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로마서 강해 -

로마서 강해 86강 선택의 바른 이해

윤주만목사 2017. 10. 3. 11:19


로마서 9:11절을 보겠습니다. (25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선택

이것은 칼뱅주의의 핵심 교리입니다 로마서를 보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선택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고 교인들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배우고는 있지만 실상은 선택에 대해서 강하게 주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선택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선택을 그들이 주장할 때는 인류를 생각하면서 이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인류를 선택하시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 중에서 얼마를 선택하시고 나머지는 유기를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 자체는 이미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학부터가 모순입니다

칼뱅주의가 맞냐 아니면 알미니안주의가 맞느냐는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는 이 둘 다 틀리다고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도 한 동안은 칼뱅주의의 선택에 대해서 동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영의 일을 깨닫고 보니까 칼뱅주의의 선택 역시도 잘못된 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편지 사이트입니다

제가 아카데미에 칼뱅의 오대강령을 기초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이트를 개편하면서 다 없애 버렸습니다. 칼뱅주의의 교리 역시도 성경과 잘못 되었다는 것을 영의 일이 계시가 되니까 깨닫게 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칼뱅주의를 따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니 칼뱅주의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우리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까? 우리 신체가 구원을 받습니까? 그것이 구원을 받는다 하면 칼뱅주의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이제 알게 된 것은 우리 신체의 구원이 아니라 영의 구원입니다 이 영이 구원을 받는다면 칼뱅주의는 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인류의 얼마가 선택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류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까지도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는 다 죽습니다. 그 죽은 것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은 것은 썩어 없어집니다.

우리는 영의 일을 알아야 합니다.

육체로 보면 칼뱅주의의 선택이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 육체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고 그 육체가 선택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리브가는 교회입니다 어느 교회인가 하면 이삭과 같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성도가 복음을 전하는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그 교회 안에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창세기에서 리브가는 에서와 야곱을 났지만 그것은 예표와 그림자고 리브가는 교회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듣고 있는 두 사람을 에서와 야곱으로 비유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장자를 삼으시고 에서를 버리셨습니다. 그때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마귀의 자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아직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이것은 영의 일입니다

교회입니다

이삭이 복음에 대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제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은 이삭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리브라가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듣고 있을 때는 아직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는 때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아직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비유를 모르면 진리에 대해서, 영의 일에 대해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삭은 별입니다 그리고 리브가는 그 별이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에서도 있고 야곱도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있는데 아직 그들이 선도 모르고 악도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왜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리브가의 배속에 있어서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에서와 야곱은 맞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처음 복음을 듣던 사람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들은 복음을 듣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해산의 수고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이나 악을 알고 있습니까? 마치 어머니 배속에 있는 것과 같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직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삭입니다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제 막 복음을 전파할 때는 그들이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그것을 리브가가 잉태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거짓 선지자가 있는 교회는 이 말씀과 아예 해당이 안 되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삭과 같이 영원한 생명이 있는 약속의 자녀가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해당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 기독교는 이 말씀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교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육체의 선택에 대해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5:13-14절을 보겠습니다. (357쪽을 보겠습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젖을 먹는 자가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는 거의 다 젖을 먹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단단한 식물을 주고 있는 사람도 없고 그것을 먹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라는 교회는 단단한 식물을 전혀 먹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는 사실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리브가가 아닙니다.

이삭입니다

그는 단단한 식물을 먹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의 일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단단한 식물을 먹이고 있는 교회 안에 일이 리브가라는 말씀입니다 이삭과 같이 영의 생명이 있는 자가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리브가이고 그 안에는 아직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 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생명이 탄생이 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나지도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삭이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서 아직 생명이 탄생이 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이 탄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명이 탄생이 되지 않은 상태는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은 때입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젖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단단한 식물을 먹이고 있습니다. 영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음으로 해서 장성한 자가 되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 짐으로 해서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탄생이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탄생이 됩니까?

선을 행해야 탄생이 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믿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것은 복음을 듣고 율법주의에 빠져 자기의 육체로 죄의 법을 섬기고 있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행위를 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고 듣고 믿음으로 자기 안에 생명이 탄생이 되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행하기도 전입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지각을 분별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없는 상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리브가의 배속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이제 막 들어왔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이삭이 전하는 단단한 식물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해산을 할 때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는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장성한 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선입니다

그리고 악입니다 이제 교회에 나와서 리브가의 배 속에 있는 사람은 아직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막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로부터 복음을 듣는데 그가 무엇을 알아서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이제 막 복음을 듣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택하심을 따라 부르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 택하심을 따라 부르시고 있습니까?

