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야고보서 강해

야고보서 강해 30강

윤주만목사 2017. 4. 4. 16:27

야고보서5:9절을 보겠습니다. (신 375쪽)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마음을 굳게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굳세 하시고 또 은혜로서 굳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만이 믿음에 굳게 서서 자기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 구원의 면류관을 굳게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너무 행위로 빠져 있습니다.

 

그것을 모릅니다.

마음을 어떻게 굳게 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마음을 굳게 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가를 그것을 행하고 있는 성도만이 알고 있습니다. 모든 행위를 버리고 오직 마음을 굳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면류관을 잡고 있다는 것이 사실은 사람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드리는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도는 복음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내가 직접적으로 하지 못할 때는 복음의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과 협력을 해서 그를 돕는 것 역시 귀한 일입니다. 꼭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그 마음부터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율법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부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역시 부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살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율법을 폐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5장에서는 부한 자들아 들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굳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영의 일입니다. 하지만 이 영의 비밀을 모르는 종교인들은 그저 교회 안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그 말을 하고 또 자기들이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고 하는 것으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행위들이 사실은 자기를 부자로 만들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굳게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행위로 자기를 굳게 하려고 합니다.

 

참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강림하시기 까지 참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굳게 서서 생명의 면류관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거대한 정통이라는 교회를 만들어 놓고 그들로 하여금 종교인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스스로 죽고 있습니다. 길이 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힘이 듭니다.

이것을 참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까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길이 참고 견디지 못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빼앗기기 때문에 길이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길이 참아야 하는가 하면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순교를 당하기까지 길이 참았습니다.

 

이 시대는 그런 순교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 초대 교회보다 이 시대가 더 길이 참기가 어렵습니다. 물질의 풍요와 종교의 자유가 있다 보니까 마음을 굳게 하고 길이 참는다는 것이 더 어려운 세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종교의 자유가 축복인 것 같이 느껴지겠지만 사실 그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더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사단의 계략입니다.

모든 나라에서 종교의 자유를 주면 어떻게 됩니까? 아마도 서로 부자가 되기 위해서 경쟁을 할 것입니다 실제 유렵의 교회가 그랬고 또 미주의 교회가 그랬고 이제 신흥국들로 전파되어 그런 교회들이 또 그렇게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사단이 얼마나 쉽겠습니까?

정통이라는 교회만 만들어 놓으면 그 거대한 세력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너무 옳기 때문에 마음을 굳게 한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신 성도들은 진리를 알기 때문에 부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마음으로 굳게 서서 주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망, 못마땅하게 여겨 탓하거나 불평을 품고 미워한다고 사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못 마땅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평을 품고 서로 미워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일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실제 이 시대 교회 안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15:2절을 보겠습니다. (신 121쪽)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들이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왜 원망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과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면서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고 있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잘 믿는 자기들을 영접하고 자기들과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자기들을 외면하는 것을 보면서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잘 했습니다.

자기들은 그래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를 했습니다. 죄인들과 바리새인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누가 보아도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원망이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못 마땅하게 여기거나 불평을 품고 미워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원망합니까?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 바리새인들이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면 자기들을 영접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 늘 국어를 먼저 공부를 해야 합니다.

물론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원 뜻을 알면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한글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한글을 모르고 성경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한글개역성경은 정말 한글만 바로 알아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원망이라는 단어가 나와도 그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단어를 생각할 때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대부분이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을 원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평하게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원망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성경을 보면서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한글개역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보고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성경을 주셨을 때는 이 성경만 보아도 구원을 받는데 있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한글을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부족한 사람이 원망을 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받았는데 자기는 못 받는 사람이 원망을 합니다. 그런데 사전을 보니까 그 뜻이 아닙니다. 잘하고 있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잘하고 있었는데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원망을 하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잘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얼마나 못 마땅하게 생각이 되겠습니까? 나는 평생을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내가 한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고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지금 이 시대도 역시 이 바리새인들과 같이 원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자가 원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로 알면 부자는 당연히 원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행위의 의로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은 부자가 되지 않고 길이 참으며 마음을 굳게 하고 있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왜 우리가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원망을 했던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바로 부자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이 율법의 의로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원망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못 마땅합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큰 은혜지만 부자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못 마땅한 일입니다. 죄인들과 같이 취급을 받는 것도 못 마땅한 일인데 하물며 자기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연히 원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지만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9:13절을 보겠습니다. (신 13쪽)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누구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의인이 많습니까? 죄인이 많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의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모두가 제사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제사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제사가 무엇인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그들에게 이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저를 원망할 것입니다, 아주 못 마땅하게 여기고 불평을 품으면서 저를 미워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제사를 하지 말하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제사를 해 오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들이 정말 수고를 하면서 하고 있는 그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 이제 하지 말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저를 아주 못 마땅하게 여기면서 이단이라고 까지 공격할 것입니다.

