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1:29절을 보겠습니다. (신 255쪽)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데 까지 이르러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 종교가 얼마나 성행을 하고 있습니까?
종교입니다
정통이라고 하는 기독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독교 안에도 수많은 교파들이 있습니다. 일반 교인들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 교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불교도 있고 천주교도 있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샤머니즘을 따르는 별별 이상한 종교까지 다 들어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밖에 나가서 건물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몇 건물에 하나씩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천주교가 있고 불교까지도 이제 선원이라고 하면서 속세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무당집들이 성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물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주변을 보고 우리 가족과 친지를 보아도 모두가 그런 곳에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늘 우리를 생각하는 척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하고 또 세상에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온갖 호리는 말로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자기 대에서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부모 때부터 하나님을 믿은 사람은 내 의지와 상관이 없이 아니 내가 생각해 볼 여유도 주지 않고 우리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가서 한번이라도 진리에 대해서 그리고 영생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하지 않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었습니다.
내 의지입니까?
제가 신앙생활을 한 것은 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내 부모가 교회에 나가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까 나도 당연히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따라하게 되어 있었고 어느 새 그것이 마치 내 믿음과 같이 되어서 살았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교회라는 곳에 들어가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성경을 한번이라도 고민하고 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누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종교라는 그물에 걸려서 나중에는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과 같이 그렇게 매너리즘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것이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칭찬을 듣습니다.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칭찬을 교회는 정말 많이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여자들은 어떤 직분들을 만들어서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저 아이의 엄마로서 살고 설령 직장을 다닌다 해도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교회 안에서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된 것과 같은 칭찬을 듣게 되면 사람은 거기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이미 마케팅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한 영혼을 더 구원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교회 안에 끌어들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들의 말로는 한 영혼을 구원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철저한 마케팅에 교인들이 속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교회가 그렇습니다.
얼마나 안 좋은 환경입니까? 초대 교회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종교가 사방에서 그물을 치고 있고 거의 모든 사람이 그 그물에 걸려들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나님께서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은혜입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내가 받은 은혜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종교에 빠져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나를 접붙이시는 놀라운 경륜을 이루시고 있습니다. 세상에 그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시대 우리를 그렇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입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누가 복음을 전했습니까? 누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로 살아갔습니까? 물론 전혀 없었다고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서로 남겨진 사람들의 글을 보면 아직까지 그런 사람의 글을 못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삶을 살기에도 버거워서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기독교라는 종교의 포승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보면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아니 수십 년간을 자기 삶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올인을 했는데 거기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됩니다.
적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사회에서 구원을 받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원 돌감나무에서 찍어 우리를 잘라내서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시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가지를 찍으시면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찍어 내셔야 합니다.
아니 이 시대 우리를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서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를 위한 것만은 아니고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에 복음이 전파가 되게 하시고 있습니다. 내 가족에게 그리고 친지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이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내셨습니다.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주변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내 주변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의 숫자가 적을지라도 영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셨다는 것을 안다면 더욱 더 이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선물입니다
그것을 은사라고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복음을 모를 때는 그것이 이렇게까지 가슴에 와 닫지 않았지만 이제 복음의 깊은 비밀을 깨달으니까 더욱 더 은혜가 되고 있습니다.
누가 받았습니까?
이 시대 많은 사람이 이 선물을 받았다면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은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다수가 같은 것을 받는다면 그것은 선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똑같은 것을 나누어 주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선물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적은 숫자가 받았다면 그것은 분명히 고마운 선물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정말 저는 이 선물을 생각할 때마다 기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선물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저 부모가 교회에 나가라고 하니까 나갔고 나중에는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아니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이 되니까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세상의 이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에서 찍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복음의 비밀을 알 수 있게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셔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제가 받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선물입니다
다수가 속해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 선물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와 닫지가 않습니다. 이 시대만 해도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천만 명이 구원을 받은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선물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절대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6:23절을 보겠습니다. (신 247쪽)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린도전서12:31절을 보겠습니다. (신 278쪽)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은사를 많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보더라도 아주 지극히 일부의 사람에게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이 영생을 주시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지만 솔직히 기독교 안에 있을 때는 이 영생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닫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을 깨닫고 나니까 이것이 현실성이 있게 와 닫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정말 히브리서의 말씀과 같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씀이 깨달아지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을 때는 막연하게 영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마치 실상과 같이 믿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셔서 이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있습니다.