그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교회에 나와서 복음을 듣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듣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선이나 악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선이나 악을 육체의 행위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리브가라는 교회를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머니 배속에서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가 아니라 교회라는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 아직 영원한 생명이 탄생이 되지 않았을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탄생이 됩니까?

선을 행해야 탄생이 됩니다. 그러나 아직 선을 행할 수 있는 지각이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탄생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치 어머니 배 속에서 열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것과 같이 교회 안에서 정말 어머니의 정성이 있는 태교가 있어야 건강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세상이 아닙니다.

리브가가 잉태를 하고 있는 것은 이제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듣고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언제까지 들어야 합니까?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까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에만 들어오면 악을 행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을 모릅니다.

아니 선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삭과 같이 영원한 생명이 있는 별이 없다 보니까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를 가르쳐 주지를 않고 있습니다. 도리어 교회에 나오자마자 가르치는 것이 악을 행하는 일입니다

성경의 비유입니다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면 영의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모든 신학자들이 이 로마서의 말씀을 가지고 무조건적인 선택이다. 사람도 그 선택에 부응을 해야 한다고 싸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알미니안주의는 세상 종교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칼뱅주의가 낫지만 그것 역시 성경에서 영의 일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어머니 배속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리브가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서 이삭과 같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가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듣고 있을 때 아직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 탄생이 되지 않을 때를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은 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1:4-5절을 보겠습니다. (329쪽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택하심입니다.

그저 단어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로마서의 말씀을 보고 택하심이라는 단어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칼뱅은 오대강령을 이야기를 하면서 그 두 번째로 무조건적인 선택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육체의 선택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체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선택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불자가 선택을 받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택하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있습니까? 칼뱅의 교리에서와 같이 다수가 있는데 그 중에서 택하시고 있습니까? 성경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육의 말씀이 아니라 영의 말씀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선택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영의 일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로마서에서도 택하심이라고 하지 않고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셨다고 하지 않고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택하심이라고 하면 되는데 왜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을 했는가 하면 그것은 사도 바울이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그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단순하게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형제들에게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택하심을 받는 사람인가 하면 먼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사람이 택하심을 입은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성도가 택하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택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저 성경의 단어를 보고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데살로니가에 있는 형제들에게 너희를 택하심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반드시 그 답이 있어야지 막연하게 단어를 보고 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막연함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문자를 이성적으로 아는 것을 가지고 얼마나 막연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마도 데살로니가에 있는 말씀을 보고도 또 역시 그렇게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들도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안다고 말할 것입니다

택하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고 하니까 마치 복음을 안 전해도 아니 복음을 조금 잘못 전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이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반드시 믿음으로 역사를 해야 하고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1:20절을 보겠습니다. (311쪽을 보겠습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택하심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택하심을 아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먼저 복음이 전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이 무엇인가를 에베소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능력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듣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능력으로 역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택하심을 입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능력입니다

어떤 일을 해 낼 수 있는 힘이라고 사전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형제들에게 택하심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택하심을 아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데살로니가에 있는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이 능력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이 어떤 능력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도 안에서 역사를 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주님은 육체가 산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하니까 육체가 산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분명히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살아야 합니다.

아니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 영이 없다면 그는 택하심을 입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막연하게 택하심을 입었다고 하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택하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육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 복음을 말로만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들음으로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서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있는 확신이 있으면 그것을 알고 있다면 그는 택하심을 입은 성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에서와 야곱을 비유로 한다고 해서 마치 야곱의 육체를 말씀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비유로 해서 육체가 되어 있는 에서와 그리고 영의 생명이 있는 약속의 씨가 있는 야곱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리심을 입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8절을 보겠습니다. (309쪽을 보겠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택하심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는데 데살로니가에 있는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서 그들이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택하심을 입는 자인가를 사도 바울이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그가 와서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우리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택하심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택하심을 아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다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가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리심을 받고 또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영생을 얻게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누구를 택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영의 생명이 있는 성도를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육체가 아닙니다. 육체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육체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는다고 하면서 그 육체를 보고 택하심을 입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알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택하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가치도 없다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어서 그들에게 영생이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원한 생명이 있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형제들에게 사도 바울은 너희를 택하심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라는 종교에서는 칼뱅의 오대강령을 배우고 있고 그것을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육체가 무조건 적인 선택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자기 육체가 선택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것에 인간의 지성까지 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선택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무조건적으로 선택을 하셨으니까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그래서 말을 합니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중에서 자기들을 무조건적으로 선택을 하셨다고 하면서 은혜라고 하고 있고 로마서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택하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보고 봉창을 두드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보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는데 육체의 일로 생각을 하면서 자기들의 육체를 보고 교회 안에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무조건적으로 선택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이 있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에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영의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을 택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9:11절 킹제임스 성경을 보겠습니다.

