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36절을 보겠습니다. (신 250쪽)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모두가 끊어진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다보니까 이 말씀을 보고도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고 있는 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율법이 아니고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로마서7장에서 두 남편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 남편이라는 말씀은 사랑하는 자가 둘이라는 말씀입니다 한 남편을 사랑하면 다른 남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이 두 남편을 함께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남녀 간의 사랑입니다 두 남편을 같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어느 남편을 사랑하면 다른 남편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두 남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한 남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율법의 남편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게 함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한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인생들에게 율법은 또 다른 남편이 되어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율법을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이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계속해서 선지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주의에 빠져 선지자들에게 환난을 주고 곤고를 주고 핍박을 하고 기근을 주고 위험을 주고 또 칼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할지라도 영의 일을 알고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어 있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끝까지 견고케 하시고 있습니다.
세상은 율법주의입니다
사람은 뼈 속부터 율법주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아무리 이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해도 그들은 뼈 속부터 율법주의라서 그것을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으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아니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누가 주님을 대적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를 알면 아주 쉽습니다. 성경에서 누가 예수님을 사사건건 대적했는가를 알면 됩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의 사상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온 율법을 지켜서 율법주의고 자기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필요한 율법만 지키니까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단 한 가지만 지켜도 율법주의라는 것이 성경의 정의입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율법이 아닙니다.
단 한 가지의 율법이 사망으로 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에서 할례라는 율법을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할례는 늘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 전체를 대표하는 율법입니다 그 한 가지 율법을 지킨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런데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할례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십일조도 율법입니다 그리고 주일이라는 날도 율법입니다 아니 이 시대 식사 기도를 하는 것도 율법입니다 그리고 예배 때마다 헌금을 하는 것도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주기도문을 외우고 사도신경을 외우고 하는 그 모든 일이 다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수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율법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게 하고 저주를 받게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이 율법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안 지킨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주입니다
율법을 안 지켜서 저주를 받습니까? 지켜서 저주를 받습니까? 성경에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는 가를 찾아보면 문자적으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율법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지게 하고 있지만 성령이 오시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성도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를 보면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되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단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분복을 주셨으면 편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으로 율법주의자에 의해서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 시대는 종교의 권력보다 국가의 권력이 강해서 우리를 이단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그들이 우리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성도가 이 세상에서 이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 교회에서 목사들이 하고 있는 주장대로라면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축복을 받은 자가 아니라 저주를 받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를 들어 주시지도 않고 그들이 짐승의 밥이 되게 하고 또 화형을 당하는 끔찍한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 시대는 이겨야 합니다.
세상에서 지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로 낙인이 찍힙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가 하면 바알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이기는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안 봅니다
아니 성경을 애써 무시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시편의 말씀을 보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들의 문제고 이제는 이겨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가 이기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있고 그 이김을 하나님께서 주시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육체가 이기는 것은 다 사단이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44:22절을 보겠습니다. (구 834쪽)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아브라함입니까?
그리고 이삭과 야곱입니까? 또 다윗 왕과 솔로몬 왕입니까? 이 시대는 육적으로 그런 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기들도 육적으로 그런 자가 되게 해 달라고 새벽마다 나가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생각인가를 모르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초대 교회에 성도들이 마치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아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육적으로 이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육적으로 이기는 자를 보여 주셨지만 구약은 다 예표와 그림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이겼습니까?
신약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사도가 세상에서 이겼습니까? 모두가 다 핍박을 받았고 율법주의 자에 의해서 그리고 로마라는 강대국에 의해서 고난을 당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 목사들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그들이 쓴 성경을 볼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체가 져서 죽임을 당했는데 그들이 쓴 성경을 왜 봅니까?
