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9:1-2절을 보겠습니다. (신 251쪽)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8장을 통해서 영의 일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아주 자세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이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물론 육체로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실 때 함께 죽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 육체와 영혼을 혼합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자기들의 육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보이고자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고 특히 자기들이 원하는 기도를 하고 나서 그것에 대해서 응답을 받은 것을 이야기를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어느 누구도 끊지 못해서 응답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죽었습니다.
성경에서 육체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으면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고 살아서 그 육체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육체의 일에 모두가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왜 끊을 수 없습니까?
그것이 영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그대로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끊을 수 없는가 하면 그 영을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나님께서 영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을 모릅니다.
자기 육체를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악한 자가 만지고 말 것이 없이 이미 죽었습니다. 악한 자의 의해서 이미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다시 악한 자가 만질까봐서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가 만질 수 있는 아담의 씨가 아니라 영으로 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있습니다. 또 그 장막 은밀한 곳에 우리를 숨겨 두심으로 악한 자가 우리를 찾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입니다
만약에 또 아담의 씨와 같은 것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면 또 악한 자가 우리를 만져서 우리가 사망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삼일 만에 영으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영으로 난 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아담으로 많은 사람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영들이 탄생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영이 어떻게 탄생이 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함으로 해서 우리에게 영의 생명이 탄생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그런 영으로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 영이 아니라면 우리는 또 사단에게 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이라는 신비로운 것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있습니다.
칼뱅주의에서 성도의 견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알미니안 주의에서는 이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 부정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어떻습니까? 물론 칼뱅주의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모두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칼뱅주의를 가르치고 있는 신학교에서도 이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 아주 애매모호하게 가르치다 보니까 알미니안 주의의 반박에 대해서 명확하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칼뱅주의가 맞습니까?
저는 칼뱅의 오대 강령이 맞는다고 한때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편지를 예전부터 보셨던 분들은 알고 있지만 아카데미 강의에 앞에 설명에 칼뱅의 오대 강령을 기초로 해서 성경을 해석한다고 했지만 사이트를 개편하면서 그것을 다 지워버렸습니다.
왜 지웠다고 생각합니까?
성도의 견인에 대한 주체가 아주 모호하게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칼뱅주의 자체가 신체의 부활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성도의 견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신체의 부활이냐 영의 부활이냐를 먼저 알아야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칼뱅주의입니다.
개혁주의 교회에서만 이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 있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아무도 끊을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칼뱅주의의 성도의 견인도 그 주체를 명확하게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체의 견인이냐 영의 견인이냐는 너무도 중요한데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입니까?
어느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까? 그러나 칼뱅주의에서 말하고 있는 성도의 견인은 신체의 견인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주 미묘한 부분이지만 영의 일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이 성도의 견인이라는 칼뱅주의의 교리도 사람을 미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지금 우리 신체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어느 누구도 끊을 수 없다는 말씀은 우리 신체가 아니라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칼뱅주의의 성도의 견인도 잘못된 교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신체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비밀을 알고 있는 성도는 굳이 성도의 견인을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탄생이 되어 있는 영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칼뱅주의의 오대 강령입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말을 할 필요성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성경에 근접한 것이 칼뱅주의의 성도의 견인인데 알미니안 주의는 아예 그 자체도 부정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어떻게 이 영의 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탄생이 되어 있는 영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영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견고케 하신다는 말씀이지 우리 신체가 아닙니다. 칼뱅주의 역시 신체의 부활을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고 있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것도 실상은 잘못된 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단입니다
성경을 아주 애매모호하게 풀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에덴에서도 하와를 미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약간만 틀어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모든 사람이 다 미혹을 당하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을 힘입어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성경에서 기초를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먼저 신학이라는 곳에서 기초를 세우고 나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성도의 견인을 주장할 수밖에 없고 그 신체가 부활을 한다는 것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입니다
사실 사람의 이성으로 이것을 이해하고 깨닫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육체의 행위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까 거짓을 말을 하는지 참을 말하는지를 도무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입니다
아마 설교를 듣는 아니 성경을 배우는 자기들도 무엇을 배우는지를 모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이 말을 하고 있고 저기서는 저 말을 하고 있고 도무지 어느 것이 맞는 말인가를 알 수 없고 어느 말씀이 기초가 되는가도 알 수 없어서 아주 혼미한 상태에서 성경을 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을 통해서 영의 일을 말씀을 하니까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성으로 본다고 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니 이해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입니다.
