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9:14절을 보겠습니다. (신 251쪽)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선택
우리는 이제까지 기독교의 교리를 따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배워왔고 그렇게 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선택의 교리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리는 육신의 선택을 말하고 있고 그 육신이 선택을 받아 영과 혼합을 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신체가 부활을 한다고 배웠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습관적으로 모든 말씀을 육으로 보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감동을 받고 있는 성도입니다 우리 역시 예전에 기독교에서 있을 때는 그렇게 성경을 보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고 있다고 할 때 역시도 기독교의 교리들을 쉽게 버리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교리를 따라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거의 2000년 가까이 전해진 기독의 교리를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치 그와 같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고 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나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사실 조상 대대로 믿어왔던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종교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라는 교리가 계속해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역시 기독교조직신학이라는 책을 가지고 신학교에서 목사가 될 사람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배운 것들을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배운 신학을 부정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을 하면 모든 것을 다 포기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천국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듣게 하시기 위해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지를 않았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은 출교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당시 출교는 그 지역에서 쉽게 말을 해서 왕따를 당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모든 것이 다 종교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출교라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시는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육체의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영이 탄생이 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택하심은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시고 있습니다. 이삭과 같은 영의 생명이 있어서 후에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리브가는 교회입니다
그 안에는 에서도 있고 야곱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곱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성도는 야곱과 같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사람인 에서로 태어나서는 안 되고 반드시 영의 사람인 야곱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두 사람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야곱은 우리의 신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서는 신체를 말씀하고 있고 그 신체와 똑같은 야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 야곱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리브가의 배속에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탄생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육체의 야곱을 사랑하십니까? 그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로 말미암아 하늘의 장자의 총회에 기록이 되어 있는 야곱을 사랑하십니다. 육체의 야곱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육체의 야곱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야곱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야곱을 그저 육체의 야곱으로 보고 있고 그러다보니까 불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육체가 택하심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야곱을 선택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야곱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총회에 기록이 되어 있는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야곱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9장은 약속의 자녀를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자녀가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씀이지 육신의 자녀가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8장에서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씨로 여기심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리브가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 안에 육신의 자녀가 있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씨가 있습니다. 에서는 육신의 자녀이고 야곱은 그 안에 약속의 씨가 있습니다. 그 약속의 씨가 있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들과 같이 없는 것을 있는 것과 같이 부르셔서 서게 하시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리브가의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왜 리브가의 교회가 없는가 하면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난 이삭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독교는 이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가 없어서 리브가의 교회도 없습니다. 리브가의 교회가 없다면 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육신의 자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육신입니다
절대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범죄를 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육신의 자녀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있는 약속의 씨를 부르셔서 서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 약속의 씨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리브가의 배속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자기 육체를 택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불자를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육신의 자녀로 택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의 씨로 부르셔서 서게 하시고 있습니다.
야곱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에서는 미워하십니다. 에서는 육신을 말씀하고 있고 야곱은 약속의 씨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을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야 그 생명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 육신이 사랑을 받는다고 하면서 그 육신이 사랑받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육신 사단이 사랑합니다.
아니 사단이 사랑한다기보다는 자기들 스스로가 사랑을 하고 있고 그것을 사단을 통해서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씨는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누구를 사랑하시는 줄을 모르고 자기 육체가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아니 자기를 택하셔서 잘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즉
앞 내용으로 미루어 뒤 내용의 근거를 짐작해 낼 수 있을 때 쓰여 앞뒤 문장을 이어 주는 말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을 볼 때는 국어의 문법을 알고 보아야 합니다. 이 그런즉을 모르고 그저 뒤에 있는 내용만을 보고 있다면 앞에서 무슨 말씀을 했는지를 도무지 모르고 그저 뒤에 있는 말씀만 가지고 해석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무슨 말씀을 했습니까?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누군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삭과 야곱이라는 육신의 자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씨를 비유와 예표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육신의 이삭과 야곱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을 우리에게 설명할 수 없으니까 그것을 이삭과 야곱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지 육신의 이삭과 야곱은 아무 것도 아니고 그것 역시 썩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습니다.