이율배반적입니다
아니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성경에서 아무것이나 찾아서 이용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무당이 되어서 그들에게 기복을 빌어주고 있고 세상에서 어떻게 하든지 이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시편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양손의 떡입니다
그것을 다 먹으려고 하는 자는 욕심이 있는 자입니다 그 중에 하나를 반드시 택해야 합니다. 세상을 택하든지 아니면 천국을 택하든지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둘 다를 택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꿩도 먹고 알도 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이 영의 비밀을 알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어 있는 성도는 오직 그것만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 천하보다 더 귀한 그것을 얻는 성도는 더 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 세상 보다 더 큰 것을 얻었는데 아주 작은 이 세상의 것을 구하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고 탐욕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가 아니라 하늘의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하늘의 모든 것을 주는 대신에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고난을 주시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그들을 위로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 이미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미리 말씀을 하셨다고 하면서 너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니 순교를 당하는 것은 미리 시편에 예언이 되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는 이 말씀을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시대는 그런 고난을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는 이 보다 더 좋은 때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어느 시대보다 더 적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도살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사는 성도의 삶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너무 편합니다. 그리고 이런 고난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편지를 보고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런 고난이 오면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도 사람으로는 순교를 당할 수 없어서 배교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성도는 기쁨으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순교도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셔서 능력을 주셔야지 만 할 수 있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6:9-10절을 보겠습니다. (신 292쪽)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성도의 삶입니다.
어느 누가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며 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어느 누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으면서 육체적으로 기뻐하면서 살아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 목사들은 성경을 아주 교묘하게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안 합니까?
그러면 누가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도살할 양과 같이 산다고 하면 교회를 나올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육체의 축복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사단은 그렇게 육체의 축복을 받는 자들을 교회 안에 세워 놓고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체와 영을 비교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볼 때는 우리는 무명한 자입니다 그러나 영을 보면 우리는 유명한 자입니다 어떻게 유명한 자입니까? 우리 영은 부활을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 같습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징계를 받은 자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자 같이 보입니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해서 징계를 받아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볼지라도 우리 영은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나를 믿으니 또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는 근심하는 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심하는 자 같이 보이는 것은 영생을 늘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성령이 오셔서 약속으로 인 쳐주셔서 기뻐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 같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면 얼마나 가난하게 보입니까?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을 한 가지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우리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요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부요합니까?
율법을 지키는 그들이 하나님의 성도와 같이 보입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은 우리가 성도와 같이 보입니까? 그것은 말을 하나마나입니다. 우리는 성도와 같이 안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요한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 가난한 자, 율법을 지키지 않은 성도를 부요하게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천국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또 성도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평안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얼마나 감사합니까?
초대 교회에 순교자들의 피가 있어서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평안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떤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떤 고난을 당했습니까?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감사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설령 우리에게 어떠한 고난이 오더라도 성령이 오신 성도는 이 고난을 기꺼이 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고난이 오더라도 우리에게 주신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상의 축복입니까?
이 시대 교회는 너무 육체적인 축복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결코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도리어 그것이 믿음의 척도가 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어떠한 고난을 당하게 되는가를 말씀하고 있지만 종교가 되어 있는 기독교는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인들과 같이 고난을 주는 자가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의 부활을 믿는 성도입니다 우리는 그리고 천국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같이 험악한 세월을 살아갈지라도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은 우리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실상이 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주의자들로부터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더 잘 살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성도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5:5절을 보겠습니다. (신 375쪽)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땅에서 사치합니다.
무엇으로 사치를 하고 있습니까? 야고보서5장1절에서 들으라 부한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으로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아가고 있어서 자기들이 종말의 날에 도살을 당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의 눈입니다
우리 성도는 도살할 양과 같이 보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로부터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볼 때는 우리가 도살할 양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부자가 되어 있는 그들에게 도살할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도살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주의자의 눈에는 우리는 도살을 당해야 마땅하게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육적으로 도살을 당할 양과 같이 보이고 그들은 영적으로 도살의 날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둘 중에 어느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도살할 양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부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부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도살의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사치를 하고 있습니까? 온갖 행위들로 부자가 되어서 사치를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에게 임할 도살의 날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비록 그들의 눈에는 도살할 양과 같이 보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천국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사법고시도 없어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모두가 사법고시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물론 풍족한 가운데서 사법고시를 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공부를 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잠을 안 자고 놀고 싶은 것을 다 포기하고 공부한 이유는 사법고시를 합격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고시도 그렇습니다.
하물며 천국을 우리에게 은혜로 거저 주시고 있습니다. 그 천국을 주시는 자에게 이 세상에서도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하나님은 정말로 불공편한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 생명이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주시는 대신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입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에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받을 영광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성도는 고난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습니다.