그리고 거짓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참과 거짓을 어느 누가 사람의 이성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이 시대 역시 모두가 거짓말에 속고 있으면서도 어느 누구도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참이 무엇이고 거짓이 무엇인가를 인가를 모르고 막연하게 성경을 이야기를 하면 참이고 세상에서 하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5: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94쪽)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참이 무엇입니까?
이 시대는 참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자기들이 교회 안에 있으면 그리고 그 안에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설교를 듣고 있으면 그리고 그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면 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입니다.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서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거짓이라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사단이 거짓의 아비가 되어서 미혹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고 있는 모든 말과 행위가 거짓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참된 자를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참 되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참 되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입니다.
참이라는 말씀은 진리를 말씀하기도 하고 진실을 말씀하기도 합니다. 다 같은 말씀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참이냐, 진리냐, 진실이냐 등은 다 같은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참된 자를 알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각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우리가 참된 자를 알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보고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심지어는 히브리어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단어를 아는 것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참이 아닙니다. 참을 말씀할 때는 생명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이 없다면 그가 아무리 참이라고 해도 그것은 거짓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내가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이제까지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자를 알고 있습니까?
이 시대 과연 참된 자를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호세아서를 보아서 알겠지만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시대 교인들보다 하나님을 몰라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르고 제사와 번제만 드렸습니까? 그럼 이 시대 역시 하나님을 몰라서 제사와 번제만 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참으로 악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했어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아주 잘 알고 있고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만 보는 성경입니까? 이 시대 역시 우리가 호세아서를 보고 있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솔직히 호세아서의 말씀 그대로 이 시대 역시 인애를 원하지도 않고 제사와 번제를 드리는 일에 모두가 깊이 빠져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참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제사와 번제를 드리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이 시대 역시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는 자기들이 드리고 있는 예배와 그리고 찬송과 기도와 헌금을 하는 일에 빠져서 그런 행위를 보고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절대로 그러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제사를 모릅니까?
사람의 육체로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보이는 모든 행위가 다 제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 찬송가를 부르는 것, 기도를 하는 것, 헌금을 하는 것, 절기를 지키는 것 등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제사입니다 이 시대는 참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거짓에 모두가 미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니까 자기들이 교회 안에 나와서 주여 주여 하면서 주님을 찾고 예배를 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어 있는 역사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그 의미를 모르고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행위를 하는 것으로 참된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육체로 아무리 교회 안에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려면 반드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우리가 참된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내가 참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된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있다는 말씀이 포함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참된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는가 하면 성령이 오시면 그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셔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입니다 사도 요한도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된 자라고 하고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또 그 참된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령이 우리를 참된 것을 말하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6:55절을 보겠습니다. (신 154쪽)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참말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있는 문자를 보면서 그것을 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참말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문자는 참이라고 하기보다는 거짓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짓이 많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문자로 보고 거짓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성경을 전하면 다 참말을 하는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면 그가 참 선지자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경을 안 전했습니까? 그들이 성경 외에 있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습니까?
성경입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성경에 기준으로 해서 성경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대적할 때도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지만 거짓의 아비 마귀에게 미혹을 당해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면서 말을 했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입니다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만나를 먹고도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만나를 먹고도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왜 죽고 말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손으로 직접 성막을 진 그들이 성막이 무엇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 성막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솔직히 성막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주님의 살을 먹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참말을 했습니다.
그가 로마서를 쓰고 많은 성경을 쓴 것이 참말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전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시작하면서부터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로마서를 시작하면서부터 복음을 말씀하고 있는가 하면 그가 하고 있는 말씀이 참말이라는 것을 증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합니까?
그것을 참말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오직 예수를 안 전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역시도 자기들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했지만 그들은 참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는 성막을 전하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들이 오직 예수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입니다
이 시대 목사들이 성경에서 이 참된 양식을 찾아서 먹이고 있습니까? 그들이 참말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이 아니라 율법을 전하는 자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참말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성경이 이해가 안 됩니까? 누구 살입니까? 누구 음료입니까? 성경은 두 가지 양식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식이 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율법이 양식이 되고 있습니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 포도주가 되기도 하고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이 포도주가 되기도 합니다.
어느 것입니까?
