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7:15절을 보겠습니다. (신 178쪽)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를 악인의 손에서 보존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누가 악인인지 누가 의인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악인을 알아야 하는데 전혀 모르다보니까 악인의 손에 잡혀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누구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악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고 있습니다.
악입니다
이 시대는 악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악인의 손에 잡혀 있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이 악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존하시면 내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하는데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보존해 주시고 있습니까?
반드시 악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악에 빠져 있는 사람은 주님이 보존해 주시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의 보존을 받고 있는 자인가를 알 수 있는 기초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기도를 하시고 있습니다.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로마서를 보고 뿌리가 자기들을 보존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악에 빠져 있습니다. 악에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 로마서의 말씀만 보고 주님께서 자기들을 보존해 주시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악에 빠져 있는 사람은 뿌리로부터 진액도 받지 못하고 있고 주님이 보존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기도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주님이 기도를 해 주시고 있는 성도는 악에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기도를 해 주시지 않고 있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모두가 악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악에 빠지지 않게 기도를 해 주시고 있는데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악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보존해 주시고 있습니까?
사단은 그런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합니까? 악을 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악에 빠져 있으면서도 로마서의 말씀을 보면서 주님께서 자기들을 보존해 주시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분향단에서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해 주셔야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기도대로 되어야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주님의 기도와 반대로 악을 행하면서 주님께서 자기들을 보존해 주시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악입니다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것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주님의 기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기도를 하고 계시는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로마서의 말씀을 보고 주님께서 자기들을 보존해 주시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악에 빠져 있지 말아야 합니다. 악에 빠져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보존해 주시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거의 모든 교회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악에 빠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악에 빠져 있는 사람은 주님이 보존해 주시지 않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우리 육체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 영혼을 보존해 주신다는 것이지 육을 보해해 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시대는 종교의 자유 가있어서 자기들이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주님께서 자기들을 보존해 주시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는 악에 빠져 있는 사람이고 주님께서 보존해 주시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육체를 보존해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영을 보존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악에 빠지지 않은 성도의 영을 주님께서 보존해 주시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님의 기도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악에 빠지지 않게 우리를 위해서 기도를 하시고 있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자만이 악에 빠지지 않고 있는데 성경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악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시고 있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주님께서 하시는 기도를 전혀 모르고 있고 그 기도와 반대로 악에 빠져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로마서11:19절을 보겠습니다. (신 255쪽)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저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그 자리에 우리를 접붙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가지를 꺾어 버리셨습니다. 왜 그들이 꺾이었는가는 이제 더 이상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킨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지가 꺾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이방인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가지가 꺾이운 것은 그 자리에 우리를 접붙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분명히 우리를 접붙이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를 꺾어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우리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종교에 들어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이라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까지 말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영의 일을 아는 것으로 접붙임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맞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가 꺾이운 것은 우리를 접붙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이방에 빛을 비춰주셨지만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인들 모두가 이스라엘이 꺾였다고 하면서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상은 어떻습니까?
꺾이운 이스라엘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보고 이스라엘이 꺾였다는 것을 아는 그들이 왜 이스라엘이 꺾였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킨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아 꺾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꺾였습니다.
그리고 접붙이셨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면 지금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이 접붙이신 것이고 주님께서 자기들을 보존하신다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다들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교인들은 목사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계입니다
그런데 전혀 경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따라 율법을 지키면서도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킨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잘 못 믿어서 가지 얼마가 꺾였고 똑같은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어서 하나님께서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으로 영의 비밀을 알고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접붙임입니다.
그리고 그 가지 얼마가 꺾이운 것입니다. 이 시대는 이 접붙임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고 그 가지 얼마가 꺾이운 것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이성으로 알고 있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가 되어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쫓은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버림을 받은 이스라엘의 행위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영의 일을 믿음으로 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를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게 하시고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를 하셨습니다.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 모형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셔서 그 모든 예표들을 만들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가지 얼마가 꺾였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있는 이방인들이 이 일에 대해서 깨달아야 하는데 이스라엘도 모르고 있고 이방인들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가 꺾이었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보고 알고는 있지만 실제 무엇이 꺾이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구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영적 천국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몇이나 들어갔습니까? 이미 예표를 통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가 꺾이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그것을 거의 육의 일로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가 꺾이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의 문자를 보고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역시 성경의 문자를 보면서 자기들이 접붙임이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은 전혀 모르고 그저 육으로 보이는 교회를 보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가 꺾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영이신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받지 못해서 영의 일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를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는 꺾였어도 자기들이 접붙임을 당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접붙임입니다.
반드시 영의 일을 알아야 합니다. 이 영의 일을 모르면서 성경의 문자를 보고 접붙임을 받았다고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19절의 말씀은 성경에서 복음을 듣고 영의 비밀을 알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지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지들이 꺾이었습니다.
영의 일을 모르는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가 꺾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인인 우리가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가 접붙임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우리 이방인이 접붙임이 된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는 로마서의 말씀을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마치 접붙임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복음의 말씀을 다 듣고서 알고 있는 성도들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우리 육의 구원이 아니라 영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어떻게 영으로 구원을 받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해서 그의 영이 거하시게 됩니다. 이 영의 일을 알고 있는 성도들이 나로 접붙임이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11:20절을 보겠습니다. (신 255쪽)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옳습니다. 그 가지들이 잘린 것은 믿지 않은 탓이고, 그대가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가 꺾였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인 우리가 그 자리에 접붙임을 당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과 우리가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말씀을 보고도 자기들과 이스라엘이 무엇이 다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아니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어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다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왜 믿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로마서10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이 의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역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릅니다.