 

이 시대는 바리새인이 되어 있습니다.

너무 깊이 제사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다 제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르고 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헌금을 하는 그 모든 일이 제사라고 하면 아마도 저를 아주 못 마땅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 때문에 구원을 못 받는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또 원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 진리를 듣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어느 사람이 아주 열심을 내서 제가 전하고 있는 이 복음의 일을 돕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제가 그 제사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 사람이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면 알고 있겠지만 진리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저를 원망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저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진리를 알고 있다면 절대로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진리를 모르고 있다면 그는 분명히 원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복음의 일을 하는 사람을 도왔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지 못하고 그 일이 아무 의미가 없느냐고 하면서 저를 도운 것을 실망하고 원망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심판하실 분께서 이미 문 앞에 서 계십니다."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망을 하게 되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는 더 많은 일을 하고 또 누구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많은 일을 한 사람이 원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하면 원망을 하게 됩니다.

 

제사 정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제사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려면 여러 가지 제사의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도 해야 하고, 기도도 해야 하고, 또 헌금도 해야 하고, 또 이웃 사랑도 해야 하고 하는 이런 모든 것이 다 제사입니다, 성도는 이것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 제사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제사가 의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사를 전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성도라면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면 원망을 하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원망을 하면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교회 안에서 누구 보다 더 열심을 내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씀을 듣게 되면 원망을 하게 됩니다. 차라리 원망을 할 것 같으면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하다가 그것이 진리를 거스르게 되고 있고 오히려 악인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사를 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기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복음이 있는 성도라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원망을 하게 된다면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믿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그것을 어느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많은 사람이 함께 협력을 해야 하고 그 모든 일이 다 제사입니다. 그 제사의 일을 할 때 그것을 기억하고 싶다면 차라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있는 성도라면 자기가 그 어떤 제사를 드렸어도 그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모르면 기억하게 되고 그것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야고보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전해집니다.

그러면 반드시 제사를 한 사람은 원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제사를 잘 드리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과 식사를 하시니까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당연히 원망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도 역시 그렇게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원망을 하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제사를 많이 드리고 있는 사람이 원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사를 전혀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먼저 긍휼을 알고 제사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긍휼을 압니다.

그러면 제사를 드려도 그것으로 의인이 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제사를 드렸다 해도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종교가 되면서 급속히 타락을 하고 있고 그 안에서 서로 제사를 더 많이 드리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진리를 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못 마땅하게 여기고 또 자기보다 더 강한 상대면 아마도 원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원망을 하는가 하면 제사를 더 많이 드리고 있는 사람이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것으로 의를 쌓고 있는 사람들이 원망을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서로 원망을 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는 계속해서 행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야고보서를 보고 오히려 더욱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복음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또 서로 원망을 하는 그런 열심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망을 하는 자는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누가 원망을 했는가를 알면 됩니다. 그냥 단어만 보지 마시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누가 원망을 했는가를 알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20:10-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3쪽)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데나리온입니다.

이 설교는 이미 아카데미 강의를 통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데나리온은 약속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원의 일군의 비유를 말씀하시면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습니다. 이 데나리온이라는 것은 이미 약속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아카데미 강의를 보시면 이해가 쉽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원망을 합니까?

제일 처음에 온 이 사람이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을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그들을 포도원의 일군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왔습니다.

그리고 삼시에 온 사람이 있습니다. 또 육시와 구시 십일시에도 포도원의 일군을 들여보냈습니다. 처음 이스라엘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상당하게 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이 난 후에 나중에 온 자부터 해서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가장 먼저 온 이스라엘의 일군에게도 역시 한 데나리온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약속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천국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아침부터 일찍 와서 일을 했다고 해서 더 받으려고 주인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누가 원망을 하는가를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비유로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기가 교회 안에서 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더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데나리온은 천국의 약속입니다

그보다 더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교회 안에 어떤 사상이 있습니까? 자기가 교회 안에서 더 열심히 많은 일을 하면 천국에서 더 큰 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천국을 동일하게 주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동일하게 받는 것을 보고 아침 일찍 와서 일을 한 그 사람이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왜 원망을 합니까?