약속의 자녀가 누구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다면 아무리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성도라 부른다 해도 그는 육신의 자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그런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약속의 자녀는 하늘의 씨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는 것이 불의가 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를 사랑하시는 것이 불의가 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해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육체를 택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육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데 하나님께서 불의하시겠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육체가 무엇인가를 조금 하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셔서 그렇게 자기들이 잘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불의하시겠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2: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7쪽)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구원입니다
우리 안에 약속의 씨가 탄생이 되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부터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의 생명의 탄생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달란트를 남기는 일이 어렵습니까?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그런 재능을 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불의하신 분이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그네에게 의복을 입혀 주시고 고와와 과부를 배부르게 먹여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약속의 씨가 탄생이 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에 대해서 사모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물론 교회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말로는 천국에 가겠다고 하고 있지만 실상을 보면 생명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하나의 보너스고 이 세상에서 자기들이 조금 더 편하게 살고 또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기들을 나타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입니다
자기 육신을 죽인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왜 사회가 발달을 할수록 문화가 발달을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그런 욕구를 해소해 주기 위해서 국가는 문화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 문화를 통해서 사람들은 자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예배입니다 지금은 예배도 하나의 쇼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예배를 통해서 자기들을 나타내고 있고 그 쇼에 자기들이 참석을 함으로 해서 자기가 그 안에 있는 소속감을 느끼게 만들고 동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찬양은 어떻습니까?
가장 문제가 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찬양을 반대를 하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교회에 나가서 찬송가를 부르고 나오면 뭔가 마음에 갈증이 해소가 되고 또 예배에 참석을 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고 함께 찬송가를 불렀다는 것만으로도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 착각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관심입니다
모두가 그런 육체의 일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제사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세뇌가 되고 나중에는 그런 행위들을 보면서 자기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착각에 빠져 들어가 아주 안일하게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즉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의 택하심이 불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영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을 하셨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혼인잔치입니다
복음이 전파가 되고 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것을 이 시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성경을 보면 이 천국 복음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물론 성령이 오셔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성령도 하나님께 구하면 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안 구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구합니까? 절대로 그들은 성령을 구하고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성령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진리의 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나타내고 싶은 샤머니즘을 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혼인잔치의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부르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리브가의 교회 안에 들어와서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리브가의 교회 자체가 거의 없어서 사실 이 혼인잔치의 비유도 무색해 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유에서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혼인 잔치에 모든 사람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모두 혼인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준비해서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잔치에 참석을 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예복을 입기를 거절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사람은 우리가 말하는 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예복을 받아 입지 않은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예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예복을 안 받아 입습니다. 혼인잔치에 참석을 해서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옷을 입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약속을 해 주시고 그 약속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입지를 않고 있습니다.
유규무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우리가 무슨 말 할 수 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복을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예복을 입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입지를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만 기회를 주셨습니까? 에서는 장자를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생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기회가 없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만물을 지으실 때부터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영에 생명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복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린 에서와 같이 이 시대도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팔아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 모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정말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나중에 유구무언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계시를 해 주셨습니다. 더구나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설령 성령이 오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 성경을 보아도 왜 성령을 구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성령을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청함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습니다. 왜 적은가 하면 하나님께서 예복을 적게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예복을 입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예복을 입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육신의 자녀가 되어서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해서 믿음으로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예복을 입지 않고 육신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육신의 자녀입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그들은 정말 유구무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를 성경을 통해서 밝히 보이시고 우리에게 주시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 이성을 따라 성경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보다는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잔치에 들어왔지만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고 하는 그들이 더 불의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해서 리브가의 배속에 있으면서도 야곱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택하셨습니까?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이 야곱이 누구입니까? 약속의 자녀가 씨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분명히 약속의 씨가 택하심을 입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약속의 씨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고 육신의 자기를 보면서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약속의 씨가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명기14:29절을 보겠습니다. (구 285쪽)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나중에 구원을 못 받은 사람은 정말 유구무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무슨 변명할 꺼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있어 만약에 불의하신 것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는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불의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신 것이 불의하십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약속의 씨를 주신 것이 불의하십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지혜로 성경을 보려고 하고 성령을 구하지 않아서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십분의 일입니다
이것도 거의 문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는 문자적으로도 하지 않으면서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십일조는 사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십일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했던 소득의 십일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자적으로 하려면 반드시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왜 소득의 십일조를 하는 그들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매 삼년 끝에 그 해에 하는 십일조를 하지 않고 있습니까? 이 자체만으로도 이 시대 기독교는 성경과는 다르게 십일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십일조의 정당을 찾으려면 반드시 이 신명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대로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십일조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율법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이렇게 명백하게 십일조가 성경에 율법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도 자기들은 믿음으로 한다고 하면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도 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 누가 지킵니까?
