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0:1절을 보겠습니다. (신 253쪽)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교회 안에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어느 누구도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있어서 의심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수가 바다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남은 자가 얼마나 적은 가를 성경에서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남은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바다 모래 같은 다수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어서 성경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안 봅니다.
또 성경을 보아도 무시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천국을 원하고 있고 달음박질을 하느라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호세아의 말씀입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어도 성경을 안 보고 있습니다. 아니 그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지혜가 있지만 안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씨를 남겨 두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며 이 세상은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씨가 누군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그 씨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의미의 말씀은 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성경이 아무 필요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행위에 의지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온에 있는 부딪힐 돌에 부딪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스라엘의 일로만 치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그들이 자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자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율법을 지켜서 율법주의고 자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까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의 위로 성자로서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은 것이 되고 자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까 율법을 지켜도 율법주의가 아닌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지킨 것이나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똑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시온에 있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행위를 했습니다.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을 합니까?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었고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그것이 다르다고 생각을 합니까?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 잡혀 있으면서도 성경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는 정말 죽을 때까지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지나치게 많은 탐욕으로 가득한 그런 예배를 드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자기감성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느끼기 위해서 부르고 있는 찬송가와 기도를 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중요하지도 않은 그런 것에 모두가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 넉넉한 시간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람의 총기라는 것이 성경에서 20세 이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먹고 살기에 너무도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일주일에 교회에 한번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버거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까운 시간을 제사를 드리는 일에 모두가 허비를 하고 있습니다.
나이 40세 정도입니다.
그때까지는 정말 먹고 살기에도 버겁습니다. 물론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은 제사에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사람들은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다른 것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는데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합니다.
전도를 합니까?
복음을 전합니까? 물론 우리가 그것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아니 내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하는 구원에 확신이 없다면 다른 것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선 내가 먼저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교제하는 성도님들이 일을 하는 것을 그렇게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먼저 내 스스로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고 난 이후의 문제지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도를 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일 역시도 행위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행위 버리시기 바랍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성경에서 못 알았다면 성경을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어 영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내 안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약속의 씨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벌써 소돔과 고모라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이 시대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경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는 남은 자입니다. 이 남은 자는 율법의 행위를 다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이 남은 자를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는 통해서 하고자 하셔서 긍휼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 마음의 간절한 소원과 내 동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내 기도의 내용은, 그들이 구원을 얻는 일입니다.”
영생입니다
우리 인생은 정말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인생들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겨주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참예를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을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썩어 없어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통해서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영의 신비로움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이 영의 신비로운 생명은 오직 믿음으로 역사를 함으로 해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영으로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 영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영의 일을 알지 못하고 모두가 육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예표와 경계로 해서 우리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빛을 세상에 비춰주셨지만 이방인 역시 영의 신비로운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우리 신체의 구원이 아닙니다. 지금은 기독교 신학부터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신학에서 잘못 배우고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다른 복음을 가르치고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결국에는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입니다.
이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시고 그들의 육체가 아니라 그들에게 새로운 영으로서 구원을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이 영의 구원에 대해서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원하는 바입니다
왜 이 로마서를 기록했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주님이 주시는 영생을 원하지는 않고 사단이 주는 이 세상 영광을 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22:17절을 보겠습니다. (신 423쪽)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내 마음에 원하는 바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이 무엇을 원했습니까? 이 시대는 자기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단 한 가지 생명입니다.
그 외에 교회에서 원하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받았다고 하면서 기도응답에 대한 간증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 사단이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원하는 것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세상 종교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구하면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이 생명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로마서9장에서 약속의 씨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군가를 말씀했습니다.
원하는 바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생명을 원하고 있고 이 생명을 모든 사람들이 받기를 원하면서 자기 육체의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신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이 지구는 사단의 것입니다 이 지구에서 받는 모든 것은 사단의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지구에 있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천국은 하나의 보너스고 이제 이 세상의 것을 어떻게 하든지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바알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확실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다른 것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 종교를 자기들의 믿음으로 건강도 원하고, 재물도 원하고, 출세도 원하고, 명예도 원하고, 자녀도 원하고, 의롭게 사는 것도 원하고 자기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세상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런 것을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원하지 않는가 하면 하늘에 있는 보화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보배가 지금 내 안에 있는데 이 세상에서 그런 모든 것을 가진다 해도 내 안에 있는 보화와는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뭐가 귀한가를 모릅니다.
