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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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윤주만목사 2015. 5. 14. 15:40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출애굽기28:1-5절을 보면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찌니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으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할찌며 그들의 쓸 것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이니라

 

푸른 나뭇잎을 봅니다.

그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을이 되면 붉은 색으로 변하게 되고 또 겨울이 오면 땅에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가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여름의 푸른 나뭇잎을 보려고 하는 사람은 없고 붉게 물들어 있는 단풍들을 보면서 그때를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세월은 그렇게 갑니다.

하루가 가고 또 계절이 변하고 그런 일들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또 우리 보다 앞서 태어난 사람들이 이제는 기억속에서도 가물가물해져 가는데 그것을 자꾸 기억 속에서 떠올리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나간 것을 물론 가끔은 그리워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자꾸 떠 올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떠 올려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스스로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또 너무 그리워 하다가 자기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고 이상을 따라가다가 삶 자체가 엉망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옛 것을 물론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옛 것을 마치 오늘 보는 것 같이 생각을 해서는 더욱 안 됩니다

 

부모님이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를 아직도 그리워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일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그림자는 지워 버려야 하고 내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단풍을 보면서 푸른 나뭇잎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단풍 자체를 즐거워해야지 여름에 나를 시원하게 해 주었던 나뭇잎을 생각하면서 마치 그것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가게 내 버려두고 지금은 단풍을 즐거워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첫사랑이 있습니다.

누구나 어렸을 때는 가슴이 뛰는 첫사랑을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아직까지 남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현실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지금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으로 투영을 하려고 하다가는 지금 사랑까지도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지나간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지 지금까지 살아 있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착각을 합니다.

그 첫사랑이 아직도 자기 가슴에 남아 있다고 해서 그 사랑이 지금 사랑 보다 더 좋아 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빠져 들어가다 보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사랑은 하찮게 되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어느 사랑이 진실인가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구약은 그와 같습니다.

내가 보고 있는 성경의 구약은 마치 그와 같은 것입니다

첫사랑과 같아서 그것은 이제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려야 하고 그냥 그림자로만 보아야 하는데 그것을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실체와 분별을 하지 못하게 되면 지금 있는 사랑까지 깨지게 되는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구약을 보는 마음입니다

아직도 그 사랑이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지금 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그것을 현실과 같이 보기 때문에 신약과 구약 사이에서 무엇이 정답인지를 모르고 스스로 혼란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를 보면 이 말씀이 맞는 것 같고 저기를 보면 저 말씀이 맞는 것 같아서 나중에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도무지 성경 말씀이 어느 것에 기준을 둬야 하는지를 모르게 됩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현실과 과거 사이에서 그것을 정확하게 분별을 하지 못하고 산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과거도 현실이 되고 또 현실도 현실이 된다면 그것은 뭐가 뭔지를 모르게 되고 나중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모르게 됩니다. 저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 가를 모르고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구약의 제사를 안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구약의 절기를 지키고 있고 또 구약에 어느 율법은 버리고 또 어느 율법은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너무 혼란스러워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모르게 되고 너무 어려우니까 나중에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우니까 편하게 자기 영혼을 맡기고 있습니다.

 

명확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 자체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내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 가를 모르고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불행한 일에 빠지게 됩니다. 교회 나온 사람들 중에 다수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데 다만 교회에 나온 것으로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얼마나 모순인가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알고 가고 있습니까?

내가 가는 길이 지금 바른 길이라는 것을 스스로 확증을 해 가면서 걸어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초행길을 가게 되면 사람에게 물어도 보고 또 스스로 지도를 꺼내 찾아보기도 하고 대충 어디쯤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내비게이션이 잘되어 있다 해도 자기가 가는 목적지가 어디인가는 대강은 알고 출발을 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갈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가야 하는 목적지가 어느 역인가를 알고 또 그 역에서 내려서 몇 번 출구로 빠져 나가야 하는가를 알고 모르면 사람들에게 물어도 보고 그 역을 나와서 어느 곳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지를 하고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일을 하면서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가고 있습니다.