기독교인들이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을 누가 지키는가에 대한 기본이 안 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은 우리 인생들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신명기에 있는 율법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절대 못 지킵니다.
아니 오직 주님만이 지키실 수 있는 율법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이 율법을 지키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에 있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면서 하나님의 의를 자기들의 불의로 가리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리브가의 교회 안에 있는 야곱을 선택하신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이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는 것이 불의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 야곱을 선택하셨다면 그것은 불의가 되겠지만 야곱을 사랑하신 것은 인생 야곱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을 야곱에게만 주셨습니까? 그것을 야곱만이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주셨습니다. 하지만 리브가의 안에는 야곱이 예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주님이 주시는 식량을 먹고 배부르게 되어서 그의 안에 약속의 씨가 탄생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떡입니다
주님께서 내 몸은 생명을 주는 떡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떡을 배부르게 먹게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율법에서 복음을 보아야 합니다.
복음입니다
율법으로 보느냐 복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영혼이 죽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 매 삼년 끝에 하는 십일조도 모르고 이 율법을 누가 지키는가도 모르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믿음으로 한다고 하는 그들이 매 삼년 끝에 하는 십일조도 모르면서 종교에 세뇌가 되어서 하고 있습니다.
누가 지키는 율법입니까?
주님이 지키시고 있는 율법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것을 듣고 영의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배부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왔으면 무엇을 먹어야 합니까? 매 삼년 끝에 주님이 하신 십일조를 먹어서 배가 불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 모두가 먹고 배부를 수 있게 성읍에 저축하여 두셨습니다. 어느 성읍에 저축하여 두셨는가 하면 하늘 성읍에 저축하여 두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주님이 성읍에 쌓아 두신 십분의 일을 먹고 배가 불러야 합니다.
마태복음15:33절을 보겠습니다. (신 26쪽)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선지자들로 미리 성경에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실제 떡으로 먹이셨습니다. 광야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실제 떡을 먹고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예표입니다
주님께서 실제 떡을 먹이신 것은 구약에 매 삼년 끝에 성읍에 저축한 십분의 일을 예표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광야에서 다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신명기의 말씀과 같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이렇게 배부르게 먹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실제 예표로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습니까?
에서는 버리고 야곱을 택하신 것이 불의하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신체를 택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불의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신체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야곱이 받은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생명을 사랑하시는데 있어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성읍에 저축하셨습니다.
우리 인생 모두가 먹고 남을 수 있게 저축하셨습니다. 배부르게 먹고 남을 수 있게 저축하셨지만 사람들이 성읍에 있는 주님이 저축한 십분의 일을 먹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것을 안 먹고 육신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그 육신의 자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것을 먹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약속의 씨를 사랑하는데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는 것이 불의하시냐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인생인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난한 자들이 다 먹고 배부를 수 있게 성읍에 저축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고 배가 불러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불의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저축을 하지 않았다면 불의하십니다. 가난한 자나 고아나 과부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저축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부르지 못해서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불의한 일입니까?
불의하십니까?
이래도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로 성경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가 아니라 영의 생명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 하시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보면 불의합니다. 그러나 영의 일을 보면 절대로 불의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성읍에 저축해 놓으셨습니다. 단지 문제는 인생들이 이것을 먹지를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많은 것을 저축해 놓으셨다고 해도 사람들이 먹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아직 제자들은 성령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구약에 이미 주님께서 성읍에 저축해 놓으셨는데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 역시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절대로 그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배가 고파야 성읍에 저축한 것을 먹을 수 있는데 이 시대는 다 부자가 되어 있어서 배가 불러서 먹으려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배가 부릅니까?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배가 불러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주님이 성읍에 저축하신 십분의 일을 먹을 수 있습니까? 아니 도리어 자기들이 십일조를 한다고 하면서 주님이 지키시는 율법을 지키면서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5:6절을 보겠습니다. (신 5쪽)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누가 먹습니까?
배부른 사람은 절대로 안 먹습니다. 성읍에 아무리 많은 것을 저축해 두었다 해도 안 먹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만이, 먹을 것이 없는 사람만이 성읍에 저축한 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모두가 배가 불러 있습니다.
