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2:7-8절을 보겠습니다. (신 326쪽)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영의 일이고 내세의 일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도 않고 또 그것을 우리 인생의 언어로는 설명도 안 됩니다 사실 그런 영의 일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기에 더욱 우리에게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서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일을 믿음으로 굳게 서 있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 믿음이라는 것이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복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10개 들은 사람과 1000개를 들은 사람은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 더 믿음에 굳게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말을 하나마나입니다.
믿음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성경에서 복음을 보아야 합니다. 겨우 몇 가지 복음을 보았다고 해서 믿음이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가 셀 수 없이 많은 복음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평생을 그 복음을 알기에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믿음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1.000개의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 10.000개 아니 그 이상의 복음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성경에서 복음을 볼 때 우리는 믿을 수 있고 믿음에 굳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어떻습니까? 우리가 평생을 이 복음만 보아도 사람의 이성으로는 서 있기가 어려운데 율법을 보고 있습니다.
넘어지고 있습니다.
믿음에 서 있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넘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서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자기가 넘어져 있는지 서 있는지도 모르고 평생을 교회 안에서 악한 일만 하다가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말씀을 하고 있고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저희가 믿지 아니함으로 꺾이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에게 저희가 믿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
저희가 믿지 아니함으로 꺾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께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왜 화가 있습니까?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넘어졌습니까? 세상 초등학문에 넘어져서 율법을 지켰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이 세상의 어느 책을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초등학문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세상 초등학문입니다
이것에 다 넘어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세상 초등학문에 넘어져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믿음에 서 있지를 못하고 거의 모든 사람이 넘어져 있습니다. 넘어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넘어졌다는 것도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은 넘어졌어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이 세상 초등학문에 넘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세상 초등학문에 넘어져 율법을 지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을 거절을 하고 넘어져서 세상 초등학문인 율법을 지켰습니다.
성경의 문자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성경의 문자를 조금 아는 것으로 마치 고상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그 정도는 대학을 공부한 사람이 혼자서 독학으로 성경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수준의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 초등학문입니다.
성경을 보았으면 믿음에 굳게 서 있어야 하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세상 초등학문에 넘어져 있습니다. 자기들이 넘어졌다는 것도 모른 채 그렇게 평생을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다가 죽으면서 자기들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넘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 로마서는 우리 이방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 있지 못하고 넘어지면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음에 굳게 서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의 행위를 보면 마치 믿음에 굳게 서 있는 것과 같이 보입니다. 아니 그들은 정말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믿음이 있는 성도와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들은 다 넘어져 있습니다. 무엇에 넘어져 있는가 하면 세상 초등학문에 넘어져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들이 넘어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 초등학문입니다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세상 초등학문을 좇으면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누가 보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성경을 봅니까?
그들이 성경을 보고 있어서 사도 바울이 세상 초등학문을 좇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 있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세상 초등학문을 좇지 말고 그리스도를 좇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넘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순간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않았는데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을 구원해 주시겠습니까? 율법을 지킨 이스라엘을 아끼지 않고 꺾어 버리셨는데 율법을 지키는 이방인들을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시겠습니까?
종교입니다
그들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노략하고 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게 함으로 해서 저주를 받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가 사람의 이성에는 너무도 옳기 때문에 거기에 모두가 노략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있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는 온갖 율법을 다 지키면서 교회를 세워 놓고 그 건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주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종교에 의해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당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에 서 있으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는 말씀은 있어도 율법에 서 있으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넘어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교회 안에 있는 소자들이 이리들에게 노략을 당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사야59:9-10절을 보겠습니다. (구 1040쪽)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우리가 소경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넘어지는 자에게 엄위가 있습니다.
성경이 넘어지는 자에게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면 누가 넘어지는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로마서의 말씀만 보면서 자기들의 이성을 가지고 넘어지는 자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을 안 지키는 것으로 넘어졌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막연함입니다.
그런 말에 미혹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넘어지는 자에게 엄위가 있으면 그 넘어지는 자가 누군가를 성경에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경에서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설령 누군가 찾아 주어도 성경을 그렇게 보면 안 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어지는 자가 누군가를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넘어지는 자에게 엄위가 있습니다.
백 명이 있는 교회에서 한두 명이 넘어진다면 사도 바울은 굳이 로마서에 이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이 로마서를 기록하게 하셨는가 하면 이방의 교인들이 모두가 넘어지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입니다
솔직히 안 넘어져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두가 넘어져 있으면서도 성경을 모르니까 자기가 넘어져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넘어진 자인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입니다.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공평이 무엇입니까? 공평한 도리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재능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게 하시는 것이 공평입니다
의가 미치지 못 합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의가 미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참 빛을 비춰주시고 있지만 어두움에 있던 이스라엘은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이사야 시대와 같이 어두움에 있어서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어두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어두움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참 빛을 비춰주셨지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은 어두움에 있어서 참 빛을 보고도 그것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그 상황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두움입니다.
