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9:3절을 보겠습니다. (신 251쪽)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큰 근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으로 있으며 복음이 없었을 때는 이런 근심도 하지 않았고 또 마음에 고통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깨닫고 나니까 이제 이스라엘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에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이라면 사도 바울에게 이러한 근심과 고통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을 받아 나름대로는 모두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하고 있지만 복음을 깨닫고 보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마귀의 자식이었습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정작 내 동족에게는 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이 복음을 전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몰랐을 때는 그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고 또 나 역시도 그런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는 저주를 받을 다섯 처녀가 있고 축복을 받을 다섯 처녀가 있습니다. 이 다섯이라는 숫자도 비유지 실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숫자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유를 모르고 자기가 그래도 다섯 안에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몰랐을 때입니다
다섯 처녀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염소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이를 갈며 울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모두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 교회를 보니까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아서 잘 알겠지만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큰 근심이 있고 마음에 그치지 않은 고통이 있는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기독교라는 종교인으로 하여금 우리가 똑같은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이방에 기독교인입니다 이 둘이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그리고 유대인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이 시대는 성전이 없어서 제사를 안 드리고 있습니까? 사실 이 두 가지 말고는 거의 같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역시 복음에 복종하지 않고 있다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고 율법을 지킨 것과 이 시대 복음에 복종치 않은 것이 같다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초대교회는 낫습니다.
그때는 주님의 제자들이 있었고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실제 사도행전에서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난 후에 성령이 오실 때 120여명이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 120여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삼천 명이 회개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복음이 전파가 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모두가 기독교라는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교제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오순절의 성령이 임하는 역사보다 더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다른 것이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복음 안에서 교제할 수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꿈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큰 은혜이고 기적과 같은 일이지만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이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빤히 압니다.
복음을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될지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소가 푸주로 가는 것과 같이 소년이 끌려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소가 푸주로 가면서도 모르는 것과 같이 음녀가 되어 있는 교회 안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너무 잘 압니다.
그들의 결말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모른다면 이런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이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간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마음입니다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다고 하면 낫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특별한 형벌을 받지 않으니까 그나마 마음이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가야 하는 그들이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끌고 들어가려고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기어이 끌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그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들을 구원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늘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 심정으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자기 혼자나 지옥으로 들어가지 왜 다른 사람까지 그렇게 열심을 내서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안타깝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자기들이 마치 큰일을 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믿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에게도 믿음이 있습니다. 그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나의 형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늘 이방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이 아니라 자기 형제를 위해서 그렇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전하고 있는 복음을 듣고 믿어 성령을 받아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단호합니까?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자기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는 성경에서 이 복음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천국을 사모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실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자기 골육과 친척을 생각하면 큰 근심이 되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사도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솔직히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은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도 바울과 같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간절한 마음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그래도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찌라도 원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마음은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고통이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 기독교를 보면 화가 치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런 마음까지는 들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제 한계를 알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마음입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골육과 친척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이 복음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사도 바울은 마음에 그치지 않은 고통이 있었습니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을 지라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저주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자기가 천국에 가지 못한다 해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저주를 받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입니다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가는 것도 저주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저주는 그런 저주가 아닙니다. 단어를 같이 쓴다고 해서 마치 그 저주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갔다 왔습니다.
그곳이 얼마나 좋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어서 사도 바울도 말씀을 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 천국을 바라보고 있지만 사실 상상이 안 됩니다 그리고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어느 정도로 희미하게는 알겠지만 사실 상상이 안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천국입니다
그곳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곳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에 참예를 하는 자가 되면 하늘에 있는 천사도 우리의 판단을 받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가지 못한다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자들이 받는 저주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로 표현이 안 되는 상상할 수 없는 그 천국을 가지 못하는 것을 저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복음을 믿고 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동족이 그 천국에 갈 수 있다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찌라도 내가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시대는 천국과 지옥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천국에 못 간다고 해서 그가 지옥에 갑니까? 그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소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에 못 가는 것은 저주입니다
지옥에 가서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자기가 자기 골육과 친척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자기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소멸이 된다 해도 원하는 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있는 성도만이 이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옥에 가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주를 말씀을 하니까 지옥에 가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너무도 좋은 곳입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은 그곳을 갔다 왔습니다. 그곳에 가지 못하는 그 자체가 저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주를 받을지라도 내 골육과 친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이 세상은 누구나 돈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누가 돈을 싫어하겠습니까?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10억을 약속을 했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에게 오면 10억을 주겠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를 잘 몰라서 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가 무서운 사람으로 잘못 알려져서 못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실감은 나지 않지만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설령 그 돈을 받지 못할 찌라도 내 아들이 그 돈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양보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자기 아들에게도 양보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옥의 저주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저주를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저주와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저주는 다릅니다. 내가 설령 천국에 가지 못할지라도 내 골육과 친척들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이 얼마나 영광이 넘치는 곳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천국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영의 일을 모르고 내세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이 말씀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저주를 말씀하면 지옥으로 생각하는 그들은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찌라도
이 말씀은 내가 설령 천국에 가지 못할지라도 내 골육과 친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받은 모든 것을 다 포기를 하더라도 내 골육과 천척들이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적인 표현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가지고도 못사는 것이 천국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이 지구를 다 내 것으로 만들었다 해도 천국은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이 지구가 아무리 좋다 해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천국을 갔다 왔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할 수 있습니다.
