을 자세하게 말씀할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을 드립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다른 복음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입니다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으면 그는 부르심을 입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믿음으로 십일조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믿음으로 할 수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십일조를 믿음으로 하고 있습니까?
십일조를 믿음으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교회에 소득의 십일조를 돈으로 내고 있는 것은 행위로 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십일조를 하려면 여러분이 돈을 내는 그런 것을 하지 말아야 믿음으로 십일조를 한다는 말이 성립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국어를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내 육체로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지 믿음으로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내가 마음으로 믿을 때 믿음으로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믿음으로 십일조를 한다고 하면서 자기 육체로 하고 있는 사람은 부르심을 입은 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율법을 자기 육체로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것을 갈라디아에서 속히 다른 복음으로 좇아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복음을 좇아가고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부르신 자가 누군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보고 무조건 부르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이 성경의 문자를 보고 예수님을 대적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역시 이 시대 성경을 거의 문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율법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습니까?
그것을 갈라디아에서 다른 복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고 있는 감각이 없는 문둥병자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그리고 세상은 어려서부터 여러분을 포승으로 묶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법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법에 의해서 철저하게 묶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에게 법이 너무 익숙해서 포승으로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성도가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갈라디아서5:6-9절을 보겠습니다. (신 308쪽)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부르셨습니까?
막연하게 나를 부르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성경에서 누구를 부르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막연하게 믿으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에 세뇌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너무 막연하게 믿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누구를 부르셨는지도 모르면서 막무가내로 자기를 부르셨다고 하면 부르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부르신 자가 누군가를 찾으려 하지 않고 막연하게 자기를 부르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입니다
그러니까 부르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 있는 성도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내는 것이나 내지 않는 것이나 아무 효력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까?
주일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까? 그런 것은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나를 부르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런 것이 효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아주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정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마치 구원에 효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는 주일을 지키는 것이 효력이 있습니다. 안식일 교회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효력이 있습니다. 여호와 증인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효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는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효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들이 정해서 지키는 것으로 그리고 안 지키는 것으로 효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입었습니까?
그런 것으로는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무엇을 지키고 안 지키고 하는 것은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나를 부르셨다고 하면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영의 일이 믿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역사를 합니다.
어떻게 역사를 합니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해서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1장에서 이미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복음을 보면 믿게 되고 그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역사를 해서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 믿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이 믿음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말씀들을 보는 사람들까지도 이 믿음을 깨닫지를 못해서 다시 다른 복음에 빠지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것이 진리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진리에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순종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교회 안에서 수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들이 진리에 순종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는 진리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오직 믿음으로 역사하는 것이 진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셔서 인도함을 받은 그가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진리에 순종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처음에 복음을 전하니까 진리에 순종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 율법주의가 들어오니까 진리에 순종을 하던 그들이 율법에 순종하고 말았습니다.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율법을 지키는 일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부르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단이 불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부르신 자가 누군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가 부르심을 받은 자가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알곡도 있지만 가라지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보이는 교회 안에는 거의 가라지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가라지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오실 때까지 자기들도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까?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퍼지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단 한 가지의 율법이 온 덩이를 퍼지게 해서 사망에 이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적은 누룩이 아니라 많은 누룩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일일이 열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율법을 지키면서도 율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를 부르셨습니까?
그것을 알 수 있는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누룩입니다 나에게서 누룩이 한 가지라도 있다면 부르심을 받은 자가 아닙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자가 아닙니다. 누가 불렀겠습니까? 사단이 불러서 율법의 종으로 살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입니다
사단의 종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있습니다. 사단의 사람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단의 사람을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면서 그가 말하는 것을 거의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적은 누룩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있으면 그가 부르시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룩이 율법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룩이 율법이라는 것을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르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권면입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여러분은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 권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속는 자도 모릅니다. 그뿐 아니라 속이는 자도 모르고 있습니다. 속이는 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속는 자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열 처녀의 비유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오실 때 속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게 됩니다.
영생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반드시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너무 막연하게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주님이 자기들을 부르셨다고 하지만 그 부르심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9:13절을 보겠습니다. (신 13쪽)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교회에 나왔습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부르심을 받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얼마나 적은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안 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봐도 자기들이 이로운 쪽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을 어떻게 하든지 자기들과 꿰어 맞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좋은 의미는 다 자기들이고 나쁜 의미는 세상 사람들과 이단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과 교회 밖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일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들 부터가 성경의 좋은 의미의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고 나쁜 의미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누가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 누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을 부르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것은 청함을 받은 것이지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왜 오셨습니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를 하게 해서 그가 천국에 가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니까 자기들이 다 죄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이 의인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죄인이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죄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지가 200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세상 죄를 가지고 자기가 죄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죄 입니다.