의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의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의 일에 있어서는 절대로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닙니다. 이미 먹을 것을 성읍에 쌓아 두고 먹으라고 하고 있지만 먹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먹지를 않고 있는가 하면 의에 주리지를 않고 있기 때문에 먹지를 않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우리 인생 모두에게 이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단지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사람들이 육신과 영을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신다고 하면서 불의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불의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체의 에서와 야곱을 보고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다면 그것은 정말로 불의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신체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는 그 말씀을 보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억지를 부리면서 불의하시지 않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불의 하시지 않은가 하면 자기들을 야곱이라고 생각하면서 불의하시지 않다고 말을 합니다.
사실 이해가 안 됩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가 됩니까? 에서와 야곱이 리브가의 배속에 있는데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한다는 것이 사실 이해가 됩니까?
안 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해가 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을 이해가 되게 하는 것도 참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다고 말을 하면서 마치 엿장수와 같이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예전에 이 선택에 대해서 솔직한 표현으로 엿장수와 같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육체를 선택하시는 것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체가 아니라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아니라 야곱의 안에 있는 장자의 총회에 기록이 되어 있는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왜 불의가 없습니까?
엿 장수 마음대로 택하신 것을 믿으라고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될 수 있게 모든 사람에게 약속의 생명이 있게 주님을 통해서 매 삼년 끝에 십분의 일을 성읍에 저축하게 하셨고 그것을 우리가 먹고 배부르게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입니다
의에 주리고 있는 자입니다 의가 없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성읍에 쌓아 두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믿음으로 배가 불러 영원한 생명이 탄생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먹는 사람은 리브가의 배속에서 야곱이 되고 그것을 먹지 않은 사람은 에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사랑했습니다.
왜 사랑을 하셨는가 하면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자가 되어서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는 하늘의 장자들의 총회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고 영의 일을 생각하면 절대로 하나님은 불의 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 수 없는가 하면 의에 주린 자가 먹고 배부를 수 있게 이미 신명기에서 주님을 통해서 매 삼년 끝에 십분의 일을 성읍에 쌓아 두게 하셔서 우리 가난한 자들이 먹고 배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미 혼인자치의 예복을 다 준비를 해 두셨습니다. 그러나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양식을 먹지 않고 있고 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의에 옷을 모두에게 주고 있지만 사람들이 입는 것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로마서9:15절을 보겠습니다. (신 251쪽)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편협 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고 그 생각을 사단이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교의 샤머니즘에 빠져 겉으로 나타나는 어떤 행위들을 보고 마치 자기들이 성령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율법을 지키는 그것 하나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 인생의 지혜로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사람이 신학이라는 것을 공부를 하고 또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서 그것을 깨달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실제 목사들이 자기들도 이해가 안 되고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말을 하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자기도 모르고 있고 또 듣는 사람들도 모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허망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정말 너무도 허망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허망한 이야기를 진실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얼마나 편협적으로 보고 있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허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습니다. 정말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그런즉에서 여기까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불의가 없으신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양식을 이미 성읍에 쌓아 두셨습니다. 그것을 가난한 우리가 가서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가 없는 우리가 먹으면 의를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다 구원을 하실 수 있게 성읍에 쌓아 두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긍휼히 여길 자입니까?
누가 불쌍히 여길 자입니까? 신명기의 말씀과 같이 성읍에 쌓아 둔 십분의 일을 먹는 사람이 긍휼이 여길 자이고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긍휼히 여길 자이고 누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인가 하면 그것을 먹는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긍휼이 여길 자이며 불쌍히 여길 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33:19절을 보겠습니다. (구 135쪽)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출애굽기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을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목사들은 이런 인용의 말씀을 보면서도 거의 문자 그대로 보고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겼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의미입니다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긍휼히 여기셨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도 전혀 모르고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이유만으로 자기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으로 올라가서 내려오지를 않으니까 백성들에 의해서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일로 모세가 하나님께 이 백성들이 금신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을 사해 달라고 하면서 자기 이름을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지워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모두가 죽어야 합니다. 왜 죽어야 합니까? 십계명에 따르면 우리 인생은 모두가 사망에 이르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는가를 이 시대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뿐 아니라 성경을 보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십계명을 왜 주셨는가를 모르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지키다가 사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왜 언약의 돌 판을 주셨습니까?