 

내가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완전히 의지를 하고 그 사람의 말만 듣고 가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자기 스스로도 알아 볼 만큼 알아보고 길을 출발합니다. 그런데 지금 현대 교인들은 자기가 가야 하는 목적지도 모르고 누군가 이리가라 하면 가고 저리가라 하면 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9:26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자기가 가는 길을 분명히 알고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냥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그림자와 실체 사이에서 어느 것을 보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가 그림자를 보고 있는지 실체를 보고 있는지를 모르고 자기가 가야 하는 길을 모르고 가고 있습니다.

 

 

천국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실상으로 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막연하게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가겠지 저 사람들이 하는 것을 나도 하면 가겠지 하면서 너무 막연하게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가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자기 눈은 푸른 나뭇잎을 보고 있기 때문에 단풍과 푸른 나뭇잎이 서로 교차를 하면서 혼동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언제부터 교회 안에 가운이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가운이 일상화 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운도 색깔과 모양이 있어 그것을 보고 권위를 내세우고 있고 또 그 가운을 안 입으면 심지어는 목사라 해도 성찬을 나눠 주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가 점점 구약의 그림자와 신약의 실체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을 실체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구약에 제사장들이 입었던 가운을 자기들도 입고 싶고 그런 외적인 것으로 자기들이 마치 신령한 것과 같이 남들에게 내 보이고 싶어 합니다. 신약의 누가 가운을 입었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아직도 구약을 살고 싶은지 신약을 살고 싶은지 그들의 생각이 정말 궁금하기 까지 합니다.

 

정체성의 혼란입니다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정체성을 모르고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아직도 구약의 모양을 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권위가 서는 것 같고 더 거룩하게 보이는 것 같아서 그런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 중에 누가 가운을 입고 침례를 주었습니까? 그러나 이 시대는 가운을 안 입고 침례를 주면 마치 큰 일이 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구약의 대제사장입니다

이 대제사장들은 이제 그림자입니다 실체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대제사장이라고 인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해서 그림자로 보여 주신 것이지 이들을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푸른 잎사귀입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도 아름다운 빨강 단풍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들의 푸른 잎사귀를 보면서 너무 좋다고 하고 또 그것을 따라하려고 한다면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정신이상자입니다 정신 분열증 환자이기 때문에 과거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 중간에서 자기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론의 반차를 쫓는 대제사장을 쫓아가서도 안 되고 그들의 모양을 흉내 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성도는 이제 그리스도를 쫓아가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7:11절을 보면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아론의 반차를 쫓는 제사장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아론의 반차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그림자로서 역할을 했고 이제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었기 때문에 그림자는 사라져야 마땅합니다. 아직도 아론의 반차를 쫓는 그림자의 모형이 남아 있다면 그는 현실과 과거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교회는 점점 이상 하리 만큼 아론의 반차를 쫓는 모양을 흉내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론과 같이 거룩한 옷을 지어 입으려고 하고 있고 그것이 이 시대의 상징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가운도 절기 때마다 다르고 또 어떤 행사 때마다 다르고 자기가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또 가운에 그 표시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레위 계통의 아론의 반차를 쫓는 제사장이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데 우리는 그들보다도 더 지독한 율법주의에 빠져 아론의 반차를 쫓는 제사장의 모양을 내려고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가 거룩한 모양을 내려 하고 있고 그것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과 귀를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반차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보여 준 것에 불과 합니다

어떻게 아론의 반차를 쫓을 수 있고 또 그런 모양을 내서 거룩하게 하려고 하는 행위들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찌니

 

아론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와 성정이 똑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거룩하게 만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론의 반차를 보고 그것을 보면서 마치 거룩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아론에게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이 옷을 지어 입히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에게 아론을 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했지만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아론을 본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아직도 아론의 반차를 흉내 내려고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예수를 믿지 않겠다는 표징과 같은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아론의 반차는 절대 거룩하지 않다고 그것은 온전하지 못하다고 히브리서는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양을 내면서 자기 겉모습을 꾸미고 있고 그런 것으로 아름답게 보이려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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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4절을 보면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아론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론을 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레위 계통의 제사장 말고 또 다른 제사장이 오시는데 그는 스스로 아름답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론과 같이 꾸미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영화롭고 아름답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영화로운 것을 가졌습니다.