왕입니다
이 세상의 왕이 아닙니다. 그런 왕은 비교조차 안 되는 왕입니다 지금 미국의 대통령과는 비교도 안 되는 영광을 주시는데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사도 바울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 봅니다
아니 자기들이 누구로부터 고난을 받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다수의 무리에 속해 오히려 고난을 주는 자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도 당하는 그런 고난을 자기들이 받는 것을 보면서 고난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세상의 일이 아니라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 받는 고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13절을 보겠습니다. (신 305쪽)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빌립보서1:29절을 보겠습니다. (신 319쪽)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셨는가 하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을 의인이 대신 죽으심으로 값으로 사셨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저주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율법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우리 인생은 모두가 저주를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데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들이 다 죽어야 하는 일입니다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의 예표를 통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은혜를 받았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기독교인이 교회 안에 너무 많다 보니까 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얼마 가운데 우리를 택하셨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출애굽기만 생각해 보아도 됩니다. 장정만 60만 명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단 두 명이 들어갔습니다. 모세나 아론과 같은 사람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단두명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예표입니다
예레미야 시대를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당시 진리를 찾고 공의를 구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남 유다의 인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백만 명이라고 해도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백만 명과 한 사람의 싸움입니다. 누가 이기겠습니까? 게임이 안 됩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고사하고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지켜 주시지 않았다면 예레미야는 벌써 죽었습니다. 그가 사역을 다 마쳤을 때는 결국에 애굽에 가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입니다 그 비율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많으나 하나님의 택하신 자는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정도 적은가 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습니다.
왕따가 문제입니다
그것이 일본에서 이지메라고 합니다. 거기서 들어온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왕따가 되었습니다. 10명이 있는데 한 명을 바보 만드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0명이 괴롭히면 한 명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 괴롭힘을 그대로 당하고 있습니다.
세상도 그렇습니까?
자기들이 나쁜 짓을 하는 것도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쁜 짓이 아니라 자기들이 선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죽일 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해서 마땅히 자기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다수가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10명이 아닙니다.
그것이 만 명이 될 수 있고 십만 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나 하나입니다. 아니 천만 명 중에 100명이라고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100명 정도만 되어도 그래도 서로 약간의 의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0명이 된다고 하면 그것은 의지가 안 됩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구나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위해서는 저런 이단은 이 지구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고난이 아니라 핍박이고 환난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종교의 자유가 있어서 그렇지 저 중동 국가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릅니까?
다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소수가 있습니다. 그 소수가 받아야 하는 고난이라는 것은 엄청납니다. 지금도 중동 국가에서는 같은 이슬람이라고 해도 파에 따라서 죽이는 일이 아주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종교의 권력이 강하면 소수가 받는 고난은 정말 끔찍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세의 천주교입니다
그들 중에는 고문 기술자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에게 반대를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상상도 하기 힘든 그런 고문을 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 죽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성도가 어떠한 고난을 받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만 명 중에 하나일 수 있습니다 10명 중에 한 명만 되어도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 명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그것을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고 사도 바울이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죽임을 당하셨습니까? 만약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스라엘의 다수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그렇게 죽일 수 있습니까? 절대로 못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서 아주 적은 소수입니다 그래서 택하신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택하신 자가 십만 명 중에 하나일 수도 있고 백만 명 중에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은혜를 주셨습니다.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만 명이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더구나 그들이 볼 때는 아주 나쁜 이단입니다 왜 성도가 고난을 당하고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택하신 자가 많으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는 택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많은 사람이 택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숫자가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택하심을 받는 자는 청함을 받은 자에게 고난을 받습니다.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스라엘이 유대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교회가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절대적인 다수입니다. 유대교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신 것과 같이 이방의 교회에 성령으로 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주 적기 때문에 우리가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8:37절을 보겠습니다. (신 251쪽)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지금의 기독교입니다
이미 종교가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본 것과 같이 두 마리의 짐승 중에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짐승에게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짐승입니다
그것은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없는 교회는, 생명이 없는 교회는 짐승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자기들이 누군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음녀입니다
그리고 짐승입니다 거대한 짐승이 되어서 우상의 제물을 먹이고 있지만 그것이 사람의 이성에는 너무 옳기 때문에 모두가 그것을 먹고 있습니다. 그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서 교회 안에서 부자가 되어 있지만 왜 자기들이 부자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짐승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성도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성도가 되면 축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큰 건물들을 지어 놓고 그 안에 온갖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들어와서 미혹을 하고 있고 그 감성적인 것에 모두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구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받는 구원은 정말 바다 모래 같은 자들을 유기하시고 그 가운데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택하심을 알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입니다
누가 대적을 합니까? 누가 우리를 송사합니까? 누가 정죄를 합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게 끊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갑니까?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의 육체가 얼마나 고난을 당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그렇게 합니다.