천국을 모르기 때문에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아침 일찍 온 이 일군이 천국을 알았다면 절대로 원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자기가 아침 일찍부터 일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더 많은 데나리온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이 세상의 이성적인 사고입니다. 누가 이것을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천국을 알아야 하고 영의 일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육체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천국을 모르고 영의 일을 모르다 보니까 이 사람과 같이 주인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원망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주님께서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사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렇게 제사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제사의 일을 따라서 더 큰 상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것을 다 받았습니다. 천국 그 이상을 우리가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렇게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동일하게 받는다고 하면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원망했습니까?

아침 일찍 온 그 사람이 원망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한 그 사람이 원망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이치로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더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것을 나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사람이 일을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입니다.

일을 하게 해 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아무리 그가 아침 일찍부터 왔다고 해서 사실 주인이 그 일군을 써 주지 않으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일을 하게 해 주신 그것이 은혜라는 것을 모르고 그리고 데나리온을 주신 것이 은혜라는 것을 모르고 이렇게 교회 안에서 자기가 한 일을 생각하는 미련한 자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20: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3쪽)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원망하면 어떻게 됩니까?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모르고 이렇게 자기가 교회 안에서 제사를 드린 것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원망을 하게 되어 있고 그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절대로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는 행위에 열심을 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로 나타나는 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모두가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인데 자기가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받으려고 하면서 원망을 하게 되어 있고 그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복음을 가진 성도는 자기 생명도 아까워하지 않고 또 자기 재산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분복과 은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마땅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지금 이 시대 역시 바리새인과 같은 그들이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 어떤 사상이 있는가 하면 이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하면 천국에서 더 큰 상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오해를 해도 너무 많은 오해를 해서 이 세상의 사상이 그대로 들어와 있습니다.

 

불교의 사상입니다

이슬람의 사상입니다. 그리고 천주교의 사상입니다. 아니 무신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의롭고 선하게 살면 좋은 곳으로 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종교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가 하면 바로 이 사상 때문입니다. 내가 일을 많이 하면 더 많은 상을 받을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천국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은혜로 주셨습니다. 그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욕심이 그 천국에서도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마치 천국을 이 세상과 같이 생각을 하면서 이 세상에서 열심을 일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얻는 것 같이 천국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면 뭐합니까?

일을 열심히 하면 뭐 합니까? 자기가 받은 약속의 데나리온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이미 나중 된 자입니다. 이 데나리온을 모르게 되면 교회 안에서 원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일을 해서 마치 그 데나리온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데나리온을 주셨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데나리온을 미리 주시기로 약속을 하시고 그리고 일군들에게 일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침 일찍 와서 일을 한 그 일군은 자기가 받은 한 데나리온을 보고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원망을 합니까?

행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더 많이 일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원망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망을 하는 자는 아침 일찍 온 일군과 같아 결국에는 나중 온 자가 되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정말 귀한 말씀입니다.

 

왜 망합니까?

내가 하고 있는 제사 때문입니다. 그것은 은혜로 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주신 데나리온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자기가 일한 그것으로 데나리온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사상입니다.

 

그런 사상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바로 이 사람입니다 차라리 교회에 나오지를 말고 일을 하지 말지 평생을 열심을 다 해서 일을 했는데 그것이 원망이 되면 그는 결국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과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원망을 했습니다. 역시 이 시대도 그런 사람들이 원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망 안 합니까?

그런 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안 한다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원망을 한다고 하면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망을 한다고 하셨는데 나는 원망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자기 마음을 스스로 속이고 있는 일입니다. 아니 자기 스스로 속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나는 정말 은혜로 하고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른 아침에 온 그 사람이 누군가 하면 바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아주 열심을 다 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전서4:9-10절을 보겠습니다. (신 381쪽)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복음의 일군입니다.