그런 모양을 내서 가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아론과 같이 인위적으로 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얼마나 영화롭고 아름다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아는 성도는 굳이 아론의 반차를 쫓는 그런 모양을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느 사도가 그런 모양을 냈습니까?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옷을 지으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옷을 짓는데 왜 옷을 잘 짓는 기능이 있는 사람에게 지라고 말씀을 드리지 않고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아론의 옷을 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상식으로는 당연히 옷을 잘 짓는 기능을 가진 사람이 지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옷은 그냥 옷이 아닙니다.

단지 아론이 제사장의 모양을 내려고 한다면 이 옷은 정말 기능이 있는 사람이 지어야 하는 옷입니다 그러나 그런 옷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 옷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으로 채워 준 사람들만이 지을 수 있는 옷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혜의 영으로 채워 주여야 가능합니다. 아론의 옷은 그냥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좋은 그런 옷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시는 그 옷을 상징하기 때문에 지혜가 있는 사람만이 그 옷을 지을 수 있습니다. 사람 눈에 보이는 그런 옷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지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 주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론의 옷을 보면 안 됩니다

우리는 구약에 보이는 아론의 옷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혜의 영으로 채워 주신 성도만이 볼 수 있는 옷이고 그 옷을 지을 수 있습니다.

 

제사장 흉내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겉모양을 흉내 내려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이방신을 섬기는 일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론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은 반드시 지혜가 있는 성도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기도 합니다. 대제사장이 무엇을 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고 대제사장의 그 일을 믿지도 않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으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할찌며

 

옷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설교를 하겠습니다.

흉패, 에봇, 겉옷, 반포속옷, 관과 띠는 각각 다 의미하는 뜻이 있지만 오늘은 그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중에 언급을 하겠습니다. 그 하나하나만 해도 한편의 설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제사장은 거룩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론의 반차를 쫓는 제사장들은 온전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옷을 지어 입혀서 제사장 직무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아론의 반차를 쫓는 대제사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옷을 안 지어 입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체로 거룩하신 분입니다

 

대제사장은 거룩해야 합니다.

백성의 죄를 사해주는 일을 하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고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아론의 반차를 쫓는 제사장들은 흠이 있어 온전하지 못하지만 후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하여 거룩하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성도의 대제사장이 되심을 예표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흠이 없으신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들의 쓸 것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이니라

 

옷의 재료입니다

다섯 가지 재료가 들어 가 있습니다. 왜 다섯 가지 재료를 정해 주셨느냐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없는 하나님께서 영으로 채워 주시지 않은 사람은 이 실들이 의미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옷을 지을 수 없습니다.

 

먼저 청색, 홍색, 자색, 가늘게 꼰 베실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네 가지로 사역을 하실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성도만이 이것으로 옷을 지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네 가지를 모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가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모르게 됩니다.

 

청색은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홍색은 종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자색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가늘게 꼰 베실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 실로 지은 옷은 실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마태복음에서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타냈고 누가복음은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타냈고 마가복음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타냈고 요한복음은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옷은 바로 그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오셔서 왕으로 자기를 나타내시고 또 종으로 우리가 해야 하는 모든 일을 하시고 또 흠이 없는 사람으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또 당신이 하나님으로 오셨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옷을 누가 지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기능이 있어서 지을 수 있는 옷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영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성도만이 지을 수 있는 옷입니다 이 옷을 지어서 아론에게 입히시고 그 옷을 보는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지만 그들은 아론의 거룩한 옷만을 보았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금색입니다.

이 금색은 너무도 중요한 바로 생명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바로 달란트의 비유에서 말씀을 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달란트는 재능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복음의 말씀에 달란트의 비유를 해석해 놓았습니다. 그것을 보면 이해가 쉽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제가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마치 구약을 버리라는 뜻으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주장을 해 본적도 없고 구약은 우리가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너무도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 구약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있어서 분명히 많은 장애가 따를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을 그대로 따라 하려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씀을 드려서 다시 실패한 이스라엘이 되겠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를 발견하세요.

구약을 보면서 우리는 그 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 하고 그렇게 할 때 구약을 통해서 더욱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모양을 따라하려고 하기 보다는 구약에서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안다면 성령 안에서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도 보물을 캐고 있습니다.

성도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캐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에 이르려고 천국을 침노하고 있습니다. 행위에 빠지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