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95-1의 연결입니다)
요한일서5:15절을 보겠습니다. (신 393쪽)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이 시대는 바알에게 부속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기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시대 기독교 안에는 수많은 바알들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바알이라는 것을 모르고 바알에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바알을 섬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구했습니까? 교회를 크게 짓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까? 아니면 재물을 많아서 자기가 편하게 이방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까? 아니면 이 시대 목사들과 같이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 구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구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무엇을 구해야 하고 무엇을 구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과 사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이 사단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정말 열심을 다 해서 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들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사도 요한은 우리가 얻을 줄 알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얻은 줄을 알고 있다고 과거형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구하는 것을 이미 얻은 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하는 것을 이미 얻은 줄 알고 있는데 더 이상 구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구한 것을 얻은 줄 모르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자기 마음에 있는 탐욕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얻었습니다.
아직 얻지 못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이미 다 얻었다고 사도 요한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정말 부탁드리지만 그 외에 다른 것을 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발람이 불의의 삯을 구하다가 사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고 또 신앙생활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해도 그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 목사들입니다
일단 안수를 받으면 무엇부터 구하고 있습니까? 자기가 사역할 장소를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장소를 얻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안에 교인들을 보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얻으면 이제 교회 안에 찬양대를 세우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고 또 그것을 얻으면 이제 교회를 짓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납니까?
다른 교회와 같이 교육관을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또 교인이 더 많아지면 주차장을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또 이제 기도원을 구하고 있습니다. 휴양원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도 부족해서 이제는 사회에 기여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 재단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목사만 그렇습니까?
교인들 역시 그것에 편승을 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 교회에서 인정을 받고 싶어서 자기들이 은사라고 하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을 잘 지키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고 십일조를 더 많이 낼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고 자기 자녀의 문제, 그리고 가정의 문제, 사돈의 팔촌의 문제까지 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 교회입니다
그들은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끝없는 탐욕을 부리면서 교회에만 나가면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있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구하고 있습니다. 이 구하는 것을 누가 주는 줄을 모르고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구원에 대해서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구하는 바가 이스라엘의 구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위해서 구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자기들의 마음에 있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는 이방의 사도입니다
그래서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보니까 모두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새 것을 바라지 않고 묵은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일로 저주를 받을 이스라엘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에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성도는 이 구원을 이미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도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도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 역시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우리로 인하여 기독교에 들어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들이 어떠한 형벌을 받는 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 가족과 그리고 나와 관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간구를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구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구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복음을 깨닫고 보니까 그들을 보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이것이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될 것 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더욱 더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대 우리들에게 사도 바울과 같은 동일한 믿음을 주셔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왜 동일한 믿음을 주셨는가 하면 우리를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이 저희로 구원을 얻기를 위해서 구해야 합니다.
로마서10:2절을 보겠습니다. (신 253쪽)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는 증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의 시작도 이스라엘로부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주셨지만 그들은 복음을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먼저 선택을 받은 민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다고 하니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이 그냥 행위로만 열심이 있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을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고 하나님께 늘 은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켰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킨 그것으로 인하여 모두가 저주를 받는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만 열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서 그들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그 성경을 볼 수 있는 눈이 소경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열심을 나타내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보였습니다.
그들이 왜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들이 그냥 지켰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니까 율법을 지켜야 사는 것과 같이 보였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습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성경을 보고 하나님께 열심을 내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진심이라는 말로 모든 것이 용납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습니다.
열심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온 사람은 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습니다. 물론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은 치열하게 세상에서 살다보니까 이 시대는 그저 교회에 한발 걸쳐 놓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종교는 그 사람들의 삶의 전부가 되었다고 해도 별로 틀리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유교입니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를 걸치면서 이 유교가 성행을 했습니다. 이 유교는 단지 종교 이상의 차원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그때는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이 유교의 사상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왕까지도 폐위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는 그렇게 그들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지금은 종교는 사치와 같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 종교가 그들의 전부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것은 어느 정도 용납이 되고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을 반대 했다가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는 자기 생명까지도 빼앗기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열심입니다
지금은 사는 것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사는 것이 빤했습니다. 농사 아니면 장사 그리고 목축이 전부였습니다. 물론 기술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지금과 같이 과학이 발달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시대 하나님께 열심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에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다 해도 이스라엘의 열심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삶 자체가 하나님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물론 이 시대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온 백성이 다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습니다.