우리 육체의 생명이 귀합니까? 우리 건강이 귀합니까? 재물이 귀합니까?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귀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히 귀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입니다. 그 죽은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우리에게 이 생명의 씨를 주셨습니다.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과 이것을 바꾸겠습니까? 이 세상 종교도 꿩 먹고 알 먹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세상 종교보다도 못하게 이 세상의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그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교회마다 기도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만 있으면 특별 새벽기도라고 하면서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해도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성도와 가라지입니다
교회 안에는 분명히 성도와 가라지가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라지가 사람들의 이성에는 정말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과 같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 세상의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원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로마서9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약속의 씨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구하고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을 위해서 구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기 동족이 모두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육신의 자녀인 것을 보고 그들의 구원을 원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그 외에 것을 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렇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살려고 한다면 더 이상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원해야 합니다.
천국에서 생명수를 먹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생명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원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 생명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생명을 약속의 씨라고 하지만 영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시편34:12절을 보겠습니다. (구 825쪽)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생명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원하는 것은 다른 것 없습니다, 그가 이방의 사도로 복음을 전하면서 바라는 것은 오직 이 생명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이방인들이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배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믿지를 않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단 한 가지의 이유입니다. 그것 외에 것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차라리 세상에 종교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죄인으로 사는 것보다 교회 안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더 불행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성경을 우리는 정말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생명을 원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바다 모래 같은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런 사람이 없다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역시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 있는 바다 모래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원하는 사람이 아주 많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를 보면 원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이 보일지라고 실제로는 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입니다.
성경에서 없다고 하면 없습니다. 성경에서 원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자기들의 생각을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렇게 못해도 자기들만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까? 우리 역시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성경에서 아무리 이런 경계의 말씀을 해도 사람들은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혀 듣지를 않은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생명을 사모하는 자가 없었어도 우리는 생명을 사모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역시 생명을 사모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 생명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부터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이라고 오직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또 다른 생명과 저주가 있는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가 원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교회 안에는 성도가 그렇게 많지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을 비유로 하다보니까 사람들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을 3분의 1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막연하게 달란트를 남긴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비유를 모르면 모두가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 그리고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많아서 달란트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입니다. 이 모든 것은 숫자는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만 보더라도 이 달란트의 비유가 무엇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시대 교인들에게 이 달란트의 비유가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설령 이것이 생명이라고 해서 이 생명을 어떻게 얻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대표성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이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두려워하여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맡기신 달란트를 도로 주님께 드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쫓아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종이 왜 무익합니까? 율법에 대한 다툼은 무익하고 헛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종이 누군가 하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이 무익한 종과 같아서 달란트를 남길 재능을 주셨지만 자기 땅 속에 감추어 둔 사람입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말 간절한 사람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니 어려서부터 소설과 책을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도 거의 모든 사람인 어려서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을 보았습니다.
그 주인공이 램프를 얻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런 동화에 이미 자기 이성이 마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것을 성경에서 알고 있습니다.
램프의 요정이 아닙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자기의 아버지라고 하는데 무엇을 못 들어 주시겠습니까? 그러다보니까 교회 안에 들어와서 자기가 원하는 소원이 너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살인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다른 것을 구하지 않고 생명만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것을 구하면 뭐합니까?
그가 살인한 자가 되어서 사망에 이른다면 그가 구한 모든 것은 바람과 같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 살인한 자는 다른 것을 원하지 않고 오직 생명에 대해서만 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그렇게 모두가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되어서 세상의 것을 구하다가 결국에는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에 원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무엇을 위해서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까? 그는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산의 수고를 할 정도로 복음을 전해서 그들에 구원을 받게 인도를 했습니다.
