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9:18절을 보겠습니다. (신 252쪽)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주시는 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고 구원에 대한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행위를 잘할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바로를 통해서 능력을 보이심으로 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일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입니다 사단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율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능력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어떻게 우리가 보았습니까?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밝히 보이고 있지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저주를 받는 율법의 행위에 속해 있습니다.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율법의 종이 되어 있으면서도 아니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게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그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들이 누구의 종이 되어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종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종입니다 특히나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 기독교는 교회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부터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니 모든 교회가 율법의 종이 되어 있다는 것을 광고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교회 앞에 써 붙여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주일에 드리는 예배와 그리고 시간을 광고를 하면서 자기들이 이렇게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면 이미 사람들의 머리에는 교회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가가 각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율법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지킨다고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어느 교회가 그런 것을 광고하지 않으면 혹시 한번 가보려고 하던 교인도 가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 새벽 예배 같은 경우에는 목사들의 영적인 척도가 되어서 목사들은 반드시 혼자서라도 새벽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의 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 종살이 하는데서 꺼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방의 교회는 스스로가 다시 종으로 살기를 원하면서 이제는 모두가 종교의 거대한 힘에 의해서 굴복이 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고 그 이름을 온 땅에 전파를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죄에서 구원할 자로 믿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그 이름이 온 땅에 전파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만 그 이름의 뜻을 정확하게 전파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우리 인생은 죄인입니다 우리 육체는 죄를 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를 안 짓고 선을 행하는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성경에서 정의를 내려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죄를 안 지려고 율법의 행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죄를 안 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죄를 안 짓겠다고 하는 그들이 죄를 지면서 이중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제가 방종을 하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는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그랬고 이 시대 역시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죄를 안 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온 땅에 그 이름이 전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깨끗하게 사는 것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구원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전파하느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혀 전파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입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대교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살아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이방인들이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의 종이 되어 있으면서도 그들은 말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한 해가 지날 때쯤이면 성탄절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날입니까? 아닙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성탄절이라는 날을 알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몰라도 사람들은 이미 국가 공휴일로 지정이 되어 있는 성탄절을 알고 있고 그 날에 쉬는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어느 사도가 성탄절을 지켰습니까? 자기들이 날을 만들어서 지키면서 그 날에 종이 되어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방에 참 빛을 비춰주셨지만 이방의 교회는 빨리 타락을 해서 성탄절이라는 날을 만들어 놓고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놓은 날에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가 종이 되어서 살아가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해서 포로가 되어 있는 자들을 자유케 하셨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스스로 다시 포로가 되기를 자청하고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바로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셨지만 이 시대는 스스로가 종이 되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우리의 어머니는 자유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 십자가의 은혜가 무색해 졌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
그런즉
앞 내용으로 미루어 뒤 내용의 근거를 짐작해 낼 수 있을 때 쓰여 앞뒤 문장을 이어 주는 말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국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한글개역성경은 구원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성경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목사들은 국어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9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즉 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그런즉 이라는 말씀입니까? 9장16-17절에 말씀에 대해서 그런즉 이라는 말씀입니까? 거의 모든 목사들이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어디에 말씀을 근거로 해서 그런즉 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아마 그렇습니다.
거의 모든 목사들이 앞에 있는 바로의 말씀을 보고 바로를 강퍅케 하셨으니까 그 말씀에 연결이 되는 말씀으로 생각을 하고 이 말씀을 연결을 해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절대로 안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소경입니다
국어도 모르는 사람이 성경을 본다는 것은 소경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사라는 사람들이 자기가 신학에서 배운 것을 그리고 스스로 공부를 한 것을 가지고 자랑이나 하고 있지 성경을 성경으로 보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그런즉 입니까?