성도는 이 일을 위해서 정말 헌신을 해야 합니다. 늘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대접을 합니까?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그네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음식과 의복을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나그네에게 음식과 의복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나그네인줄은 모를 지라도 우리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서로 대접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으면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을 해아 합니다. 그런데 절대로 원망을 하면서 해서는 안 됩니다 포도원의 일군과 같이 원망을 하면서 할 바에는 차라리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정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알고 있다면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원망을 하지 않고 정말 은혜로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은혜로 한다고 해도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종교적인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각각 받은 은사대로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대로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을 하려고 하지 마시고 내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가를 알면 됩니다. 은사라고 하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은사만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내가 받은 분복대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은사도 분복입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원망 없이 대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것 까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성경을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원망 없이 하시기 바랍니다.

원망을 할 것 같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그에게 더 유익합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는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진심이 아니라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는 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선한 청지기입니다.

그는 원망 없이 나그네를 대접합니다. 또 그는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도 그랬고 이방의 교회도 역시 행위가 빠져 버렸고 자기가 받은 은사 이상을 하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나중 된 자가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상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이상한 하나님으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이 욕을 먹고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 이상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각각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만 하면 되는데 그것을 넘어서려고 하다 보니까 문제가 되고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식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 이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이상의 능력을 주셨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굳이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인생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고 그 이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십자가를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모르다 보니까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서 스스로 망하는 길로 빨리 달려가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내가 잘못해서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하려고 하다가 그것이 악이 되어서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심판을 받습니다.

그 이상을 하려고 하다가 사람들이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누가 심판을 받는가 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면서 심판하실 분이 문 앞에 서 계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원망을 하면서 복음의 일을 하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고 그 심판자가 문 앞에 서 계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3:18절을 보겠습니다. (신 146쪽)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문 밖에 서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문 밖이 저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육체가 살아 있다 보니까 이 영의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세상에 오셨다가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에게도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믿지 않는 자가 누구입니까?

물론 이 세상 사람들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지 않는 자는 율법의 행위로 부자가 되고 있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나왔다고 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조상 대대로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에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주님이 오시고 난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문 밖입니다.

인생의 생명이라는 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안개와 같은 인생들은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고 있다면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 있다 해도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임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벌써 심판을 받은 것 같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다수 역시 벌써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원망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신 은사 그 이상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기가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서 한 그 행위를 생각하면서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원망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해야 하는데 그 이상을 하다 보니까 당연히 원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심판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정말 냉정하게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심판이라는 단어가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인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인가를 성경만 주의 깊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정통이라는 교회 안에 있다고 자기는 심판을 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말씀은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정통입니다.

아니 그들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의 선민으로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도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을 자기들 이성으로 보다가 결국에는 다 사망에 이르고 있지만 역시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5:10절을 보겠습니다. (신 375쪽)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모든 선지자들이 고난과 오래 참음을 본을 보여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거의 모든 선지자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고난이라고 하니까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는 것을 그리고 힘들게 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의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이 누구로부터 고난을 당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고난을 당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물론 그 고난이 바로 순교로 이어졌습니다. 누가 그렇게 고난을 주었는가 하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정통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오순절이 와서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제자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주의 이름을 전했습니다. 그 이름을 전할 때 이스라엘은 귀를 막고 심지어는 돌로 쳐 죽였습니다. 고난을 누가 주었는가 하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 백성이 선지자들에게 고난을 주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고난을 주고 있습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5장 시작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물이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이 부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길이 참고 믿음으로 마음을 굳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직 믿음으로 마음을 굳게 하면 반드시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부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려고 폐한 성도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누가 옳은가 하면 부자가 옳습니다. 율법을 폐기한 성도는 이 부자들로부터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선지자들이 누구로부터 고난을 당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있는 부자로부터 고난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분명히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 뜻을 아는 성도는 반드시 율법을 폐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폐기를 해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부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 길이 참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사도들이 왜 고난을 당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로부터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했기 때문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고난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18:13절을 보겠습니다. (신 219쪽)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사도 바울이 고소를 당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사도 바울을 고소했습니까? 그 이유가 바로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폐기를 하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니까 그것으로 이스라엘이 분이 나서 사도 바울을 고소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율법을 가지고 선지자들에게 고난을 주었습니다. 율법으로 부자가 되어 있는 그들이 바로 악한 자들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똑같다고 보면 맞습니다. 이 시대 거의 모든 교회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어느 한 교회라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없습니다. 만약 그런 교회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교회로 성장을 한다면 아마도 엄청나게 공격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율법을 안 지키는 교회가 있습니까?

