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16절을 보겠습니다. (신 251쪽)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슨 행위를 잘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깨닫기 보다는 자기가 행위를 잘 하면 하나님께서 사랑을 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우리 육체를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육체가 사랑을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라는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 육체를 사랑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다고 해도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래를 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까? 물론 전혀 틀리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체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씨로 태어난 생명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나를 선택하셨습니까?
내 육체를 선택하셔서 그 육체를 주님의 날에 구원을 해서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 육체는 모두가 유기가 되었습니다. 아니 이미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육체는 흙으로 지음을 받아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수고와 고생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인생을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인생의 가치가 더 높아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이 더 행복하기 위해서 점점 더 율법주의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육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이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죄를 진 육신을 하나님께서 설령 사랑을 하신다 해도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잠시 후에 썩어 없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사랑을 하신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누구를 선택하셨습니까?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하나는 육신의 자녀고 하나는 약속의 씨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자녀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씨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에서와 야곱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육신의 에서와 육신의 야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 자녀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서가 있고 야곱이 있습니다. 에서는 미워하시고 있고 야곱은 사랑을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야곱을 사랑하시는가 하면 하늘의 있는 장자들의 총회에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야곱을 사랑하시고 있습니다.
이 야곱을 사랑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는데 있어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알고 있는 선택에 대해서는 모두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 선택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완전히 엿장수 마음대로 하시는 분으로 밖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 야곱을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야곱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약속의 씨가 있는 야곱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의 씨, 영원한 생명이 있는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야곱이라고 하니까 육신의 야곱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좀 어렵더라도 야곱의 안에 있는 약속의 씨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막연하게 자기가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시는 자가 누구라는 것을 모르고 막연하게 자기가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고 그런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십계명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겨주시는데 이 시대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십계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고 싶어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십계명의 어느 한 계명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역사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누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입니까?
그것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에게 주님께서는 정죄를 하지 않고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물론 실제 간음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우리 인생 모두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미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저주를 받은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아서 죽어야 하는 그 생명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저주를 받게 하시고 저주를 받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주셨는가 하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지키시고 십자가에서 구속을 이루시고 영으로 부활을 하심으로 우리에게도 그 생명이 있는 영을 주셨습니다.
그 영이 야곱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영이 약속의 씨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 육신이 긍휼히 여김을 받고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 육신은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고 이제 우리 안에 있는 약속의 씨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선택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 육신이 선택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육신이 선택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을 선택했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어차피 썩어 없어지는 것을 선택하신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영입니다
그리고 육신입니다 이 두 가지를 같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지금 로마서9장은 영과 육신을 같이 말씀을 하고 있어서 우리가 깨닫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또 제가 설명을 하는 것 역시 어렵다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성도들은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신학의 교리입니다
그것은 이제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성경을 본다는 것은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조직신학에서 배우고 있는 기독교 교리가 성경을 아는데 있어 방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다 버리고 성경을 성경으로 보아야 합니다.
두 가지를 같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과 영을 같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영과 육을 따로 분별을 해서 아니 육신이 영과 혼합하는 것으로 보면 성경을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의 사람과 영을 같이 말씀을 하고 있고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리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절대로 성경이 보일 수 없습니다. 왜 보일 수 없는가 하면 그들은 육신을 선택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로마서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육신이 아니라 약속의 씨, 영의 생명이 탄생이 되는 성도를 택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고 있습니다.
누가 섭니까? 우리 육신이 아니라 영이라는 것을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은 육신이 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육신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또 다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입니다
사람은 이성을 가지고 있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천국을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육신이 원한다 해도 그것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달음박질을 잘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 달음박질을 하는 그 육신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우리 육신은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자기들의 육신을 가지고 원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5:39절를 보겠습니다. (신 98쪽)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천국에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더라도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가기를 원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원하는 것과 같이 보이고 있습니다.
원하는 자가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정말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까? 표면상으로 물론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는 생명에 대해서 원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는데 야곱이 되려고 하는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말입니다.
