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야고보서 강해

야고보서 강해 29강

윤주만목사 2017. 4. 4. 16:25

야고보서5:6절을 보겠습니다. (신 375쪽)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도살의 날입니다.

도살장을 눈앞에 두고도 마음을 살찌우고 있습니다. 정말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이 시대는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야고보는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어디에서 나온 사상인가 하면 바알입니다. 얼마나 부자가 되고 싶은가를 이 시대 노래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을 노래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도살을 당한다는 것을 모르고 부자가 되고 싶어서 노래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부자가 되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겠다고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그런 행위들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사람의 이성으로 바르게 판단이 되는 그것을 보면서 부자가 되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성경을 몰랐다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가 되지 말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부자가 되겠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하는 율법의 행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부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그것으로 해서 마음에 부자가 되어 살을 찌우고 있었고 또 겉으로는 회를 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자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을 하셨어도 이스라엘은 부자가 누구인가를 모르고 더욱 더 부자가 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교회 안에 있는 부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역시 부자가 되는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아니 부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부자가 너무도 보기에 좋기 때문에 그것을 마다할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으로 부자가 됩니다.

그리고 은사로 부자가 됩니다. 성화로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지식으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렇게 부자가 되고 있지만 그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을 오히려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모양을 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면 성경과 얼마나 벗어나 있는 가를 쉽게 알 수 있지만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다 부자가 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야고보서를 바로 해석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신학자들의 강해나 주석을 보아도 어느 누구 하나 행함이 있는 믿음에 대해서 바르게 해석을 하지 않았고 교회는 더욱 더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로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단이라고 공격을 합니다.

부자가 되지 말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까지 공격을 합니다. 사실 부자가 되라고 하는 것이 다른 복음인데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사람에게는 없어서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라 해도 행함이 있는 믿음을 모르고 있고 그것으로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아 도살할 날이 가까이 왔는데도 마음을 살찌게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이성입니다

분명히 부자가 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음행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진노의 포도주를 마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는 가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깨달을 수 없는 영의 비밀입니다. 육을 가지고 있는 인생들의 이성으로는 지혜로는 그것을 깨달아서 알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더 부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도살을 눈앞에 두고도 자기가 부자가 되는 줄로 모르고 그렇게 부자가 되어서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보고 있습니다. 도살의 날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이 무슨 악을 행했는가 하면 옳은 자를 정죄하고 죽였습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 있는 부자들이 죽였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부자가 되어 도살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면서 뭐라 생각을 했는가 하면 이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태복음27:19절을 보겠습니다. (신 49쪽)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저희가 옳은 자를 정죄 하였도다

또 죽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빌라도의 재판장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고 빌라도의 아내지만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옳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폭동이 일어날 것으로 염려해서 빌라도는 사형을 처하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정죄합니다.

유대인은 율법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에 법에 따라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법에 따라서도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다고 인정을 받으셨지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따라 정죄를 했습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안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에 사로잡혀서 정죄를 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다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야고보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정죄의 직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은 정죄의 직분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정죄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다 율법에 따라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의의 직분입니다.

교회 안에는 정죄의 직분을 가진 자도 있고 의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성도도 있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은 정죄에 직분에 빠져 있습니다. 정죄의 직분은 정죄를 해서 죽이는 직분이고 의의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거저 줌으로 해서 살리는 직분입니다.

 

자기가 어느 직분에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이제는 다시 죽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죄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역시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실제 죽일 수는 없을지라도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옳은 자를 죽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도 똑같이 죽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그 자체가 죽이고 있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오직 예수를 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역시 예수를 안 믿고 있습니다. 아니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를 보면 다 부자가 되어서 구속의 은혜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죽였습니까?

바로 자기들의 율법의 의 때문에 죽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성경을 어려서부터 보고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어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를 못 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럴지라도 사람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요한복음3:19절을 보겠습니다. (신 146쪽)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왜 죽였습니까?

이스라엘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빛이 무엇인지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정말 이 시대 역시 참 빛이 무엇인지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더욱 더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 교인들 역시도 참 빛과 어두움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흠 없는 율법의 의가 어두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이성과 눈으로 보고 그것을 빛으로 보았습니다.

