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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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윤주만목사 2015. 5. 14. 17:32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시편73:1-3절을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

 

시편73편을 보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가 한번쯤은 이런 마음을 가졌고 또 아삽과 같이 환경을 보면서 실족하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아삽의 시와 같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면 그리고 악인이 너무도 잘 되는 것을 보게 되면 아무리 믿음이 있는 성도라 해도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이 맞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기복주의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주변에서 보면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그들이 어떻게 하든 세상 적으로 성공을 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 탄식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 세상의 축복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구약의 그림자를 보면서 마치 그것이 실체인양 사람들에게 육적인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복은 너무 멀리 있고 지금 당하는 고통을 어떻게 하든 벗어나려고 그저 육신의 축복을 빌고 또 목사들은 그것을 빌어주느라 매일 기도를 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축복을 받는다고 하는 일부 목사들의 거침없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과연 저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복에 환장을 했습니다.

목사도 그렇고 교인들도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복을 받지 못하는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있을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복을 받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이 되고 있고 자기가 받은 복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성도는 두 가지 복을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이생의 복과 하늘의 복을 둘 다 주셨다 해도 그것을 누리기보다는 복음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이생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지라도 하늘의 복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인내하고 감당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육적인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성도라 할지라도 육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육신의 복을 쫓아가는 사람은 영의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육신의 축복을 받는다 해도 그것을 자랑하기보다는 하늘의 복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인지라 역시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을 떨쳐 버리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교회 안에 있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잘 되고 한 사람이 잘 안 되면 눈으로 보이는 그 판단에 따라 잘 되는 사람이 마치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이 되어 집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또한 그들이 잘 되는 것을 보면서 실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 형통함을 보고 실족을 한다면 결국 나만 손해입니다 성도는 눈으로 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바로 보고 그것을 깨달으며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늘에는 더 큰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악인이 가진 모든 것은 잠시 보이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안개를 보고 그것을 부러워하고 그림자를 보면서 그것을 부러워한다는 자체가 실체인 영혼을 아직 바라보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율법주의 기복주의 사상에 빠져 있는 목사들이 잘 되는 것을 보면 지금 제가 전하는 복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며 회의에 빠질 때도 있고 어떤 날에는 글을 하나도 쓰지 못하고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방황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한 글자도 쓰지 못합니다.

목사인 저도 그러할진대 일반 성도들은 더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실족을 할 뻔할때는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내 환경과 그들의 환경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그들은 너무도 잘 나가도 복음을 전하려 하는 저는 고난에서 벗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 때 더욱 내 마음에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시로 노래를 한 아삽도 그럴진데 우리 같은 이방인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오직 성경 말씀만을 의지하고 그것을 믿고 나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성경 말씀을 이용해서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해서 기복주의 사상을 전하고 있는 그들의 말을 듣다 보면 더욱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아삽이 왜 실족할 뻔했는가를 보겠습니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

 

악인이 형통했습니다.

그리고 오만한자가 잘 되는 것을 보면서 질투를 느꼈습니다. 악인은 하는 일마다 모든 일이 마치 하나님이 돕는 것 같이 잘 되었고 오만한자는 모든 것을 누리고 있어 나도 그들과 같이 누리고 싶어 질투를 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악인이 누구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인과 악인은 믿음을 의지하는 자는 의인이고 행위를 의지하는 자는 악인입니다 율법주의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악인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율법을 따라 행하려고 하는 자는 이스라엘과 같이 악인입니다

 

그런데 누가 잘 됩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보다는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잘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율법주의가 잘 되기 때문에 믿음을 가진 아삽은 거의 실족을 할 뻔했다는 말씀입니다.

 

육적으로 형통하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지금 이 시대에 그가 악인이다 의인이다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은 그림자와 모형입니다 그들의 육적인 형통은 지금 이 시대 영적인 형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형통한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복음의 일을 하는데 있어 모든 것이 잘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혀 어려움이나 고난이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이 신앙생활을 참 잘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럽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에서 형통함을 보면서 실족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면서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었던 사도들이 누가 있었습니까? 사도바울만 보더라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환란이 찾아와서 가는 길을 막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순탄하게 복음을 전했다기 보다는 극한 어려움 가운데서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는 일들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형통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의 눈에는 초라하게만 보였습니다.