자기들은 율법을 폐기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 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폐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율법을 폐기 했다고 말로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정통이나 이단이나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교회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고난을 안 줍니다.

서로 이단이라고 공격은 해도 말로만 하고 있지 실제 고난을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구원파라든지 그리고 가정교회를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야고보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율법에 대해서 먼저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다 율법주의입니다.

어느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한 가지라도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다면 율법주의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십일조를 하지 말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이 사단에게 미혹이 되었다고 하면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한다고 하면서 고난을 줄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한다고 하면서 고난을 줍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모든 율법을 다 지켜서가 아니라 단 하나의 율법만 지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교회가 십일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 합니다. 설령 그것에 자유롭다 해도 주일이라는 날에 자유롭지 못하고 또 그것에 자유롭다 해도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에 자유하지 못하고 있고 설령 그것까지도 자유 한다 해도 성만찬에 대해서 자유하지 못 합니다.


다 율법입니다.

자기들이 그러한 율법을 지키고 있는데 그것을 반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정통성 자체가 부인이 되고 자기들의 행위가 판단을 받는 것이 되기 때문에 고난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이 율법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았다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말로만 오직 예수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라고 할 때는 반드시 율법을 버려야 합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생명을 얻는 두 남편입니다. 그리고 두 가지의 의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를 버리지 않고 오직 예수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며 오직 예수라는 의미를 모르고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보고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것은 예수 이외에는 다 버릴 수 있어야 오직 예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너무 율법주의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말로는 오직 예수라고 하면서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폐기하라고 하면 고난을 주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고 종교의 자유가 있어서 고난을 주지 않지 만약에 이슬람 같이 종교의 자유가 없는 곳이라면 불을 보듯 빤합니다.


로마서8:18절을 보겠습니다. (신 250쪽)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장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고난을 받겠습니까? 영을 좇는 자는 육신을 좇는 자에 의해서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육신을 좇는 자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너무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다 라고 보면 맞습니다.


영을 좇습니다.

이 자체가 고난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을 좇는 성도는 정말 때로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누구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도 힘이 듭니다. 율법을 버리고 은사를 가능한 절제를 하고 또 성화가 되고자 육체의 모양을 내지 않고 있으면 그 자체가 스스로에게 고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아카데미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종교적인 행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말씀만으로 예배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찬양도 부르고 싶고 때로는 예배의 형식도 갖추고 싶고 때로는 교회의 형태도 갖추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아니 전혀 그런 것을 하지 않고 있는 아카데미는 정과 욕심이 살아 있는 우리 육체에게는 어쩌면 고난이기도 합니다.


제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형식을 갖추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말씀으로만 예배를 하고 있다는 자체가 고난입니다. 이 아카데미에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왔다 갔습니다. 하지만 이 고난을 참지 못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다시 율법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본인은 모를 수 있습니다.

자기는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보이는 거의 모든 교회는 율법주의입니다 과연 그 중에 몇 교회나 율법주의에서 온전하게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직까지는 제가 그런 교회를 못 봤습니다.


현재의 고난입니다

사실 영을 좇아 행한다는 것이 고난입니다. 육신대로 살지 않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누가 그리스도편지를 인정하겠습니까? 저는 그런 것 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고난을 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을 좇아 살아가고 있다는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사람은 늘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지 않고 사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이 고난을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이 고난을 참고 견뎠습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말씀을 하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의 이름으로 병자도 고치고 주의 이름으로 능력도 행하고 주의 앞에서 먹지 않았냐고 묻고 있습니다.


성도는 육을 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모두가 육을 좇아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국가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모든 종교가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 그래도 어느 정도 되면 서로 의지가 될 수 있는데 잠언에서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 혼자입니다.

모두가 왼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 혼자 오른 쪽으로 간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모두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하는데 나 혼자 그 율법을 폐기하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내 말을 들어 주겠으며 누가 나와 교제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과 같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육체적으로 고소를 당해 고난을 안 당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지자입니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할 때 선지자 혼자서 다른 말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했는데 예레미야 혼자서 항복을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애국자이고 누가 반역자입니까? 이것이 바로 영의 일을 좇는 성도가 당하는 고난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고난이 옵니다.