 

참 빛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빛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은 참 빛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하는 행위는 다 어두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했다 하지라도 어두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어두움은 자기들이 열심을 내서하고 있는 복음을 위해서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보이지 않고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의는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악 합니다.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악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악한 것을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망으로 끌고 가는 것임에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죽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악해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해서 그러한 일을 했습니다. 이 시대도 교회 안에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 어두움이 마음을 살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행위라고 생각하면서 어두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 역시 교회 안에서 행위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은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하면 분을 내면서 참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람의 이성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빛을 모르고 어두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모르다 보니까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어두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은 이것을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인데도 이 기초를 모르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들이 가진 지혜의 한계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이 빛과 어두움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행위만 어두운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 역시 어두움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어두움을 더 사랑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입니다. 하지만 역시 이 시대도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참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미혹이 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행위는 율법이라고 하고 자기들이 하는 행위는 믿음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고 거기에 다 넘어가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어두움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두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였습니다. 이 시대 역시 자기들이 하고 있는 어두운 행위로 사람들을 정죄를 하고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또 그를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53:7절을 보겠습니다. (구 1033쪽)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주님은 이 예언 그대로 이스라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빛을 몰라서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였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법정에 세워서 죽였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때 정말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당신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면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도수장으로 끌려가면서도 그 입을 열지 않고 잠잠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의해서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저항을 하기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 오신 목적이 바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죽일 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런 것입니다.

이 세상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이스라엘이 옳은 자를 정죄를 하고 죽일 때도 대항하지를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우리와 똑같은 육체의 모습을 입고 오셨습니다. 정말 그 당시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한 형벌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 중에 하나였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날씨가 아니라 중동 지역은 아주 더운 날씨입니다 그런 곳에서 십자형을 받기 전에 채찍으로 거의 반은 죽이게 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더운 날씨에 목이 타 들어가는 고통을 당하면서 서서히 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십자가 형입니다.

 

그것을 모르시겠습니까?

주님은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마에 땀이 피가 될 정도로 흘리면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길 만하면 옮겨 달라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셔서 당하셔야 하는 그 십자가형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시고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은 그 잔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에 예언이 되어 있는 그대로 도수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두움을 사랑해서 자기 땅에 오신 메시아를 정죄를 하고 죽였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대항하지 않고 십자가에게 죽으셨습니다.

 

예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영의 일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너무도 당당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서 왔는가 하면 철저한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대항을 하지 않고 그대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을 깨달아야 하는데 말로는 아니 지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믿어지지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그랬던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도 율법주의에 깊이 빠져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악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다고 믿고 있는 아니 자기가 얼마나 가난한 자인가를 알고 있는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죽임을 당하면서도 이스라엘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부자들은 모릅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악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죽이면서까지도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으로 단 한 가지라도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 영의 비밀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보내심을 받은 성도만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야고보서 뿐 아니라 이 시대 성경을 얼마나 거꾸로 해석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같은 경우에는 조금 더 심하게 하고 있지만 거의 모든 성경을 거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성경을 사람의 이성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자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사야의 예언을 보고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성경을 얼마나 틀리게 해석을 하고 있는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생명이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에만 나오면 이상하게도 자기 생명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에는 그렇게 신중하고 애착을 갖는 그들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6:53절을 보겠습니다. (신 47쪽)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입니다. 당시 로마가 아무리 강대하다 할지라도 주님의 능력만으로도 로마의 모든 권세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있어 십자가형을 피할 수 있습니다.

 

천사입니다.

아마 이 천사들이 나타난다면 이스라엘 뿐 아니라 로마의 군인들까지도 그 자리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천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런 능력이 있는 천사을 보내주실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정죄를 받으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우리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셔야 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기 위해서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대항을 하면 이스라엘은 절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로마의 군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하나님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육체의 싸움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영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셔야 우리 인생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옳은 자를 정죄하고 죽이려 해도 그것에 대항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싸움이었으면 분명히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의 비밀을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 두셨습니다. 사단까지도 이 비밀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게 하심으로 사단이 이스라엘을 감동을 해서 자기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임으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가 상하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이려고 유대인들을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이는 그 일이 자기 머리를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대항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시니까 주님이 죽음으로 해서 모든 것이 끝이 나고 자기가 이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부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부활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부활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단도 그것을 몰랐고 또 이스라엘 역시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활입니다.

