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야고보서 강해

야고보서 강해 31강

윤주만목사 2017. 4. 4. 16:30

야고보서5: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76쪽)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욥의 결말입니다.

그것은 그가 율법주의자에서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성도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하기를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욥과 같은 율법주의자는 없었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욥보다 더 악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의를 드러냈던 사람입니다, 아니 욥보다 더 부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 부자인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또 긍휼히 여겨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욥에 대한 말씀이 조금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욥은 의인이 아닙니다.

가장 악한 자입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면서 자기가 한 행위를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에 달려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욥과 같은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또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 역시도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기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욥의 결말이라고 하니까 마치 그가 이 세상에서 처음 보다 갑절이나 축복을 받은 그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욥은 구원을 받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누구를 만나로 오셨습니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욥은 죄인이 아닙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 보아서 알겠지만 욥은 하나님이 만나시지도 부르시지도 않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순전함을 이야기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욥을 회개 하게 하셨습니다.

 

욥은 의인입니다.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부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서 욥과 같은 사람도 인내를 해서 회개할 수 있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욥은 자기의 의를 주장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부르시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런 악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서 그 결말에 회개를 할 수 있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들으라 부한 자들아 그 부한 자들에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였던 욥도 인내를 해서 회개를 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데 하나님께서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서 욥과 같은 부자도 회개를 했다는 말씀입니다.

 

부자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욥은 예표입니다 이 시대 부자들에게 욥과 같이 하시겠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런 예표를 통해서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되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욥과 같이 부자가 되려고 하다가는 이제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참으로 심오합니다.

사람들은 욥의 결말을 육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욥과 같은 의인은 부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자비하시고 또 긍휼이 많으신 분이라서 이 세상 이성으로 가장 의로운 사람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가장 악한 욥을 회개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대 역시 욥과 같은 사람을 회개 하게 해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결말을 보았습니다.

성경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면 어쩔 수 없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예표들을 통해서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는데도 악을 행하고 있다면 이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고 욥의 결말을 아는 성도는 절대로 부자가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이나 땅이나 그 밖에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다만, "예" 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예"라고만 하고, "아니오" 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아니오"라고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서6:13절을 보겠습니다. (신 258쪽)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맹세

사전에서는 임무나 약속을 꼭 실행하거나 목표를 꼭 이루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것을 말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임무를 받거나 약속을 실행하는 것을 꼭 이루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세상의 이성적 상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약속을 하거나 자기 임무를 맡았을 때 이렇게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물론 그 임무를 충실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사람도 간혹 가다가 있습니다. 그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아주 작은 일에 대해서 그렇게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세상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면 이 맹세라는 사전적은 뜻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누가 맹세를 하고 또 누가 그것을 지키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저 사전적인 뜻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전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전적인 뜻을 알았다면 성경에서 맹세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또한 바로 알고 있다면 맹세에 대해서 바로 정립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맹세하기를 좋아하고 있고 자기가 그 맹세한 것을 이루었을 때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상상이상으로 만족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입니다.

굳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기가 다니는 종교에서도 그렇고 세상에서도 맹세를 이루고 나면 그것으로 자기를 과대평가를 하게 되어 있고 그것이 자기의 의가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맹세를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누구라도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능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랑합니까?

특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 자랑을 많이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육체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맹세를 이루고 나면 그것을 간증이라고 하면서 자랑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랑을 듣고 또 다른 사람들이 자기도 자랑하고 싶어서 맹세를 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맹세의 사전적인 뜻입니다.

그것을 사람이 하고 또 그것을 이루고 나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가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느 목사가 간증을 하는데 자기가 이렇게 살기로 했는데 그렇게 살아서 너무 기쁘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알고 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것까지도 우리는 자랑해서는 안 되는데 자기가 목사로서 그렇게 산 것을 자랑하는 것은 한 마디로 사단에게 미혹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가 없는 그저 성경을 문자적으로 알고 이 세상의 학문으로 공부를 해서 직업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자랑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고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맹세를 하셨습니다.