정말 왜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하는 가를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도 율법이 자기들을 어떻게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 율법을 위해서 성도들에게 고난을 주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만든 종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입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31절에서부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서 이겨야 믿음이 있는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모두가 져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게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죽으셨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이 모든 일에서 하나도 이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시편60:5절을 보겠습니다. (구 845쪽)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육체를 사랑하십니까? 그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영을 사랑하십니다.
육체가 아닙니다.
이 시대는 자기 육체를 사랑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마치 아담의 자손인 우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영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육체는 썩어 없어진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썩어 없어지는 것을, 죄를 지어서 율법의 저주를 받은 것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보고 자기 육체를 사랑하신다고 하면서 그 육체가 사랑을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육체의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그 육체로 사랑을 받으려고 하다가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영광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 썩어 없어질 육체를 사랑하시겠습니까? 정말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라고 하니까 아담의 자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사랑하시는 것으로 오해를 하기 때문에 이 시대 기독교가 육체로 별의 별일을 다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사랑하시는 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의 일을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육체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서 그 육체가 많은 것을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으로, 그리고 재물로 부자가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해 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가 누군가 하면 우리 육체가 아니라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입니다
시편에서 육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은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서의 육체의 구원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영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구원해 주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주님이 나를 사랑해 주셔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사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이 시대도 구원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고 싶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구원해 주시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아담의 씨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사랑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죽었습니다.
그 죽은 자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 영을 사랑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성경을 거의 다 육적으로 보고 있고 자기 육체가 사랑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는 말씀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른 손으로 구원을 해 주십니다.
오른 편은 구원을 상징하는 편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보면 넉넉히 이기지를 못 합니다 그러나 영을 보는 성도는 넉넉히 이기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신명기15:7-8절을 보겠습니다. (구 286쪽)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깁니다.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목사들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복음을 못 보고 있습니다. 복음을 보아야 믿을 수 있는데 모두가 소경이 되어서 성경을 아무리 많이 보아도 성경에서 복음이 안 보이고 있습니다.
늘 말씀드립니다.
성경을 수백 번 읽으면 뭐 합니까? 아니 자기 평생을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 성경만 연구를 하면 뭐 합니까? 성경에서 복음이 안 보이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며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의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남겨 놓은 책들과 주석, 그리고 강해서를 보아도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왜 넉넉히 이기는 줄을 모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하니까 무엇을 이기는 줄도 모르고 어떻게 이기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종교가 부흥이 되고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넉넉히 이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구약에서 비유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구약을 보면 뭐 합니까? 이런 율법을 보고 자기들이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누가 지키는 가에 대해서 기초가 없다보니까 누가 가난한 자이고 누가 부자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꾸어 줍니다,
자기가 재물이 조금 있다고 해서 그것을 꾸어 주는 것을 보면서 아니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행위를 하면서 이 율법을 보고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노력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하면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믿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영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보아도 다 소경이 되어서 문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문자가 사망으로 끌고 간다는 것을 모르고 문자를 알고 그것을 자기 육체로 행하는 것을 보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말씀을 보고 사도 바울이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신명기의 말씀을 보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가난합니다.
막연하게 가난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가난하다고 해서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가난하다고 말씀할 때는 분명히 가난한 자가 누군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신명기의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가난한 자가 있으면 넉넉히 꾸어 주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넉넉히 꾸어 주어야 합니다.
왜 넉넉히 꾸어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 하기 위해서 넉넉히 꾸어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난한 인생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넉넉히 꾸어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주님으로부터 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입니다
우리는 거지 나사로와 같이 가난합니다. 무엇으로 가난한가 하면 율법의 의로 가난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은 율법에 비추어 보면 모두가 다 가난한 자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가난합니다.