이것은 정말 신비한 일입니다,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영의 신비한 부활입니다, 죽었던 주님이 부활을 하신 것과 같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이 탄생이 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의 몸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새로운 영을 탄생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전혀 다른 썩지 않는 부활의 신령한 몸을 입혀서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셔서 그 영의 신비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대항하지 않고 이스라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야고보서5:7절을 보겠습니다. (신 375쪽)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며,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실 때까지 길이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은 부자들의 세상입니다. 부자가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였습니다. 정말 교회는 늘 부자에 의해서 가난한 자들이 법정으로 끌려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자들이 사치하고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성경을 보면 늘 그렇게 해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보아도 그렇고 이방의 교회도 역시 부자들이 모든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이제까지 교회사를 보아도 역시 부자들이 교회의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도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서로 기록이 되어 있는 책들을 볼 때 과연 성도가 있었는가 하는 것을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천주교도 부자였고 또 프로테스탄트 교회 역시도 부자가 되었습니다. 성도라고 할 수 있는 형제들은 거의 보이지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도 역시 부자들의 세상입니다. 과연 성도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찾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늘 부자들은 교회를 종교로 만들어서 그 안에서 사치와 연락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이 야고보서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리고 있습니다.

 

성도가 없습니다.

천주교와 기독교를 거쳐 오면서 구원을 받을 성도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해석을 한 이 야고보서 강해 한 가지만 보아도 너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종교 개혁을 한 루터도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야고보서는 성경으로 취급을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루터만 그렇습니까?

그래도 루터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신학자들은 야고보서를 다 거꾸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신학자들이 야고보서를 행위를 강조하는 말씀으로 해석을 하다 보니까 그것이 이제는 굳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르면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모른다고 하면 다른 아는 사람을 통해서 알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안다고 하면 더구나 그가 유명한 신학자이면 사람들은 거의 맹목적으로 그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인쇄술이 발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책들이 나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자칭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남긴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책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그 중에서 진리를 바로 전하고 있는 책이 얼마나 되는가는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성도만이 알고 있습니다.

 

인쇄가 발달을 해서 책이 대중화 된 것이 불과 200여년 되었습니다.

물론 아주 유명한 신학자들의 글은 그 이전이라도 책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들은 불과 200여 년 전부터 쓰여 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책들이 쓰여 지기 시작을 했을 때는 이미 교회는 거의 다 율법주의와 성화주의 그리고 은사주의에 깊이 빠져 들어가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고 그것이 마치 성경의 권위와 비슷하게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유명한 신학자들에 의해서 잘못 해석이 된 설교집이나 그리고 강해 주석들을 보면서 그것을 신학에서 배우다 보니까 그것이 마치 진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신앙서적을 봅니다.

지금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심판이 그대로 보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습니까? 성경보다도 그런 책들을 보면서 그가 더구나 유명한 신학자이면 성경보다도 더 그 책에 있는 글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발달을 해서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는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또 다른 사람들이 함께 공유를 하면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모르면서 안다고 하며 글로 남기는 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 부자가 많습니까?

그것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안다면 절대로 부자가 되려고 하지 않을 수 있는데 성경을 모르다 보니까 서로 부자가 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안다고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을 자기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일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아는 척을 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34쪽)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왜 길이 참습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서 부자들에 의해서 환난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시대도 진리를 알고 있는 성도는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그리스도편지가 그렇게 많이 알려지기가 않아서 그렇지 아마도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추고 알려지기 시작을 하면 지금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에서 아마도 분명히 이단이라고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자입니다.

그 부자들은 자기들이 사치하고 연락하는 그것을 쓰레기 취급을 하면 참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무던히도 노력을 했는데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쓰레기와 같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악한 것이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핍박을 합니다.