 

시편73:4절을 보면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저희는 죽을 때도 아주 평안하게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팔십 평생 아프지도 않고 모든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서 임종을 맞이하면서 아주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정신 나간 목사는 사람이 죽을 때를 보면 그가 천국에 갔는지 지옥에 가는지를 알 수 있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식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바로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갑니까? 죽을 때 모습을 보면 지옥에 갔는지 천국에 갔는지 알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몰라도 그렇게 무식하게 모를 수 있는지 또 그가 과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지가 궁굼합니다.

 

악인은 죽을 때도 고통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그가 죽는 모습을 보고 그가 의인이냐 악인이냐를 우리는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악인은 모든 것이 육적으로 형통하기 때문에 죽을 때도 전혀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평안하게 마치 천국에 간 것같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부터 순교자를 약7000만에서 1억 명을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화형을 당하고 또 사자 밥이 되고 또 여러 가지 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미디어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에서 극적인 것을 살리기 위해 순교할 때 마치 평안하게 죽은 것으로 오해를 하지만 실제는 사람이 죽을 때 아무리 믿음이 있다 해도 그것은 고통입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아삽의 눈에는 악인들은 죽을 때도 고통을 당하지 않고 의인들은 오히려 고통 가운데 죽는 것을 보며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를 의심하고 실족할 뻔했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73:5-6절을 보면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악인은 고난도 없습니다.

그리고 타인과 같이 재앙도 당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재앙도 없어 고통도 없다면 내 믿음을 스스로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징계는 다 당해야 합니다.

내가 잘해서 징계를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저 사람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잘못을 했기 때문에 징계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도 징계를 당했습니다.

 

내가 잘 해서 징계를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참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징계를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 아들이라면 반드시 내 잘못에 따른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욥 보다 잘하고 있다면 자신이 징계를 당하지 않는 것을 정당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욥 보다 못하고 있는데도 신앙생활을 평탄하게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참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징계도 당하고 않고 재앙도 없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높아지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강포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그 백성들에게 얼마나 강포를 휘둘렀습니까? 그들은 거룩한 옷을 입고 길거리에 다니면서 옷에 구멍을 내서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동전을 흘려 떨어뜨려 주었습니다.

 

사람은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참 아들이라면 욥과 같이 징계도 당하고 재앙이 찾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악인이 가득한 교회에는 그런 재앙도 없고 고통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형통함만 있고 육적인 축복을 받은 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내가 잘 되는 것을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악인의 소행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내 의에 옷을 거룩하게 입고 그것을 나타내는 것은 악인이 하는 일입니다 의인은 설령 내가 그렇게 했을지라도 자기의 의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시편 73:7절을 보면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얼마나 풍족하면 그 눈이 솟아나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눈을 치켜뜨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눈을 치켜뜨고 아주 거만히 행하고 있습니다. 입술로는 겸손한 척 하고 있지만 그 마음에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로 인하여 부자가 되어 자연스럽게 눈을 치켜뜨게 됩니다.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 보다 더 얻고 있습니다.

천국에서 누리는 것 보다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이 세상에 천국이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은 수고와 고생이라고 말씀을 하는데 이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나오는 부자가 마음의 소원 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율법의 고운 베옷을 입고 자기 의를 소득으로 삼아 호화로이 연락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아삽은 계속해서 악인이 어떠한 자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시편 73:8-11절을 보면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악인은 거만히 말합니다.

높은 율법의 의를 말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율법의 의를 내세우며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면서 더 높은 의를 행하기 위해 아주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들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갖기 위해 더욱 더 율법을 연구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높은 율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행하는 율법의 의를 보이면서 계속해서 더 높은 율법의 의를 요구하면서 가난한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그들의 입이 바로 하늘을 대적하는 말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리고 그 은혜를 가르쳐 주기보다는 자기들이 행하는 율법의 의를 요구하면서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하는 그들의 입이 하늘을 대적하는 말이라는 말씀입니다

표준 새 번역10-11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 들이키듯,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덩달아 말한다.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하고 말한다.”