“(아직 자식들이 나지 아니하였고 또한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였을 때에 택하심을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르시는 그 분에 의해서 있게 하시려고)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설명을 하는 저 역시도 무척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정의를 해서 말씀을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어렵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선택의 교리가 우리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어서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나도 설명을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이삭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났습니다.

그 이삭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 사라로부터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이삭은 생명이 있는 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이 있는 자가 이 세상에서 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교회가 세워지고 있고 그 교회 안에는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에 택하심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는 야곱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그가 택하심을 받았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그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 하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선택이라고 하지 마시고 이 택하심이 무엇인가 하면 그가 택하심을 받는 자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행위를 하지 않고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 있는 자인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무 강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로마서911절의 말씀은 칼뱅의 오대강령으로 우리에게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벗겨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설명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영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택하셨다고 하지 않고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147:4절을 보겠습니다. (909쪽을 보겠습니다.)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영의 일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로마서911절의 말씀은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를 선택하셨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말씀을 깨달을 수 없고 도리어 혼란만 가중이 됩니다.

하나님입니다

로마서4장에서 아브라함을 말씀을 하면서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과 같이 부르십니다.

영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영은 정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우리 인생의 언어로 표현이 될 수 있는 것이 영이라는 단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에 대해서 알 수도 없고 느끼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영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별입니다

그 별에 대해서는 이미 요한계시록에서 충분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별은 구원을 받은 성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늘의 뭇별들을 보이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경은 다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뭇별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영의 생명을 보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육체의 사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생명이 있는 성도는 없는 것이지만 있는 것과 같이 부르시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은 없습니다.

물론 그 생명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없는 것과 같이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없는 것을 있는 것과 같이 부르시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늘의 뭇별들을 세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을 생명이 얼마나 되는지를 세시고 있고 또 그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어서 이름대로 부르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십니다.

행위는 누가 하고 있습니까? 우리 육체가 있는 인생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택하심은 우리 육체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택하심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말씀을 보고 칼뱅은 무조건적인 선택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부르시고 있습니까?

우리 육체를 부르시고 있습니까? 시편을 보면서 우리 육체를 부르신다고 하는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그 이름대로 부르신다고 말씀하는 이 별은 영의 생명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별은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이삭과 같은 약속의 씨가 있는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9장입니다

6-13절까지는 영의 씨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영의 씨를 말씀을 하면서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누군가 하면 육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별의 수효를 세시고 그 이름대로 부르시는 그 별이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28:15절을 보겠습니다. (41쪽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갈라디아서4:19절을 보겠습니다. (307쪽을 보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구원입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씨가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 일이 그냥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칼뱅주의와 같이 무조건 적인 선택이라는 것은 사실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 성경적이지 않은가 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시고 있습니다.

하늘의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그 이름대로 부르시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서게 하기 까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의 생명이 탄생이 되는 것은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여정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절기를 정하시고 그 절기를 지키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늘 말씀을 드리지만 그것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과 같이 편한 시기에 자기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을 한 것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고 더구나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자기를 선택하셨다는 달콤한 언어에 속아서 스스로 안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은 여정입니다

아니 한 가지씩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틀리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율법을 정하셨습니다. 그것을 하나씩 알아갈 때 부르심을 입을 수 있고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여정을 무시를 하고 무조건적인 선택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의 육체를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창세기에서 야곱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장에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택하셨습니까?