9장13절까지의 말씀을 이어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약속의 씨로 태어났고 또 이삭이 리브가라는 교회 안에서 복음을 전해서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는데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다는 그 말씀에 대해서 그런즉 이라는 말씀입니다 국어의 문법을 모르면 이 말씀이 어디에서 연결이 되는 말씀인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를 말씀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에서와 야곱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복음을 전한 교회 리브가의 교회 안에는 에서와 야곱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입니다
바로가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잘 보아야 합니다. 바로를 강퍅케 하신 것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고 에서는 강퍅케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리브가의 교회 안에 있는 두 사람 중에 야곱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고 에서는 강퍅케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야곱과 같이 긍휼히 여기심을 입은 사람이 있고 에서와 같이 강퍅케 하심으로 버림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누구를 강퍅케 하셨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8: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61쪽)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겨주셔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긍휼히 여김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고 모두가 다 멸망의 길고 가고 말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누구입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육체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 육체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은 우리 육체가 아니라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약속의 씨입니다. 그 씨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긍휼히 입은 것이지 우리 육체가 긍휼히 입어서 그 신체가 주님이 오시는 날에 부활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야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해서 야곱은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총회에 이름이 있습니다. 물론 그 이름은 야곱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별들을 이름대로 부르십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그 이름대로 부르십니다. 그 이름을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부르고 있는 그런 이름이 아닙니다. 육체의 야곱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심으로 약속의 씨가 태어났습니다.
영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우리 영이 구원을 받는 것이지 우리 신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영의 일을 모르고 자기 육체가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은 약속의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의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기억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 신체가 부활을 하면 반드시 기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약속의 씨가 구원을 받기 때문에 우리의 불의와 죄를 기억하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불의를 기억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가 약속의 씨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정말 이 영의 일을 모르면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믿어지는 역사가 그 안에서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아 이 영의 일이 믿어지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것이 누구입니까? 육체의 야곱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물론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약속의 씨가 없다면 그 야곱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시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씀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누구입니까?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거하시고 있습니다. 그 영이 있기 때문에 긍휼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육체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썩어 없어집니다. 불의를 행했기 때문에 썩어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주셔서 그 영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불의와 죄를 기억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입니다
그 야곱에게는 육체의 야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삭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리브가의 교회에서 태어난 약속의 씨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받은 약속의 씨가 야곱에게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약속의 씨가 있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고자 하시는 자입니다
그것이 누구인가 하면 야곱에게 있는 약속의 씨 입니다 그 씨를 이삭이 장자의 축복을 해 줌으로 해서 그가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 육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영을 비교를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심을 받은 자는 우리 육체가 아니라 약속의 씨가 있는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육체가 아닙니다.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입니다 그것이 만약에 우리의 신체라면 성경은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영의 일에 있어서 일관성이 있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시대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믿을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김을 받아서 그 신체가 구원을 받은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는 누군가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약속의 씨라는 말씀입니다 그 약속의 씨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실 수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우리가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천국은 우리의 상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역사를 하는 성도만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영의 일을 믿기 보다는 육체의 자기가 천국에 가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거룩한 형상만이 들어갈 수 있지 우리 신체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입니다
그것은 육체의 야곱이 아니라 그 야곱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씨가 탄생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긍휼히 여기심을 받은 자의 안에 있는 약속의 씨가 있기 때문에 야곱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실제는 야곱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시고 있습니다.
히브리서3:15-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55쪽)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출애굽기에서 바로도 그 마음이 강퍅케 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을 내 보내지 않은 것은 마음이 강퍅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9장18절의 말씀에서 강퍅케 하셨다는 말씀은 바로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에서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바로는 이 세상 사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긍휼히 여김을 받았고 하고자 하시는 대로 세상 사람들은 강퍅케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세상과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가 있고 강퍅케 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에서와 야곱을 통해서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바로에게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거의 모든 사람이 그 다음 절에서 바로를 강퍅게 하시고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을 긍휼히 여기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은 바로와 같이 강퍅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합니까?
자기들이 하는 말에 그리고 행위에 대해서 반대를 하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셔서 저렇게 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자기들이 강퍅케 되어 있는데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고 세상 사람들은 강퍅케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강퍅합니까?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을 강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광야에서 죽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이 마음이 강퍅해 져서 범죄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떠한 범죄를 했는가는 고린도전서10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간음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을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원망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광야라는 교회 안에서 어떻게 했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히브리서에서는 마음을 강퍅케 해서 하나님의 격노를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경계입니다
왜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런 예표들을 보여주셨습니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계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은 무슨 짓을 하든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다고 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강퍅해 져서 자기들이 교회에 나오라고 해도 말을 안 듣고 오히려 대적을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거의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은 자기들이 다 하고 있고 나쁜 의미의 말씀은 세상 사람이나 아니면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이단이라고 하는데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경계로 기록을 하고 있지만 그 경계의 말씀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누가 강퍅합니까?