분명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참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함께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참과 거짓이 합해지면 그것이 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과 거짓을 함께 전하면 사람들이 참을 아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율법이 포함이 되지 않은 것을 오직 예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오직 예수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 의미를 모르고 성경에 문자로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가 아니라 예수와 율법이 혼합이 되어서 음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참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무엇을 말씀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에는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전제가 된다는 것을 로마서7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말을 해야 합니다.
참말을 해도 그 안에는 거짓에 미혹을 당하는 자가 있습니다. 하물며 거짓을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짓을 말하는 곳에서는 생명을 얻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말을 해도 그리스도의 영이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5:8절을 보겠습니다. (신 268쪽)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참
진실 같은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참말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거의 만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성경을 보고 있는 목사들에게서는 참말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목사들을 너무 신뢰를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가 정통의 목사라면 더 합니다. 또 그가 인간적으로 지성을 갖추고 있고 인격을 갖추고 있으면 사람들은 거의 맹목적이 됩니다. 그가 또 미국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고 하면 더 이상 믿고 말 것이 없어집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다 참이 됩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합니까?
오직 예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 시대도 보면 율법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오직 예수라는 말을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일수록 오직 예수라고 말을 합니다. 그 오직 예수라는 말 한 마디를 하는 것으로 마치 그가 참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까?
이 시대 모든 목사들이 오직 예수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같이 오직 예수를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라고 말만 했지 실상은 그들의 설교에 온갖 누룩이 다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이방인들에게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목사들의 설교에서 누룩 없는 떡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없습니다.
누룩 없는 떡으로 하고 있는 목사가 있습니까? 이 시대 뿐 아니라 이제까지 교회사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모든 교회는 다 누룩 있는 떡으로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룩이 없는 떡이 참말이 될 수 있는데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누룩을 모릅니까?
이 정도의 비유도 모른다면 그는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것이 그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저주를 생각하지 않고 있고 교회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은 축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퍼지게 하고 있습니다.
아주 적은 누룩 하나가 온 덩이를 퍼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룩이 없는 떡으로 해야 합니다.
율법입니다
목사가 있습니까? 그가 참말을 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기초가 바로 이 누룩입니다 그 다음에 영의 일을 생각해야지 이 누룩을 먹이고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입니다
그들이 어떤 누룩을 먹였습니까? 그들은 율법주의자입니다 성경은 율법을 누룩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목사들은 다 누룩이 있는 떡으로 하고 있습니다.
참말이 아닙니다.
누가 율법을 지키라고 했습니까? 어느 선지자가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했습니까? 물론 구약에서 문자적으로는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면 그것이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는 성도입니다
처음부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신체를 구원하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로 만세 전부터 예정을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게 예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또 다시 율법을 지키라고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누룩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이 누룩 없는 떡이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에 문자를 아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성경을 그렇게 알 수 있다면 우리 사람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고 알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절에서도 성경을 해석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도울이라는 학자가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실제 절에서도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과 목사들이 말하는 것이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웬만한 목사들은 도울에게 상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 누룩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누룩이 섞여 있기 때문에 그 말이나 그 말이나 거의 다 비슷하게 들려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느 목사들은 도울이 요한복음 강해를 했는데 그것을 배우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 기독교 목사들의 한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은 누룩 없는 떡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저 자기들의 종교를 위해서 무지한 사람들에게 오직 예수라는 그 말한 마디를 하는 것으로 자기들이 참말을 하고 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한다고 하니까 오직 예수라고 하면 아니 자기가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마치 참말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편31:6절을 보겠습니다. (구 823쪽)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야고보서2: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73쪽)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사도 바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다 참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거짓 선지자가 많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말과 거짓말을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이 참말과 거짓말을 분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성경을 얼마 보지도 않고 신학도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먹고 사는 것과 치열하게 싸우다가 일주일 내내 보내고 일요일에 겨우 교회 한번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은 다 거짓 선지자에게 속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박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참말을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 안의 실상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우리 사람이 보는 성경은 소경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시편에서 다윗도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무엇이 허탄한 거짓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거짓말을 듣고 있는 그들이 참말을 듣고 있다고 하면서 그 교회 안에서 평생을 신앙생활 하다가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허탄한 거짓입니다.
거짓이 허탄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시편을 보고 모든 사람은 다 자기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그들이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주의 형제 야고보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다윗이 허탄한 것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다윗의 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허탄한 것을 숭상하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미워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미워하시는데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허탄한 것을 숭상하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다윗을 통해서 미워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허탄한 것을 숭배를 합니까?
