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2, 네 손을 펼지니라
신명기15:11절을 보겠습니다. (구 286쪽)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누가복음20:46절을 보겠습니다. (신 132쪽)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사도행전2:44-45절을 보겠습니다. (신 190쪽)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의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정의를 내려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도 중요한 이 의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니 어느 정도까지는 접근을 해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하면 자기의 의가 아니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구에 사람이 살면서 인구가 늘어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부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신명기의 말씀 그대로 땅에는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육적으로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성경은 거의 모든 말씀이 영적인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고 이 영적인 일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율법을 보고 영적인 일을 깨닫기보다는 육의 일로 만들어서 자기들이 육체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15장입니다.
1절부터11절까지의 말씀이 하나의 율법입니다. 아마도 이 말씀을 보는 거의 모든 목사들이 다 육적으로 이 말씀을 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지키심으로 해서 우리가 그 율법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땅에는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그 가난한 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고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율법이 육적이라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육적으로도 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가난한 자를 어느 정도는 도와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대로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고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못 합니다
물론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가난한 자를 돕고 사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유니세프 같은 곳에 기부를 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부를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율법 지킬 수 있습니까?
과연 누가 이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율법이 폐하여 지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이 율법 한 자기만 해도 그들이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 부자 교회들이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율법을 육체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지키지 못 합니다.
물론 가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장기려 박사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이 세상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평생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 율법에 근접할 정도는 그는 자기 손을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넉넉히 주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의술을 통해서 그렇게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 율법을 지켰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천주교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성경을 보고 성경에 있는 율법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분명히 인간적으로는 존경을 할 만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같은 범인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의 의입니까?
장기려 박사가 천주교인으로서 성경을 보고 정말 그러한 삶을 산 것으로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누가 했습니까? 장기려 박사가 했고 장기려 박사의 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한 행위에 대해서는 분명히 저 역시도 인간적으로 존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이 율법을 누가 지킬 수 있습니까? 장기려 박사나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이 지킬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이 율법을 지킨 것이 됩니까?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장기려 박사나 테레사 수녀가 인간적으로 존경을 받을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구원에 있어서는 가난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의는 좋았습니다.
그래서 성인이라고 사람들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의로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의가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이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장기려 박사나 우리나 저울에 달아보면 입김보다 더 경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습니다.
그럼 장기려 박사나 테레사 수녀가 부자입니까?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장기려 박사도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이고 테레사 수녀도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이고 나 역시도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재물을 말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땅에 살고 있고 떵에 사는 모든 사람은 다 가난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가난한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꾸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꾸어 줍니까?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가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대도 우리 가난한 자가 꾸어 달라고 하면 그 손을 펴셔서 우리가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넉넉히 꾸어 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넉넉히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와서 우리가 요구하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의를 꾸어 달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손을 우리에게 펴서 우리가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시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넉넉히 꾸어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꾸지를 않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았으면 하나님의 의를 알고 꾸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꾸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이 신명기의 말씀을 보고 자기들이 아주 조금 가난한 자들에게 꾸어 주는 행위를 하면서 율법을 지키면서 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렇게는 못하더라도 하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조금 하는 것으로 합리화 시키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반드시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고 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아주 조금 하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입니다
감성적으로 접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법은 법대로 해야 그 법을 지킨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이 안 하는 것을 조금 했다고 해서 마치 법을 그래도 그 사람보다 더 잘 지키면서 산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그 요구하는 대로 넉넉히 주지 않았으면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난한 자에게 꾸어 주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까? 그것은 사실 이 율법대로 지키지 않은 것이며 사람의 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장기려 박사가 한 행위도 사람의 의고 테레사 수녀가 한 행위도 사람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하셔야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주님은 우리가 꾸어 달라고 하면 주님의 손을 우리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그러니까 우리가 천국을 요구하는 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넉넉히 꾸어 주셔서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시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를 못 보게 되면 그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복종치 않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고 힘써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복종치 아니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정말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는 행위는 외식이고 자기들이 하는 행위는 진심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긴 옷을 입었습니까?
그리고 시장에서 어떻게 문안을 받았습니까? 이들은 신명기의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시장에 나가면 거지들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땅에는 육적으로도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그 거지들이 바리새인들이 지나가면 구걸을 하려고 곁에 다가갑니다.
