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43쪽)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18-1에 이어지는 설교입니다 본문은 별개의 설교가 아닙니다)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부르심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신체가 아닙니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 가지는 원래는 본성을 따라 사는 돌감람나무에 있는 가지인데 그것을 찍어서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셔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우리 육체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접붙임이 되어서 우리에게 영생의 은사를 주신 것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정말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육체가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게 하시고 그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활을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성도는 이미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찍으셨습니다.
우리가 본성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찍으시고 우리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하시고 그 영을 거룩하신 이의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이 영이 잘못 될 수 있습니까? 이 영이 타락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영이 한번 거하면 다시 죽을 수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하신 이의 영을 주신 것을 후회를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은 정말 비밀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체의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후회를 하실 것과 같은 생각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의 비밀을 알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알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말씀은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부활하셔서 천국에 들어가셨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말씀은 그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후회하심이 없습니까?
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체를 따라 그것이 변할 수 있다면 분명히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 것과 같이 후회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것은 후회하심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신체가 아니라 영으로 하셨습니다.
영생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영생을 모르고 있습니다. 불교에 있는 사람과 같이 신체의 부활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썩어 없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이 영생을 얻는다면 성경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부활을 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한 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게 됩니다.
요한일서5: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93쪽)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온 이스라엘입니다
저희 죄를 없이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죄를 짓지 않음으로 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는 가장 기초가 바로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고 있습니다.
반드시 죄가 없어야 구원을 주십니다. 그런데 구원을 주시고 거룩하심으로 부르셨는데 그가 다시 죄를 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볼 때는 그럴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은 복음을 잘 듣고 따라오다가도 다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제를 잘하다가도 보면 다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하나님께서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없이하십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도 한동안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정말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을 받은 사람과 같이 보입니다. 실제 교회 안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여기 그리스도편지에 와서 예배를 하고 주의 만찬을 나눌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처음에는 정말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과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의 구원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마음에 있습니다. 잠시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에게 거룩하신 이의 영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 사람들을 의심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고 싶습니다. 자칫 한 사람을 의심을 하다가 그 영혼을 실족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의심하지 않고 싶습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육적인 모습으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 영혼이 실족을 해서 다시 구원이 취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잠시 그렇게 보였지만 실상은 그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우리 육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접붙임을 당해서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한 것과 같이 우리의 영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뿌리로부터 가지가 거룩한 영이 있는 성도는 범죄를 하지 않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까?
반드시 범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범죄를 하지 않아야 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율법을 지키는 범죄를 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가 다시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닙니다. 단지 그의 육체가 잠시 그렇게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로 난 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자기 아들이 죽는 것을 지켜보겠습니까? 어느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죽는 것을 그냥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는데 왜 없는가 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지키셔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단입니까?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면 우리는 범죄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이제 접붙임이 되어서 더 이상 본성을 따라 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내가 하나님께서로 난 자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난 자는 본성을 따라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서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셨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왜 후회하심이 없습니까?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지키시기 때문에 후회하시지 않습니다. 사단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이미 그 싸움에서 이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살아 있지만 싸움에서 졌기 때문에 죽은 자나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우리 성도를 만질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가 율법을 지키게 미혹을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누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인 줄도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만 있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라고 부른다 해서 아버지가 아니라 반드시 아버지가 낳아야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입니다.
성경은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은 무조건 자기들의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자가 되려면 육체로는 안 되고 영으로 되어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거룩하심을 입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룩하려면 그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이 영의 비밀을 모르고 자기 육체로 거룩하게 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본성을 따르는 율법을 지키다가 사망에 이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입니다
누구를 지켜주십니까?
우리 육체가 하나님께로서 났습니까? 우리 육체는 아담으로부터 났습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육체를 지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 육체를 지켜주시는 것이 맞는다면 초대 교회에 순교한 성도들은 버림을 받은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가 지키십니다.
누구를 지키시는가 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지켜 주십니다. 자기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하는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정말로 무지한 사람입니다 우리 육체는 우리 부모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남을 말씀하고 있고 주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거듭남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 단어는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 거듭나는 것인 줄도 모르고 있고 영에 대한 비밀도 전혀 모르고 거듭났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목사 한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자기가 거듭났다고 하면서 이 시대 거듭난 성도가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 사이트를 가르쳐 주었는데 글을 하나 보내왔습니다. 그 목사가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순전히 말장난에 불과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서 겨우 회개를 가지고 어떻게 회개를 해야 하는 것으로 자기가 거듭났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듭났습니까?
한 가지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범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듭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그 목사가 율법을 지키고 있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못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마귀를 너무 단순하게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도덕적인 죄를 짓게 하는 존재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세상 사람도 알고 있고 나쁜 짓을 하면 마귀 짓을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모두를 율법주의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죄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를 깨닫지를 못하니까 도리어 그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이 시대도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을 자극해서 그 본성에 따라 살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감동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영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며 그 영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범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율법을 지키는 범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11:30절을 보겠습니다. (신 255쪽)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입니다 교회에 내 육체가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헌금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부르심이 무엇인가 하면 돌감람나무 가지에 있던 우리를 찍어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신 것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우리 육체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 접붙임 자체도 육의 일로 생각을 하고 자기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마치 접붙임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가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접붙임이 되었고 그 영이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거룩합니다.
우리 이방입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라고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순종치 않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본성을 따라 살아가던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 사람의 본성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접붙임이 된 사람이 아닌데도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소경이 되어서 이 영의 비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겨우 교회에 나온 것으로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순종이 무엇입니까?