십일조를 악이라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일이라고 하는 날을 악한 행위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키고 있는 성탄절과 추수감사절 그리고 송구영신 예배가 다 짐승에게서 미혹이 된 악한 행위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다수의 힘을 빌어서 그리스도편지를 이단이라고 공격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전하고 있는 말씀은 그들이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 합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 있는 선한 일들이 악하다고 하면 누가 더 나쁘다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선지자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누구와 싸웠습니까?

다 율법주의자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부자들과 싸우다가 핍박을 받았습니다. 늘 교회는 부자들에 의해서 사치와 연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소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그저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해서 그것이 옳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부자가 되려고 따라갔습니다. 물론 가끔 가다가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표입니다.

거의 모두 다 교회 안에서 핍박을 당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만약에 그리스도편지가 알려지면 아마도 심하게 핍박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핍박을 받으면서 산 것이 성도입니다. 교회는 늘 부자들이 사치하고 연락을 했기 때문에 사실 성도들이 그들과 함께 하지를 못 했습니다.

 

성도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고아고 과부고 나그네입니다, 더구나 율법을 폐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을 아주 잘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 핍박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부자들이 있는 교회 안에서 성도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이제 듣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교회 안에서 자기가 들어왔던 그 지식이 그대로 있어서 마치 내게 복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으로 오해를 하다가 더 큰 실망을 하고 핍박을 당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영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을 돕지 않습니다. 설령 내가 구원을 받고 성경에서 모든 진리를 다 알고 있다고 해도 육적으로 돕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도 주의 강림하실 때 까지 길이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육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 같으면 참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육체적으로 직접 도와주시면 되지 왜 참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 까지 길이 참으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육체적으로 도와주시지 않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기 때문에 길이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37:40절을 보겠습니다. (구 829쪽)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말씀을 보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이런 말씀을 육적으로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라고 말씀을 하니까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반대하고 있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자기를 육체적으로 도와 건져 주시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사도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악인에게서 건짐을 받았습니까? 도리어 악인에 의해서 순교를 당하고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처음 순교자가 누구입니까?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가 누구에게 순교를 당했습니까? 바로 이스라엘의 악인들에게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아서 순교를 당했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스데반 집사는 악인에게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육체는 돌에 맞아 죽는 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악인이 누구입니까?

이 세상 사람도 물론 악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부자들이 악인입니다. 그 악인에게서 육체적으로 건짐을 받고 도우심을 받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도는 육체적으로는 그 악인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살아갑니다.

 

얼마나 많은 순교를 당했습니까?

물론 전부가 순교자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초대 교회를 지나고 교회에 의해서 순교를 당한 사람이 수천 만 명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교회가 부자가 되어서 심지어는 왕까지도 바꾸고 또 종교 재판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천주교에서만 있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도의 삶입니다.

내가 진리를 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굴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더 핍박을 받습니다. 내게 진리가 있으면 세상은 나를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사상이 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고 또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부자를 악하다고 하는 성도는 당연히 세상에 의해서 그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핍박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길이 참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정도 참아야 합니까? 내 육체의 생명이 끝이 날 때까지 그렇게 길이 참아야 합니다. 그것을 참지 못하면 결국 진리를 배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우리가 길게 살아 보아야 백년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생명은 불완전해서 아프기도 하고 또 슬픔을 당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생명은 썩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이길 수 있는 완전한 형상입니다. 천사들도 우리가 부활을 하고 나면 판단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활입니다.

이 둘을 다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가끔가다가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도 그런 분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보면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꿩도 먹고 알도 먹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가를 알고 있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기꺼이 참고 견딥니다. 천국에 있는 부활을 생각하면서 아무리 힘이 들고 때로는 내 생명을 빼앗으려고 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정말 하늘의 것이 얼마나 좋은가를 알고 있다면 참을 수 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셔서 참을 수 있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농부입니다.

그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귀한 열매를 바라며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농부도 자기가 씨앗을 심고 그것의 열매를 바라면서 참고 또 참으면서 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습니다.

 

베드로후서3: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87쪽)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귀한 열매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부활을 해서 주님 앞에 나타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보다 더 귀한 열매가 어디 있습니까?