그때에 자기 보다 더 큰이가 없음으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를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맹세의 기초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맹세를 할 때는 가장 큰 자가 작은 자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 명세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런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맹세를 하면 그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맹세에 따라 어느 사람은 그것을 실제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작은 자도 큰 자에게 맹세를 하고 그것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의 맹세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아야 합니다.

맹세라는 것을 누가 이루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시고 자기를 가리켜 맹세를 하셨는가 하면 그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한분 만이 맹세를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약속에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어떤 약속을 하더라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능력이 없으면 그 약속은 거짓이 되고 맙니다. 오늘 당장에는 능력이 나에게 있었던 것 같아도 우리가 욥기를 보아서 잘 알고 있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살기로 맹세를 했을지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생의 능력입니다

비단 욥뿐 아닙니다. 인생은 하루아침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잠을 자다가 비명횡사할 수 있습니다. 누가 그것에 대해서 다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오늘 건강해서 내일까지 그 삶을 보장 받는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까 이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될지라도 실제 우리 주변에서는 밤새 안녕이라는 말 그대로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가 맹세를 하면 뭐 합니까?

명세는 영원한 생명이 있고 또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만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같이 연약한 존재는 사실 맹세를 해서도 안 되고 그 맹세를 이룬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느 사람들이 이루는 그것을 보고 착각에 빠지고 있습니다.

 

맹세를 하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생명은 수에 셀 가치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맹세를 해서도 안 되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또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가리켜 맹세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큰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맹세를 이루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다는 것을 히브리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고도 아니 맹세를 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고도 사람들은 현재 자기를 보면서 맹세를 하고 있고 사단은 교회 안에서 실제 그 맹세를 이루는 사람들을 만들어 놓고 그들을 통해서 사망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6: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58쪽)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약속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이 시대 성도들이 약속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천국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기업으로 받은 자들에게 그 뜻을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을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약속만 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그 일에 맹세로 보증을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맹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맹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에게 그 뜻을 변치 아니하심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시고 또 그 일에 보증을 받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맹세는 하나님께서 하시고 또 그 일에 보증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증으로 성경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약속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보증하기 위해서 아니 그 약속을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오셔야지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성도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냥 약속을 하시고 기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천국은 우리가 볼 수도 없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모든 것이 다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말로 가히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막연합니다.

사실 천국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을 사람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천국에 대해서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그 자체가 천국을 모르고 있다고 자기 무식함을 스스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 뜻이 변치 아니하심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경에서 우리가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천국의 비밀을 알고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하시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이 천국에 대해서 믿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일에 맹세로 보증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이루시려고 우리에게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 주셨다고 고린도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맹세를 분명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임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맹세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맹세하기를 좋아할 것이고 자기를 아는 사람은 맹세를 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모든 본질은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부터의 출발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영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성령에 대해서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성령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이런 말씀들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성경을 다 사람의 이성으로 보고 있고 그것이 자기 영혼을 망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약속을 받은 성도들에게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 마음에 보증을 해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열심이 넘쳐서 맹세를 하려고 하고 있고 그 맹세가 어떠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5:1-2절을 보겠습니다. (구 1057쪽)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예루살렘의 패망입니다.

북 유다가 망할 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한 사람도 공의를 구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가 없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우리나라가 안 망하고 있습니까? 겉으로 보는 나라는 안 망하고 있을지 몰라도 예레미야 시대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한 사람이라도 공의를 구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있는가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없습니다.

정말 이 시대는 종말을 맞아도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면서 이 시대 가난한 성도들을 구원해 주시고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과연 이 시대는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공의를 구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누구 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선민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자부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만 그랬습니까? 노아의 홍수 때도 다 악한 자들만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때는 어땠습니까?