사람들은 그것을 십계명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십계명이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십계명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실상은 언약의 돌 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약을 해 주신 돌 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십계명을 누가 지킵니까?
이스라엘은 문자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교회 역시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십계명을 우리는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모든 율법은 주님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 십계명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사실은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 시대도 아마 똑같이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을 하신 것과 같이 하면 이 시대 역시 내가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다고 하고 또 조금 부족한 사람은 내가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긍휼히 여길 자입니다
누가 긍휼이 여김을 받아야 합니까? 이 십계명을 우리는 지키지 못 했기 때문에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이 계명으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십계명의 영적인 의미를 모르고 있는 사람은 로마서를 보고 또 이 출애굽기를 보아도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는 말씀을 아마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긍휼히 여깁니까?
우리 인생 모두는 십계명을 범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 지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방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을 하고 있고 또 자기가 혹시 지키지 못한 것이 있으면 회개를 하고 이제 지키려고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범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 십계명을 설교로 올려 드렸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그 십계명을 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까지 십계명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뿐 아니라 이 영적인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어느 누구도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입니다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자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십계명을 지키라고 문자 그대로를 외우게 하고 있습니다.
누가 긍휼히 여길 자입니까?
우리 인생 모두는 십계명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도 다 십계명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자기가 십계명을 지키고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 거짓에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영의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며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모두가 십계명에 의해서 사망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렇게 사망에 이르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심으로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긍휼히 여김을 받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를 긍휼히 여기십니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누군가 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인생 모두는 긍휼히 여길 자입니다 문제는 왜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뭐합니까?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왜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누군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십계명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그 육체가 다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심으로 그가 약속의 씨인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왜 사망에 이르고 있는가 하면 계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구속의 일을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긍휼이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이사야49:15절을 보겠습니다. (구 1029쪽)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뜻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육적으로 이 세상에서 강대한 나라가 되는 것을 원했고 또 육적으로 개개인의 삶도 풍요를 누리는 것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 예표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표와 그림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성경을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왜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 잡혀 갔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들은 포로가 되어 가면서도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또 포로가 되어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도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조상들이 왜 포로가 되었었는지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을 보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왜 포로가 되었는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막연하게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포로가 되었다고 말을 하지만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를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죽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냥 문자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문자를 많이 아는 것으로 성경을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것으로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암기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그렇게 알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법고시를 공부하는 사람이 가장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서울대를 나온 사람들이 다시 공부를 해서 신학을 배우고 나서 목사 안수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자기들이 이제까지 세상에서 공부를 했던 그 방식 그대로 성경을 보면서 설교를 하고 있고 그것이 도리어 타락의 길로 가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포로가 되어 갔습니다.
그들이 왜 포로가 되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고 있는 행위를 4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헛된 수고입니다
그리고 무익하게, 공연히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 헛되고 무익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하고 있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그렇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 역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그 행위로 인하여 자기들의 어떻게 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흑암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어두움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을 비추매 어두움이 깨닫지를 못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어두움에 거하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입니까?
그것이 참 빛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참 빛을 비춰주셨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그 빛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의 이성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이 일이기 때문에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그것을 육의 일로 비유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의 일을 가지고 영의 일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그것이 육의 일인지 영의 일인지를 모르고 다 육에 빠져 헛되고 무익한 일을 하다가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인입니다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습니까? 정말 구더기 같은 인생이요 벌레 같은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이지만 여인이 어찌 그 젖 먹은 자식을 잊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남자라서 어머니의 마음은 잘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간접적인 체험과 직접적으로 자기가 어머니로 사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어찌 젖 먹는 자식을 잊겠습니까? 일을 하더라도 젖 먹은 아이를 잊지 않습니다. 자기 배 속에서 열 달을 키워서 난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젖을 먹고 싶어 하는데 그 아이를 잊을 여인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말씀과 같이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어 있습니다.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아이를 잊겠습니까? 여인을 비유로 해서 지금 이스라엘의 상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은혜를 주시고 이제 그 자손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거의 5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아직까지 젖을 먹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의 일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 역시 젖 먹는 아이와 같이 영의 일에 있어서는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때가 오래 되었습니다.
아니 때가 오래 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더 젖을 먹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면 이제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하는데 도리어 뒤로 물러가 젖을 먹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적으로도 여인이 젖 먹는 아이를 잊을 수 없습니다.