어느 정도로 가난한가 하면 거지와 같이 가난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꾸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넉넉히 꾸어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이 율법을 주님이 지키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사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정도로 꾸어 주고도 남는 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넉넉히 꿀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율법으로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넉넉히 꾸어 주라고 정해 있지만 이 율법을 보고도 모릅니다.
넉넉히 이깁니다.
왜 넉넉히 이깁니까? 주님이 넉넉히 꾸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셔서 부요한 자로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구하는 대로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요구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복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성도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꾸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넉넉히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꾸어 주시고 있고 그렇게 꾸어서 부요하게 된 성도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고 있습니다.
로마서8:4절을 보겠습니다. (신 249쪽)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영이 탄생이 되는 역사는 주님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에게 그 손을 펴서 꾸어 주심으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하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루어지게 하셨는가 하면 주님은 부자로서 우리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펴서 넉넉히 꾸어 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셨고 또한 영이 탄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질 수 있습니까?
우리 육체는 반드시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영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습니다. 어떻게 이루었는가 하면 주님이 부자이신데 우리에게 꾸어 주셔서 우리가 부요하게 되어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었고 그렇게 생명이 있는 성도는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넉넉히 이깁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이의 영입니다 아무리 율법이 강하다 해도 율법을 다 지키면 저주를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다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영 또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룬 자가 되어서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입니다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못 합니다 그 육체는 반드시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입니다 그 영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습니다. 어떻게 이루었는가 하면 우리 가난한 자에게 주님께서 손을 펴서 꾸어 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넉넉히 이깁니다.
우리는 반드시 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넉넉히 이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우리 성도는 넉넉히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아버지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기셨습니다.
그 이기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이 질 수 있습니까? 구원에 대해서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넉넉히 이기는 줄을 모르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는 것을 믿는 성도는 넉넉히 이긴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집니다.
반드시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것은 무엇이 이기는가 하면 우리의 영이 이긴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 육체로 이기려 하다가 모두가 지고 있습니다.
요한일서5장4절을 보겠습니다. (신 393쪽)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고린도전서15:57절을 보겠습니다. (신 284쪽)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이 시대는 우리가 무엇에서 이겨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 일에 있어서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육체의 일을 이기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의 일을 이기라고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육체의 것을 벗어버리지를 못하고 그 육체를 이기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넉넉히 아깁니다.
무엇에서 넉넉히 이깁니까?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이 율법에서 넉넉히 이기게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사망을 당하게 하고 있는데 그 율법에서 우리를 이기게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켜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심으로 우리가 이긴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십계명을 보고 죄를 안 짓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이성으로는 분명히 이기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에 비추어 보면 지금 지키고 있는 그 율법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지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기는 것을 모릅니다.
이 시대 특히 자기들이 십계명을 지키는 것을 보면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 주셔서 자기들이 십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반대가 되는 말을 하고 있는데도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죄를 깨달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계명을 보면서 자기들이 성령을 받아서 지키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긴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김을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기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김을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글이 이해가 안 됩니까? 이기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김을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경에 이기게 하신다는 말씀도 있지만 엄밀히 말씀을 하면 이김을 주시는 것이 더 맞습니다.
율법입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까? 아니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이 율법을 온전하게 다 지킬 수 있습니까? 그럼 이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길 수 있게 역사를 해 주시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넉넉히 이깁니다.
이것은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요한일서에서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데 어떻게 이기는가 하면 믿음으로 이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넉넉히 이깁니다.
내가 이기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김은 믿음인데 이 믿음을 하나님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믿음을 누가 주시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기셨습니다.
그 이긴 것을 성령을 보내 주셔서 믿게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일이 영의 일입니다 이 영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이 모든 일을 믿어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지피지기라 했습니다.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무엇을 말씀하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저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보고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입니다.
영의 일을 믿을 수 있게 육의 일을 가지고 비유와 예표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을 거의 문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돈키호테와 같이 아무 것에나 싸워서 이기려고 하고 있고 그런 육체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로마서8:38-39절을 보겠습니다. (신 251쪽)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너무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일에서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으로 넉넉히 이긴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역시 확신해야 합니다.