의인 열 명만 있었어도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갈 때는 어땠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광야라는 교회에서 죽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이 공의를 구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가 거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 믿고 있다고 하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역시도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타락을 해서 종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거짓 맹세를 합니다.

자기들이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짓 맹세를 합니다. 더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에 망해서 포로가 된다고 했지만 이스라엘의 모든 선지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 거대한 바벨론도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누가 믿음이 있습니까?

예레미야가 믿음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모든 선지자가 믿음이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야기를 해 보나마나 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똑같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어서 주변에 공산주의 국가가 있어도 우리를 지켜 주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에게 보이는 외적인 모습을 보면서 잘 믿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거짓 맹세입니다.

무엇이 거짓 맹세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도와주시고 또 자기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거짓 맹세를 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데도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거짓 맹세를 하면서 백성들을 안심시켰고 그들은 결국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면서 그들이 율법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보고 행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거짓입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역시 천국을 이야기 하고 있고 자기들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맹세를 하고 있지만 실상은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는 맹세가 얼마나 거짓되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행위들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맹세에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거짓됩니다. 설령 그가 혹시라도 자기 입으로 한 맹세를 이루었다 해도 그 맹세 자체가 거짓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의 일을 말씀해 주시고 있지 육체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도 거짓 선지자들은 교회 안에서 맹세를 하고 있고 또 교인들에게도 맹세를 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을 믿는 일은 주님께서 다 이루신 일을 믿는 그것입니다. 내가 맹세를 하고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자체가 이미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거짓을 누가 이루게 하는가 하면 사단이 그런 자들을 세워놓고서 맹세를 이루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5:33절을 보겠습니다. (신 7쪽)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이스라엘은 맹세하기를 좋아 했습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서원이라고도 합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그 맹세를 했으면 반드시 지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맹세를 하거나 서원을 하면 그것을 반드시 지키려고 했습니다. 사실 구약의 율법의 맹세나 서원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인데도 사람들이 율법을 문자적으로 보다보니까 맹세를 하기 좋아 했습니다.

 

왜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까?

구약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나면 폐하여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보아서 알겠지만 맹세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만이 맹세를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세상의 이성으로 생각하면서 아무나 맹세를 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상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사상입니다. 또 율법에서 맹세를 하면 반드시 지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제 오셔서 다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라도 맹세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가장 쉽게 맹세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나와서 어느 정도 자기 신앙이 자랐다고 하면 가장 먼저 하는 맹세가 바로 십일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이제 십일조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되면 그 십일조에 대해서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자기가 사는 동안 십일조를 하겠다고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토록 십일조를 합니까?

그리고 십일조를 반대를 하면 아주 심하게 반발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다 자기가 맹세를 했고 또 그것을 이루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이성으로는 십일조를 한다는 것이 얼마다 대단한 일입니까? 누군가 하나님을 안 믿더라도 자기 소득의 십일조를 따로 떼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 하면 아마도 스스로를 대단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입니다.

왜 사람들이 맹세하기를 좋아하는가 하면 바로 그것을 이루었을 때 느끼는 자존감이라는 것이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것을 사단이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자기의 의가 살아나기 때문에 그것으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맹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맹세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약속을 실행하거나 목표를 이루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이 이 세상에서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세상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맹세를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영혼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맹세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맹세를 한다 해도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저 육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들이 맹세를 하고 또 그것을 이루는 것을 보면서 너무도 쉽게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맹세할 수 있습니까?

영의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맹세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맹세의 기본을 모르다 보니까 쉽게 자기가 서원을 하고 있고 맹세를 하면서 그것을 지키는 자신을 보면서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길입니다.

이 시대 주님이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그 말씀을 얼마나 어기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어느 것을 정해서 하고 있다면 그것은 다 맹세에 속한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입 밖으로는 맹세를 하지 않았을지라도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는 맹세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주일을 지킵니다.