그것을 주의 형제 야고보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는 사람을 허탄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쁜 의미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그렇게 합니까?
교회 안에 있는 다수가 허탄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한두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 다수에 속해 있는 바다 모래 같은 사람들이 다 허탄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소경이 되어서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이 말씀이 누구에게 하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허탄한 사람입니까?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허탄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형제 야고보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왜 이 서신을 보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까지 유대인의 관습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 행함이 있는 율법을 버리는 믿음을 보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설령 이것이 율법을 버리는 행함이라는 것을 간혹 가다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율법을 완전하게 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행함이 있는 믿음이 율법을 버리는 믿음을 말씀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도리어 율법을 지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그것을 지키고 있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주의 형제 야고보가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사도행전15장에서 사도 바울이 와서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바리새파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와 야고보가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짐을 지우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허탄한 거짓입니다
율법은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거짓인가 하면 율법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거짓입니다 사람들이 왜 율법이 거짓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육체가 없기 때문에 율법을 허탄한 거짓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7:8절을 보겠습니다. (구 1061쪽)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히브리서7: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59쪽)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남 유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율법을 상징하는 나라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시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남 유다가 왜 망했는가를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죄를 지어서 망 했습니까?
그들이 이 시대 기독교인들보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 않아서 망하게 되었습니까? 정말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도덕적인 죄를 더 많이 져서도 아닙니다. 또 그들이 우리보다 진심이 부족해서 멸망을 당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거의 문자적으로 보다보니까 그들이 이 시대 기독교인들보다 더 타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망한 이유입니다.
9절부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도적질 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멸망을 당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까?
실상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신 것을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는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바벨론에게 포로가 되어 가고 있는 이스라엘은 이렇게 했어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도적질을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도적질을 하지 않고 있습니까? 너희가 살인을 하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살인을 하지 않고 있습니까? 간음하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간음을 하지 않고 있습니까? 거짓 맹세하며, 이 시대 시독교인들이 거짓 맹세를 하지 않고 있습니까? 바알에게 분향하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바알에게 기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까?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을 섬기면서.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있습니까?
답답합니다.
예레미야만 답답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 복음을 알고 있는 성도들 역시 기독교라는 종교를 보면 마음이 답답합니다. 그들에게 아무리 진리를 전해도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지혜가 없고 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무익한 거짓말로 인하여 도적질을 하고 있고 살인을 하고 있고 간음을 하고 있고 알지 못하는 다른 신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는 남 유대의 백성들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익한 거짓말입니다.
그것에서 이 모든 것이 다 나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도적질을 하는 일이고 율법을 지키는 일이 살인을 하는 일이며 율법을 지키는 일이 간음을 하는 일이며 율법을 지키는 일이 거짓 맹세를 하게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는 그 탐욕이 바알에게 분향을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익한 거짓말로부터 다 나오고 있습니다.
그 무익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전엣 계명이라고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익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라고 하는 모든 말이 다 거짓말입니다 그것을 무익한 거짓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을 전엣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것이 어떠한 죄를 짓고 있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왜 거짓말인가 하면 그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면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거짓말입니다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으로 끝이 난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바로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 믿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됩니까?
전엣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합니다. 그런데 이 무익한 종이 무엇을 했는가 하면 전엣 계명을 지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평생을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절대로 생명의 달란트를 남길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도리어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 복음의 비밀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연약하고 무익한 전엣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거의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예레미야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찾고 공의를 구하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하나님께서 내가 이 성을 사해 주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왜 남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는가 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하는 말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 이 시대는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율법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수많은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것을 율법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다 율법입니다
십일조 율법입니다 주일 율법입니다 예배 다 형식에 맞추어진 율법입니다 헌금 율법입니다 제가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율법이라고 하면 저보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종교의 거대한 세력에 포승으로 묶여서 자기 이성까지도 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이라고 하면 믿음이 되고 있습니다. 좀 심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 북한에 주체사상과 지금의 기독교 안에 있는 사상은 거의 같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사람을 우상화하는 것과 이 시대 율법을 지키면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 같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체사상입니까?
그것은 기독교 안에 있는 율법주의와 같습니다. 김일성 일가를 우상화하는 것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한 행위를 자랑하고 우상화 하는 것이 무엇이 다릅니까? 저는 지금의 기독교는 거의 공상주의의 사상이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행동도 통일하고 있습니다.