그것을 본으로 삼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지자들을 보아서 잘 알겠지만 어느 선지자가 백성들로부터 환대를 받았습니까? 물론 가끔가다가 그런 선지자도 있었을지 몰라도 이사야부터 해서 말라기까지의 선지자들을 보면 모두가 다 고난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사상과 다릅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다수의 율법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선지자들에게 고난을 주었고 이스라엘이 사도들에게 고난을 주었다는 것을 성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육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육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방의 교회가 육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핍박을 했습니까?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을 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있고 성령을 따라 난 자가 있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역시 교회 안에서 그렇게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을 핍박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야고보서에서는 고난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을 참아야 합니다.

아니 선지자들의 본을 삼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고난을 받은 것 같이 이제도 너희가 고난을 받을 것인데 그것을 그대로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육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부자에 의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가르쳐 주면서 선지자들도 그렇게 고난을 당했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6:14-15절을 보겠습니다. (신 358쪽)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오래 참으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 오래 참아야 하는가 하면 약속을 이루시기 까지 오래 참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고 또 거기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주 오래 동안 주시지를 않았습니다.


내가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실제 아브라함이 얼마나 오래 참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육적으로도 오래 참았습니다. 그러나 이 오래 참았다는 말씀은 물론 그런 육적인 뜻도 있지만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이 무엇입니까?


천국입니다.

아브라함은 오래 참아서 천국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본을 삼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믿음을 의심치 않고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면서 아주 오래 참았습니다. 그 결국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천국이라는 말씀입니다.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본을 삼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도 역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동일한 믿음으로 오래 참아서 천국의 약속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시대는 이 믿음의 비밀을 너무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오래 참아서 약속을 받아야 하는데 행위에 쉽게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오해 참았습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가 무엇으로 오래 참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자기 육체의 고난에 대해서 오래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에 있어서 그것을 이루시기까지 오래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지를 못 합니다.

거의 다 육체로 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느냐는 그 말씀이 너무도 와 닫습니다. 복음을 들었으면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사람들이 오래 참지를 못하고 다시 육체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이 강의를 들은 사람 중에서 참지를 못하고 육체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참지를 못 합니까?

그들은 약속을 모르기 때문에 참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이 세상에서 오래 참아 그 약속을 받을 수 있지만 그들에게는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다시 육체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이 미혹을 하면 너무도 쉽게 미혹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다 마음을 굳게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니까 그 마음이 자꾸 흔들리는 것입니다, 모두가 왼쪽으로 가는 것을 보니까 나 혼자 오른쪽으로 가는 것 같아서 불안해서 참지를 못하고 다수를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오래 참지를 못하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육체는 끊임이 없이 정과 혈을 통해서 미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으로는 너무 바른 일 같이 보이기 때문에 참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듣다가도 다시 육체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내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을 사람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아주 타당성이 있는 육체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 믿음을 강조를 해도 자기 육체의 정과 욕심에 이끌리어서 육체를 따라 난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선지자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릅니다. 그리고 그저 맹목적인 종교인만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모든 사실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육체를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를 너무 모르고 있고 자기 영혼의 결말이 어떠하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서 육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5:11절을 보겠습니다. (신 375쪽)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보십시오. 참고 견딘 사람은 복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욥이 어떻게 참고 견디었는지를 들었고, 또 주님께서 나중에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가여워하시는 마음이 넘치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크십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고 했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성경에서 인내를 하는 자를 복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인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전적인 뜻입니다. 물론 그것이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성경에서 인내를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14:12절을 보겠습니다. (신 413쪽)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성도들의 인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냥 이 세상에서 아무 것이나 참고 견디는 것이 인내가 아니라 성도의 인내가 이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성경을 볼 때는 그 의미를 알고 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버림을 받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뜻이 다 성경에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보고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의 계명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그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명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율법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율법이 계명이라고 하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계명입니까?

이미 완성이 된 계명이고 또 폐해진 계명입니다. 이제 성도는 그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명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래서 영생을 얻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인내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그 인내가 복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계명이라는 것은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생명을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은 계명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주신 것이지 진노를 받게 하는 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그것을 모르다 보니까 인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쉽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쉽습니까? 율법을 안 지키는 것이 쉽습니까? 사람의 이성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쉽습니다. 사실 율법을 안 지키고 예수만 믿는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고 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욥기2:8절을 보겠습니다. (구 762쪽)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허락을 하셔서 사단이 욥의 아들과 딸들을 죽게 하고 또 그의 모든 재산을 잃게 하고 나중에는 그의 몸까지 쳐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자기 몸을 긁는 그런 고통 중에서도 욥은 인내를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것도 욥의 인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육체적인 고난을 당하는 욥을 보면서 인내해서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의 인내를 바로 깨달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욥은 자기 생명까지도 저주를 했습니다.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몸을 긁을 정도면 그의 육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 합니다.