그것을 왜 지키고 있습니까? 자기 마음에서 맹세를 했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맹세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시대 교인들과 같이 주일을 철저하게 지키지는 않았을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안식일을 그토록 철저하게 지켰습니까?

그것은 자기들의 조상이 하나님과 언약을 했고 그 언약이 지금 하나님을 믿는 자기들에게도 유효하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왜 지키는가를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서 이미 맹세를 했기 때문에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에서 맹세를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철저하게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되고 또 주일이라는 날을 그렇게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같이 이 시대 역시 맹세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지키고 있고 그런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뜻을 모르고 아직까지도 맹세를 하고 그것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맹세는 행위가 직접적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도무지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마음으로 맹세를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율법주의에 깊이 빠져 있겠습니까? 굳게 맹세를 했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부인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입니다.

 

마태복음5:37절을 보겠습니다. (신 7쪽)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우리는 맹세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것을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영의 일에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의 일을 모르는 육체로 사는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수도 없이 많은 것을 맹세를 하고 있고 그것이 그들의 행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어떻습니까?

영의 일을 알기 때문에 맹세를 하지 않습니다. 영의 일을 내가 맹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았을 때 옳다 옳다 하고 또 아니라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맹세를 하는 순간 그것이 다 악으로 좇아 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악이라는 말씀입니다

명세를 하고 그것을 행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다 악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성경을 보고 거기서 말씀을 깨달았으면 그것이 옳으면 옳다 할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그 이상은 성도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에서 지나는 것은 다 악으로 좇아 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악입니까?

십일조를 하는 것이 악입니다. 또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악입니다, 제가 연보를 하지 말고 또 한 날을 정해서 예배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의 십일조나 주일을 지키는 일 그리고 행위로 하고 있는 그 모든 일이 이에서 지나는 것이고 다 악으로 좇아 나는 것임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옳다 옳다 하거나 아니다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서 지나는 것은 다 악에서 좇아 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이에서 지나는 것을 너무도 많이 하고 있고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악입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사람의 모든 행위는 다 악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나면 옳으면 옳다 하고 또 아니면 아니라고 하는 그것이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서 지나는 모든 것은 다 악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에서 지나는 것을 하면서도 그것을 믿음이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한글도 모르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다보니까 종교가 되어 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교회 안에서 악을 행하고 있는가를 모르고 그 악을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일입니다,

그것에서 지나는 모든 일은 다 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이 악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바로 깨달아야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는데 악을 행하면서 그것이 선이라고 생각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니까 그 악을 행하는 일이 더욱 더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왜 오직 믿음인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행하고 있는 모든 행위는 이에서 지나는 것이기 때문에 악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악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모든 일이 악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에서 지나는 일에 너무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영의 일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뭐가 있습니까?

그것을 마음으로 믿는 그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이에서 지나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 하면서 비웃으려고 합니다.

 

안 해도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나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예수를 믿어 천국에 갈 수 있게 전도의 미련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셨을지라도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맹세를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위해서 십일조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주일이라는 날을 만들었습니까? 그것이 아무리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이에서 지나는 것이기 때문에 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서 지나지 않고도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데 이 시대는 악해서 악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죄 정함입니다,

이에서 지나는 모든 것은 행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악한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정죄함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수많은 행위들을 삼가 지키고 있습니다. 삼가 지키고 있다는 것은 맹세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 행위가 정죄하고 있습니다.