누가복음5:39절을 보겠습니다. (신 98쪽)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묵은 포도주입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입니다. 이 묵은 포도주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도 거의 모든 목사들이나 사람들은 이 묵은 포도주가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이 누구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만 바리새인이 있었고 이 시대는 바리새인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고 있는 모든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인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만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 역시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미리 아시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다고 하셨으면 이 시대 역시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은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었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자기들은 새 것을 원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이 시대 역시 없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묵은 포도주입니다.
그것은 율법입니다. 그리고 새 것은 성령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것을 원해야 내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도 성경을 어느 정도 본다고 하는 목사들은 묵은 것이 율법이고 새 것이 성령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지기들이 모두가 성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새 것을 원해서 성령을 받은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두 가지를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묵은 것도 마시고 새 것도 마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묵은 것을 원하는 자는 묵은 것을 하게 되어 있고 새 것을 원하는 자는 새 것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새 것과 묵은 포도주를 함께 부대에 넣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묵은 것과 새 것을 분명하게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원합니까?
새 것을 원하고 있습니까? 묵은 것은 낡은 부대에 넣어서는 안 됩니다. 또 묵은 것을 새 부대에 넣어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새 것을 새 부대에 넣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새 것을 새 부대에 넣은 사람이 없습니다.
묵은 포도주입니다
그것은 율법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입니다. 그것은 성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묵은 부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 부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에 대해서는 모를지라도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묵은 것을 새 부대에 넣어서도 안 됩니다. 또 묵은 것을 묵은 부대에 넣어서도 안 됩니다. 묵은 것을 묵은 부대에 넣으면 그것은 묵은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새 것을 묵은 부대에 넣으면 터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의 일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성경을 보아도 이 비유를 모르니까 도무지 무슨 말씀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다는 말씀은 묵은 것을 마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묵은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새 것을 원하고 있습니까? 묵은 것이 없어야 새 것을 원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 안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묵은 것이 분명히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말 합니까?
자기들은 새 것을 원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묵은 것을 묵은 부대에 넣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으로 마치 새 것을 새 부대에 넣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다보니까 자기들이 하는 말을 모르고 말과 그들의 행위가 전혀 다르게 하고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새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묵은 것과 새 것을 혼합을 해서 부대를 터뜨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난 영을 모르니까 묵은 포도주를 묵은 부대에 넣고 있으면서도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원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 시대는 원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단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만 보아도 원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만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원하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
이 시대는 기독교인들은 정말 말과 행동이 전혀 다릅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하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없으면서도 아니 분명히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은 묵은 것을 내어 버렸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언행일치입니다.
말과 행동이 같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모르다보니까 언행일치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말로는 자기들보다 더 언행일치를 하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그들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묵은 부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묵은 포도주입니다. 그것은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내 육체로 율법의 행위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 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모두가 종교에 빠져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생명밖에는 없습니다. 성경은 이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하면 성경을 보면 복음이 보이고 그 복음을 봄으로 해서 믿을 수 있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 살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묵은 포도주를 가지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사람들이 묵은 것을 좋아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는 묵은 포도주를 묵은 부대에 넣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주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 진심이라고 해도 성경을 모르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감성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우리 인생들을 감성에 빠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는 것이 아니라 대충 보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새 것을 새 부대에 넣고 있는 새 것을 원하는 자라는 것을 감성적으로 느끼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단입니다.
그가 어떻게 미혹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막연하게 성경의 문자를 보고 자기는 새 것을 새 부대에 넣고 있는 것으로 느끼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새 것이고 새 부대가 무엇인가를 알고 또 묵은 포도주와 묵은 부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데 사단은 막연하게 사람들의 이성을 빼앗아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 거기에 속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을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것을 명확하게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막연하게 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막연함을 이용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리새인인은 묵은 것을 묵은 부대에 담다가 망했고 이제 너희는 새 것을 새 부대에 담고 있다고 하면 모두가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모두가 사단에게 이성을 빼앗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묵은 것으로 묵은 부대에 담게 함으로 해서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에서 육체의 일이 성령을 대적함으로 해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이 육체의 일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거의 모든 교회가 다 육체의 일에 빠져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이방인들에게 자기 마음에 원하는 것을 전했지만 이 시대 이방인들은 묵은 것으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next 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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