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계20:9.)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94-2, 네게 미칠 것이니

윤주만목사 2025. 2. 5. 07:52

신명기28:15절을 보겠습니다. (30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갈라디아서5:3절을 보겠습니다. (307)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신명기28장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는 기본이 안 되어 있습니다. 지금 신명기의 말씀이 누구에게 하고 있는 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지킵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야 하고 또 사단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고 사람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지킬 수 없는 율법이라면 우리는 지켜서는 안 됩니다. 제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도덕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누가 지켜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어리석었습니다.

율법을 보고 자기들이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의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니 성경을 보고 율법을 지켜서 법에 이르지 못한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을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습니다.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이 법에 이르지 못해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저주를 받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를 논한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모순입니다.

저주입니다

율법의 행위 아래 있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신명기에서 분명하게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갈라디아에서는 율법을 한 가지 지킨 자는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의의 법을 좇아가서는 안 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법을 좇아가는 자는 모두가 저주를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온전히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신명기28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지키실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할 때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는 안 됩니다.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만 법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이방인 역시도 의의 법을 좇아가면 법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법에 이르지 못하면 신명기의 말씀과 같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저주를 받는다고 하면 반드시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의의 법을 좇아갔습니까?

지금 이 시대 이방인들이 의의 법을 안 좇아가고 있습니까? 물론 이스라엘과 같이 모든 율법을 지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율법 한 가지를 행하는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의의 법을 좇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저주를 받습니다.

제가 저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 아래 있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담대하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을 몰라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너무 담대합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담대합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그 율법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마치 이스라엘만 의의 법을 좇아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아니 자기들은 의의 법을 좇아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를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단 한 가지의 율법을 지켜도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주어지기 때문에 의의 법을 좇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법에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이 시대 이방인들도 법에 이르지 못해서 저주를 받고 있지만 이것이 영의 일이다 보니까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정의를 해 주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은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법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법에 이르지 못하면 반드시 저주를 받는데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면서도 너무 담대합니다.

저주를 받을 자입니다

누가 저주를 받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저주를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들은 축복을 받고 세상 사람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율법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달아서 은혜를 구해야 하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율법,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키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지키신 그 율법으로 내가 복을 받고 내 안에 천국의 복을 받는 의로운 영이 탄생이 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율법을 주님께서 지키시고 우리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신 것을 성경을 보고 믿는 성도는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왜 지킵니까?

저주를 받는 율법을 왜 굳이 지킵니까? 그것은 사람의 이성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 당연히 옳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두움의 일이고 악을 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율법을 절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의의 법을 좇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만 좇아갔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방의 교회 역시 모두가 의의 법을 좇아갔습니다.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있었던 때 아주 잠깐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교회는 의의 법을 좇아갔습니다. 물론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과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흔적은 교회사를 통해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역시 모두가 의의 법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 역시 모두가 의의 법을 좇아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이제는 더 이상 의의 법을 좇아가지 않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기적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의의 법을 좇아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큰 축복을 주시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비밀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의의 법을 좇아가지 않는 남은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된지를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지혜가 있어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우리에게 약속의 씨를 주시고 이 세상에 그 씨를 남겨 두시고 있습니다. 정말 다시 생각을 해도 사람의 이성으로는 의의 법을 좇아가지 않을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9:32절을 보겠습니다. (25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이 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이스라엘은 의의 법을 좇아갔지만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는 자기는 분명히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졌다고 생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복음이 계시가 되기 전까지는 사도 바울도 자기는 율법을 다 지키면서 산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 역시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의의 법을 좇아간 그들이 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왜 법에 이르지 못했는가 하면 그들이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5:17절을 보겠습니다. (6)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우리 인생입니다

어느 누구도 법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법에 이른다는 것을 이미 율법에서부터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마태복음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의 전환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아니 율법을 지켜도 된다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도로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말 하는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일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사람이 지키려고 하는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고 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반포를 하셨다고 해서 율법을 지켜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인생이 율법을 지키면 법에 이르지 못 한다는 사실입니다. 법에 이르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행위에 의지 했습니다. 율법을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켰습니다. 사람이 지킬 수 있는 율법 같으면 지켜도 되겠지만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부딪힐 돌에 부딪쳤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을 지킬 수 없는데 율법을 지키려고 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믿음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법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법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법에 이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법에 이릅니다.

그것은 율법을 완전케 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율법에서부터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 법에 이르려고 하다가 도리어 그 율법을 범함으로 해서 저주를 받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박국2:4절을 보겠습니다. (1303)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신명기를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생명과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사망과 저주가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생명과 사망이 함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봅니까?