나는 어떻게 해도 택하셨습니까? 아니 세상 말로 거꾸로 메달아도 천국에 들어갑니까? 참 듣기에 좋은 말이지만 그 말이 사람들로 하여금 영의 일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니 선택이라는 그 교리로 인하여 사람들이 나태해 질 수 있습니다.

부르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게 하시고 있습니다. 내 육체를 서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영이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을 받기까지 없는 것을 부르셔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고 있습니다.

이 여정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고 있습니다. 이 일을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고 이루셔서 서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서게 하시는 그 생명을 보고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까지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기까지 없는 것을 있는 것과 같이 부르셔서 그것을 다 이루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적인 선택입니까?

물론 의미적으로는 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무조건적인 선택이 맞는다면 우리는 굳이 침노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육체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우리 영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기까지 침노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그 침노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침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을 창세기에서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산의 수고입니다

그냥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만 해산의 수고를 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듣는 일입니다

그것을 이 시대는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을 듣는 자는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 내가 삼년 동안 밤낮으로 눈물로 훈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듣는 사람 역시 밤낮으로 복음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월절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먹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일주일이면 먹을 수 있습니까?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늘 복음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복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이루시고 있습니다.

또 사도 바울도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까지 그냥 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칼뱅의 무조건적인 선택은 쉽게 말을 해서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은 알고 있는 말과 같이 거꾸로 메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루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해산의 수고를 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성령의 감동이 있어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감동을 누가 받고 있는가 하면 영의 일에 있어서 깜깜한 내 육체의 이성이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우리 인생이 받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면 소경과 같은 우리 인생이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택하심입니다.

우리 육체가 절대로 아닙니다.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는 우리의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9장을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었지만 그들은 성경을 보고 자기들이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면서 약속의 씨,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에 대해서 전혀 알지를 못 했습니다

선민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민이라고 하는 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예를 들면서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선택을 받았다고 말을 하면서 안주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뭐가 다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것과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입었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행위에 열심을 내는 것이 무엇이 다릅니까? 택하심을 받는 생명은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이스라엘 못지않게 행위에 열심을 내면서도 성경의 문자를 보고 자기들이 택하심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천국을 침노해야 합니다. 잠언에서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보고는 있지만 영의 일에 있어서는 너무도 나태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행위에 대해서는 열심을 내는 그들이 영의 일은 해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9:12절을 보겠습니다. (251쪽을 보겠습니다.)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시기를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하셨습니다.”

교회입니다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삭으로 난 씨라야 네 씨라 칭하신다고 말씀을 하면서도 에서가 리브가의 교회에서 탄생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입니다

분명히 둘 다 이삭의 씨가 맞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약속의 씨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이 두 사람은 이삭과 같은 씨가 되어야 하지만 아무리 이삭이 복음을 전한다 해도 그 교회 안에는 에서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그 교회 안에도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에서는 자기의 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창세기를 통해서 이미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육신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반드시 교회 안에 있고 그 사람이 큰 자가 되어 있다는 것을 또한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교회입니다

리브가의 교회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씨가 있는 자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하면 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창세기부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예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에서는 당연히 자기가 장자이기 때문에 장자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 자기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결국에는 장자의 명분을 얻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이제도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입니다

그냥 얻어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칼뱅의 교리를 너무나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 교리를 늘 생각하면서 나는 어떻게 해도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영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영의 일을 알아서 천국을 침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육의 일이 아닙니다.

제가 육체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한다면 저 역시도 마귀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까지 얼마나 수고를 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칼뱅의 교리를 배우면서 어떻게 해도 자기가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요한복음173절 말씀에서 아는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그 말씀도 무시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는 어떻게 해도 알게 되어서 결국에는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 절기를 정하시고 그 절기를 반드시 지키라고 하셨습니까? 왜 유월절을 만들어 놓고 반드시 유월절을 먹으라고 하셨습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유월절을 먹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는 성령이 오시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그에게는 영의 생명이 탄생이 될 수 없고 그러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떻습니까?

이 시대 누가 유월절을 먹고 있습니까? 제가 안 먹고 있다고 하면 그들은 저에게 자기들도 성경을 보고 있고 말씀을 듣고 있다고 말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을 보고 있지만 그들은 문자만 보고 있고 말씀을 듣고 있지만 그들은 세상 초등학문으로 말씀을 듣고 있어서 영의 일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고 유월절을 먹지도 않고 있습니다.