그것이 이사야 시대만 있었습니까? 주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이 어두움에 있어서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만의 문제입니까? 이방의 교회 역시 어두움에 있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은 이스라엘과 다르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빛을 바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어두움뿐이었습니다.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우리가 소경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소경입니다
누가 소경입니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산과 바다를 두루 다니며 교인 하나를 얻으면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입니다
성경에서 복음이 안 보이는 소경입니다. 그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우리가 넘어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을 넘어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율법을 잘 지키는 자기들이 서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넘어졌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넘어진 자입니다 소경은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소경이 혼자서 길을 가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이 서 있고 세상 사람들이 넘어졌다고 하면서 막연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넘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강장한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 자 같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강장한 자 같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율법을 그렇게 잘 지키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자라고 예수님께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 강장한 자 같지만 실상은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도 똑같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는 순간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 있는 성도는 절대로 넘어지지 않지만 믿음이 없으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강장한 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일지라도 죽은 자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죽은 자 같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보아도 그렇고 이 시대를 보더라도 모두가 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4:18-19절을 보겠습니다. (구 915쪽)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의인의 길입니다
그리고 악인의 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 길 중에 반드시 하나를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죄인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라고 기록한 말씀이지 세상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의인의 길은 돋은 해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참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의인은 그 빛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정말 바로 알아야합니다.
단번에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만한 광명에 이르기 까지는 그러니까 구원을 받기 까지는 점점 빛이 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점점 더 많이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의인은 늘 성경을 보고 있고 성경에서 참 빛을 보고 있습니다. 그 빛이 점점 더 빛나서 결국에는 완전한 빛에 참예를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악인도 있습니다.
문제는 악인입니다 의인은 자기가 점점 더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하지만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회개라도 할 수 있고 돌이킬 수 있지만 어두움 같아서 넘어져도 도무지 모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악인입니다
그래도 자기가 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저 사람은 악하다고 하면 본인도 자기가 어느 정도는 인지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악인은 어두움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쳐 넘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가를 깨닫지를 못 합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잘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누가 넘어지는 줄도 모르고 누가 악인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악인이라고 하고 있고 또 자기들의 이성의 도덕적 관념에 따라 넘어졌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넘어졌습니까?
율법주의자들이 넘어졌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고 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넘어진 자를 악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넘어 졌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도리어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악인은 자기가 악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악인은 이렇게 거쳐 넘어져도 자기가 왜 넘어졌는지도 모르고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악인이 많습니까? 의인이 많이 있습니까? 성경에 악인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는 자는 적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 바울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이스라엘의 수가 바다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넘어진 자가 자기가 왜 넘어졌는가를 알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면 다시 털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들이 넘어졌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넘어졌습니다. 율법주의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방의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 역시 모두가 넘어져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조차 넘어져 있으면서도 무엇이 넘어졌는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래도 알기나 하면 낫지 않습니까? 자기가 악을 행한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고난을 당하면 그나마 좀 낫지 않습니까? 그런데 악을 행하는 자는 자기가 왜 넘어졌는지를 모르고 평생을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그 행위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아주 잘 믿었다고 하면서 죽을 때까지도 천국에 간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죽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자기가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고 넘어진 것을 알고 있었다면 덜 슬픕니다. 그런데 자기는 선한 일을 하고 있고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하지만 한 평생의 신앙생활이 실상은 넘어져 있었습니다.
넘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면서도 막연하게 자기는 의인이고 넘어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말씀을 보면 뭐 합니까?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알면 뭐 합니까? 아니 히브리어에 능통하고 헬라어에 능통하면 뭐 합니까? 자기가 넘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평생을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주여 주여 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곁에서 보는 사람이 얼마나 안쓰럽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넘어져 있는 자에게 누군가 넘어져 있다고 가르쳐 줘도 그것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왜 받아들이지를 못하는가 하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넘어졌다고 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세상일이라면 차라리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런데 악인은 어두움에 있어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보고 또 기독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시대가 율법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는가를 생각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들만은 잘 믿고 있다고 하면서 율법의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시편66:5절을 보겠습니다. (구 848쪽)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인생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엄위
엄격하고 위엄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사랑만 있으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시는 것도 이 엄위하심이 있기에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엄격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법대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율법을 반포를 하셨습니까? 그것은 법대로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법대로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보았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누가 법대로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는 대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의롭다고 하셔서 의로우신 것이 아니라 율법에 있는 그대로를 다 하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시고 죄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엄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엇에 대해서 엄위하신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생각이 나는 대로 이때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고 저때는 저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법대로 하십니다.