잘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모든 것을 걸고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대해서 희미하게라도 알고 있어야 사도 바울이 어떤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도 모르고 이 시대 교인들이 이 말씀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일만 달란트로도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포기를 한다 해도 내 혈육과 친척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사도 바울과 같이 특별한 마음을 주시지 않은 사람은 이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방의 사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골육과 친척을 얼마나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설령 천국에 가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32:32-33절을 보겠습니다. (구 133쪽)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
모세입니다
그는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해서 가나안으로 인도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인도자였다면 사도 바울은 이방의 인도자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세와 같은 인도자를 얼마나 바랐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가 바라는 모세가 고소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모세가 고소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반포한 율법이 너희를 고소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방에 증인이 되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내려오지를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십계명을 주시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내려오지를 않으니까 백성들이 아론에게 모세가 내려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모세가 죽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론이 신을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를 각을 떠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만들고 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 진노를 하셨습니다. 모세가 내려와서 하나님의 편에 설 사람을 부르고 나서 그들로 이스라엘을 도륙하라고 해서 레위 자손들이 그 형제를 친척을 삼천 명을 죽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 백성은 목이 곧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이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로 하여금 큰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시자 모세가 하나님께 구하여 이 백성의 죄를 사해 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돌리지 말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합의를 하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모세와 하나님이 합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원하는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그가 얼마나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보아서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하나님께 간청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간청을 하지만 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라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봅니다.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 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 까지 보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천국을 사모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를 가나안에 들여보내시지 않고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보게 하셨습니다.
그런 모세입니다
그가 얼마나 천국을 사모했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이 범죄를 해서 금송아지를 각을 떠서 만들어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시려고 할 때 모세가 내 이름을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지우시고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 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몰랐습니다.
아니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온 20세 이상의 장년이 모두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사모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그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었는가를 신명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모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하면서 우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진멸을 당해야 하는 백성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십계명의 처음 계명을 어긴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서 간구합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 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주의 기록한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모세입니다 그는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형대로 성막을 만들게 했습니다.
모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인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이방의 사도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마음이 똑같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의 기록한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찌라도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씀입니다
내가 천국에 못 가더라도 이 백성만큼은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곳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 지옥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지옥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곳을 누가 가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거짓 선지자가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요한계시록21장에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가는 둘째 사망은 모두가 다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것과 거짓 선지자가 들어가는 불과 유황 못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도 구더기도 죽지 않은 곳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음부의 고통 중에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누가 들어가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저주를 받는 사람들이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불쌍합니까?
세상 사람이 불쌍합니까? 그들도 물론 정말 좋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불쌍합니다. 그러나 진짜 불쌍한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말 합니다
차라리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거짓 선지자들이 들어가는 곳에는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도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달라고 했고 사도 바울 역시도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찌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이 지워진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이것이 지금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저주를 받아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는 일이라면 모세나 사도 바울은 한 마디로 객기를 부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옥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들이 지옥에 가는 것이지 우리는 이미 성경에서 악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 믿음이 취소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설령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세상에서 무신론자로 산다 해도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의 영광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그곳을 가지 못하는 그 자체가 저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과 같은데 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을 저주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 역시 저주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방에 사도로 세움을 입고 이방에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만은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절대로 끊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런 일이 있다 해도 내 골육과 친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내 골육과 친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그냥 하는 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정말 진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 수 있는가 하면 천국도 알고 있고 지옥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르면서 객기를 부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9:4절을 보겠습니다. (신 251쪽)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들이 누구라는 것을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데아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삭은 에서와 야곱을 낳았는데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시고 가나안 일경으로 흉년이 들게 하시고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모두 애굽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400년을 살게 하시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모르는 왕이 나오면서 이스라엘이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4:22절을 보겠습니다. (구 87쪽)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언약을 해 주셨습니다. 400년 후에 가나안 일경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그 조상들로부터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무슨 뜻입니까?