우리는 세상 죄라도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인들을 보면 세상 죄로 의인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죄를 보면서 정죄를 하기도 하고 있고 자기들은 그런 죄를 짓지 않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자기들은 주님만을 믿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참 그럴듯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는 죄인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지만 이 시대 역시 죄인이 없고 다 의인만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내가 반드시 죄인이어야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아마 이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다 죄인이라고 말을 합니다. 어느 이단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까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곳도 있습니다. 성경을 전혀 모르면서도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죄인도 아닌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을 합니다.
죄인 이어야 합니다.
어느 죄인이어야 합니까? 이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적인 죄를 진 죄인이어야 합니까? 아니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것과 같이 죄가 더한 곳이 은혜가 넘친다고 하니까 일부러 죄를 짓습니까? 죄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면 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십계명이 있습니다.
이 시대는 모두가 이 십계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그들이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십계명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십계명을 지키지 않은 사람과 비교를 하면 의인입니다 그렇게 의인이 되어 있으면서도 성경에서 주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니까 무조건 죄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이 어떤 죄인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남들이 죄인이라고 하니까 아니 성경에서 죄인이라고 하니까 자기 죄도 모르고 무조건 죄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를 진 사람이 죄인이지 죄를 안 진 사람은 죄인이 아닙니다. 반드시 죄를 지어야 죄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대도 똑같이 묻고 계십니다.
부자 청년에게와 같이 십계명을 말씀하면서 묻고 있습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의 그 청년과 같이 대답할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아니면 제가 일부 지키지 못한 것이 있지만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니 지키면서 살려고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지켰습니다.
그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성경을 보고 십계명을 지켰으면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자기를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가증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어느 죄인을 부르러 오셨는가 하면 십계명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십계명 중에서 어느 한 가지 죄를 진 사람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십계명 전체에 대해서 하나도 지키지 못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은 십계명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겼습니까?
나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섬겼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했습니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았습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습니까? 살인을 했습니까? 간음을 했습니까? 도적질을 했습니까?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거를 했습니까? 이웃의 집을 탐하였습니까? 여러분이 이 모든 죄를 짓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주님이 부르시지 않은 사람입니다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 십계명에서 다섯 개를 지켰습니다. 그러면 다 못 지킨 사람보다 의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십계명에서 하나를 지켰습니다. 하나도 못 지킨 사람보다는 의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아마도 제가 이 십계명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면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대답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중에 하나를 범해서 죄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중에 하나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도 지키지 못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계명입니다
그리스도편지에 이미 설교로 다 올려 드렸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자입니다 여러분이 율법주의에 있을 때 십계명의 어느 계명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는 지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키고 있습니까?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의미를 알고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이 십계명의 어느 계명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은 이 십계명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주님께서 부르신 죄인이 될 수 있는데 이 시대는 이스라엘의 부자 청년과 같이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어느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까? 십계명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내가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죄인이 될 수 있고 그 사람을 주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죄인 인지를 모르고 있는 사람은 결코 주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성경에서 부르셨다고 하니까 부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죽습니다.