에서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더라도 야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말에 꿩 잡는게 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야곱이 비열하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사람과 같을 지라도 야곱은 천국을 침노 했습니다. 그는 결국에는 장자의 명분을 얻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야곱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25:25-26절을 보겠습니다. (35쪽을 보겠습니다.)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

마태복음19:30절을 보겠습니다. (33쪽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큰 자입니다

그리고 어린 자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난 자와 나중에 난 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그 말씀을 예수님께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먼저 된 자이고 누가 나중 된 자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누가 큰 자입니까?

에서입니다 그리고 누가 어린 자입니까? 야곱입니다 사실 이들은 쌍둥입니다 누가 크고 어리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는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입니다 우리가 쌍둥이들을 보아서 잘 알고 있듯이 거의 같습니다.

물론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쌍둥이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에서와 야곱은 전혀 달랐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쌍둥이 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누가 크고 누가 어리다고 한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에서를 크다고 하고 있고 야곱을 어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난 자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된 자는 나중 되고 나중에 된 자가 먼저가 될 자가 많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된 자입니다

에서가 먼저 난 자입니다 지금 마태복음에서 누구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누가 먼저 된 자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재물이 많은 청년이 주님께 와서 묻고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살인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에게 십계명에 있는 계명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동문서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게 이 계명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청년은 문자적으로 자기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을 하면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율법의 의로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입니까?

먼저 된 자입니다 그러니까 문자적으로 율법을 아주 잘 지키고 있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먼저 된 자이고 누가 큰 자인가 하면 이렇게 문자적으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자가 먼저 된 자이고 큰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리브가를 통해서 미리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 에서는 장자의 권한을 잃어버렸고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누가 장자입니까? 분명히 에서가 장자입니다 그는 큰 자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재물이 많은 청년과 만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자기가 율법을 잘 지킴으로 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많은 정도가 아니라 이 시대도 천국의 축복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정말 정성을 다 해서 십계명을 문자적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똑같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과 이 부자 청년이 무엇이 다릅니까? 이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은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서 이 십계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뭐가 다릅니까?

정말 너무 편협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고 근시안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지킨 것은 똑같습니다. 이유가 다를지라도 이 청년과 지금의 기독교인이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같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청년입니다

그는 십계명을 지켰습니까? 그리고 이 시대는 십계명을 안 지키고 있습니까? 지금도 주일 학교에서부터 이 십계명을 외우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십계명을 외우는 아이들에게 상을 주고 있습니다. 또 칭찬을 해 주고 있습니다.

왜 외우게 합니까?

그것을 지키라고 외우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에서가 누구입니까? 먼저 난 자입니다. 그는 먼저 된 자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에서 그가 십계명을 지켰다는 말씀은 없지만 성경을 보면 그가 누구라는 것을 너무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에서와 야곱에게만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 시대 리브가의 교회에도 똑같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큰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먼저 된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큰 자는 장자의 권한을 빼앗깁니다. 아니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리브가의 교회에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에서와 같은 먼저 난 자는 반드시 나중이 되고 그는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된 자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된 자입니다 먼저 된 자는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나중 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역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먼저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리브가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단지 육적인 에서와 야곱의 일로 치부를 하고 있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그 말씀 그대로 야곱은 장자가 되었고 에서는 장자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츨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은 내 장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장자입니다

장자라는 말씀은 하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에서와 야곱을 비유로 해서 교회 안에 있는 육체의 사람과 그리고 영의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가 아니라 이삭과 같이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교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9:13절을 보겠습니다. (251쪽을 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는 에서가 있고 야곱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 두 사람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교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육의 사람이 되어서 미워하심을 받았고 야곱은 영의 사람으로서 사랑하심을 받았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아는 것으로 빤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택하셔서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육의 일을 가지고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그것을 사람과 사람의 비유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삭이 누군가를 알고 그리고 리브가가 누군가를 알면 에서와 야곱이 누군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에서와 야곱을 같은 육체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사람 중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야곱이 되어야 합니다. 리브가라는 교회 안에서 에서가 되는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에서가 누군지 야곱이 누군지를 모르고 그저 자기들이 야곱이라고 하면 야곱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사랑하시고 또 누구를 미워하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 막연하게 나는 야곱이고 저 사람은 에서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에서가 누군지 그리고 야곱이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좋은 의미는 무조건 자기들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146:8절을 보겠습니다. (908쪽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잠언15:9절을 보겠습니다. (927쪽을 보겠습니다.)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에서가 누구고 야곱이 누군가를 알아야 합니다. 리브가의 교회 안에는 에서가 있고 야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리브가의 교회가 거의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종교가 되어 있는 기독교의 교회는 보여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는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괜히 미워하십니까?