사람이 말로는 무슨 말을 못 하겠습니까? 그런 말에 미혹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천국을 사모하는 것과 같이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들은 천국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묵은 포도주입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입니다 묵은 포도주는 율법을 상징하고 있고 새 포도주는 성령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묵은 포도주로는 어느 누구도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를 하면 약속의 씨가 탄생이 되고 있습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약속의 씨를 원하는 자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시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새 것을 마시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입니다
그 율법으로는 모두가 저주를 받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반드시 새 것을 마셔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난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없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 시대 기독교인들 역시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마치 이스라엘만 그런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들에게만 하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님께서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자가 없습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지만 원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먼저 원하는 자가 있어야 하는데 원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표면적으로는 원하는 자가 천만 명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원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입니다
원하는 자가 없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셔도 자기들이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만 원하는 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방의 교회 역시도 원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원하는 자가 없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묵은 것을 좋아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만 묵은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기독교인들 역시도 묵은 것을 좋아해서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합니까?
거짓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이 묵은 것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원하는 자가 없이 모두가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있으면서도 성경과 반대로 자기들이 원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이 아닙니다.
만약에 원하는 자로 말미암아서 된다고 하면 주님의 말씀과 같이 원하는 자가 없어서 우리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지각이 있어서 그것을 원하고 있는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의 일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원하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원해서 지금 이 시대 이 복음을 깨닫고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묵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를 스스로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묵은 것은 원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묵은 것을 좋아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한다고 해서 마치 우리가 원해서 이 복음을 깨닫고 믿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가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습니다. 왜 원하는 자가 없는가 하면 새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 인생의 지혜로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것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야 그때부터 우리가 새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닙니다.
아니 우리 인생은 새 것을 모르기 때문에 원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은 다 묵은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는 저주를 받고 있지만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묵은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왜 묵은 것을 좋아하고 있는가 하면 새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새 것을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습니다.
새 것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원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자기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막연하게 천국에 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08쪽)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닙니다.
이 시대는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성령이 대해서 너무 무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마치 샤머니즘으로 생각을 하면서 성령이 오시면 자기들의 육체를 통해서 어떤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런 표적들을 보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그러니까 영의 일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의 영이 탄생이 될 수 있게 역사를 하는, 우리를 인도하는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령의 은사라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종교적인 샤머니즘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먼저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육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이 시대 교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천국에 가려고 교회 안에서 온갖 여러 가지 행위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 행위들이 다 천국에 가기를 원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우리 육체는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니 도리어 원하는 것을 방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육체로는 어느 누구도 원하는 것을 그러니까 천국에 가는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방해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이 무엇입니까?
그 육체 안에는 우리의 마음도 있고 지혜도 있고 혼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육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성령을 대적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영의 비밀을 모르면 인생 모두는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하고 있습니까?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닙니다. 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닌가 하면 우리 육체는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성령을 대적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우리 육체가 어떻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로마서의 말씀을 보고 마치 엿장수 마음대로 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하는가 하면 엿장수 마음대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은 원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우리 육체는 원하지를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원하고 있습니까?
아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원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를 보면 도리어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면서 대적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이면 우리 인생은 모두가 사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입니다
우리 육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육체가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천국에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육체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도리어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면서 대적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원하는 자로 말미암아 되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왜 성령을 주시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령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령이 오시지가 않아서 성경을 보아도 육체를 따라 행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가 않아서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하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무엇을 좋아하고 있습니까?
육체의 소욕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묵은 것을 마시고 새 것을 마시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경에서 이러한 말씀들을 바로 알지 못하면 평생을 교회 안에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면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체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묵은 것을 좋아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에서는 육체의 소욕이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고 대적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성령을 아직 오시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원한다고 하면서 천국에 갔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닙니다.
우리는 원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물론 천국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는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고 대적하면서 묵은 것을 좋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기 전까지는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원하고 있습니까?
물론 천국은 모두가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우리는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도리어 우리 육체는 거스리고 대적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엿장수가 아닙니다. 이 시대 육체의 선택을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엿장수 마음대로 선택을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제까지 신학자들이 그렇게 가르쳤고 그것이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하면서 맹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원하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 육체는 도리어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고 대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원하는 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도 묵은 것을 마시고 새 것을 마시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새 것을 마시기를 원하지 않는가 하면 우리 육체는 새 것을 모르기 때문에 마실 수 없습니다.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우리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고 대적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야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 육체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대적입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와 그리고 혼과 정신은 성령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것으로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성령을 거스리고 대적을 하고 있지만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아서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내 육체와 성령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성령이 오셨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원한다고 하면서 천국에 들어가기를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 열심이 도리어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고 대적을 하고 있지만 깨달을 수 없습니다.
원하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로마서를 통해서 영의 일을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이 영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모두가 육체의 소욕이 빠져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의지입니까?