순종치 않던 이스라엘이 강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순종치 않다고 말씀을 하니까 이 시대는 거의 율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순종을 잘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순종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면 그들은 율법의 종이 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순종치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라는 교회에서 복음에 순종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하시는 모든 것을 보여주셨지만 그들의 마음이 강퍅케 져서 순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경계로 이 시대 그대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순종치 않고 있습니다.
복음에 순종치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순종을 하면서 그것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율법에 순종을 하고 있는가 하면 마음이 강퍅케 되어서 그렇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아서 순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육체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어느 누구도 복음에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는 말씀은 사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사람은 그 마음이 원래 강퍅합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복음을 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정도 수긍은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지극히 적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받아들이지를 못하는가 하면 사람의 이성은 강퍅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경계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했는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복음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그 복음이 설령 사람의 이성에 이해가 되어도 그것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에게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지만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복음에 순종을 하지 않고 마음을 강퍅케 해서 하나님의 격노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강퍅했습니다.
그 결론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에서 저희가 믿지 아니함으로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들의 눈으로 다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만 믿지 아니하므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까? 그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계가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믿지 않아서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도 마음이 강퍅케 져서 믿지 아니함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습니다.
이 시대 역시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말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믿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 시대 역시 교회 안에서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3:2절을 보겠습니다. (신 235쪽)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저희 마음이 강퍅합니다.
저희가 순종치 않았습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는가 하면 믿지를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입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이성을 상실하는 것 같습니다. 그 안에만 들어오면 모두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라는 교회에서 어떻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다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지를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악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저희가 순종치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순종치 않고 강퍅한 마음을 가졌다가 모두가 사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경계를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강퍅해 져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은 다 믿음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타락의 길로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이 누군가 하면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누구입니까?
우리 육체가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은 믿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왜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닌가 하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주시기 때문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을 수 있습니까?
사람이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왜 믿을 수 없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겨주셔야 믿을 수 있고 그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주시고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씨가 탄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십니다. 교회 안에 이 두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은 강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믿음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있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 믿음의 비밀을 모르고 그저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믿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누가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인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또 누가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악을 행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마음이 강퍅합니다. 그 악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자기 육체로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악한 자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 악한 자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건짐을 받은 믿음이 있는 성도입니다 정말 이 시대를 보더라도 악한 자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지만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성경을 보는 눈이 소경이 되어 있는 사람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3:14절을 보겠습니다. (신 289쪽)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강퍅하다
까다롭고 고집이 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완고하다 역시 비슷합니다. 용통성이 없고 고집이 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늘 성경을 볼 때마다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혜가 있습니까?
누가 이 시대 복음을 깨닫고 그 안에서 교제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정말 사람의 지혜라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만큼 성경은 오묘합니다.
이 성경에서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복음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이 하고 있는 종교적인 행위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복음이 계시가 되기 전까지는 모두가 다 강퍅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는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강퍅케 하십니까?
그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은 모두가 다 강퍅한 자입니다 왜 강퍅한 자인가 하면 모두가 율법주의에 빠져서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다 강퍅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기 전에 우리는 강퍅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퍅케 하셔서 강퍅한 자가 아니라 본래 강퍅한 자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본래 강퍅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강퍅케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본래가 강퍅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쉽게 보다보니까 누구는 긍휼히 여기시고 누구는 강퍅케 하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강퍅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강퍅한 자 중에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면 이상하게 해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아담의 씨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다 강퍅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은 긍휼을 입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강퍅케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라 해도 우리는 본래 강퍅한 자이지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강퍅하다
완고하다 거의 비슷한 말입니다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아직까지 수건이 벗겨지지가 않은 사람이 너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거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가 있어서 수건을 스스로 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은 뼈 속부터 율법주의라서 그것을 벗기가 완고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완고합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이성으로는 율법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면 사람들은 율법주의에서 절대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율법을 의미하는 수건을 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면 자연스럽게 벗어집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완고하기 때문에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입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는 불안해서 견디지를 못 합니다 율법을 지켜야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완고하다고 그리고 강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강퍅합니다.
그리고 완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가 되어서 긍휼히 여김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 절대 안 벗겨집니다.