누가 본성을 거스리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지혜가 있다고 하는 사람도 본성을 거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누구라도 이 본성을 거스리는 순간 사회로부터 그리고 교회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거스리게 하시고 좋은 열매, 영생을 얻는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믿음으로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로마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여러 가지로 비유로 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1장에 와서는 자기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하면서 우리 이방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 돌감람나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찍어 버리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 본성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에서 찍어서 우리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하시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시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실 이 영생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이 시대 대형교회에서는 병을 고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암병이 고쳐졌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을 하면서 간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적입니까?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것은 너무도 하찮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깟 암병이 고쳐지는 것을 가지고 무슨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이 시대는 교회에만 나오면 마치 모두가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사가 아주 싼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싸구려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얻는 성도는 이 선물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이 선물이 너무 커서 초대 교회에 성도들은 이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순교까지 당 했습니다 자기 생명을 잃으면서 까지도 이 선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겨우 암병을 고쳤다고 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대단한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영생입니다
얼마나 큰 은사입니까? 그런데 이 영생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영생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이 영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이 영생을 전하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를 했는가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그 영생을 어떻게 받습니까? 그것을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삼년을 밤낮으로 훈계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영생을 얻었습니까? 저는 절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선은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본성을 거스리기보다는 본성을 따라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는 좋은 열매가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찍어 주셔야 합니다.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주셔서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셔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셔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성경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알아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9:15절을 보겠습니다. (신 295쪽)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입니다
우리 성도가 영생을 얻는 일입니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사를 이 시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고 있습니다. 누가 성경에서 복음을 깨달아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제까지 기독교가 진리를 전했다면 이 말씀이 그렇게 와 닫지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복음이 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성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본성을 따라 이제까지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평생을 그렇게 본성을 따라 살다가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나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성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실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아도 그렇고 우리의 이성을 따라도 그렇고 정말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본성을 거스르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이것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이 시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사모했습니까? 제가 영생에 대해서 정말 간절한 마음을 가졌습니까? 제가 진리를 알기 위해서 남들보다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제가 받은 영생이 말할 수 없는 은사라고 믿고 있습니다.
표적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영생을 바라보고 사는 성도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그들의 종교의식에 따라 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는 그들은 이 은사를 절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이 은사에 대해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거기서 찍어 내셨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은 것은 정말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말할 수 없는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이 복음을 우리가 세상에 전해보지만 그들이 받아들입니까? 사람의 이성으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아니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영생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받는 영생이 어떤 것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큰 선물인가를 전혀 모르고 막연하게 영생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고 받지도 않은 영생을 가지고 감사하다는 것을 마음껏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실체도 없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감사하고 있고 기쁨이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도 없는 그들이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영의 비밀도 모르고 신체의 부활을 주장하는 그들이 더욱 감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신체의 부활은 사실 그렇게 영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자기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다 알고 있다면 그것은 천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영생이라고 하면서 기독교인들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신체의 부활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연약한 우리 신체는 죽으면 그것으로 썩어 없어지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오실 때 거룩한 그 영이 부활을 해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신체의 영생입니다
그리고 영의 영생입니다 물론 율법주의자들은 신체의 부활을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 산 그것이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가 나는 것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신체의 부활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영생입니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누가 이 영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저 역시도 어떻게 이 영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으로 말미암아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거룩하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거룩하신 이의 영이 거하시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선물을 받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기가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어떠한 은사를 받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입니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며 그저 감사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은사를 우리가 아무리 전하려고 해도 사람들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복음 안에서 교제를 했기 때문에 이 은사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에 감사가 넘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4:7절을 보겠습니다. (신 331쪽)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왜 부르셨는가 하면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해서 영생을 받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거룩입니다.
우리 육체는 거룩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고 이 거룩이라는 말씀을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다고 하니까 마치 우리 육체가 거룩함을 입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 기독교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거룩함을 입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라고 하니까 마치 우리 육체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는 절대로 거룩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육체가 거룩해지면 우리는 죽어서도 안 되고 또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신체의 부활이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 신체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영이 거룩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합니다. 우리를 접붙이시는 것은 우리 육체를 접붙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의 일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게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접붙이는 것과 같이 하여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룩케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입니다.
이 시대 이 거듭남에 대해서 말로 미혹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거듭나는 것을 모르면서도 말 장난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났으면 반드시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로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거듭났습니까?