말도 통일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생각까지도 거의 통일이 되고 있습니다. 뭐가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기독교인들이 저를 비난하고 저에게 어떠한 위해를 가한다 해도 저는 지금의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밖에 안 보고 있습니다.
제가 교회를 비판합니까?
저는 교회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교회를 한 번도 비판하지도 않고 판단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종교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이라고 하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익합니다.
전엣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합니다. 왜 연약한가 하면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연약하고 무익합니다. 그 무익한 것을 지키라고 하고 있다면 거짓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율법이 있다면 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8장까지 보면 사도 바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쓴 성경을 보는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쓴 로마서를 보고 이 시대 거의 모든 목사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다 율법을 지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거짓말이 도적질을 하고 있고 살인을 하고 있고 간음을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 합니다
요한계시록20:10절을 보겠습니다. (신 420쪽)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거짓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이 시대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그것이 사람에 이성에는 분명히 옳습니다. 저 역시도 사람의 이성에 따르면 율법을 지키라고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이단이나 정통이나 모두가 한 가지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어느 이단이 율법을 안 지키고 있습니까? 그리고 어느 정통이라는 교회가 율법을 안 지키고 있습니까? 다만 정도의 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더 많이 지키고 누가 적게 지키고 또 누구는 적당히 지키는가에 따라 이단과 정통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공통점입니다
율법을 안 지키는 교회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도의 차이가 약간 있지만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정통이라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구원파가 율법을 안 지킵니까? 절대 아닙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율법은 무익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남 유다에게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포로가 되었는가 하면 거짓말을 의뢰했기 때문에 율법을 상징하는 나라의 포로가 되어서 살아보라고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선지자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선지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평신도로 살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순간에 그는 선지자가 됩니다. 세상에 대해서 선지자가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끝이 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 거짓 선지자가 어떠한 형벌을 받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거짓말을 했던 모든 사람은 다 거짓 선지자입니다
나는 안 했습니까?
그 또한 거짓말입니다. 율법을 지켰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이 행동을 했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세상죄인으로 살지언정 거짓 선지자는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세세토록 고난을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을 보는 거의 모든 사람이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거짓이 무엇인가 하면 연약하고 무익한 전엣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교회는 안식일을 지키는 자기들이 성경대로 하니까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다고 하고 있고 하나님의 교회는 자기들이 성경대로 유월절을 지키니까 제일 잘 믿는다고 하고 있고 또 침례교는 자기들이 성경적으로 침례를 하니까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통의 교회 어떻습니까?
이제 주님이 부활하신 날에 예배를 한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제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마다 자기들이 정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가장 성경적으로 잘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 무엇입니까?
다 율법을 지키면서 그 행위를 하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율법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모르고 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 믿는다는 것도 모르면서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7:10절을 보겠습니다. (신 293쪽)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사도 바울입니다
그 역시도 사람입니다 왜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복음을 알고 있다면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은 것이 내 가족과 친척입니다 사실 복음을 알고 있는 모든 성도들의 근심이라고 해도 맞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제 가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친지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사촌 동생이 암으로 죽었습니다. 정말 그때도 많이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제 겨우 쉰의 나이에 육체적으로 사망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동생의 육체가 사망을 당한 것보다 더 마음이 아팠던 것은 교회 안에서 율법주의자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큰 근심입니다
아마도 여기에서 교제를 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저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가르쳐 주고 싶은데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전하려고 해도 하도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감히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저는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를 했습니다. 그들이 볼 때는 그저 그런 목사로 보입니다, 아니 이제 나이가 들어서 할 일이 없어서 남들과 같이 신학교를 나와서 목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이것으로 자기 마음에 큰 근심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복음이 계시가 되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복음을 알고 나니까 자기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입은 것은 개인적으로는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을 보니까 아직까지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가 예전에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와 같이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자신들을 보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들의 행위를 보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율법에 더 열심을 내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나니까 그들이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구원은 둘째 이야기입니다 차라리 사도 바울의 민족이 이스라엘이 아니었다면 이 마음이 덜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 세움을 입었지만 늘 자기 민족을 보면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무엇입니까?
살인을 하고 있습니다.