그리고 사람의 노력입니까? 그리고 사람의 이성입니까? 사람의 인격입니까? 그것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면 묵은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또 성령을 거스리고 대적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 거의 모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합니까?
원하는 것을 도리어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원하는 것을 거스리고 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원하는 자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원하는 자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면 굳이 성령이 오실 필요도 없고 우리는 사람의 이성을 따라 성경을 보면서 지혜를 구하면 됩니다.
이 시대 인격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령이 오시면 자기들이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이라는 것이 어떠한가 하면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고 대적하면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격을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한 자의 말입니다 우리 인격이라는 것은 성령을 거스리고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인격이라는 것 역시 육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인격으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데도 자기들이 꽤나 고상한 척을 하면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2:3절을 보겠습니다. (신 311쪽)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영이 탄생이 되기 전입니다
그때의 육체를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육체입니다
우리 육체가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로는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육체를 살리셨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육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났다는 말씀입니다
육체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신체가 부활을 한다는 그 교리부터가 잘못 되어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모든 성경을 바로 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하지만 무엇을 살리셨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영입니다
육체는 진노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영을 살리셨습니다. 그 영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진노를 받게 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육체와 마음은 진노를 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하는 자로 말미암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원하는 자로 말미암아 되게 하시면 우리는 다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원하는 자로 말미암아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노력을 하고 있고 의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인생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할 수 있게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너무 오해를 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였다고 말씀을 하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세상에 살 때 그랬는데 이제는 교회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풍습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법입니다 세상 풍습이라고 하니까 우리나라에 있는 유교적인 관습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유교도 역시 법을 지키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그 법이라는 것이 육체의 욕심이고 우리 마음에서부터 그 법을 지키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진노의 자녀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니 그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육체는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의 육체로 원하는 것을 하려고 의지를 나타내고 있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서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반드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야 우리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고 대적을 해 줌으로 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7절을 보겠습니다. (신 308쪽)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달음박질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달음박질을 누가 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 인생이 스스로 달음박질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고 묻고 있습니다. 누가 달음질을 못하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 육체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데 육체가 그것을 못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선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육체와 지금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로는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육체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육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달음박질을 하는 것을 할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육체가 어떻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말씀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하니까 오해를 해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긍휼히 여겨주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육체로는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도 없고 또 달음질을 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있어야 하고 말 것 아닙니까?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어느 누구라도 원하는 것을 하고 있고 달음질을 하고 있어야 그것으로 하고 말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육체는 그것을 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고 대적하면서 할 수 있게 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야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달음박질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은 상태에서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달음박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서 달음박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는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고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생각부터 지우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아니라고 하면 아닙니다.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다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원하는 자가 있고 달음박질을 하는 자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원하는 자도 없고 달음박질하는 자도 없습니다. 왜 없는가 하면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고 사람들은 마치 원하는 자가 있는 것으로 달음박질을 하는 자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긍휼을 입었다고 하면서 감성적인 말로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2:4-5절을 보겠습니다. (신 311쪽)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긍휼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자와 달음박질을 하는 자는 우리 육체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은 우리의 육체가 아니라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입니다
원하는 자도 없습니다. 그리고 달음박질하는 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 안에 이삭과 같은 약속의 씨가 탄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육체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십계명을 지키지 못해서 다 죽어야 하는데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복음을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해 주셨습니다.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 안에 생명이 탄생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정말 이 구원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구원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너무 막연하게 보고 있고 그저 교회 안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 구원도 영의 구원이 아니라 자기들의 신체가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었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영을 함께 살리시는데 원하는 자가 없고 달음박질하는 자도 없는데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영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그것이 안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소경이 되어서 소경을 인도하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자기들이 원하지도 않고 달음박질도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이 말씀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어떻게 살아났는가 하면 육체는 죽고 영으로 살아났다는 말씀입니다
전제 조건입니다.
육체로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말로는 죽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죽지를 않고 있습니다. 죽어야 살리실 수 있는데 이 시대는 죽지를 않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전혀 죽지를 않고 살아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누가 긍휼하심을 입습니까?
그것을 출애굽기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기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구입니까?