이제까지 교회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도 이 율법이 벗겨지지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가 아니라 그들은 긍휼을 입은 자가 되지 못해서 그렇게 유명한 신학자로서 평생을 살았지만 수건이 벗겨지지가 않았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수건이 벗겨지지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얼마나 완고한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스라엘이 완고해서 그들은 율법주의가 되어서 율법을 지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인들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리고 이 시대는 성경적으로 성도로서 살아가야 하는 율법만 지키고 있습니까? 역시 율법을 지키는 것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에서 사도 바울이 할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성경에 있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킬 의무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있습니다. 어떻게 긍휼히 여겨주시고 있는가 하면 성령을 보내 주셔서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닌 믿음의 비밀을 알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서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한다는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십일조를 내면서 믿음으로 한다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수건이 벗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긍휼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누군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직 완고해서 수건이 벗겨지지가 않은 상태에 있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단 한가지의 율법입니다
그것만 보아도 그가 누군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아직 완고해서 수건이 벗겨지기가 않은 사람이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아직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자가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강퍅한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있습니다. 그가 누군가 하면 이삭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리브가의 교회 안에 있는 야곱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야곱은 이삭과 같이 가나안을 유업으로 받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약속의 씨가 있는 성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9:19절을 보겠습니다. (신 252쪽)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내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책망하시는가?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강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고 있습니다. 아니 쉽게 말씀을 드리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마음이 강퍅합니다. 복음에 대해서 그렇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참 사람이 볼 때는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지 않았다면 교회 안에 있는 어느 사람에게는 강퍅하게 그대로 두시고 어느 사람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셨다면 불공평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볼 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 하시고서 어떻게 사람을 책망하실 수 있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를 구원해 주시고 구원을 못 받은 사람을 허물한다면 그것이 잘못 된 것이 아니냐고 말할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참 이성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그렇게 하시고 어떻게 우리를 허물하시겠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허물을 찾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선택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거기에 또 운명론자들이 있기도 합니다. 선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운명론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반대하는 나름대로의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지금 이 운명론자들이 나올 것을 알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대로 됩니다.
그런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운명은 이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우리는 이제 포기를 하면서 살아가야겠다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니 복음을 전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대로 모든 것이 다 이미 운명처럼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박을 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복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까지도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은 아직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잘못을 말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설득력이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지 않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 말씀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이 말씀이 이해가 안 됩니다
아니 지금 로마서9장에서 사도 바울이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복음이 없는 사람은 로마서를 아무리 보아도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의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그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잘못된 선택론을 교리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시대 기독교의 교리가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목사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억지로 성경을 풀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리와 성경이 맞지를 않으니까 스스로도 성경을 보면서 앞뒤가 맞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이미 로마서 강해를 하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이 부활을 하시고 이제 천국에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달란트를 남길 수 있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재능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육체로는 강퍅한 자입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셔서 강퍅한 자가 아니라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우리 인생은 모두가 강퍅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재능을 다 주셨습니다.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혼인 잔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해야 합니다. 반드시 리브가의 배 속에는 야곱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리브가의 배 속에 있는 자는 누구나 달란트를 남길 수 있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거지입니까?
고아입니까? 과부입니까? 나그네입니까? 그가 어떠한 자라 해도 달란트를 남길 수 있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 재능을 사용하지 않고 나서 나중에 하나님이 어찌하여 나를 허물하느냐고 말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5:39절을 보겠습니다. (신 151쪽)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어찌하여 하나님이 허물합니까?
당연히 허물하실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당연히 허물을 하시는가 하면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만약에 세상 사람들의 문제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허물하신다면 그것이 잘못입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로마서를 하나님이 사도 바울에게 기록하게 하셨는데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셨는데 이것이 교회 안에 와 교회 밖이라면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허물을 찾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입니다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갑니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긴 자가 천국에 갑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 자는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에게 재능을 주셨습니다. 재능을 주시고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밖이 아닙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세상 죄인은 이 지구에 종말이 오면 그들은 불못에 들어가 소멸이 됩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안 전해졌다고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듬어서 찾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먼저 알고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왔습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에 분명히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고 재능도 주셨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고 있습니다. 아니 본다고 해도 영생을 얻기 위해서 상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또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물하시는 것이 잘못입니까?
사람들은 운명론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운명론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체의 선택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그들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물론 중세시대에는 성경을 못 보게 했습니다.