도적질을 하고 있습니다. 간음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큰 근심이 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도 전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전하지를 못하고 있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볼 때는 사도 바울은 변절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보았듯이 그가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어떻게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자기들이 생각하는 이단이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다가 변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사도행전에서도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변절자입니다
이단에 갑자기 빠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 곁이 있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볼 때는 그렇게 밖에는 안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면서 늘 자기 민족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이미 사도 바울은 변절자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살아 계실 때 늘 함께 다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과는 다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내게 큰 근심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복음을 깨닫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는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제가 차라리 복음을 모르면 낫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에 빠져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전하고 싶어도 그들이 이상한 이단에 빠진 사람 취급밖에 안 하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이 시대 비슷한 것이라도 들어봤다면 그래도 우리가 전하는 것이 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악이라고 하면 미친놈이 되고 맙니다.
그 근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큰 근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교제를 하고 있는 우리도 이 근심이 크지만 사람으로는 안 되니까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내 부모입니다
그리고 내 형제입니다 또 내 자식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이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게 하고 싶은데 사람으로는 안 됩니다 정말 이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제가 복음을 모르면 차라리 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그들이 어떠한 결말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빤히 알고 있는데 전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민족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가족에게 그리고 아는 사람에게 이 마음이 있습니다.
거짓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거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한 마디로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깨달아 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도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많은 시간동안 복음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봤습니다.
구원입니다
물론 단번에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기 까지는 성경에서 많은 말씀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게 하기 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하고 있고 또 이미 종교의 포승에 묶여 있는 그들을 사람으로는 꺼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큰 근심이 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이 복음을 다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가 유언으로 하겠다는 말을 농담 삼아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같은 큰 근심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서 그들이 이 복음을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가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2:7절을 보겠습니다. (신 385쪽)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무슨 고통입니까? 사람들은 사도 베드로가 한 이 말씀을 많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고 이상하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문자만 보고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롯이 고통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음란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서 음행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자기들은 동성연애를 하지 않으니까 세상에 있는 성소수자들을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자기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입니다
저 역시도 인간적으로는 그들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별로 만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보고 있고 또 복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은혜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사람을 육체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꽤나 거룩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도 육체대로 판단을 하시지 않은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육체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무법입니다
법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법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성령의 법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8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생명의 성령이 법이 없다고 사도 베드로가 롯을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은 법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법이 없어서 음행을 하고 있고 심지어는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서 음행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성소수자들을 마치 벌레 보듯이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뭐가 다릅니까?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취급을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뭐합니까? 사도 베드로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창세기의 롯을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 도리어 세상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통입니다
왜 고통을 받습니까? 그들이 성령의 법이 없어서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저주를 받는 것으로 보니까 고통을 받습니다. 불과 유황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누가 거기에 들어갑니까? 거짓 선지자가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거짓 선지자가 누군가 하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를 보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받았습니까?
지금 사도 바울이 누구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을 보면서도 모르겠습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자기 민족 유대인들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불과 유황 못으로 들어가 세세토록 고난을 받을 것을 빤히 보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을 보면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없다면 그는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는 나만 구원을 받은 것으로 끝을 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사도들만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우리 역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어떻게 멸망을 당했습니까?
거짓 선지자가 들어가는 것과 같이 불과 유황으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생명의 성령이 법이 없어서 음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을 안 믿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시 노아 홍수가 끝이 나고 물론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그래도 다수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고통입니다
그들이 당할 고난을 생각하면 우리 성도의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다고 하면 낫겠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가 받을 형벌을 알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을 보면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내 친족들을 보면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한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거짓에 미혹이 되어서 사망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그들을 보면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게 됩니다. 이 마음은 복음이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성도만이 이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말 우리는 늘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버린다 해도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을 택해야 합니다. 설령 그들이 듣지를 않는다 해도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디모데전서3:9절을 보겠습니다. (신 339쪽)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사도 바울의 양심입니다
그 양심이 무엇인가 하면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이방인들에게 이 믿음의 비밀을 가르쳐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양심에 있는 그 믿음의 비밀을 이 시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내 양심입니다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있는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더불어서 증거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개인의 생각으로 이 성경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 성경을 기록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입니다.
갈라디아에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고 묻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더불어 증거 한다고 하는 말씀은 진리의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내 양심에 있는 믿음의 비밀을 주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으로서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성경을 많이 보았다 해도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 역시 성령이 임하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의 양심에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성령 안에서 더불어서 증거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있어서 자기에게 큰 근심이 있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더욱 고통이 컸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이 시대 복음을 가진 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내 가족을 생각하고 내 친족을 생각하면 이 마음이 듭니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는 참말을 해야 합니다. 그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이 생명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 있는 믿음으로 더불어서 증거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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