원하는 자도 아닙니다. 달음박질하는 자도 아닙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런데 누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가 하면 십계명을 지키지 못해서 죽어야 하는 우리가 긍휼히 여기심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십계명을 자기들이 지키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는 것은 우리가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이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십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문자 그대로의 십계명을 지키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늘 귀로 들어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을 보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로만 자기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9:17절을 보겠습니다. (신 252쪽)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바로를 두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일을 하려고 너를 세웠다.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의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영의 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육의 일로 보고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서 예표와 그림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그리고 예표입니다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세상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문자를 아는 것으로 마치 영의 일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이 어떠한가 하면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은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바로를 세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위해서 바로를 세웠습니까?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는 일을 위해서 바로를 세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닙니다. 그리고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닙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일입니까?
구원입니다 구약은 그림자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구약을 볼 때는 늘 그림자와 비유와 예표라는 것을 알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구약을 문자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보다보니까 성경이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거의 다 삼천포로 빠져 갈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위해서 바로를 세우셨는지를 모르고 그저 문자 그대로 설교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앞에 있는 말씀이 깨달아져야 이 일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데 앞에 있는 말씀을 모르면 이 일이 무엇인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바로를 세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9:16절을 보겠습니다. (구 94쪽)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바로입니다
지금의 이집트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당시는 애굽이라는 나라가 가장 강대했습니다. 주변 거의 모든 국가가 애굽의 포로가 되거나 아니면 조공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바로는 모든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바로의 포로가 된 것은 아닙니다. 요셉 때에 기근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살게 하심으로 해서 갔습니다. 아직 가나안 땅에 죄악이 관영하지를 않아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셨지만 요셉을 모르는 왕이 나타남으로 해서 이스라엘은 포로가 아닌 포로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내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보이시고 내 이름을 온 땅에 알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하나님께서 바로를 육적으로 이기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능력을 보이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은 애굽에게서 이스라엘을 꺼내 주신 일입니다
어떤 능력을 보이셨습니까?
이스라엘이 바로의 포로가 되어서 노역에 시달렸는데 하나님께서 그 바로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주셨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가 아니라 그 당시에 포로라는 것은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포로가 아니었지만 포로와 같이 살았으며 나중에는 아들을 나면 죽이라고 까지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입니다
그것은 천국의 백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서 노역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을 하신 것이 있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애굽에서 나올 수도 없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너를 세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셨는가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기 위해서 세우셨습니다. 애굽이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 해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해 주시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바로를 세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을 보이시기 위해서 바로를 세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성경의 거의 모든 비유는 율법에 대한 비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를 통해서 비유로 해서 율법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율법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6:5절을 보겠습니다. (구 89쪽)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시편126:1절을 보겠습니다. (구 898쪽)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이스라엘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나오더니 이스라엘을 포로로 삼았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은 나라입니다 포로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포로로 잡힌 자는 자기의 뜻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포로로 잡은 자가 죽여도 할 말이 없이 그대로 죽어야 합니다.
바로입니다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를 하고 있습니까? 사단은 우리 인생들을 모두 포로로 잡았습니다. 사단의 종이 되어 있는 우리 인생은 모두가 사망을 당해야 합니다. 사단이 죽인다 해도 우리에게는 저항 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포로가 되어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종은 포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능력을 바로를 통해서 보이셨습니까? 이스라엘이 바로의 포로가 되어 있었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로의 포로에서 꺼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능력으로는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해 주셨어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올 수 없습니다.
포로는 그렇습니다.
군대가 있어야 싸울 수 있는데 이스라엘은 군대도 없고 또 무기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꿈꾸는 것 같습니까?
포로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올 수 없습니다. 마치 근대사의 우리나라와 같습니다. 우리는 일본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군대도 없고 또 일본이라는 나라와 싸울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함으로 해서 일본의 포로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잘 상상이 안 됩니다 그런데 해방을 맞이했던 사람들은 그것을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반 백성들은 살기가 힘들어서 그런 것을 잘 모를 수 있겠지만 나라를 생각하면서 독립군에서 싸움을 했던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광복이 되었다는 것은 이 시편의 말씀과 같이 꿈을 꾸는 것과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의 일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누구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데 누군가 더 강대한 사람이 와서 우리를 건져 준다면 정말 꿈만 같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이 일을 위해서 세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바로에게서 나올 수 없고 노역에 시달리면서 신음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영의 일입니다
우리는 다 사단에게 잡힌바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은 율법에 의해서 모두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율법으로 하면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능력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자기가 율법주의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지독한 율법주의입니다
그렇게 율법에 포로가 되어 있던 사람이 포로에서 풀려났을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애굽의 포로가 되어서 노역을 하면서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포로가 되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이제 율법을 바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성도는 자기가 얼마나 율법에 매여 있었던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리스도편지에서 교제를 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정말 꿈만 같다고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혜가 있습니까?