제가 법대로 하신다고 하니까 율법대로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 육체는 법대로 행하셔서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인생이 한번 죽는 것을 정하셨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한번 죽어야 합니다. 이 한번 죽는다는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왜 한번 죽습니까?
하나님은 엄위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우리는 한번 죽어야 합니다. 죄를 진 인생은 모두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서 한번 죽지도 않고 휴거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죽지 않고 휴거가 되어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엄위가 훼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엄위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반드시 한번 죽어야 합니다. 휴거가 된다는 말에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도 말씀하고 있지 않은 휴거를 왜 이야기를 합니까? 설령 종말의 때가 와도 휴거가 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을 정하셨다고 하는데 이 시대는 누군가에 의해서 휴거가 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엄위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있어 죽음은 엄위입니다 그러나 그 엄위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죽음이라는 것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또 그 영이 주님의 날에 부활을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들에게 엄위가 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5:29절을 보겠습니다. (신 151쪽)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마태복음25:30절을 보겠습니다. (신 44쪽)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넘어지는 자입니다
이 시대는 넘어지는 자가 누군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잠언의 말씀대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일을 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고 악한 일은 율법의 행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엄위와 인자입니다.
교회 안에는 분명히 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받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악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무익한 종이 누구입니까? 율법은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킨 사람을 주님께서 이 무익한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익한 종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살 때 무익한 일을 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율법을 아주 잘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는 율법을 지킨 그 일이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무익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넘어지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서 있는 자보다는 넘어지는 자가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 많은 정도가 아니라 믿음에 서 있는 성도가 지극히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서 사람들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비유로 말씀하니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적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말씀 그대로 비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몇 달란트를 받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교회 안에서 생명을 얻었는가 아니면 생명에 대해서 무익한 일을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생명에 대해서 무익한 일, 율법을 지킨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갊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교회 안에서 대충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다면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겠습니까?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 정도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지만 그가 한 모든 일이 그러니까 율법을 지킨 일이 무익한 일이 되어서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넘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엄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는 모두가 넘어져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3:3절을 보겠습니다. (신 279쪽)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말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한글개역성경이 정말 잘 번역에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엄위에는 만일이라는 단어를 안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자에는 만일 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볼 때는 성경이 잘못 번역이 된 것과 보입니다. 만일이라는 있을지도 모르는 뜻밖의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는 사람이 얼마나 적다는 것을 이 단어 하나로만도 쉽게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있을지도 모를 뜻밖의 경우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볼 때는 한국 교회가 천만 명이라는 숫자가 있다 보니까 로마서를 보고도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지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성도는 이 만일이라는 말씀이 충분히 깨달아집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이 모두가 사랑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지극히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정도 적은가 하면 있을지도 모를 뜻밖의 경우와 같이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두 가지를 놓고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둘 중에 하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쁜 의미로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좋은 의미는 정말 있을지도 모를 뜻밖의 경우와 같이 아주 극소수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넘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자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니까 교회 안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니까 그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13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카데미강의를 통해서 이 사랑에 대해서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사랑이 무엇이라는 것을 이제 우리 성도님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 가를 알고 그 사랑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자기 행위로는 넘어져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넘어져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다보니까 성경의 문자만 보고 이스라엘은 넘어져 있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온갖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확증해 나가고 있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거의 모든 사람이 넘어져 있고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7:19절을 보겠습니다. (신 10쪽)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영생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영생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런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우리 안에 있어서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넘어져 있으면 하나님의 인자가 그 안에 거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를 않으면 찍혀 불에 던지 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자에 있습니까?
말로만 인자에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넘어진 자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야 그 다음에 인자에 거할 수 있습니다. 넘어지는 자가 누군지도 모르면 자기가 넘어져 있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반드시 찍혀 불에 던지 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가 꺾여 버렸습니다.
그들이 왜 가지 얼마가 꺾였는가 하면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넘어졌는가 하면 율법을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않고 있으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육의 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 안에 생명이 탄생을 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생명에 대해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을 하면서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마치 자기들이 생명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아주 쉽게 넘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로마서의 말씀만 보다보니까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는지를 모르고 자기가 인자에 거하는지 아니면 넘어져 있는지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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