자기들과 같은 행위를 하지 않으면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에서 지나는 것은 다 악으로 좇아 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이 아니고 이에서 지나는 어떤 행위를 하게 되면 그것이 다 악으로 좇아 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악을 행하기를 너무 좋아해서 교회 안에서 수도 없이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씀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왜 지키는가 하면 바로 맹세를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모든 일이 사실은 그 교인들의 마음에서 이미 맹세를 했기 때문에 지켜지고 있고 그것이 사실은 다 악으로 좇아 난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계속해서 사람들은 명세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창하게 하는 맹세만 맹세가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이에서 지나는 것을 행하겠다고 하는 모든 맹세가 다 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모든 행위가 다 그렇습니다. 다 믿음에서 지나서 나는 것이고 그것이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지혜가 없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죄함을 면하려면 믿음에서 지나는 것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서5:13절을 보겠습니다. (신 376쪽)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새변역을 보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너희 중에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 중에 고난을 안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고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느 때는 정말 살기 싫을 정도로 고난 가운데 살아가고 있고 어느 때는 너무 기뻐서 주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이라고 하니까 육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당한 고난에 대해서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서 지금은 즐거워하고 있다고 하면서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간증이라는 것이 정말 사람들이 피는 담배와 같이 백해무익한 것인데 간증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치 니코틴에 중독이 된 것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간증은 니코틴과 같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그 한 가치를 물고 깊이 빨라들으면서 당장 느끼는 그 기분을 떨쳐 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담배를 피울 때는 그 기분에 너무 좋아서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담배가 얼마나 백해 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간증이라는 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간증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그러나 그 간증을 하고 싶어서 사람들이 얼마나 영악합니까? 간증을 하고 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용납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든 안 돌렸든 그것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악한 것이라고 야고보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악한 일입니다.

고난을 당했는데 내가 기도를 해서 그 고난을 이겨냈다고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 주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악을 행하면서도 이 시대는 너무도 간증을 하고 싶어 합니다, 구역 예배 같은 경우에는 이런 간증을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난에서 이겼습니까?

누가 기도를 해서 고난에서 벗어났습니까? 야고보서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 하면 응답을 해 주셔서 그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난당하는 자가 있으면 기도를 하면 됩니다. 그것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그 이상입니다. 초대 교회에 고난당하는 자들이 과연 그 고난에서 벗어났습니까? 오히려 그들은 기도를 하면서 고난을 기꺼이 자기 몸으로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기도를 하면 마치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43쪽)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성도는 고난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고난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그 고난을 기도를 해서 벗어나려고 밤새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한 풀이 하는 것을 기도의 형식을 빌리고 있을 뿐입니다.

 

고난을 벗어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악한 일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고난을 받으면 그것에서 벗어나려고만 합니다, 그들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겠지만 그저 종교인으로서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고난을 받으니까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느 누구가 고난을 기도해서 벗어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기본이 되는 이런 성경도 모르다 보니까 사람들이 자기 육체의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이기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성도는 그것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없는 자는 어떻습니까?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그것에서 벗어나거나 이기려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기도를 하는가 하면 그 고난에서 벗어날 때까지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을 누가 들어 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들어 줌으로 해서 그 영혼이 그것을 자랑하게 만들고 악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고난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어느 사람이 자기가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까?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있지만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기 위해서 그들이 얼마나 큰 고난을 당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까? 심지어는 몇 번씩 떨어지면서 기어이 그것에 합격하기 위해서 지금 당하는 고난을 기꺼이 참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당하면 기꺼이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벗어나려고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중에서도 나를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와 가라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고난 한 가지만 보아도 성도는 기도를 하면서 그것을 받고 있지만 가라지는 그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맞는다면 야고보는 분명히 너희 중에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주시고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것이라고 기록을 했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 그 고난에서 벗어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연히 천국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은혜로 받았으면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는 고난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고난을 줄 수 있습니까?

심지어는 정치인들까지 교회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그들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고난을 받아야 하는 그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종교의 자유라는 명목아래서 자기들이 누리는 것을 마음껏 누리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고 있습니다.

 

너의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모두가 응답을 받는다는 그 잘못된 생각에서 이런 말씀을 보고도 자기들 마음대로 성경을 이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기도 하면 응답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생각입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응답은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보다 더 귀한 천국을 얻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당하면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데 그 고난을 기도해서 응답을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에게 육체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 들었으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고난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받아야 합니다.