그리고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그것은 단 한 가지 살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종교가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만 그 사는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다 살기 위해서 신을 믿고 있고 또 자기 스스로 해탈을 해서 열반에 오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법에 이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얻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내세를 바라보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많이 변질이 되어서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본질을 잊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누군가 하면 자기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 외에 어떤 것도 이 사는 것에 앞설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사는 것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살 수 있는가를 모르고 그저 교회에만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저주를 받는 율법을 지키는 그들이 천국을 마치 따 놓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유 없습니다.

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차라리 믿지를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이유도 살기 위해서 지키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도 살기 위해서 믿고 있습니다.

신명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반포하시고 생명의 축복과 사망의 저주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는 사는 방법이 두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는 방법을 두 가지로 그리고 두 가지 의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율법을 다 지키는 것도 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역시 의입니다 이 의가 있으면 산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다 지켜도 의를 얻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내 육체의 행위로 하고 있습니다.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가 믿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를 못하고 행위로 살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이 살려고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살려고 지킨 그 율법은 저주도 함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법에 이르는 것입니다

법에 이르러야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서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을 믿음으로 법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서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로는 육체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는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약속의 씨가 거하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약속의 씨입니다.

행위로는 이 약속의 씨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행위로 자기 안에 영의 생명이 거할 수 있습니까? 영의 일을 알고 있는 성도라면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해서 부딪힐 돌에 부딪쳤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잠언11:28절을 보겠습니다. (923)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행위입니다. 자기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떠한 행위를 하면 그것이 의가 되어서 재물이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한 행위는 자기의 의입니다. 그것을 자기의 재물이라고 잠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왜 지킵니까?

의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안 지키면 불안합니다. 왜 불안한가 하면 혹시 내가 구원을 받지 못할까 해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말씀을 보았어도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지키고 있는가 하면 그것이 자기 마음에 재물이 되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의지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율법을 지키는 당위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율법을 지키면 의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불안합니다.

사실 믿음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정말 무색무취합니다. 제가 표현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우리에게서 느끼거나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약속의 씨가 영이라는 것을 누가 어떻게 느끼게 해 줄 수 있습니까?

사실 불안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 믿음을 의지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키지도 않은 율법을 법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 어떻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나는 율법을 하나도 안 지켰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어디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 할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십일조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먹었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릴 때 나도 같이 드려서 이제 더 이상 십일조를 안 드려도 된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저 사람이 거저먹으려고 한다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십일조를 하기 싫으니까 별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고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이렇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믿음에 의지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물론 율법을 전체 다 지키지는 못할지라도 그래도 내가 지킬 수 있는 것은 해야 사람이 편안합니다. 이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에 의지하지 못하고 행위에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안 했습니다.

그런데 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양심이 있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나는 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법에 이르렀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법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법에 이르렀다고 하면 도리어 비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믿음에 의지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는 행위에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의 씨를 주시고 있지만 그것이 믿어지지가 않으니까 당연히 행위를 통해서 자기들이 약속의 씨라는 것을 보이게 됩니다.

보물이 있습니다.

진짜 보물이 있는 사람은 그 보물을 굳이 보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보물이 없는 사람이 자기에게 보물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하든지 보이려고 합니다. 천국과 영은 내세의 일입니다. 그것을 어느 누구도 보일 수 없습니다. 아니 사람의 이성으로 이것이다. 라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는 굳이 증명해 보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믿던지 믿지 않던지 우리는 분명하게 우리 안에 보물이 있기 때문에 증명해 보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물이 없는 사람은 자기에게 보물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하든지 보이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영의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 영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그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시대 모든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찬송가를 부르고 하는데 우리는 굳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믿음에 의지해서 우리 안에 약속의 씨가 있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하지 않아도 있는데 왜 보이려고 합니까? 사람들이 믿고 안 믿고는 그들의 자유의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보물이 있어서 이 영의 신비한 일이 우리에게 역사를 해서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의지가 되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해서 의지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행위를 하지 말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공항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믿음에 의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 성도는 교회 안에서 그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아도 의지가 되고 있습니다. 내 생명에 대해서 확실한 의지가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리 믿으라고 해도 자기 행위가 의지가 되기 때문에 믿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이 영의 일을 어떻게 의지할 수 있습니까? 행위로 의지한다는 그 자체가 도리어 모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행위로는 의지할 수 없는 일인데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교회 안에서 율법의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영의 일은 믿음이 아니고는 의지가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아니 지극히 일부의 사람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바다 모래 같은 다수의 사람들이 율법의 행위를 하게 되고 그 행위로 인하여 저주를 받는 것을 사도 바울이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으로 해서 부딪힐 돌에 부딪쳤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그리고 행위가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 부딪히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위가 좋아진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과 행위는 서로 조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딪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행위에 빠져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았는데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그리고 율법입니다. 이 둘이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저주를 받아 죽게 하는 것이고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 복음과 율법이 교회 안에서 함께 섞이게 되면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망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둘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의지하느냐에 따라 생명의 복이 임할 수 있고 또 사망의 저주가 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하는 것을 성경은 간음이라고 또 음행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기는 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기는 자가 누군가 하면 이 둘이 우리 앞에 있는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9:33절을 보겠습니다. (252)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보아라, 내가 시온에,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둔다.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과 율법입니다

이 둘의 관계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평생을 음행하면서 살다가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님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의 종이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딪힙니다.