이제 갓 난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젖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젖을 계속해서 먹고 있으면 죽습니다. 젖을 먹은지 오래 되었으면 이제는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하는데 이스라엘도 그렇고 이방의 교회도 그렇고 젖을 먹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사람이 성경을 보면 그 성경이 다 젖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의 일에 있어 단단한 식물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다 젖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시면 영의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잊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잊으시면 우리는 다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들이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다 젖을 먹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고 있습니다.
젖을 먹는 그 아이가 울면 얼마나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나 여인은 혹시 잊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 인생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약속의 씨가 태어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인이 젖 먹이를 잊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혹시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잊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영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젖을 먹는 아이를 여인이 잊으면 그 아이는 죽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젖을 먹여서 키워서 이제 단단한 식물을 먹게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정말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왜 모르고 있는가 하면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 해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그들이 도리어 긍휼히 여기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일을 모릅니다.
그가 아무리 세상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령한 일을 모르다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엇을 사랑하시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 일에 있어서 우리 영을 사랑하고 있지만 그것을 마치 육체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다 헛되고 무익한 것을 하다가 사망의 길고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참 빛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모르다보니까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신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진짜 이삭의 아들인 육신의 자녀인 야곱을 사랑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야곱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그 씨를 사랑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누가 이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절대로 이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씀은 정말로 우리 가난한 자들에게는 큰 은혜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못 지켰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갈 만한 지혜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고 고아로 그리고 과부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을 긍휼히 여겨 주심으로 우리가 주님이 성읍에 저축한 것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하셨고 또 우리가 십계명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지만 주님이 지켜 주심으로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릅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누구를 긍휼히 여기시는 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도리어 십계명을 지킴으로 해서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내가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을 지킴으로 해서 도리어 부자가 되어서 주님이 성읍에 저축한 것을 배부르게 먹지를 않고 있습니다.
잠언19:17절을 보겠습니다. (구 932쪽)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잠언에서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가 하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하다는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자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무조건 자기가 가난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해야 합니다.
말로 가난한 자가 아니라 진짜 가난해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가난해야 합니까? 물질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육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니까 그런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율법의 의가 없어서 가난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꾸임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말씀을 하니까 그저 자기가 불쌍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누가 가난한 자인가 누가 부자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십계명을 지키고 있는 그들이 입으로는 가난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말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가증합니다.
부자가 가난하다고 하면 그것은 가증한 사람입니다 실제 가난한 자가 은혜를 구해야 하는데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이 가난하다고 하면서 은혜를 구하고 있다면 그는 가증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십계명을 지키면서 부자가 되어 있으면서도 자기가 가난한 자라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해 주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도 아니고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도 아닙니다. 성경은 반드시 가난해야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가난합니까?
물질이 아닙니다. 반드시 율법의 의로 가난한 사람만이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이스라엘 못지 않게 율법을 지키면서 부자 청년과 같이 자기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십계명을 지키고 있는 자는 가난한 자가 아니라 부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입니다
이 가난한 자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자기가 가난한 자인가 부자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면서도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입니다
십계명을 지키지 못해서 모두가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거꾸로 십계명을 지키면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를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입니다
내가 얼마나 가난한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온갖 행위를 함으로 해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교인 하나를 교회 안에 데리고 오면 그를 어떻게 하든지 부자를 만들어서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8:27절을 보겠습니다. (신 31쪽)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을 하시면서 대표성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라고 말씀을 하니까 어느 한 사람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의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이 바로 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에 모두가 속해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빚을 안 지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합니다. 그 가난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류 모두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 모두가 일만 달란트를 빚진 가난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예수 그리스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 빚을 갚아 주시고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가 불쌍한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부자를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습니다. 누가 부자를 불쌍히 여깁니까? 만약에 부자를 불쌍히 여긴다면 부자는 화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이 참지를 못하고 분을 내다가 결국에는 자기 땅에 오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자기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되어야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데 도리어 부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온갖 율법을 지키면서 부자가 되어 있는 그들이 말로는 자기가 가난하다고 하면서 가증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또한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누구입니까?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십계명을 지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문자적으로 십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온갖 율법의 행위를 하면서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안에 약속의 씨가 탄생이 되지 않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왜 사랑하셨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은 불의하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길 자입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길 자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계명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으로 볼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우리 안에 약속의 생명의 씨를 주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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