성도와 가라지는 다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다 성도가 아닙니다. 정말 내 안에 복음이 있는 성도는 설령 자기가 죽을병이 들었어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천국을 사모하고 있고 그곳만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 성도라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왜 고난을 안 받습니까?

그것은 자기 육체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고 천국을 사모하는 성도라면 자기에게 어떠한 고난이 오더라도 그것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기도를 하는가 하면 자기 육체의 연약함으로 자기가 영의 일을 생각하지 못할까 하는 그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시편34:19절을 보겠습니다. (구 826쪽)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고난을 안 주시겠습니까? 아니 세상에서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까지는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목표로 하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많은 고난 중에서도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

 

고난이 많습니다.

아니 평생 고난의 연속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고난이 없다면 그는 의인이 아니라고 해도 맞습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의인이 고난이 많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많은가 하면 자기 생명을 잃기 까지 고난이 많습니다. 실제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는 그런 고난이 왔고 그들은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져 주십니다.

구약의 말씀을 보고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건져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그 영혼을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육적으로 당하는 고난에서 건져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육은 우리의 영의 일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응답이 아닙니다,

고난도 이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예수를 믿고 싶어서 교회에 나가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많은 고난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 고난을 이기고 자기가 이제는 마음 편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 합니다. 자기가 기도를 했는데 주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어 주셔서 이제는 주일도 지키고 십일조도 낸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영적인 고난이 아닙니다.

육적인 고난입니다. 성경은 그런 육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 겨우 그런 종교 활동을 하는 것으로 당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복음과 함께입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예수를 전하려면 반드시 율법을 폐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율법을 폐하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 안에 있는 다수의 율법주의자들로부터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을 당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주 쉽게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천만 명의 율법주의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 혼자 율법을 폐하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교회 안에서 받을 고난은 상상을 초월하게 됩니다. 먼저 이단이라고 공격을 받게 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직까지도 이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의 괴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단이 됩니다.

다수의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율법을 폐하였다고 하면서 이단이라고 공격을 받게 됩니다. 아마 십일조가 폐하여 졌고 그것이 악이라는 그리스도의 편지의 말씀이 전해진다면 이단이나 정통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이단이라고 공격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습니다,

자기 행위로 의인이 된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 의로 의인이 된 사람은 거저 의를 얻었기 때문에 의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종교인으로 고난을 받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도와 종교인은 다릅니다.

성도는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인은 자기가 기도를 해서 어떻게 하든지 그 고난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성도는 자기에게 오는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해도 자기 영혼을 구원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고 종교인은 당장 그 고난에서 벗어나려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성도인가 아니면 종교인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그런 고난을 안 받으려고 한다는 자체가 잘못입니다. 나에게 어떠한 고난이 오더라도 성도는 그것을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장차 우리에게 올 영광이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활과 또 천국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담대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육적인 고난이 아닙니다.

주일을 누가 못 지키게 합니까? 십일조를 못 내게 하고 있습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싶은데 그것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이런 것은 이 세상 사람들도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에 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도 같은 고난을 당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해서 그 고난에서 벗어났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잘 믿어서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고난입니다.

그것은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입니다. 의인은 이런 고난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은 거의 모두가 율법주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 율법을 폐하라는 복음이 가장 듣기 싫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으면 화가 나고 분이 나서 참지를 못하고 성도들을 고난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하박국3:18절을 보겠습니다. (구 1305쪽)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즐거워합니까? 그저 이 세상에서 자기가 기도한 것이 응답을 받아서 기뻐하고 있습니까? 그런 자들은 나중에 주님께서 오실 때 그 눈에서 피눈물을 흘릴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성도가 즐거워하는 단 한가지의 이유는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나를 어떻게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알면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저는 찬송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찬송이라고 하니까 그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내 영혼의 구원을 성령의 감동으로 확신을 받은 성도는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즐거워하고 있고 그것을 입술로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찬송가가 아닙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부르고 있는 찬송가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모든 구속의 일을 자랑하는 것이 찬송입니다. 내 마음이 기뻐서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찬송이라는 말씀입니다.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이 찬송도 너무 삐뚤게 가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그런 감성적인 찬송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찬송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구원을 해 주셨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늘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찬송입니다.