누가 이 시대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믿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를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자기의 의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면서 막연하게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의를 모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종교입니다
자기가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아니 자기들이 의를 이루어야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 것을 성경은 자기의 의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믿음입니까?
왜 이스라엘이 믿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 의에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의에 대해서 바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그리고 자기의 의가 무엇인가를 몰랐고 또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믿어야 하는 줄을 전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자기의 의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의 의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똑같습니다.
이스라엘과 전혀 다르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를 수 있다고 하지만 이 시대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셔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말씀입니다.
이 의입니다
반드시 의가 있어야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의로워지려고 하는 모든 행위를 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구원을 받는 것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믿지를 않고 전부 다 율법의 행위를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행위를 함으로 해서 꺾이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의 일을 이 시대는 어느 누구도 모르고 막연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5:39절을 보겠습니다. (신 151쪽)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디모데후서3:15절을 보겠습니다. (신 346쪽)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이스라엘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믿지 않았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왜 보고 있는가를 이스라엘은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입니다
정말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이스라엘은 집에 있을 때나 나갈 때나 언제라도 이 성경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왜 성경을 보아야 하는 줄을 전혀 몰랐습니다. 성경을 사람의 이성적 지혜로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해서 그 문자를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입니다
그들이 주님에게 반박을 할 때 무엇을 가지고 했습니까? 성경을 가지고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사람의 이성적 지식으로는 정말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이 무엇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지를 전혀 몰랐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가 문자적으로 보는 성경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본다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이미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믿지 못했는가 하면 성경을 사람의 이성을 따라 문자 그대로 보았기 때문에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도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믿지 않았습니다.
왜 믿지 않았는가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보았습니다.
그 율법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이 감겨져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었습니다. 율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못보고 있는 사람은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 로마서 강해를 하면서 이제까지 많은 율법을 인용을 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말씀을 보고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도 그렇고 이 시대 역시 그것을 전혀 못 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못보고 있는 사람들은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전입니다
성전은 저의 육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을 보고 그의 육체라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고 있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못 보았습니다.
못 보다 보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께서 자기 땅에 오셨지만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이 모든 것을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그저 문자적으로 보다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믿지 않았는가를 성경을 보면서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저희가 믿지 않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은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입니다.
제가 늘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을 믿는 것은 너무도 막연한 일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아는데서 부터 출발이 될 수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믿는다는 것은 세상 이야기로 하면 스스로가 사기를 당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이 알아야 합니다.
어느 정도 알아야 합니까? 그것을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절기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서 유월절이 무슨 절기인가를 말씀을 했습니다. 율법에는 칠일 동안 그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서 믿음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실 때까지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입니다
정말 이 구원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아는 것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이 아는 것을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은 세상적으로 박사가 될 정도로 많이 알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는 너무도 게으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냥 막연하게 믿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합니다. 100개를 아는 사람과 1000개를 아는 사람 중에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물론 100개를 아는 사람도 믿을 수 있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힘써 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함으로 꺾이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습니까? 이 말씀을 보고 그저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믿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믿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51:17절을 보겠습니다. (구 839쪽)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사야42:3절을 보겠습니다. (구 1018쪽)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저희가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십니다. 그것을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상한 심령이 있어서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믿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그렇지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의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 제사가 무엇인가 하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이 실상은 다 제사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합니까?
아니 하나님을 위해서 아주 큰일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도리어 그런 일을 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꺾어 버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상한 심령입니다
그리고 상한 갈대입니다.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 인생들을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상한 갈대가 되지도 않았고 상한 심령으로 제사를 하지도 않아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꺾어 버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누가 상한 심령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율법의 의가 없어서 도무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상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자기의 의를 세우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상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하여 연락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어떻게 되어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그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데 이스라엘은 율법의 의로, 자기의 의를 힘써 세움으로 해서 부자가 되어서 꺾이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꺾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들이 왜 꺾이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냥 막연하게 성경에 문자를 아는 것으로 그들이 믿지 않고 꺾이게 되었다고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무엇을 믿지 않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의를 몰라서 믿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가지가 꺾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함으로 꺾이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면 영의 나무에 접붙임이 되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꺾이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섰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가 하면 이스라엘은 믿지 아니함으로 해서 꺾이게 되었고 우리는 믿음으로 해서 구원에 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믿음에 설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돌감람나무를 잘라서 참감람나무에 접붙이심으로 해서 영의 일을 알아 믿음으로 해서 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 어떻게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을 사도 바울은 접붙임으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의 일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이성으로는 어느 누구도 이 영의 일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지를 잘라서 참감람나무에 접붙이심으로 해서 우리가 진액을 함께 받아 이 영의 일을 믿음으로 해서 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입니다
믿음으로 서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제까지 로마서10장에서 다 말씀을 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섰습니다. 무엇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섰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제 11장에 와서는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은 자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9:27절을 보겠습니다. (신 274쪽)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믿음을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설령 내가 복음이 있어서 그것을 전하는 자로 살아간다고 해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이성으로 내가 스스로 설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섰습니까?
그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이 시대 누가 믿음에 서 있습니까? 아니 이제까지 교회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우리가 이 시대 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알았습니까?
이스라엘이 왜 믿지를 못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지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눈이 소경이 되어서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이 시대를 보더라도 모두가 완고해져서 율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정말 이 시대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존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믿음의 비밀을 모르고 그저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 살다가 그들과 함께 멸망을 받고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은혜로 구원을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소경이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볼 때 수건이 벗겨지는 역사가 있어서 복음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제 우리가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가진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의 비밀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자기가 어떤 은혜를 받았는가를 아는 사람은 절대로 높은 마음을 가지기 않고 도리어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next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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