승리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이겼다고 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이제 이긴 자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어떻게 장자가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은 장자가 될 수 없었지만 야곱이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저희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씀은 저희는 하나님의장자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실제 이스라엘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이방의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사야43:1절을 보겠습니다. (구 1019쪽)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이 있습니다.
8장에서 말씀하는 양자가 아닙니다. 지금 육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육적으로 그들의 신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영적으로 우리 성도들을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육적으로 지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장자로서 이 세상을 살았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 모든 민족 중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양자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육의 이스라엘입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살았을지라도 분명히 육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잘 믿으면서 설기를 원했습니다. 비록 그들에게는 복음이 계시가 되지 않았지만 육적으로는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10:12절을 보겠습니다. (구 278쪽)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영광이 있습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섬기고 싶어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해 주심으로 해서 그 자손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사람들이 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노아 때에 홍수를 통해서 사람들을 진멸을 했습니다. 그리고 노아 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노아 홍수 후입니다.
그들은 홍수를 경험하고 난 이후에도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언어가 같아 바벨탑을 쌓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달리 하시고 그들을 지면에서 흩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스스로 더듬어서 하나님을 찾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지으실 때 하나님을 더듬어서 찾기를 원하셨지만 사람들은 도리어 악만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를 왜 부르셨습니까?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육적으로는 지금 있는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습니다. 그들을 부르시고 율법을 주시고 성막을 짓게 하시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분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분이 계시가 되어서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인생들에게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러나 그 영광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이스라엘을 부르셨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깨달을 수 없는 영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백성 전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잘 몰랐고 이방의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영광에 참예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영광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을 통해서 언약을 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6:4절을 보겠습니다. (구 89쪽)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언약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가는 언약이 있다면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언약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이스라엘과 한 언약은 아니지만 그들의 조상을 통해서 언약을 하셨습니다. 이 언약들에 대해서는 정말 한 시간도 부족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두 가지 언약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해 주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하는 그 언약이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하셨습니까? 어느 민족도 아닌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시고 그것을 이루시고 있습니다. 물론 그 언약들은 다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비유입니다 실제 문자적인 언약을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문자적인 언약들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여러 가지를 언약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믿지를 못하는가 하면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31:24절을 보겠습니다. (구 312쪽)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율법을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듣고 자기들이 다 지켜 행하겠다고 언약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지만 이스라엘은 모세가 낭독하여 들려 준 율법을 자기들이 다 준행하여 지키겠다고 언약을 했습니다.
누가 율법을 받았습니까?
이 세상 어느 민족도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 율법을 반포를 하셨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그 율법의 의미를 모르고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율법을 세우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세우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세우신 목적을 몰랐습니다. 도리어 그 율법을 자기들이 지키겠다고 하다가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저주를 받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지만 이스라엘은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율법입니다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세우신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해서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그 율법을 자기들이 지키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4:20절을 보겠습니다. (신 148쪽)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배입니다
기독교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배에서 완전하게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서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먼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누군가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먼저 자기가 예배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 여인에게 주님께서 예배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예배를 잘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입니다
에디오피아 간다게의 내시가 예배를 하려고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배하는 자가 없어서 다시 자기 나라로 돌라가는 중에 성령이 빌립에게 감동을 해서 이 내시를 만나서 예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에게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예배를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하는 자가 없었다고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자를 찾고 계시는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역시 예배를 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의 중요성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지금 기독교를 판단을 한다고 해서 예배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예배를 해야 합니까?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와 같이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가 얼마나 먼 거리를 예배하러 왔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당시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온다는 것은 하루 이틀에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안전상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예배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럼 지금 이 시대는 예배를 하는 자가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물론 교회는 수많은 예배를 드린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가 무엇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배가 있으면 뭐 합니까?
예배를 어떻게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종교적인 형식에 맞추어서 하는 것을 예배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율법적인 제사에 불과합니다. 예배와 제사를 분별하지 못하고 모두가 제사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배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주님의 대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단순히 대화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마리아 여인과 예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많은 남자를 만나서 살아가고 있는 이 여인이지만 예배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예배를 원했는가 하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면서 예루살렘에서 예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를 하러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런 이 여인의 마음을 아시고 주님께서 이 여인과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예배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예배가 있는데도 예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 역시 자기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예배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는 예배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하고 있는 종교적인 신앙생활을 알기 위해서 아니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0:2절을 보겠습니다. (신 33쪽)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약속들이 있습니다.
