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9:27절을 보겠습니다. (신 252쪽)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육의 일로 보고 있습니다. 또 교회 안에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좋은 의미는 교회 안에 자기들이 하고 있고 나쁜 의미는 세상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그 영혼이 망하는 길로 가기도 하고 또 영생을 얻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어 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이 된 그대로 율법을 지키고 또 제사를 드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누가 보아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역시 이스라엘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굳게 믿고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족보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조상들이 아브라함이고 이삭이고 야곱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게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굳게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하면 그들도 역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화를 낼 것이 분명합니다.
육신의 자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육신의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족보가 확실한 이스라엘도 그렇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다 육신의 자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면 그 백성이 누가 됩니까?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호세아서를 보아서도 잘 알고 있지만 육신의 자녀는 어떻게 살았는가 하면 모두가 음란에 빠져 있고 음행을 하면서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입니다
사람의 육신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육신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는 그런 행위들을 보면서 그 육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어떻게 해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육신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가 하면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은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만 하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시대 역시 우리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고 있지만 영의 생명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음행과 음란에 빠져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고 보면 맞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라는 여자와 음행과 음란을 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음행과 음란이 무엇인가 하면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와 그 안에서 하고 있는 사람의 열심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호세아 선지자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음행을 하지 않는 교회가 하나도 없으면서도 성경을 보면서도 음행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심지어는 세상 사람들이 성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고 음행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누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부터를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지만 자기들이 육적으로 음행을 하지 않은 것으로 호세아서의 이스라엘과는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또 음행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죄를 다 지고 가셨다고 하면서 고백하는 회개를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입니다
성경을 보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음행을 하고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죄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안에 영이 탄생이 되고, 되지 못하는 일은 영적인 죄로 인하여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갈라디아에서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노릇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라고 말씀하면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우리가 났다고 하면서 사라를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 진짜 나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그 영이 주님이 오실 때 부활을 해서 신령한 몸을 입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름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우리 성도가 가는 곳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 즐거움을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육신으로는 그 즐거움을 느낄 수 없습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 무미건조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하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무미건조한 영의 일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육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이 육신에 대해서는 말씀을 하고 있지만 반드시 죽고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육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고 그 영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또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두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을지라도, 남은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육신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삭과 같은 약속의 씨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의 씨는 우리 육신이 아니라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난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해서 어떤 사람들이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를 허물하겠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떻게 말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면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고 따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면 나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그러면 하나님을 믿을 이유도 없고 그냥 포기를 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그런 기회도 주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문장의 연결을 바로 알고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지금 보고 있는 말씀만 보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세상 말로 쌩뚱 맞는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계속해서 그 말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냐고 힐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그러면 우리는 아무 할 일도 없고 그저 로봇과 같이 그렇게 정해진 삶을 살아가야 하느냐고 하면서 운명론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성경을 보면서 영생을 얻기를 위해서 상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성경을 성경으로 안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 다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를 인용을 하고 있고 이사야서를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영의 일에 대해서 성경에 다 말씀을 하고 있지만 문제는 너희가 지혜를 구하지 않아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 하나님을 힐문하는 자들에게 사도 바울이 호세아서와 이사야서를 인용을 해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10:22절을 보겠습니다. (구 980쪽)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나 그 주권이 성경에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누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 사람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누군가를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면 뭐 합니까?
그들이 성경을 안 보고 있고 성경을 보아도 소경이 되어서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말씀을 보면서도 자기 육체를 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고 있고 심지어는 그 육신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성경과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를 보았습니다.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성경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호세아의 말씀을 보면서도 이것을 이스라엘의 일로만 치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음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 주셔서 저희를 불러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고 있지만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힐문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성경을 성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성을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입니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고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들에게 약속을 하신 대로 자기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지금 자기들이 가나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들은 다 음행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려고 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일어서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 기독교라는 종교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 역시 똑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말이 됩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이스라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누구입니까? 모두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 딴에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하는 그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100만 명 정도는 될 것 아닙니까? 아니 이성이 있는 장정만 해도 최소한 10만 명 이상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10만 명 중에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 우리나라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몇입니까?
1000만 명입니까?
그런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으면 이 시대도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입니다
바다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바다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남은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 남은 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대 모래와 같은 사람들 중에서 남은 자라고 하니까 얼마나 적습니까? 바대 모래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바다 모래를 누가 셀 수 있습니까? 아무도 세지 못하지만 남은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수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수에 치지도 않고 있습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지금 이 시대 육적으로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스라엘은 우리 이방인의 예표고 그들이 한 모든 행위는 우리에게 경계가 되고 있습니다.
예표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으면 우리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이스라엘만의 일이라면 사도 바울은 호세아서의 말씀을 그리고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만의 일을 왜 우리에게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합니까?
경계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 역시 그렇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도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이스라엘만의 일이라면 사도 바울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성경에 기록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이방의 교회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예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행위를 경계로 해서 우리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고 있는 이방인 역시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음행에 모두가 빠져 들어가 있습니다.
미가4:6-7절을 보겠습니다. (구 1294쪽)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받게 한 자를 모아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막연하게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니까 막연하게 자기들이 남은 자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남은 자가 누군가를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남은 자라고 해도 성경에서 남은 자가 누군가를 모르고 있다면 그는 남은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이 시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나라만 해도 천만 명이라고 하고 있고 세계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수십억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면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숫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보다 더 많은 바다 모래를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다 모래 같이 많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말씀하는 것은 이 시대 역시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적습니다.