그리고 괜히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이 엿장수입니까? 성경을 볼 때는 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을 왜 사랑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이 하시면 그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저 사람을 미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시대는 택하심을 모르고 있고 부르심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창조주시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이 되고 미워하시면 미워하는 것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육체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의 육체를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하지만 누가 에서고 누가 야곱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의인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악인을 미워하십니다. 우리는 의인과 악인에 대해서 정말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대부분의 교회들이 자기 육체가 의롭다 함을 받아 의인이 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야곱이 의인입니까?

야곱은 의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사랑하시는데 야곱은 의인이 아닙니다. 육체로 리브가의 몸에서 태어난 야곱은 의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만 사랑하십니다.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우리 육체를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은 야곱의 육체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보내 주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야곱에게서 이삭에게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의인이 없다는 말씀에는 야곱도 포함이 되고 있습니다.

육체의 야곱입니다

그가 의인입니까? 악인입니까? 그는 악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육체는 다 악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만 행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육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야곱은 의인이 아닙니다.

에서도 의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리브가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의인이 아니라 악인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육체로는 야곱도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의롭다 함을 얻은 의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육체적으로 무엇을 잘 해서 의인이 아니라 장자의 명분을 얻어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체의 야곱을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사랑하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자만이 사랑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에서는 의를 쫓지 않았지만 야곱은 의를 쫓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가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 축복을 받고자 할 때 야곱은 형의 옷을 입고 갔습니다. 그 형의 옷은 물론 에서의 옷이지만 의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입니다 그 옷을 입고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았고 그것을 잠언에서는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야곱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형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상징하고 있고 그 옷을 입은 것을 잠언에서는 의를 따라가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로마서에서는 그 말씀을 인용을 해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엿장수와 같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나 사랑을 하시면 사랑하는 것이고 아무나 미워하시면 미워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실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미워하실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이유는 전혀 모르면서 성경의 문자를 보고 자기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육체는 어떻게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받은 수 없는 육체로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는가 하면 그는 의를 따라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의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창세기25:23절을 보겠습니다. (35쪽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에서는 악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신 것은 에서가 악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악인이었는가 하면 이삭이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서 에서는 하나님께서 재능을 주셨지만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 못 했습니다 에서에게는 생명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미워하십니다.

그냥 에서라서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에서는 악인이기 때문에 미워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삭이 복음을 전하는 리브가의 교회 안에서 에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장자의 명분 때문에 천국을 침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잘 보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특히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가 복음을 전하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말씀과 같이 에서는 악한 자의 길에 서 있으면서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고 말았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미워하셨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9장을 시작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이 될 수 없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은 악인의 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표와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에서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괜히 에서를 미워하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셔서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는 모든 조건이 갖추고 있었지만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제까지 신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전한 다른 복음으로 인하여 이 시대 우리가 복음을 깨달아 가는데 있어 도리어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선택의 교리 하나만 생각을 해도 우리가 얼마나 그들에게 세뇌가 되어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선택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영이 일이 더욱 가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있는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는데, 생명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데 도리어 이 생명을 알아 가는데 있어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열심으로 말미암아 아마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사람들은 선택의 교리에 묶여서 자기 육체가 선택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면서 교회 안에서 선택 받은 자의 행위를 나타내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육체가 아닙니다.

우리 육체는 다 에서와 같은 자입니다 우리는 다 악한 자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영원한 생명의 약속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탄생이 된 것을 침노를 통해서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가 아닙니다.

우리 육체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을 부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자녀가 아닌 약속의 자녀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악인입니다 그것은 에서와 같습니다. 그 에서를 가지고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쌍둥이와 같이 에서도 있고 야곱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에서는 미워하시고 우리의 야곱을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생명의 달란트가 없는 악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삭과 같이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입니다 그것을 잠언에서 악인의 길에 서 있는 자를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의를 따라가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구원을 받을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는 이스라엘과 같이 악한 자의 길에 있었고 야곱은 의를 따라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