그저 교회 안에서 곡조에 맞추어서 노래를 하는 것이 찬송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 종교적인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찬송가를 부르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말하라는 말씀입니다,

 

찬송을 너무 모릅니다.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아는 성도는 저절로 찬송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언제부터 찬송가를 만들기 시작을 했지만 그 노래 가사를 보면 전혀 복음적이지 않은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것은 찬송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늘 고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러나 그 고난이 자기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알고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기에 찬송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고난 중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견디려면 기도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고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또 그런 성도를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육체적으로는 고난을 받지만 영혼은 구원을 받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당하면서 기도를 하고 또 구원에 확신을 갖고 고난 중에서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고 그런 찬송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로 아시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 기도를 하고 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즐거워하면서 찬송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5: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76쪽)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참으로 이 야고보서의 말씀으로 인하여 교회가 이상하게 변질이 되고 있습니다. 병이 들었다고 하니까 육체의 병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를 보면 거의 병원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만병을 다 고칠 수 있는 병원을 만들고 그것을 광고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늘이 올라가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 또 그런 역사들이 일어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런 성경 말씀을 그저 문자적으로만 보고 있다 보니까 그것이 의미하고 있는 뜻을 모르고 있고 또 병자를 고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병자를 고치는 곳입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절대로 그런 행위를 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런 역사를 전혀 부인하고자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성도가 병이 들면 그것을 고치는 것이 맞습니까? 아니면 그 병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습니까? 이런 문제가 해결이 안 되다보니까 병을 고치는 것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 교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신약시대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만 해도 신약 성경이 기록이 안 되었습니다. 단지 그 시대는 구약 성경만 있었습니다. 그 구약 성경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신약과 구약을 같이 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전하는데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입니까?

그 시대 예수는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갈릴리 아주 작은 마을에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하지만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것을 물론 500여 문도들이 보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사람은 이미 하늘에 올라갔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모든 성경이 한권의 책으로 누구나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시대에 병자를 고치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경이 있습니다.

제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자칭 성도라고 하는 그들이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기도를 받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모르고 그저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성도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까? 물론 히스기아 같은 특별한 경우도 있었지만 엘리사도 죽을 병에 걸려서 죽었다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병원이 아닙니다.

그런 행위를 하는 자체가 샤머니즘이라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병을 고치는 병원이 있는데 왜 교회가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모르고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이 완전히 기록이 되어 있고 인쇄술의 발달로 이제는 누구나 성경을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병자를 고치려고 하는 그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육체의 병입니까?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 교회 안에 육체의 병이 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겠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는 사도바울도 정작 자기 병은 고치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 역시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고 또 속 사도라고 부를 정도로 복음의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인데도 믿지 않은 사람들의 병은 고쳤어도 정작 자기들의 병은 고치지를 못 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5:30-32젏을 보겠습니다. (신 97쪽)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병든 자가 누구입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잘 아는 육체적인 병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암이 걸렸다든지 당뇨가 걸렸다든지 또 여러 가지 불치병이 걸린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교회 안에서 다수가 이런 말씀을 보고 마치 그런 육체의 병에 걸린 것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비방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고 말씀을 하면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병든 자가 누구인가 하면 아직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을 병든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병든 자입니까?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사람이 병든 자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병이 든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의 병이 든 사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들을 병이 들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병든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병 같으면 자기 몸이 아프므로 병이 들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이 병은 진리를 알기 전에는 자기가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병은 사실 사람의 이성으로 깨닫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역시도 병이 들어 있지만 자기들의 행위를 보고 자기들은 의인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병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병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병이 들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야고보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병이 아닙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육체의 병을 고치라고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그리고 제자들이 수많은 병자들을 고친 것을 제가 부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병자들을 고친 것은 다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병자를 고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육체의 병이 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고침을 받으라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몸에 병이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너무 샤머니즘에 빠져 마치 주술을 하는 것과 같이 기도를 하면서 병자를 고치려 하고 있습니다.