이 데나리온의 비유에 대한 말씀은 이미 아카데미 강의를 통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아카데미 강의를 보면 되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포도원에 일군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시고 그들에게 일을 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들어가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이방인들이 들어가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일을 마치고 난 후에 주인은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해서 한 데나리온씩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더 받을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가 자기들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보고 주인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데나리온입니다
일을 한 품삯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약속의 데나리온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과 약속한 것을 잊어버리고 그 이상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데나리온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일을 해서 가려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주인과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 것을 가지고 가라고 하면서 이스라엘과 약속한 데나리온을 주고 그들을 쫓아버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자기들의 것을 받고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중 온 자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주인이 일방적으로 한 약속을 믿고 일을 하고 난 후에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나중 온 자들은 주님이 주시는 데나리온을 받았고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일한 삯의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에게는 약속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 약속을 모르고 일을 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 데나리온은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 차별이 없는 데나리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는 이스라엘과 같이 처음 온 자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차별이 없이 주시는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일을 많이 해서 자기들이 일한 삯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먼저 온 자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을 해서 삯으로 천국에 가려고 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주님이 주시는 차별이 없는 은혜를 따라 천국에 가려고 하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먼저 들어온 자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 교회 안에서 그 삯을 다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먼저 온 자는 자기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약속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먼저 온 자가 누군가 하면 율법주의자입니다 그러나 나중 온 자는 하나님을 아는 일을 했습니다. 먼저 온 자는 자기 행위로 교회 안에서 일을 했고 나중 온 자는 하나님을 아는 일을 했습니다. 같은 약속을 받았지만 어떻게 일을 하는가에 따라 그가 먼저 온 자가 되어서 버림을 받을 수 있고 나중 온 자가 되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있어서 그들은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도리어 저주를 받는 백성이 되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먼저 온 자가 되어서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보면서 한 데나리온을 받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 이 세상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받을 상을 다 받은 것이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상입니다
이 세상 교회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천국에 가서 상을 받아야 합니다. 아니 천국에 가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어마어마하게 큰 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인들은 그 상을 이미 교회 안에서 다 받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받고 있는 그 상으로 천국을 잃어버리고 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0:11절을 보겠습니다. (신 274쪽)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저희는 이스라엘입니다
고린도전서10장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왜 저주를 받고 가나안에 들어가지를 못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하고 나서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셨습니까?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그렇게 했어도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저희가 간음을 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저희가 원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경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기독교인들에게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면 우리가 언제 우상숭배를 했느냐고 따질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 우리를 모욕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저를 공격할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당한 일을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전혀 경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경계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고 자기들이 간음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고 그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이스라엘과 같이 먼저 온 자가 되어서 원망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입니까?
아니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한 일이 우리가 문자적으로 보고 있는 나쁜 일입니까? 그것을 이 시대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이렇게 하다가 모두가 죽고 말았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라는 교회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뿐입니까?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어떻습니까?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그 바알과 아세라를 이스라엘만 섬기고 있습니까? 그들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고 이 시대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지 않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은 잘못 기록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알을 섬겼다면 이 시대 역시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다만 지혜가 없어서 자기들이 어떻게 바알을 섬기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세라를 섬겼다면 이 시대 역시 아세라를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성경이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왜 봅니까?
물론 그 안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로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들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경계를 무시하고 있고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만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래서 그들만 마귀의 자식들이 되었습니까? 주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켜서 마귀의 자식들이 되었다면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마귀의 자식들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그 결과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교인들은 십일조를 내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있고 주일을 지키면서도 그것을 율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믿음이라는 말만 하면 믿음이 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3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찐저 바리새인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7번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게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주님께서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신 그 말씀을 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외식하지 않고 있습니까?
외식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나타나고 있는 교회 안에서의 모든 행위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지만 외식하고 있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은 바리새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경계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나쁜 의미로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말씀들을 이 시대 기독교 안에서 그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아무리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어도 그것이 풀어지지가 않아서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외식합니다.
어느 정도 외식을 했는가 하면 식사를 하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을 손을 씻지 않으니까 이상하게 생각을 하고 있고 율법을 어겼다고 합니다. 아마도 제가 목사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 기도를 하지 않고 식사를 하면 그들은 저에게 목사가 맞느냐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외식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스라엘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있습니까?