아니 의미를 모르면 반드시 죽습니다. 자기가 어떤 죄인인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부르시는 것은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죄인도 아닌 사람은 마태복음에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입니다
어려서부터 이 십계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그들이 이 십계명의 어느 계명도 지키지 못한 죄인이지만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 되어서 부르신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부르셨습니다. 십계명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죄인이라서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디모데후서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43쪽)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부르셨습니다.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행위입니다
율법을 행하면서 믿음이라는 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했던 율법으로 지켰든 그것은 다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믿음과 행위를 전혀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자기 행위로 하면서도 그것을 믿음으로 했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입니다
행위의 종교가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부터 이미 종교가 들어오기 시작을 했고 행위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행위에 빠져 드는가를 우리가 성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도 행위가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부르셨습니다. 아담이 범죄를 했습니다. 그 이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구원해 주시기로 예정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 아들을 보고 믿는 자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부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을 이루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구속의 일을 성경에서 보고 믿는 자들을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안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모르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그들이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수많은 행위들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행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대로 부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거저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행위대로가 아니라고 하는데 행위를 하면서 은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분명히 행위대로가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해서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있고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말씀은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육체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안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성도를 예수 안에 있는 은혜를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부르심은 이 생명이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약속의 씨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의 씨가 있어야 예수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약속의 씨가 없으면 안 됩니다
이 씨가 영이요 생명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약속의 씨가 반드시 있어야 부르신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르심을 입은 자인가를 반드시 성경에서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막연하게 주님을 기다리다가는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5:10절을 보겠습니다. (신 382쪽)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왜 부르셨는가 하면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이 영광은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그런 영광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영광입니다 내세의 일이기 때문에 다른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어서 영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그리고 부활입니다 내세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언어로 표현이 안 되기 때문에 성경은 다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영광이 어떠한지는 저 역시도 감히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주신 믿음으로 이 영광을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을 왜 부르셨는가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오직 이 영광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들은 이 땅에서 자기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런 영광만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푯대입니다
성도는 다른 것을 안 보고 있습니다. 왜 안 보는가 하면 자기를 부르신 이의 뜻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 영광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그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 영광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잠깐 고난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고난에 대해서는 로마서8장에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는 성도입니다 물론 우리 육신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하늘의 신령한 것을 입고 들어갑니다.
문제는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잠깐 고난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제까지 기독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고난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고난을 받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고난을 주는 자가 되어 있습니다.
잠깐 고난을 받습니다.
그 잠깐이 어느 정도입니까? 우리가 복음을 알고 난 이후에 우리에게 믿음이 온 이후로는 고난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누구나 받는 그런 고난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고난은 세상 사람들도 받는 고난입니다
사도들입니다
선지자들입니다 누구에게 고난을 받았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에게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실 기독교의 역사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되어서 그들은 고난을 받는 자가 아니라 고난을 주는 자의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역사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고난이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고난을 받으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는 너무도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고난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합니다.
고난입니다
성도가 고난을 안 받은 시대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주교가 있은 후에는 이단이라고 하면 종교재판을 했습니다. 그들이 누군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역사를 통해서 천주교에 의해서 고난을 받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고문 기구들이 속속히 밝혀지고 있습니다.
고난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고난이 왔을 때 배교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는 순교를 당하는 그 자리에서 배교를 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도는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잠깐 받는 고난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은 고난이 없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권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환경이 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 않고 있지만 만약에 우리가 율법주의자에게 이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고난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믿기 때문에 행위를 하지 않는 그 자체도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위를 하면 쉽습니다.
우리도 좋은 건물에서 예배를 하고 또 기독교와 같이 모든 행위를 하면 좋을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 육체에서는 끊임이 없이 소욕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육체의 소욕을 참고 인내를 한 것 역시도 고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육체의 소욕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가진 것을 내 보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은 영의 생명이기 때문에 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 자체가 고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잠깐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 소욕과의 싸움이 고난이기도 합니다.
영의 일이라는 것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정말 무미건조합니다. 이 무미건조한 것을 오직 믿음으로 내 안에 역사를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고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감동을 해 주심으로 잠깐 받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더욱 견고케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6절을 보겠습니다. (신 264쪽)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부르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보시기 바랍니다. 이 고린도전서의 말씀이 그대로 실감이 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입니다
이런 자들을 자기들이 교회 안에 끌어 들이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또 그런 자들을 통해서 자기들이 전하는 성경을 정당화 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특히 교회 안에 유명한 공인이 하나가 들어오면 그를 아주 잘 이용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인은 자기의 재능을 교회 안에서 보이면서 대단한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많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꼭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이 복음은 그런 사람이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혜가 있습니까?
그 사람은 반드시 교회 안에서 자기 지혜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능한 자가 있습니까? 그 사람은 교회 안에서 자기 능력을 나타내고 싶어서 견디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벌 좋은 자가 있습니까? 그 사람은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해서 이 무미건조한 영의 일을 믿는다는 것을 참고 견디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부르셨습니다.
이방인 중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부르신 사람들을 이렇게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주님이 부르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경에서 누구를 부르시는 가를 알아야 내가 부르심을 받은 자인가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직도 성경에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를 통해서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보았을 때 분명히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왜 성경을 보아야 하는가 하면 성경이 부르신 자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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