왜 그들이 그토록 열심을 냈는가를 주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그렇고 이 시대 역시 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5:39절을 보겠습니다. (신 151쪽)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막연하게 열심을 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열심을 그냥 쉽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어려서부터 성경을 가르치라는 말씀이 있어서 그들은 이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경을 읽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세상에서 출세를 하기 위해서 공부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먼저 배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냥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위해서 정말 정성을 다 해서 성경을 읽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들이 성경을 안 보았다면 그렇게 율법주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았기 때문에 율법주의가 되었고 부자청년과 같이 그들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냥 율법주의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알고 그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상고 했는데 그것이 율법을 지키는 열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시대입니다
성경을 상고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목사가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한 번도 읽지도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꼭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대로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제가 아무리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전한다 해도 우리 성도는 개인적으로도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저도 압니다.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회생활뿐 아니라 또 가정에서 가장으로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정말 이 시대는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리스도편지에 올려드리고 있는 말씀만 본다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공감합니다.
그리고 이해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복음을 바로 전하고자 하려고 늘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바쁜 삶에서 그래도 복음을 바로 들을 수 있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성경을 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냥 율법을 지켰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정말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성경을 상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고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말았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열심이 있어서 성경을 상고 했는데 그들은 율법으로 나타났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목사들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이 있습니까? 저 역시도 그 사람들의 진심을 폄하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정말 그들도 하나님께 열심이 있어서 성경을 보고 또 신학을 아주 열심히 공부를 해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교회의 목사들 중에는 거짓에 빠져 있는 것을 알고도 그런 사람들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목사들은 정말 그들도 한 영혼을 구원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저 역시도 인간적으로는 그 분들의 열심을 절대로 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경을 보는 것을 거짓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진심으로 그런 일을 했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재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사람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기록을 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성경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있고 이 성경을 보면 영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봅니다.
왜 성경을 보는가 하면 이 성경을 보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다는 말씀은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믿어서 영생을 얻기를 원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성경의 문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성경으로 안다면 그는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성경을 보았는데 율법주의에 빠졌는가 하면 성경의 문자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역시 거의 모든 사람이 성경의 문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서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이 헤어져도 그것을 버리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는 줄을 몰랐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하면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성경이 헤어 졌다고 해서 그것을 함부로 쓰레기로 헌책으로 버린다는 것이 도무지 용납이 안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집에 아주 오래 된 성경도 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안 보고 그저 책장에 꽃아 있는 장식에 불과하지만 그 책을 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의 문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여러분이 사람의 이성으로 보고 있는 성경의 문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 열심마저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화를 하고 있고 거기에 적응해서 살다보니까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을 가질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사람들은 다 종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봤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본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보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도 안 보고 하나님도 안 믿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히 있어서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것마저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1: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02쪽)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사도 바울입니다
그에게 복음이 계시가 되기 전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알고 나서 성경을 읽었습니까? 복음을 알기 전에 성경을 읽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복음이 계시가 되기 전에 이미 충분히 성경을 읽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가 공회원의 자격이 있으려면 정말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계시가 되기 전에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게 살았습니다.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는데 그때 사도 바울이 어떻게 했는가 하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이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습니까?
그 열심이 종교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 열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습니다. 이 시대 역시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다 기독교인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지나침으로 해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율법을 잘 지키겠습니까?
지식을 모르고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사람은 사도 바울과 같이 유대교에서 있을 때 흠 없는 율법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는 조금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 전체의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이 정한 율법만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식을 모릅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을 내면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종교가 됩니다. 여러분이 무심히 쓰고 있는 기독교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대교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교회는 또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정말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당을 만들고 누가 교를 만들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독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몰라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으나 지식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 기독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의 간판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교회의 이름을 짓은 것도 성경적으로 볼 때는 큰 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거기에 종교의 이름까지 붙이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성경에 어느 선지자가 종교를 만들었고 어느 사도가 종교를 만들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마치 이스라엘이 유대교인이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성도입니다. 당도 만들어서는 안 되는데 종교를 만들어서 교회를 세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각이 없습니까?