농부는 농사를 지어 귀한 열매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라면서 길이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무엇을 바라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직 구원입니다.

이 세상의 그런 생명이 아닙니다, 이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거짓 구원이 아닙니다. 성도는 영의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영이 주님이 오시는 날에 부활의 열매가 되어서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이것을 위해 길이 참고 바라고 있습니다.

정말 부자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서 그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바라는 것이 바로 이 열매입니다. 구원의 열매를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시는 그 날을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래 참습니다.

곧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벌써 2000년이 지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고 거짓과 같이 보여 지지만 주님의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리 오래 참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의 시간으로는 정말 오래 참고 기다린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아직 짧은 것 같습니다.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주님이 오실 때의 징조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교회의 징조를 보면 아직은 때가 아닌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다 죽기 까지는 주님이 오시지 않을 것으로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도 모릅니다.

정확한 시간은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로 이 세상에서 비록 고난과 환난을 받으면서 살아가다 잠을 잘 지라도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분명히 우리를 깨워 영접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구원할 성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내가 되고 또 나를 통해서 이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정말 말세의 때에 길이 참으면서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생명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 하고 또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런 생명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귀한 생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는 아닐 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귀한 열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환난 가운데 산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성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있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은 성도라는 것을 알고 참고 또 참으면서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5:8절을 보겠습니다. (신 375쪽)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여러분 참으십시오.

반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참기가 힘이 들면 계속해서 참으라고 말씀을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이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야고보는 계속해서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앞서서 말씀을 드렸지만 죽을 때 까지 참아야 합니다. 그렇게 참는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죽을 때까지 이 세상에 있는 부자들에 의해서 아니 부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또 내 마음에서도 끊임이 없이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솔직히 얼마나 부자가 되고 싶습니까?

부자가 되기 싫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으로는 너무도 좋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정말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고는 이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니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악이라고 하니까 그것이 부자라고 하니까 그것을 참으려고 하니까 얼마나 견디기 힘들겠습니까? 사실 그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가 길이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령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참고 싶어도 안 됩니다, 그것이 인생의 이성으로는 너무도 바르기 때문에 그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자가 되지 말고 길이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성도입니다.

우리 성도는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 못 박았습니다. 사실 이것을 못 박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그런 고통의 시간을 이기고 길이 참고 견뎌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또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려 가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2:3절을 보겠습니다. (신 400쪽)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에베소 교회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있는 성도들은 참았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참았는가 하면 주의 이름을 위해서 참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바라면서 참았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입니다.

그리고 예수입니다. 이 두 가지의 싸움입니다. 율법의 의미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율법을 버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정말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맞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지도 않고 성화가 되려고도 하지 않고 은사를 나타내지도 않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정말 때로는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의 일입니다.

육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는 너무도 당연합니다. 육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믿는 것 같은 생각이 되는데 그저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하는 그것이 때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볼 때는 제가 대단하게 보일지 몰라도 저 역시도 사람입니다, 복음의 비밀을 전하고 있지만 때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에 확신을 주고 있어서 그런 회의가 들 때에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은 힘이 듭니다.

율법은 보이기 때문에 내가 감정적으로 느끼고 보고 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면서 육체적으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내 마음으로 믿어지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없습니다. 단 한 가지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내가 받은 이 은혜의 복음을 내 이웃에게 전하는 그 일 뿐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가진 자를 도와서 다른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믿는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몸으로 무엇을 하지 않으면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기 몸으로 하려고 하고 있고 사단은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점점 더 율법주의로 변하고 있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자꾸 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일을 합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킵니다. 또 은사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성화가 됩니다. 그러한 행위들이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증표로 사람들의 이성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것이 부자가 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전혀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때로는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음을 주시고 있습니다.