그리고 내 안에 거룩하신 이의 영이 거하시고 있습니까?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저희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다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거룩케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우리 신체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거룩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시니까 그 가지에 붙어 진액을 먹고 있는 우리의 영도 거룩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왜 부르셨는가를 모른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의 문자를 알고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기 신체를 보고 부르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신체는 절대로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거룩해지지도 않은 것을 보고 부르셨다고 하면 그는 성경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습니까? 반드시 거룩해져야 합니다. 만약에 거룩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부르신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무엇이 거룩한지도 모르고 자기의 신체를 보고 부르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있어야 부르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내 안에 있지 않으면서 부르셨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전혀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왜 부르셨는지도 모르고 있고 그리고 부르셨으면 어떠한 결과가 있어야 하는 줄도 모르고 있다면 그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망하는 악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라고 하니까 신체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신체의 내가 있고 그리스도의 영으로의 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내가 거듭난 생명이고 또 그 영이 거룩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막연하게 나를 부르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런 막연함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언어는 아주 추상적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언어를 쓰다보니까 사람들은 더욱 더 막연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한국에 기독교인이 많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추상적인 언어를 자주 사용하다보니까 성경을 보면서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하면 그 은사가 무엇이고 그 은사를 어떻게 얻어야 하고 또 부르셨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를 성경에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을 정말 믿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사기를 치고 당하게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자기 딴에는 그를 정말 바로 안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면 속은 자신을 보게 됩니다.
믿음입니다.
반드시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이 됩니다. 성경을 모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소년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체는 안 됩니다
반드시 거룩하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거룩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뿌리가 어떻게 거룩하신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 뿌리부터 신체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으로 거룩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는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육체는 없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으로 부활을 하셨는데 그 영이 거룩하십니다. 그리고 그 영에 우리 가지를 접붙이셔서 우리 가지에 그의 영이 거하심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거룩하신 이의 영이 거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심이 없다는 말씀이지 다른 것에게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고 난 후에 우리 안에 거룩하신 이의 영이 거하시는 것에 대해서 후회하심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상15:35절을 보겠습니다. (구 433쪽)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하나님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하나님도 후회를 하시는데 왜 로마서에서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느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이 말씀을 하고 저기서는 저 말씀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문자로 후회라는 단어만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스스로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후회라는 단어가 나오더라도 그 의미를 알면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식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문자에 스스로 걸림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 왕입니다
누가 이 왕을 세웠습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왕을 세우시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들을 보니까 왕이 있고 그 왕이 백성들을 지켜주는 것을 보면서 사무엘에게 가서 우리도 왕이 필요하니까 왕을 세워달라고 이야기를 하고 사무엘이 그것이 싫었지만 하나님께 기도를 하자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을 세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표입니다
우리는 후회라는 단어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사울 왕은 여러 가지를 예표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사단을 예표 하는 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울 왕을 사무엘을 통해서 기름을 붓게 하시고 이제 그를 폐하시고 또 다른 왕 다윗 왕에게 기름을 붓게 하셔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고 있습니다.
사울 왕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사단을 예표하는 왕으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 아니라 백성이 원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통해서 아멜렉을 진멸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멜렉이 무엇입니까?
비유입니다
아멜렉은 우리의 혈과 정입니다 나라를 보더라도 그 나라가 무엇을 비유로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울은 충분히 아멜렉을 진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아멜렉을 진멸하지 않고 좋은 것은 남겨 두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멜렉입니다.
사울은 사단을 예표하는 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사단이 있으면 절대로 아멜렉을 진멸하지 못 합니다 그 아멜렉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혈과 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시대 지키고 있는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왕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아멜렉을 진멸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아멜렉을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 믿음은 야고보서의 말씀과 같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혈과 정 때문에 이제까지 자기들이 지켜왔던 그러니까 형제와 같은 율법을 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단 한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똑같이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셔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체의 정와 혈을 끊지 못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후회를 하십니다. 왜 후회를 하시는가 하면 차라리 왕을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후회를 하십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사단에게 미혹을 당한 자가 있습니다. 마치 사울 왕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분히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재능을 주셨는데 그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아멜렉을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을 통해서 예표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면 당연히 은사를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영생을 얻고 거룩하게 하신 성도에게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울입니다
그는 분명히 아멜렉을 진멸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고 탈취를 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재물을 탈취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사울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예표의 의미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표의 의미입니다
그런 사람을 후회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잘못하셨다는 뜻보다는 사울이 잘못했다는 것을 말씀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에 사울이 다윗과 같은 왕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후회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통해서 사단을 예표하는 왕으로 보여주시면서 후회라는 단어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입니다
사울 왕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멜렉을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 부르심을 받아 거룩하신 이의 영이 있는 성도는 이미 아멜렉을 진멸을 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충분히 말씀을 했습니다.
구원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거룩하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성도를 그러니까 그의 영이 거하시게 하는 역사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 후회하심이 없는가 하면 우리의 구원은 신체가 아니라 영의 구원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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