성경을 왜 보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유대교가 되어서 어떻게 되었는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를 세우면 기독교대한 장로회 무슨 교회라고 간판을 내 걸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 지식이 없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복음이 계시가 되기 전에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은 것과 같이 역시 기독교를 지나치게 믿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아니 성경을 똑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교도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는 해도 그리스도 교인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우리는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나친 열심이 사람들 스스로가 종교인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지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는 이미 행위로 빠져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영이 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지 종교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습니까?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경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스스로 지식이 있다고 했지만 율법을 지키는 일에 빠져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지식을 좇지 않으면 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유대교가 되든지 아니면 기독교가 되든지 해서 종교인으로 살아가 그들의 행위로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3:6-7절을 보겠습니다. (신 345쪽)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
말세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까 성경은 전혀 안 배우고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의 행위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상은 이스라엘도 성경을 어려서부터 배웠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거의 다 문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자만 어리석습니까? 남자는 다 똑똑해서 어리석은 자가 없습니까? 생리적인 여자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을 여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입니다
그 여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있습니다. 남의 집이라는 말씀은 실제 남의 집이 아니라 교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세운 교회가 있고 주님이 세운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인하는 자는 누군가 하면 자기를 자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가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갑니다.
어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는가 하면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교회가 거의 없다 보니까 남의 집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그런 교회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나서 또 다른 곳으로 갈 때 그 교회에 장로를 세워 놓고 갑니다. 그 교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를 유인합니다.
생리적인 여자가 아니라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여자를 유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해지고는 있지만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는 말씀은 아직 충분하게 유월절을 먹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반드시 유월절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유월절을 하루아침에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는 떠날 때 내가 삼년 동안 눈물로 너희를 가르쳤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내가 떠나면 흉악한 이리가 들어와서 너희를 잡아먹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잡아먹히지 않을 정도로 유월절을 먹어서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어리석은 여자입니다.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충분하게 유월절을 먹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의 교회가 아닙니다. 이 시대는 유월절을 먹이고 있는 교회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해서 유월절을 먹였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항상 배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배웁니까? 성경을 배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교회에 이제 사도 바울이 떠나고 나니까 이런 자들이 들어와 어리석은 여자들을 가르치고 있고 그들이 항상 배우고 있습니다.
성경 공부를 하고 있습니까?
이 여자와 같이 항상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진리에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려서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행위를 가르침으로 해서 그 율법을 지키는 탐심으로 인하여 진리에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닙니다.
누가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닙니까? 교회 안에 있는 어리석은 여자들이 지식을 좇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어서 구원을 받고 싶어서 성경을 배우고 있는데 진리의 지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려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입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제 장로를 세우고 다른 지방으로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어리석은 여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려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입니까?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성경을 배운다고 하고 말씀을 듣는다고 하지만 다 무엇에 대해서 듣고 있는가 하면 여러 가지 욕심에 대한 것을 듣고 있습니다. 그 욕심이 율법을 지키는 일로 나타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1:52절을 보겠습니다. (신 114쪽)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 열심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역시 이스라엘 못지않게 하나님께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런 이스라엘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성경에서 율법을 연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율법을 연구하는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지식의 열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보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성경에서 율법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의 열쇠를 가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율법을 이 시대 역시 성경을 통해서 율법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열쇠를 가지고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사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습니까? 그런데 그들에게 주님께서 너희도 들어가지도 않고 들어가는 자를 막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보고 있지만 율법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로는 그 율법을 너무 잘 지키지만 율법의 의미를 알려고 하지도 않고 율법을 알려고 하는 사람도 막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 율법을 풀어서 올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 율법에서 복음을 깨닫는 것이 율법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연구를 하는 율법사들은 그 의미를 깨닫기보다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미를 알려고 하는 자를 막고 있고 자기들도 그 의미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율법사들과 같이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지만 율법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고 있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를 막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보고 지식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보고 있습니까?
지식을 좇지 않은 사람은 이 율법사들과 같이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지식을 좇지 않고 있습니다. next 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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