천주교의 신부가 아니고 성경을 본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사모하는 성도는 성경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가난해서 못 보았습니까? 그것까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기를 위해서 상고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종교를 위해서는 성경을 그렇게 열심을 다해서 보고 있지만 영생을 얻기 위해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경을 보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상고를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성경으로 보기가 참으로 어렵게 편찬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늘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에 너무 많은 첨삭이 들어가 있고 그것을 아무 생각이 없이 목사들까지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로마서9장입니다
1절부터13절까지가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해서 14절에서 그런즉, 16절에서 그런즉, 18절에서 그런즉, 30절에서 그런즉 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8절에서 그런즉을 말씀하고 있는데 19절에서 시작하면서 동그라미를 쳐 놓고 그 위에 제목을 달아 놓아서 18절과 19절의 말씀이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즉 입니다.
그 다음 그런즉이 나올 때까지 한 문장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18절에서 29절까지는 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19절에서 동그라미를 쳐 놓고 제목을 달아 놓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성경을 보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립니다.
이런 성경을 보면서 과연 구원을 받을 사람이 나오겠습니까? 정말 우리는 성경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목사들도 성경을 보면서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의 일부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꾸짖지 아니하시고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설령 그런 성경을 보고 있다고 해도 영생을 얻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또 성경을 바로 볼 수 있게 역사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영생을 사모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똑같이 성경을 보고 있지만 성경에 대해서 전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합니까? 자기에게 불리하게 생각이 되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에게 강퍅케 하시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다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허물하겠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허물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달란트의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받은 자에게 주님께서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달란트를 남길 수 있는 재능까지 주셨는데도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재능을 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허물하시는 것이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22: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7쪽)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성경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안 읽었다 해도 누구나 그래도 마태복음 정도는 읽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이 성경을 보겠다고 하면서 읽는 것이 마태복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정도는 누구나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 혼인 잔치를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천국에 들어가게 잔치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교회에 나오면 천국에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천국에 대해서 알고자 하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이스라엘을 청했는데 그들이 오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청했다는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먼저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안 오니까 종들을 보내서 사거리에서 만나는 자를 혼인 잔치에 청해서 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주님과 혼인을 하는데 그 잔치에 청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악한 자입니다 그리고 선한 자입니다 만나는 대로 모두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원래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오지를 않으니까 사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혼인 잔치의 예복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복을 안 주었습니까?
약속의 씨를 안 주셨습니까?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할 수 있게 예복을 준비를 해서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복을 주는데도 안 입고 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어느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면 성경을 보게 됩니다. 그 성경에 이미 예복이 다 준비가 되어서 값없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예복을 준비 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예복을 입지를 않고 있습니다. 혼인 잔치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예복을 주시고 있지만 사람들이 안 입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묻고 있습니다.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고 하자 유구무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데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나중에 유구무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깨닫지를 못하고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을 하겠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로마서의 말씀을 보고 있지만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신체의 선택이니 운명이니 하면서 격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막연하게 자기들을 구원하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 합니까?
자기들이 긍휼하심을 입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도 모르고 예복도 입지 않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셨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신체가 선택을 받았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반드시 마태복음의 말씀과 같이 유구무언이 됩니다.
나중에 할 말이 있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아니 한글을 배울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겼다고 하면서 나를 어찌하여 허물하느냐고 하는 말이 통할 것 같습니까? 반드시 이 한 사람과 같이 유구무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 팔십년입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아니 영생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부지런하게 성경에서 영생을 얻기를 상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영생에 대해서 게으르게 하다가 주님이 오셨을 때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이 발견이 되어서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던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국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천국은 우리에게 영광이 넘치는 곳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이 천국에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천국이 좋다고 해도 교회 안에는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차라리 세상에 살면 그 수족을 결박당하지 않을 수 있고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던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예복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적습니까?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가 적어서 적습니까?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영생에 대해서 사모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안 입습니다.
예복을 은혜로 거저 주셔도 안 입습니다. 왜 안 입는가 하면 자기들의 지혜로 이 성경을 보니까 도무지 입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물하신다고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예복까지 준비를 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11:13절을 보겠습니다. (신 112쪽)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안 보내 주셨습니까?