믿음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이 모든 일에서 넉넉히 이긴다는 것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경에서 복음을 알아야 이 모든 일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로마서8장은 영의 깊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영을 좇아 살아가고 있는 성도는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육체적으로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확신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정말 이 확신이 없이는 전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에서 넉넉히 이기는 확신이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이 영의 일이 보이는 것이라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을 하겠습니까? 영의 일은 말씀 그대로 영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그것으로 이 영의 일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왜 내가 확신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은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이며 이 일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어서 아들의 형상으로 나타나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믿습니까?
이 시대는 로마서8장 자체가 해석이 안 되고 있습니다. 아니 설령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이 로마서8장을 바로 말씀을 드려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아니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이 말씀을 보아도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의 일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런 영의 일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확신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이것이 이해가 될 것 같으면 사도 바울이 내가 확신한다는 말씀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막연하게 다수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따라 하면서 확신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다수를 따라 가는 것이지 확신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구원을 받는 자가 얼마나 적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다수입니다.
이 시대 천만 명이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가 구원을 받을 것 같으면 사도 바울이 확신한다고 말씀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을 받는 사람이 지극히 적기 때문에 내가 확신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확신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1:5절을 보겠습니다. (신 329쪽)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왜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 복음인가 하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기 때문에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복음을 믿음으로 우리가 넉넉히 이기고 있습니다.
어디서 이기는가 하면 율법에게서, 사망의 쏘는 것에서 이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이기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미련한 자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들이 구원에 확신이 있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말로만 이긴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그 말씀들을 보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율법의 행위를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말씀을 보다가 돌아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넉넉히 이겼습니까?
말로만 확신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넉넉히 이겨서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믿음으로 확신을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고 있습니까?
정말 부탁을 드리지만 복음을 바로 깨닫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복음을 깨닫지를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아니 복음을 알아야 믿을 수 있고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기고 있는 성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감동이 역사하기 때문에 큰 확신이 있습니다.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말로 확신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누구라도 다 합니다. 지금과 같이 평안한 시대에 누가 무슨 말을 못 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성도만이 확신할 수 있지 아무나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기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기는 줄도 모르고 무엇에서 이겨야 하는 줄로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영의 싸움에서 무참하게 지고 있으면서도 확신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를 보고 자기 안에 있는 영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저 말로 확신한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내가 어떻게 넉넉히 이기는 줄을 모르면서도 구원을 확신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싸움입니다. 보이는 육적인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영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영의 일에 있어서 이기는 성도만아 확신할 수 있는 것이지 말로 확신한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확신합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끊을 수 없습니까?
이것이 영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내 육체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이 무슨 영인가 하면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반드시 사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은 다릅니다. 그 영은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다 육체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육체가 사랑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육체는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 육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온갖 행위들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입니다
그들은 육체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아도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영의 일을 대해서 우리 영의 생명을 그 어느 것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에게 끊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자기 육체가 그렇게 사랑을 받는 것으로 애매모호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천사도 안 됩니다
우리를 죽일 수는 있습니다. 아니 우리 육체는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영은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 사랑이 끊어질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믿지를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 눈에는 그가 끊어지는 것과 같이 보여도 실상은 처음부터 그 안에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끊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영을 바로 알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끊어질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안 믿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말씀할 때는 항상 능력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그 능력이 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 절대로 끊어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확신을 해야 합니다.
요한일서5: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93쪽)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성도입니다
육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육체의 사람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난 자는 이미 악한 자에게 미혹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의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영은 사단이 만지지도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사단에 의해서 사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우리 육체는 범죄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범죄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 육체가 범죄치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범죄치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범죄치 아니하는가 하면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우리를 지켜 주시기 때문에 범죄치 않습니다.
범죄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생명도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의 놀라운 비밀로 해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가 접근도 못하니까 우리는 범죄하지 않을 수 있고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이기 때문에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의 생명이 탄생이 되어서 그 생명이 영생을 하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을 이루시고 삼일 만에 영으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그와 같이 부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영의 생명을 우리에게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입니까? 이 영의 일로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영의 일이 아니면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영의 일을 가르쳐 주면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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