제가 교회 인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하면 무슨 봉창 두드리는 말을 하느냐고 따질 것입니다 분명히 보이는 우상을 섬기지 않고 있는데 우리에게 왜 이상한 말을 하느냐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우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평생을 우상숭배하면서 살아가다가 사망에 이르는데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경계입니다
그러나 경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고 하면서 우상을 숭배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이 우상을 숭배하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방의 교회 역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은 어리석어서 그렇게 했어도 자기들은 성령을 받아서 지혜가 있어서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두 짐승입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짐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교회가 역시 짐승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환상을 통해서 보여 주셔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두 짐승이 누구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들이 짐승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지금 우리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한 일을 지금 이 시대 교회가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로 그런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고 그저 문자적으로 보면서 자기들이 우상을 섬기지 않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9:5절을 보겠습니다. (신 251쪽)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조상들도 저희의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 아들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탄생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입니다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아브라함이 누군가 하면 이스라엘의 조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큰 자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갈데아우르에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 조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늘의 뭇별들을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조상을 둔 이스라엘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히브리서11장을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기록이 되어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이스라엘의 조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도 족보가 있습니다.
그리고 문중이 있습니다. 자기 조상 중에 왕이 있었거나 또는 영의정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 조상이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얼마나 자랑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조상 중에서 누가 있었고 우리 조상 중에서 어떠한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모두가 자랑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모든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아주 적은 숫자를 빼고는 모두가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그런 조상을 두었다는 것은 조상을 따라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조상이 뛰어나면 그 후손도 조상을 따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런 조상을 두고도 이스라엘은 조상들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던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후에 디모데나 디도 같은 사람들이 복음의 일군으로 직분을 맡은 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사도들만 해도 모두가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율법의 행위를 하다가 저주를 받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있어서 그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조상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그 동안에 이방인들에는 거의 복음이 전해지지가 않았습니다.
로마서1:3절을 보겠습니다. (신 239쪽)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조상들도 저희 것입니다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도 저희에게 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족보를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와 누가복음에서 족보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족보를 따라 나셨습니다.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아직 정혼을 하지 않은 마리아에게서 주님이 성령으로 잉태가 되어서 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족보를 따라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구약에 선지자들로 미리 약속하신대로 그래도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이스라엘의 족보를 따라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실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수많은 민족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그 족보를 따라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기 조상들의 족보를 따라 오신 하나님을 이스라엘은 믿지를 않았습니다. 당연히 성경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을 하셨으니까 믿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영접하지를 않았습니다. 왜 영접을 하지 않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의 일을 이루시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모든 성경을 다 육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역시 영의 일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육적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족보를 따라 오셨어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보고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지금은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는 반드시 율법을 지키는 일을 버리는 것이 선행이 되어야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5: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94쩍)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지만 또 이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교리에 모두가 묶여서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 삼위일체의 교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만들고 놓았습니다. 아니 감히 그런 생각조차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은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 말씀이 기초가 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성경이 한권의 책으로 나오기도 전에 아타나시우스라는 사람이 만든 교리를 가지고 삼위일라는 이상한 신을 만들어 놓고 다른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느 누가 삼위일체라 해도 저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삼위일체를 믿는다 해도 저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없고 유일하신 하나님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다른 위의 아들입니까? 성경 어디에서 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은 다 그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왜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입니다 성자로서 하나님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여자의 몸을 빌어서 나셔서 아들이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은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기독교라는 종교는 참 하나님이신 분을 성자라고 하면서 다른 위를 가지신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른 위 자체가 이미 유일하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가장 기초가 되는 말씀이 이사야9장6절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들로 인정이 되셨다고 하면서 확실하게 정의를 내려 주고 있습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입니다
왜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라고 합니까? 아들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자기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다보니까 가장 기초가 되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교회 안에서 다른 신을 섬기면서 영생을 얻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면 그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삼위일체라는 교리에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입니다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강해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강해 85강 육신의 자녀는 부활하지 못합니다 (0) | 2017.10.03 |
---|---|
로마서 강해 84강 영생입니다 (0) | 2017.10.03 |
로마서 강해 82강 육체가 아닙니다 (0) | 2017.10.03 |
로마서 강해 81강 율법입니다 (0) | 2017.10.03 |
로마서 강해 80강 천국입니다 (0) | 2017.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