야고보서의 이 말씀을 보면서 욥이 인내를 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 처지가 어렵고 힘이 들더라도 욥과 같이 인내를 하면 그가 나중에 받은 복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하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욥이 자기 육체의 고난에 대해서


인내를 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인내를 하면 욥과 같은 결말을 볼 수 있습니까?

아무리 힘이 들고 정말 생명까지도 경각에 달릴 정도로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욥과 같이 인내를 하면 그가 나중에 받은 그 결말과 같이 우리도 역시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욥의 결말이 무엇입니까? 육체적으로 다시 회복을 해서 아들딸들을 다시 낳고 또 거부가 된 것이 욥의 결말입니까? 성경이 그런 육적인 것을 결말이라고 보여주고 있습니까?


욥의 결말은 무엇입니까?

물론 육적인 결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결말은 그가 회개를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자기 자녀들이 죄를 지면 그것을 제사로 드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욥은 회개가 무엇인가를 몰랐고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는가를 몰랐습니다.


욥의 인내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가 인내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가 인내하게 하셨습니까? 욥은 사실 악한 자였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려서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고난을 주시고 또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욥은 그저 이 세상에서 가장 율법을 잘 지키고 살다가 죽은 사람으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욥기를 왜 기록하셨습니까?

욥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율법적으로 볼 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의롭고 순전하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고백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지만 그는 처녀에게 눈도 돌리지 않았고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지 않았고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욥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욥과 같이 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가 욥기에서 고백하는 것을 보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로 순전하고 정직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실

정도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분명히 의인입니다.

아니 그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의롭게 살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보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모는 것을 다 치시고 생명만 남겨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몰랐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사는 것이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 자기가 그렇게 의롭게 살아간 이유가 하나님이 너무 두려워서 그렇게 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욥은 인내를 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받을 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욥이 그 벌을 안 받았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의롭게 산 사람으로 기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다가 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고난을 주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의 최고의 의인으로 살다가 지옥으로 갈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을 사랑하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치시고 그가 회개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욥의 인내입니다.

그것을 누가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욥을 고난을 빠뜨리셨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욥 스스로가 그런 고난을 자초했습니다. 그런 고난 중에 있으면서도 끝까지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이 계시면 물어 보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는 잘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잘한 그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욥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욥기도 아카데미 강의를 통해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 욥이 인내를 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욥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더 맞는 말씀입니다. 어찌 되었든 욥은 분명히 고난을 당했고 인내를 했다고 야고보서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욥은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의 의를 쌓는 일을 했습니다.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정말 순전할 정도로 믿었지만 믿음을 모르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몰라서 그랬지 실상은 하나님을 그보다 더 잘 믿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믿음으로는 욥보다 더 잘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 가를 몰랐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로움을 이야기 하다가 결국에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그가 회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욥의 결말입니다.

만약에 그가 나중에 받은 복을 이야기 하면서 그 결말이 이야기 한다면 그는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욥기 42장10절에서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그전 소유보다 갑절을 주셨다는 그것을 육적으로 보고 있다면 그는 육의 사람입니다.


물론 육적인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 소유가 무엇입니까? 이제까지 욥이 산 모든 의롭고 선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갑절은 무엇입니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욥의 결말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저 육적으로 그전 소유보다 갑절을 더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욥은 회개를 했습니다.

이전에 받은 소유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가 받은 것은 이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받았습니다. 이전에 것은 다 잃었습니다. 그것은 진노를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우리에게 인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고 있고 또 욥의 결말을 보게 하셨습니다.


욥이 회개 했습니다.

만약에 그 회개가 없었다면 아마도 욥은 성경에 기록되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욥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욥의 인내라는 말씀입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자기가 의롭게 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고난을 통해서 인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말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다시 이전과 같이 회복이 된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를 한 그 결말을 보여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철저한 율법주의자가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성도로 그 결말을 보여 주셨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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