 

율법주의자들에게 미혹된 하나님의 백성을 아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의에 취해서 고운 옷을 입고 더 높은 율법의 의를 행하는 그것을 마치 물을 마시는 것같이 쉽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을 마시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지금 이 시대도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그 율법이 무거운 멍에가 아니라 오히려 쉬운 것입니다 심지어는 믿는 것 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더 쉽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이렇게 쉬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저 장식에 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주의자에게 미혹이 되면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부정을 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그 마음에서는 자기 율법의 의가 가득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그 오묘하신 지혜와 지식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물 마시는 것 같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쉬운 사람에게 은혜라는 것은 그다지 마음에 와 닫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율법주의에 미혹된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는 말이 더 가슴에 와 닫고 그것을 행하는 자신들의 모습이 너무도 대단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은혜를 내려주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73:12절을 보면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악인은 모든 것이 평안하기만 합니다.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평안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그 마음이 불안하지만 모든 율법을 다 지킨 사람은 마음이 평안합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아삽은 율법주의의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은 재물이 더 합니다

이 재물은 바로 율법의 의입니다

항상 더 높은 율법의 의를 바라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날마다 재물이 더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를 안 진 그것을 보며 마음에 평안을 얻고 그 재물을 더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예수 안에서 평안을 얻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자기가 지키는 율법의 의를 보면서 자기가 죄를 안 짓는 그것을 보며 마음에 평안을 얻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의 보화를 쌓기 보다는 땅에 자기 육체에 율법의 의로 재물을 쌓고 있는 사람은 악인입니다

내가 무엇으로 평안을 얻고 있습니까?

 

내가 행하는 율법의 의 그리고 짓지 않는 죄를 보면서 평안을 얻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악인입니다 그러나 비록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예수 안에서 평안을 얻고 있다면 그는 의인입니다 교회 안에는 의인 보다는 악인이 더 많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 자신을 분별해서 의인의 자리에 서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시편 73:13-16절을 보면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아삽은 고민을 했습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정말 믿음을 가지고 살아온 것이 허사란 말인가 하면서 혼란을 격고 있습니다. 악인이 잘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은 자신은 징계를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내가 가진 믿음이 허사란 말인가 하면서 지금 거의 실족을 하게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매일 징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늘 자기는 재앙 가운데 있어 정말 내가 의인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삽은 나도 그들처럼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분명히 아삽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었다고 확신을 했는데 오히려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는 그들의 더 형통하고 잘 되는 것을 보면서 너무도 혼란스러웠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의를 가진 사람보다는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 더 잘되고 평탄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는 매일 징계를 당하고 있고 재앙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왜 아삽이 이렇게 말씀을 하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의 의라는 것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아삽이라고 해서 지금 말하는 악인들 보다 못한 의를 가진 것이 아니라 아삽의 눈에는 그들의 의나 자기의 의나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 아삽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으려 한 사람이고 악인들은 행위로 말미암아 의를 얻으려고 하는데 그들이 잘 되고 더 형통한 것을 보고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는 말씀입니다

 

아삽이 아니라 누구라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악인인 그들이나 아삽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이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고 있는데 악인인 그들은 잘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으려 하는 아삽은 오히려 재앙을 당하고 매일 징계를 당하고 있으니까 도무지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면서 마음에서 흔들렸습니다.

 

시편 73:17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아삽은 성소에서 악인의 결국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성소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 악인의 결국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아삽은 매일 징계를 당하고 재앙을 당하는 것 같을지라도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었으며 예수를 믿지 않는 행위에 의지하는 악한 자들의 결국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환경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의인은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악인은 모든 것이 형통하고 평안하기만 합니다. 그런 환경을 보면서 많은 신앙인들이 거의 실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징계와 재앙을 기꺼이 감당하면서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당하는 징계가 비록 슬퍼 보이고 감당하기 힘이 들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참 아들들을 징계하고 있습니다. 징계하시는 이유는 그 인내를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12:11절을 보면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징계로 인하여 내가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참 아들로 인정하는 증거라는 것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내 환경을 보고 감사하기 보다는 내가 맺고 있는 의의 열매를 보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