그때 어떻게 합니까?
긴 옷을 입고 갑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려고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왜 긴 옷을 입고 나갔는가 하면 자기들이 구제를 하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장에 거지들이 다가오면 바리새인들은 이 긴 옷에 구멍을 뚫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구멍으로 동전을 떨어뜨리면 소리도 나지 않고 거지들을 구제할 수 있었습니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자기들이 구제를 하는 것을 안 보이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외식이 되어서 이제는 누구나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 그렇게 긴 옷을 입고 시장에 나가서 거지들을 구제를 하고 그 거지들로부터 문안을 받는 것을 좋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숨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숨길 수 없었고 그것이 또 다른 외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이 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삼가라고 말씀합니까?
자기의 의를 세우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를 하면서 자기의 의를 세우고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을 삼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명기의 말씀을 보고 이들 나름대로 한 그 행위가 자기들의 의가 되어서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가난하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 했습니다. 자기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긴 옷을 입고 다니면서 동전을 떨어뜨리고 있는데 가난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의 행위가 어떠한 결과는 가져왔는가 하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내세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지역 사회에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는 것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헌금한 것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를 했다고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다 자기들이 가난한 자를 도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가난합니까?
성경은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이 가난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시장에서 긴 옷을 입고 다니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자기들이 가난한 자를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있는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는 것과 이 시대 교회가 하는 것이 뭐가 다릅니까?
똑같습니다.
시장에서 문안을 받는 것과 교회 안에서 광고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을 합니까? 또 자기들이 사회에 얼마나 봉사를 하고 있는가를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의 의가 되어서 이렇게 의가 있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가난하다는 것을 모르게 되고 그런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입니다
내가 얼마나 가난한 자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다보니까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시는 것을 모르고 자기들이 그 일을 함으로 해서 자기의 의를 세워서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있습니다.
구제
제가 나쁘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를 도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사실 그렇게 부자도 거의 없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면서 살기도 버겁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를 도울 여력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바리새인으로 자기가 살아 보았기 때문에 더욱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를 해서 우리에게 말씀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2장의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다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당시에는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로마에 세를 바치다보니까 백성들의 삶은 더 궁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삼천 명이 회개를 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삼천 명 중에는 다수가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들었던 사람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이 오고 나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니까 삼천 명이 회개를 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지금과 같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환경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막 교회가 세워지고 있는 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항상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 보다 더 어려웠던 때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지금과 같이 교회가 먼저 있고 사람들이 들어왔던 때가 아니라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울 수도 없는 때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고 나서 사도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삼천 명이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신 천국복음을 그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때입니다.
복음입니다
하루아침에 한번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내가 복음을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처음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건물을 세워졌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제 그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부자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내 놓아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서 모이기를 힘쓰며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했습니다.
누구라고 지칭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제 4장에서는 바나바가 기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과 지금을 같이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시는 이제 교회가 태동이 되고 그들과 교제를 하려면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누구의 의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까? 사도행전에서 믿는 사람들이 자기 것을 팔아서 이제 막 복음이 전파가 되니까 그 일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의입니까? 아무리 복음을 위해서 일을 했다 해도 역시 자기의 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믿는 사람은 설령 자기의 것을 팔아서 구제를 했어도 자기의 의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의를 세웠다면 그 사람의 이름이 기록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라고만 기록을 했습니다. 같이 가난한 자를 도왔습니다. 물론 이 믿는 사람은 복음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은 시장에서 다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했습니다.
그러나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이 시장에서 긴 옷을 입고 그렇게 했든 이 믿는 사람들이 자기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음식을 먹고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했든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나오지가 않고 있습니다. 물론 뒤에 바나바는 이름이 나오지만 그는 레위인으로서의 의미하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것은 영의 의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의입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자기의 의입니다. 우리는 꼭 율법이 아니더라도 자기의 의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지키지 않을 수 있지만 복음을 전하면서 나타나는 의까지도 우리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얻기 위해서 그것을 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의를 알면 절대로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자기의 의를 세우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얼마나 많은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들의 의를 세우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6:24절을 보겠습니다. (신 9쪽)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의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제 마태복음에서 천국 복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6장은 의에 대한 말씀이라고 해도 별로 틀리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의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 주인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자기의 의를 두 주인이라고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경을 성경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으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두 주인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비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 거의 문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보니까 어떻게 됩니까?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니까 하나님을 섬기려면 재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재물이 조금이라고 있는 사람은 이 말씀으로 정죄를 받고 있고 그 정죄로 인하여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섬기지 못 합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를 가지면 하나는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섬기지 못한다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면 재물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재물이 있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자적으로 보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인생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재물이 만약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돈이라면 우리는 돈이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돈이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이 거짓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시대정신 나간 목사들이 이것을 돈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사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그 안에서 말을 듣는 그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했으면 반드시 겸하여 섬기지 못 합니다.