반드시 부딪혀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딪혀서 반드시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설령 이 로마서 강해를 본다 해도 율법을 쉽게 버리지를 못 합니다. 왜 못 버리는가 하면 이제까지 수십 년을 율법에 의지하면서 살아왔는데 그것을 어떻게 쉽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반석이라는 것을 그리고 돌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시대 반석 교회라는 이름과 그리고 돌을 의미하는 교회 이름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왜 그들이 그런 이름을 사용하는가 하면 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시온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온에 있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이제 천국에 계신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행위를 의지하고 있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려고 할 때 돌에 부딪히게 되고 또 반석에 거치게 되어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소망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있어서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부딪히게 되고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하는 사람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이사야가 예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예언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을 모르고 점점 더 율법주의로 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보았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율법을 보고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계속해서 여러 가지의 비유로 율법을 왜 지켜서는 안 되는 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본다고 하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우리 이방인을 위한 예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보면서도 그들과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을 다 비유와 예표로 성경에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왜 믿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천국에 가서 영생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기독교라는 종교가 이 시대는 워낙 샤머니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천국보다는 이생에서 바랄 것이 더 많이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도 이제는 참 많아졌습니다. 아니 시간이 더 흐를수록 사람들은 천국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이생의 것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는 본질을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생의 것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사실 영의 일이라는 것은 아무 느낌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생의 것은 자기가 느끼고 감동을 하고 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그런 사람의 체질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그런 것을 주고 있습니다.

마약입니다

한번 느끼면 그런가 보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점점 더 중독이 되면 사람들은 그 행위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편지에서 예배를 할 때 찬송가를 안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와서 본다면 도무지 이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도대체 아무 감동도 없습니다.

행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마치 마약을 맞는 것과 같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이 되어서 나중에는 그것을 하지 않으면 참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은 찬송가를 불러야 하고 기도를 하는 사람은 기도를 해야 하고 또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런 것을 해야 합니다.

행위입니다

그것이 시온이 있는 돌과 부딪히고 시온에 있는 반석과 거치게 된다는 것을 이 시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단이 무엇으로 사람들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가 하면 행위로 하고 있습니다. 그 행위에 한번 맛을 들이기 시작을 하면 마치 마약을 맞은 사람과 같이 그 행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안 믿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만들고 있습니다.

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약에 취하면 그것을 사람의 의지로 끊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약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도박도 그렇고 담배라는 기호 식품도 마찬가지고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건강이 나빠져도 그것을 끊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술과 담배를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것으로 내가 사망에 이르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설령 마약을 했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는 구원을 받습니다. 육적인 것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끊기가 쉽지 않습니다.

행위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이성에 나쁩니까? 그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성에는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행위라는 마약에 취하게 되면 도무지 끊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술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저는 마약과 같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행위가 부딪히고 있습니다.

그 행위가 거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부딪히고 거치는가 하면 천국에서 그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단 하나의 행위가 천국에서 부딪히고 있고 거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행위의 술에 모두가 취해서 이성을 상실한 대로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3:15절을 보겠습니다. (346)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시온입니다

그곳은 주님이 계시는 천국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는가 하면 영의 일을 믿음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그 영이 구원을 받는 지혜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계속해서 구약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경을 보면 사람들이 오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역, 니은, 디귿이라고 각주를 달아 놓았습니다. 마치 그것만 구약 성경을 인용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성경을 인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그것을 찾지를 못해서 성경학자들이 마치 그것만 인용이 된 것으로 성경을 편찬했는데 사실 그렇게 편찬이 되어 있는 성경을 보고 복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성경에 너무 사람의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 성경을 보면서 마치 그것을 성경의 일부로 생각하는 이상은 절대로 그 안에서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성경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목사들이 신학에서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성경을 보고 교회에서 설교를 하다보니까 도무지 믿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으려면 성경을 성경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성경에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있는 성도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가 하면 구원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믿음에서 난 의가 있는 성도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그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같은 의로운 영이 내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 약속의 씨가 있는 성도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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