행위를 하지 않고 믿음을 주시는데 그 믿음을 가지고 행위를 하지 않으려니까 정말 견디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길이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에는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참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부자가 되는 것을 참았다는 말씀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저희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그 구원자를 알기 위해서 게으르지 않고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힘썼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부지런한 성도는 율법의 행위를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될 수 없다 보니까 사람들로부터 정죄를 받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어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성도는 육체로는 참고 견뎌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를 보면 그들은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너무 부자가 되어 있고 종교에 빠져 거기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 육체의 일만 생각하고 영의 일은 도무지 모르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마음을 굳게 하라

 

고린도전서16:13절을 보겠습니다. (신 285쪽)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마음을 굳게 하라

사람들은 행위에 대해서는 너무도 굳게 하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행위에 대해서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타락을 하면서 종교화 되다 보니까 행위를 통해서 자기들이 성도라는 것을 보이고자 노력을 하고 있어서 그렇지 성경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행위는 너무 잘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으로 굳은 신념을 보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행위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율법주의다 보니까 사람들이 그 안에 있을 때는 자기 행위로 굳게 설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겠지만 욥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고와의 아버지가 되고 과부의 눈을 실망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였지만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의롭게 산 욥이라 해도 그의 모든 재산과 그리고 가족까지 잃고 나니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 육체의 병을 보면서 탄식을 했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고 있을 때는 전혀 깨닫지 못 합니다. 내가 주일을 지킬 수 있고 내가 십일조를 낼 수 있고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있고 성도와 같이 살 수 있을 때는 자기가 하고 있는 행위가 너무도 당연하고 모든 사람도 나와 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모든 것을 잃고 나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행위라는 것이 바로 그렇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금 하고 있는 행위를 보면서 그것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굳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이 행위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레에 이틀을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낸다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는 바리새인과 주님께서 나를 도와 주셔서 내가 십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라고 기도를 하는 지금의 교인과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똑같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안 도와주셨다고 생각했습니까?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도와 주셔서 이레에 이틀을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욥과 같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행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는 노력을 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고 저 사람은 포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 눈에는 역시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행위는 분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에 따라 어느 사람은 굳게 선 것처럼 보이고 어느 사람은 방종을 하는 것같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로는 굳게 설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다 보여 주셨습니다. 죄를 한 번도 안 지어본 아담이 범죄를 하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다릅니다.

내 행위는 나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내가 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구속의 일입니다. 죄인인 사람이 하는 행위는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점도 흠도 없는 주님께서 하시는 구속의 일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을 굳게 하고 주의 강림이 가깝다는 것을 믿으라는 그 말씀은 바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내 마음이 믿고 있습니다.

 

마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마음을 굳게 하라고 하니까 마치 내가 스스로 마음을 굳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스스로의 마음은 늘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마음으로 믿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1:21-22절을 보겠습니다. (신 287쪽)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시고 있는가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는가 하면 저가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셔서 우리가 마음을 굳게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내 마음이 주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내 마음이 굳게 서 있습니까? 부자가 되려고 행위에 빠지지 않고 있습니까? 정말 성도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성경이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영의 일을 모르다 보니까 그저 육의 이성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내 마음에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적인 믿음과 하나님께서 주시고 있는 성도의 믿음이 무엇이 다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우리를 견고케 하시는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모든 종교는 다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게 하든지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누누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는 부자가 되기보다는 오직 믿음으로 굳게 서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자를 보면 너무도 부럽고 또 나도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어느 누가 그것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 역시도 사람인지라 제가 행위로 부자가 되어서 칭찬을 들으면 좋습니다. 이 복음을 주님께서 주시지 않고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지 않았다면 저 역시도 이 세상의 종교인들과 같이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 이 세상의 이성으로 어떻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계속해서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을 안다고 해도 사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자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사실 모든 행위를 다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사람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영의 비밀입니다.

 

마음입니다.

아니 성령의 감동입니다. 이 세상 종교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성도들에게 비밀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가 아무리 지혜가 있고 유명한 신학자라 해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저 종교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굳게 하라고 하니까 이 세상의 신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 세상 종교입니다.