돈이 있습니까?
문자 그대로라면 돈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가 돈이 있으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배치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는데 돈이 있는 상태에서 겸하여 섬기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모순이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돈부터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주인이 누구입니까?
그 결론을 33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주인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의와 자기의 의라는 말씀입니다.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믿고 있습니까? 그는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있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있습니다.
십일조 율법입니다
주일 율법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각종 헌금 다 율법입니다. 찬양도 율법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예배도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의 행위가 다 율법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율법을 지킵니까?
하나님의 의를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누가 율법을 완전케 하셨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그 자체가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킵니까?
성도로서 살기 위해서 지키고 있습니까? 그런 합리화를 시키는 말에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와 자기의 의를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으면 그런 것입니다.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않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을 예표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않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 이방의 교회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을 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같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면 모든 율법을 행한 의무가 그에게 주어집니다. 아니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면 그것이 재물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키지 않는 율법을 지키면 세상 사람에 비해서 재물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까?
십일조를 내지 않는 사람과 비교를 했을 때는 재물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드려서 내 재물을 되지도 않고 드린 것을 내 마음에 생각지도 않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내고 있는 그 십일조를 누가 드렸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의와 자기의 의 두 가지를 비교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드렸으면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나 내가 드렸다면 자기의 의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니 진심이니 그런 감성적인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자기 육체로 지키면서 믿음이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그것이 재물이라고 하면 재물이 되고 그것이 자기의 의라고 말씀을 하면 자기의 의가 됩니다.
성경을 왜 봅니까?
내 생각을 맞추어 보려고 성경을 봅니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합리화 시키지 위해서 성경을 봅니까?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미 자기들의 이성적 지식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이성에 성경말씀을 합리화 시키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의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구해야 합니까?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 안에서 복음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주님이 하신 하나님의 의는 모르고 성경을 보고 자기의 의를 세우면서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있습니다.
야고보서1:25절을 보겠습니다. (신 372쪽)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의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의를 알아야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모르기 때문에 이 시대 거의 모든 교회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일을 사도 바울이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의가 아니고는 우리는 어떻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제까지의 교회를 보면 거의 모든 교회가 율법을 지키면서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있습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입니다
야고보서 강해를 통해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시대는 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지키신 율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말씀과 같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완전케 하신 율법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입니다.
주님이 다 지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의입니다. 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실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을 구해서 내 것이 되고 이제 더 이상 문자적인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입니다.
우리는 이 율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육체로 율법을 지키면서 이 율법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입니다. 이 율법을 지킨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있습니다. 이 영이 거하고 있는 성도는 이제 육체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사람입니다
자기의 의를 세우면서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주님이 완전케 하신 자유하는 온전한 율법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제 완전케 하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더 이상 육체로 율법을 지킬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디도서1:10절을 보겠습니다. (신 348쪽)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복종하는가 하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주의 형제 야고보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종치 않고 있습니다.
누가 복종치 않고 있는가 하면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많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대표성을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비유로 하실 때 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입니다
율법의 대표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할례당 가운데 많다고 말씀을 하니까 이 시대는 교회에서 자기들이 할례를 하지 않으니까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초대 교회에 있던 어떤 사람들을 말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613가지입니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할례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 중에 복종치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아니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는 모두가 할례당이 되어 있으면서도 진짜 육체로 할례를 받지 않는 것으로 보면서 할례당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할례당입니다.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면 그는 할례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할례당이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하나님의 의도 모르고 율법도 몰라서 모두가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완전케 하신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입니다. 그 율법을 믿는 성도는 절대로 자기의 의가 세워지는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를 구해서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next 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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