그래서 성경을 보아도 도무지 무슨 말씀인가를 알 수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렇게 긍휼히 여기시는 자에게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까? 우리는 정말 성경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성경으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성령을 안 보내 주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성령을 구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성령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말씀들이 너무 많은데 그런 것을 생각하지를 않고 스스로 포기를 하거나 자기에게 믿음이 없는 것으로 치부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안 봅니까?
그러면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성경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왜 성경을 보는가 하면 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복음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역사를 하는데 어떻게 성경을 안 볼 수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 뭐합니까?
이미 기독교라는 종교에 너무 세뇌가 되어 있습니다. 목사들은 자기들이 배운 신학을 기초로 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핑계를 대고 운명론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 선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이 곧 운명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 장난입니다.
내 신체를 선택하신 것이나 운명론이나 무엇이 다릅니까? 고상한 척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선택이라는 고상한 말을 하면서 스스로 포기를 하고 있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성령을 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은사가 아닙니다. 아니 이 시대는 은사가 아니라 종교의 샤머니즘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그런 현상을 보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영을 이 시대는 구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진리의 영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감히 구할 생각도 못 합니다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구합니까?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면 감지덕지 하고 받는 것이고 자기가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냥 보내 주시면 되지 무엇 하려고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보내 주시면 되는데 왜 굳이 우리에게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구해야 합니다.
반드시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나는 구하지도 않는데 하늘에서 도깨비 방망이 두드리듯이 뚝딱하고 주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십니까?
당연히 허물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그리스도편지에 와서 같이 교제를 하고 있는 성도들이 그냥 왔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는 모두가 지혜를 구했습니다.
늘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늘 영생에 대해서 그리고 성경을 바로 알기를 사모 했습니다. 아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언가 왠지 모르게 찜찜했기 때문에 바로 알고 싶어서 찾아 다녔습니다. 직접적으로 성령을 구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 말씀이 성경과 같지 않았기 때문에 찾아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물하십니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 모두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진리를 알고 영생을 받는 것을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복음을 밝히 보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왜 강퍅한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허물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허물을 하시는데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안 보고 있고 성경을 보아도 이미 기독교의 교리에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 보고 있어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과 같이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편19:12절을 보겠습니다. (구 816쪽)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생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구원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이것이 영의 일이다보니까 사람의 지혜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은혜라는 말씀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자기 허물을 깨달아야 하는데 사람의 이성으로는 어느 누구도 자기 허물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답이 다 나와 있습니다. 누가 자기 허물을 깨닫습니까? 허물을 깨닫지를 못하니까 나의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시대 누가 자기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까? 제가 알기에는 자기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구하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물이라고 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자기 육신의 죄가 숨은 것이 있으면 그것이 생각나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까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 하면 마음이 강퍅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긍휼을 구해야 하는데 긍휼을 구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면 어떻게 나를 허물하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누가 그 뜻을 대적할 수 있겠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말합니까?
이 시대 자기 신체의 선택을 주장하는 자들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아니 자기들이 신체의 선택의 당위성을 설명하려고 하나님께서 그 뜻을 정하셔서 우리를 선택하셨는데 누가 대적하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전혀 모르는 그들이 육의 일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이 마치 대단한 존재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먼저 허물을 깨닫기 바랍니다.
아니 내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자기들의 허물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허물진 백성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서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자기들의 허물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허물진 백성입니다
왜 허물진 백성인가 하면 우리 스스로 복음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강퍅해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있지만 이 복음이 전혀 보이지가 않아서 자기 허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약속의 씨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삭과 같은 생명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리브라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과 같이 약속의 씨가 있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약속의 씨가 없는 에서를 미워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리로 생각해도 너무도 당연한 말씀입니다
영의 생명입니다
사실 누구나 다 얻을 수 있게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고 있습니다. 성경을 안 보니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할 수 없습니다. 아니 성경을 보더라도 이 영생에 대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육체의 이를 위해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 하고자 하는 자가 누군가 하면 성경을 보면서 영생을 얻기를 위해서 상고를 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보는 사람은 성령을 구하게 되어 있고 자기 허물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성경을 안 보고 있고 성경을 봐도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물하십니까?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대적하겠느냐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밝히 보이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운명론자도 아니고 육체의 선택을 믿는 자도 아니고 천국의 보화를 성경에서 찾은 성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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