 

의원입니다.

그것은 비유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병이 든 자도 의원이 고치고 있습니다. 물론 건강을 미리 챙기기 위해서 검진을 받기 위해서 의원을 찾는 사람도 있지만 거의 모든 사람은 병이 들었을 때 의원을 찾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과 같이 의학이 발달을 한 시대가 아니라 2000년 전이라고 생각하면 답은 더 쉽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왜 오셨습니까?

병든 자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자기가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회개의 의미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안 믿던 사람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그것이 회개입니다.

 

병든 자입니다.

영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병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무슨 병이 들어 있는지를 모르고 마치 자기들이 예수를 잘 믿는 것과 같이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무엇이 다른가를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의인은 모릅니다.

그러나 죄인은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역시 십일조로 주일로 의인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병에 들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병을 알아야 장로를 청해서 기도를 받을 수 있는데 장로도 모르고 있고 병든 사람도 자기가 어떤 병에 들었는가를 모르는 참으로 안타까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장로입니다.

이 시대 목사입니다. 이 시대 장로가 아니라 성경의 장로는 이 시대 목사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장로는 사실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목사를 장로라고 부르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굳이 장로로 부를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뜻을 바로 알고 있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호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장로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성경의 호칭조차도 정립이 안 되어 있는 교회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시대는 장로가 없어서 누구를 불러야 할지 모릅니다. 목사는 있어도 종교인으로서 목사는 많아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장로는 거의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정 교회에서는 장로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옳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 역시 율법주의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호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모른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호칭부터 개혁하는 것이 교회가 바로 서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교회 안에 이상한 장로들이 있어서 그것을 바꾸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시편23:5절을 보겠습니다. (구 818쪽)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장로는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고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병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영적인 병이 들어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제까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 행함은 율법을 버리는 행함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성화 그리고 은사를 통해서 자기의 의가 드러나고 있고 그것이 병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병입니다.

육체에 병이 들어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어도 바리새인과 같이 영적인 병이 들어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으로 성화로 그리고 은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영적인 병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 자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바로 알면 자기가 병이 들었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병이 든 사람은 장로를 청해서 기도를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장로는 그들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병든 자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름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말씀합니다, 기름을 바르고 기도를 하라고 하는 말씀은 성령으로 기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시편에서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셨다는 말씀은 원수 율법의 목전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도의 가장 큰 상은 바로 그 영혼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다고 하는 말씀은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성도는 구원이 잔이 넘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병든 자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이 세상 사상에 빠져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가 되어 있고 성화주의가 되어 있고 은사주의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다 영혼을 죽게 만들고 있는 병입니다. 그런 병이 걸려 있는 사람은 자기가 병이 걸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다 율법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은사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감리교나 침례교 같은 경우에는 성화주의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이렇게 병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장로를 청해 기도를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병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장로가 없다는 것입니다.

 

장로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장로가 다 그 병에 걸려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이 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육체적으로 세리와 죄인들을 오히려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 병이 걸려 있는 줄을 모르는데 과연 그에게서 배우는 교인들이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 야고보서를 통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바로 알아야 병이 들었는지를 알 수 있는데 이 시대는 야고보서를 바로 해석해서 가르치는 장로가 없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다 병이 들어 있습니다. 육체의 병이 아니라 그 영혼이 죽는 병이 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해석이 안 되니까 그저 문자 그대로 육체의 병으로 생각하고 교회가 점점 더 깊이 샤머니즘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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