그런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를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셔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우리 안에 있어야 마음을 굳게 하고 주의 강림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종교인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때로는 고독하고 외로울지라도 주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성도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율법주의자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부자가 되지 말라고 하면 그들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 줄도 모르고 공항 상태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고 어떤 신앙생활의 행위를 하지 않고 오직 믿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믿음이 있는 성도는 그것이 내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지만 율법주의자들은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하는 줄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믿음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그저 종교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행위를 가지고 믿음이라는 아주 이상한 주장들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행위로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미혹하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인생은 욕심과 정욕을 떨쳐 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행위가 사람의 이성으로 너무 좋고 그것을 통해서 믿음이 좋다는 인정을 받고 또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기도 하고 존경을 받기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성령이 그들에게 오시지가 않아서 이 세상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성경을 본다고 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성령이 오신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이생의 욕심과 정욕을 떨쳐 버려야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고 오직 성령이 오셔야지만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릅니다.

다 성령을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하는 것을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 마음이 부자가 되어 있는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행위를 하나라도 지키고 있고 또 성화가 되려고 하고 있고 은사를 통해서 나를 나타내고 있다면 그는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은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5:9절을 보겠습니다. (신 382쪽)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성경을 보는 이유를 알고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믿음을 굳게 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종교에 빠져 교회 안에서 행위에 열심을 내지 말고 정말 성경을 바로 알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아 믿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종교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행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지금 얼마나 행위에 빠져 있는가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라는 말씀입니다.

 

싸움입니다.

사람은 늘 행위로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지는 사람은 구원이 없습니다. 야고보서도 계속해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고 성경 전체가 다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종교적인 행위에 빠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영생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모릅니다.

아니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이단이라고 까지 합니다. 행위를 하지 말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공격을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애착을 가지고 있고 정욕에 빠져 있는 가를 알아야 하는데 성령이 오시지 않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교회는 이 세상의 종교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뭐가 다릅니까?

불교와 기독교가 뭐가 다릅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 그 말 한 마디 빼고는 똑같습니다.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불교도 도덕적으로 살라고 가르치고 있고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설교를 들어 보아도 도덕적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기독교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목사가 나와서 설교를 하는데 자기 부부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부부는 이제까지 한 번도 부부 싸움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 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그것이 자랑입니까?

 

설령 부부 싸움을 안 했어도 그렇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왜 설교를 합니까? 다 자기 행위를 자랑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이미 그 목사는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목사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자기도 그 목사와 같이 행위의 부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할 것이고 그런 것으로 자기가 믿음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목사가 그런 설교를 하면 자기도 모르게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행위로 점점 더 부자가 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런 종교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굳게 서 있어야 주의 강림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13:9절을 보겠습니다. (신 369쪽)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오직 믿음입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것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단어에 집착을 하고 그렇게 말을 하는 것으로 마치 오직 예수를 믿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시대는 너무 지적인 수준이 높다 보니까 성경을 아무나 보고 있고 그것을 사람의 이성으로 보면서 예수를 믿으려 하고 있습니다.

 

굳게 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강림이 가깝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가깝다고 하는 표현을 우리 인생들의 생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은혜를 받은 성도는 그 마음을 굳게 세울 수 있습니다. 아카데미 강의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떻게 성도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바로 깨닫는 성도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굳게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식물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는 이성적 성경지식으로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신학박사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신학박사가 되려고 노력을 하기 보다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들이 어떻게 박사학위를 받습니까?

이번에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회에서 목사의 박사학위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신학박사도 거짓으로 받는 그들이 과연 성경을 바로 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박사는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런 유혹을 받은 적이 있고 아주 쉽게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묵사만 식물로 합니까?

교인들도 지적인 수준이 있다 보니까 성경을 그저 문자적으로 많이 알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그런 지식을 가지고 오히려 은혜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왜 식물로 하지 말고 은혜로 하라고 말씀을 하느냐면 식물로 하면 은혜를 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 역시 식물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 알고 있다고 해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성도는 그런 식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마음을 굳게 하여 이 세상에서 무명한 자 같아도 주의 강림을 기다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고보서 강해 31강  (0) 2017.04.04
야고보서 강해 30강  (0) 2017.04.04
야고보서 강해 28강  (0) 2017.04.04
야고보서 강해 27강  (0) 2017.04.04
야고보서 강해 26강  (0) 2017.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