아니 율법의 포로가 되어 있으면서도 내가 포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인지조차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계시가 되니까 이제 그 율법을 바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이 시대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은 꿈과 같은 일입니다 왜 꿈같은가 하면 그래도 이스라엘이 애굽에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은 인지라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는 수십 년을 포로로 살면서도 포로가 되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았습니다. 애굽에 포로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육적으로 포로가 되어서 살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어떤 능력을 보이셨는가 하면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 육체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셔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포로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모두가 사단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 자유케 하신 것을 아는 성도는 그것이 꿈과 같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율법을 안 지킬 수 있습니까?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바로에게 나타내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고 소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 저주를 받은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꿈과 같은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에서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는 성도님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얼마나 꿈과 같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어떻게 종이 되어 있는 줄을 모르고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아들과 함께 유업을 얻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율법을 안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너무도 자유롭기만 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너무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포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바로에게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어떤 능력을 보이셨는가 하면 우리가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는데 거기서 꺼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바로라는 강한 자를 세우시고 우리를 거기서 꺼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2:5절을 보겠습니다. (신 265쪽)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로의 포로에서 스스로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를 저주 받게 하는 그 율법을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이 시대 우리에게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하면 믿음입니다.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평안할 수 있고 구원에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로를 세워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어떻게 보여 지고 있는가 하면 율법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야고보서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온전케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육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바로의 손에서 꺼냄을 받아서 광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누가 강합니까? 율법이 강합니다. 우리 인생의 지혜로는 어느 누구도 이 강한 자에게서 스스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행함이 있는 믿음, 율법을 지키지 않는 믿음을 주셔서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고는 우리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일 수 없습니다. 이 시대 모든 사람이 율법의 포로가 되어 있으면서도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빠져 나오지를 못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입니다
율법은 그 바로보다 더 강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 모두가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바로는 포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율법에 포로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가 포로가 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바로보다 더 강한 자가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육적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보이시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능력이 되어서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포로가 되어서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서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이 시대 누가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고 있습니까? 아무도 안 보이고 있습니다. 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지를 못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는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의 포로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보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하나님의 능력이 전혀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능력을 보여야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보이지가 않아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의 말씀과 같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인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5절을 보겠습니다. (신 304쪽)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그 능력이 그때만 보이신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 보이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능력입니다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면서 이상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령의 은사라고 하면서 성령 체험이라고 하면서 샤머니즘적인 행위들을 하면서 마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물론 육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영의 일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능력을 너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를 세워서 하나님께서 능력을 보이셨다고 하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면 자기들에게도 육적으로 바로를 이긴 것과 같은 능력이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표와 그림자입니다
구약의 문자를 그대로 보면서 하나님께서도 이 시대 자기들에게 능력이 임하시면 이스라엘이 육적으로 바로를 이기고 나온 것과 같이 육적으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의 종이 되어 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율법입니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구원을 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믿음에서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뭐합니까?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서냐 믿음에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믿음에서냐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하시는 이의 일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서냐 믿음에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분명히 믿음에서라고 모든 사람이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보이시고 있는가 하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의 비밀을 주시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행함을 통해서 보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21절을 보겠습니다. (신 1쪽)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구원입니다
원하는 자가 없습니다. 달음박질하는 자도 없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천국에 가기를 원하고 있고 나름대로 천국에 가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고 아니 육체는 저주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영의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으로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도 같은 영을 주셨습니다.
바로에게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바로에게 그렇게 능력을 보이신 것은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고 그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어떤 능력을 보이셨습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보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가 되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이 시대는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믿는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있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위해서 율법을 세우시고 그 율법을 완전히 지키심으로 해서 의인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이 시대는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내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의 지식으로 외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전파가 되지 않고 있는가 하면 이 일을 위하여 바로를 세우시고 바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하는데 이 시대는 전혀 그렇지가 않고 있습니다.
이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자를 구원해 주시는 일입니다 그 일을 바로를 세우시고 바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보여야 하는데 이 시대는 전혀 그렇지가 않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 안에서 나타나지를 않고 모두가 율법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지키시고 십자가에서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그 이름만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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