얼마나 적은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호세아서나 예레미야서나 다른 성경을 보아도 아주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시대에 몇 사람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때에만 많은 사람을 구원을 하시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이제 이방에 막 복음이 전파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가 지나고 나서 교회사를 보면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회사를 보면 복음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다수입니까?
제가 소수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숫자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이 시대 역시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남은 자가 누군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이 문제는 정말 우리가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는 실수를 해도 용납이 되고 또 그 실수에 대한 고통을 자기가 육체로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영의 일은 내 생명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너무 막연하게 자기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저 남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어떻게 받을 수 있고 누가 받는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지만 성경을 안 보고 있고 또 문제는 그들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소경이 되어 이 세상 초등학문을 보듯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남은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수가 바다 모래 같습니다. 이 시대 역시 바다 모래 같은 숫자의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아니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모인다면 정말 바다 모래와 같이 많은 사람일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스바냐3:19절을 보겠습니다. (구 1309쪽)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갈라디아서6: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저는 자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성경이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데 그 말씀을 성경에서 깨달을 수 없다면 우리는 성경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성경을 편찬하는 사람들이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경그대로 편찬을 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성경에서 그 답을 찾기가 너무 어렵게 성경을 편찬해 놓았습니다.
저는 자가 남은 자입니다
그 저는 자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가 되려면 반드시 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누가 저는 자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괴로움을 받고 있는 자가 저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스바냐서입니다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괴로움을 받고 있는 저는 자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을 받고 있는 자가 저는 자입니다
그 저는 자가 남은 자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다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는 자는 반드시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괴롭기 때문에 절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괴로우면 저는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정말 이 시대는 율법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너무 고착화 되어 있습니다.
제가 세상 법을 지키지 말라고 합니까?
성경도 세상 법을 지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방종을 하면서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씨가 있는 약속의 자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비록 구원과는 상관이 없어도 우리는 그 부탁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행해야 합니다.
괴롭게 하는 자를 벌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괴롭게 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는 누가 자기를 괴롭게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율법주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괴롭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우리를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율법이 전혀 괴롭지가 않습니다. 이미 그것이 우상이 되어 있는 그들에게는 괴로운 것이 아니라 우상입니다 그 우상이 되고 싶어 하는데 괴로울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자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 저는 자가 남은 자입니다 그런데 누가 저는 자인가 하면 괴로움을 받고 있는 자가 저는 자입니다 율법으로부터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볼 때 저는 자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율법을 안 지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반드시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율법이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전혀 괴롭지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이 괴로운 사람만이 저는 자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괴롭지 않으면 절대로 저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얼마나 괴롭습니까?
사람의 이성으로 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보니까 율법을 지키면 안 됩니다 정말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벌 하셨습니다. 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받던 저는 자를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괴로움을 받는 성도만이 저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괴로움을 당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괴로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로부터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생각은 율법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오직 복음을 믿는 성도만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 괴로움을 당하겠습니까?
율법주의자는 바다 모래 같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성도는 남은 자입니다 누가 괴로움을 당하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제 처음 복음을 듣게 되면 이제까지 교회에서 들어왔던 말들이 생각이 나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에게 복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면 율법주의자들이 자기 말을 듣고 굴복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율법주의자들을 이기지 못 했습니다 그들에게 고소를 당해 결국에는 로마에 있는 법정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반드시 율법에 의해서 괴로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습니다.
우리는 저는 자입니다
왜 저는 자인가 하면 율법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으로부터 누가 괴로움을 당합니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율법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 율법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을 당하는 그것이 우리가 저는 자라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 저는 자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저는 자로 남은 자가 되게 하셔서 구원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스라엘의 수가 바다 모래 같습니다. 아니 이 시대 기독교인의 수가 바다 모래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저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해서 세상이 볼 때 우리는 저는 자가 되었습니다.
남은 자입니까?
반드시 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저는 자가 누군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율법주의로부터 괴로움을 받고 있는 자가 저는 자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해서 고난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가 저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힐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그 긍휼히 여기는 자가 누군가를 성경이 다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을 하면서 그 남은 자가 누구라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 구원을 못 받습니까?
결국에는 자기들이 성경을 안 보고 있는 것이고 또 성경을 보았으면 지혜를 구하고 성령을 구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를 않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힐문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들이 없다면 하나님을 힐문해도 되겠지만 성경을 주셨는데도 안 보고 있고 지혜를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는 자입니다
왜 저는 자인가 하면 율법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율법으로 괴로움을 당하기보다는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를 하면서 괴롭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단 한 가지의 율법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왜 써서 보냈습니까? 할례라는 한 가지 율법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할례를 받는 갈라디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후로는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스바냐3:13절을 보겠습니다. (구 1309쪽)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남은 자입니다
로마서를 보고 막연하게 내가 남은 자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보면서 자기들이 남은 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도 안 보고 목사가 하는 말에 거의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 교인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수가 바다 모래 같을 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자입니다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남은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 육체를 말씀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성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는가를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시대 기독교는 자기들의 신체가 구원을 받는다고 교리로 세워 놓고 있고 그것이 성경과 다르더라도 누구 하나 그 교리를 반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남은 자가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원히 산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남은 자가 되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남은 자가 되라고 하면 도리어 화를 냅니다.
아니 이단이라고 공격까지 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이 시대는 구원을 받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면 우리는 반드시 남은 자가 되어야 하고 그 남은 자가 누군가를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그 남은 자가 누군가를 가르쳐 주고 있지만 성경을 안 보고 있습니다.
아니 남은 자를 가르쳐 주면 뭐라고 합니까?
성경을 알레고리하게 해석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남은 자가 누군가를 찾아서 말씀을 하면 도리어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교리에 포승으로 묶여서 꼼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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