육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을 했다면 그의 은사가 있어야 하고 부르심을 따라 거룩한 영이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런 영의 일을 모르고 교회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문자를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다 미혹이 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제가 성경 자체를 판단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성경을 보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악을 행하다가 진노를 받고 있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이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때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같다고 보면 맞습니다. 성경을 정말 깊이 생각하면서 보아야지 문자만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로마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영생입니다
그들은 이 영생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이방인들은 복음을 들을 수도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이방인에게 영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입니다
그들은 순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에게 복음이 안전해졌다는 것도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부터 사람들이 더듬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릅니까?
우리는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물론 솔로몬 시대에 스바 여왕이 왔다 갔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까?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가 또 다시 찾아왔습니다. 지금과 같이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 핑계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로마 시대는 또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 사도들을 통해서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설령 사도들이 전하지 않았어도 사람은 본성에는 하나님을 더듬어서 찾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3:36절을 보겠습니다. (신 147쪽)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너희가 전에는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세상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의인과 악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을 순종치 않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순종치 아니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이 있습니다. 이방인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방인이 순종치 아니한 것은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이고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한 것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 둘은 다릅니다.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는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실상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는 사람이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순종치 아니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해서 순종치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이방인들이 순종치 아니하는 것과 뒤에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방인들 역시 이 세상에서 법에 의해서 본성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예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순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어떻습니까? 노아 시대 이전에 다른 신이 있고 다른 종교가 있었습니까? 노아 홍수가 있은 후에 언어가 달라지고 난 후에 다른 종교가 생겨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언어가 하나일 때입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을 더듬어서 찾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찾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가를 우리는 그래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을 사도 바울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구원이 얼마나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가 전에는 순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해서 이제 이방인들이 긍휼을 입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순종을 해서 그 가지 얼마가 꺾이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리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표와 그림자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안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또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순종치 않게 이 모든 복음의 비밀을 감추어 두셨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지혜가 있는 백성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 주시지 않았는가를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이방인들을 보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민족이 복음에 순종을 하고 있습니까? 유럽을 거쳐 아메리카 대륙을 통해서 이제는 아시아까지 복음이 전파가 되고 있습니다.
어느 민족입니까?
그렇게 많은 언어로 성경이 번역이 되어서 전해지고 있지만 이 복음에 순종하는 민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순종치 아니하였어도 자기들은 다 순종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입니다. 우리 이방인이 순종을 했습니까? 이미 아브라함의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의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는 이스라엘보다 더 순종치 아니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입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해서 이방인들이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방인과 초대 교회의 이방인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이 처음 전해졌고 이 시대 이방인들은 이미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상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4:10-11절을 보겠습니다. (신 356쪽)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19: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2쪽)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스라엘은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이 시대는 순종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순종치 아니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순종을 한다고 하는 그들이 도리어 순종치 아니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반포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이 모든 말씀을 준행을 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언약까지 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나서 율법을 받으면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해 준다고 하면 다 그렇게 대답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이방인들도 성경만 보고도 율법을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안식일이 변해서 주일이 되었다고 하면서 또 일을 만들어서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면서 그 날에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쉬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안식일이 변해서 주일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면서 쉬지를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기 일입니다
안식에 들어간 자는 자기 일을 쉽니다.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아직까지도 자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기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 부자 청년과 같이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자기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입니다
이제 더 이상 율법을 지킬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을 과거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받을 구원이라면 우리는 쉬지 못 합니다 그러나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는 이제 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입니다
안식에 들어가 쉬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일이 무엇인가 하면 이 부자 청년과 같이 십계명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이 살아 있습니까?
그래서 이 시대에도 지켜야 합니까? 그는 아직까지 영생을 위해서 자기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누군가 하면 이 부자 청년과 같이 지금도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마음으로 십계명을 지키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어서 성도로서 지킨다는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일이라고 하면 일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것을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진 것이라고 말씀을 하면 그런 것입니다
이 청년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 청년과 같이 자기들이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십계명을 문자적으로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안식에 들어가면 이제 일을 하지 않고 쉰다고 말씀을 하는데 쉬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이 아닙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계명을 지키고 있습니까? 성경이 일이라고 하면 일입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 일도 하지 말고 안식에 들어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 역시 주님 앞에 나온 청년과 같이 십계명을 지킨다고 하면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순종치 아니하는 본입니다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는 아직 안식에 들어가지 못해서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주일이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져 있는 행위라고 하면 아마도 기독교인들은 그럼 예배는 언제 드리냐고 따질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가 걱정입니까?
제가 예배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제가 이 말씀을 몰라서 주일을 지키는 것이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이 청년이 그 일을 하다가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니까 근심하면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율법 쉬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어느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이미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그는 이 청년과 같이 이미 근심하며 돌아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3: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56쪽)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성경이 우리에게 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쉬라고 했으면 쉬는 것이 순종하는 것임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입니까?
그런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진 것을 율법을 지키는 일을 믿음이라고 말씀합니까? 히브리서에서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로 보건데 저희가 믿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버림을 받았습니까?
순종치 아니해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 순종치 아니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믿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순종치 아니하는 행위가 무엇인가 하면 안식에 들어가서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그것이 율법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일을 믿음으로 지킵니까?
십일조를 믿음으로 드리고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사단은 성경에 없는 말을 만들어서 마치 있는 것과 같이 교인들을 세뇌를 시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데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순종입니까?
초등학문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율법을 안 지키는 것이 순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 이스라엘이 얼마나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성경을 보고도 모릅니까?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순종치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방의 교회가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해서 우리 이방인들이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지나자마자 이방의 교회도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져서 긍휼을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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