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9:21절을 보겠습니다. (신 252쪽)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토기장이에게, 흙 한 덩이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데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성경입니다
늘 성경을 보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성경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미천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정말 이 시대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제가 아는 것은 선지자들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는 것을 늘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잘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문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문자를 보고는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게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그것은 이 세상 초등학문을 아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이상하게 알레고리하게 성경을 풀라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은 성경이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또 성경은 문자보다는 그 문자의 이면에 있는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볼 때는 너무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사람의 이성은 도리어 성경을 아는데 있어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입니다
아마도 이 말씀을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굳이 이제까지 신학자들이 쓴 주석이나 강해를 안 보아도 그들의 생각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로마서 강해를 들으신 분들은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로마서 9장은 13절까지가 내용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 그런즉, 16절에서 그런즉, 18절에서 그런즉, 30절에서 그런즉으로 내용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18절부터의 말씀이 계속적으로 연결이 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는 것을 먼저 알고 나서 이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어떻게 말씀을 했습니까? 우리 인생은 모두가 강퍅하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렇게 강퍅한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누가 긍휼이 여김을 받습니까?
가난한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가난한 자가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을 힐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입니다
그 물건이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누구입니까? 우리 인생 모두는 지음을 받은 물건입니다. 교회 안에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역시 지음을 받은 물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물건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 안에서 있을 수 있는 말을 스스로 질문과 대답을 하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질문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 문제가 되는 말씀입니다
아니 목사들이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누구라고 하기에 참 좋은 말씀입니다. 누군가 질문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오직 예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택하심을 따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말 합니다
그러면 기회가 안 주어진 사람들은 불행한 것 아니냐고 하고 하나님께서 기회조차 주시지 않는데 불의하신 것 아니냐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성경에 하나님께서 진흙 한 덩어리로 귀히 쓸 그릇을 만드시고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셨다고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귀히 쓰셔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 합니다
비교법과 같이 보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는 21절은 비교법과 같이 보이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다 비교법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은 귀히 쓸 그릇으로 만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세상 사람이나 이단에 있는 사람들은 천히 쓰는 그릇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비교법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는 성경을 잘 보아야 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비교법으로 보고 자기들은 귀히 쓸 그릇이고 자기들과는 다른 사람은 천히 쓸 그릇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히 쓸 그릇이 되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귀히 쓸 그릇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창세기3:19절을 보겠습니다. (구 4쪽)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하나님께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흙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진토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영의 일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로마서9장의 말씀은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13절까지가 내용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삭과 같은 약속의 씨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통해서 리브라가의 배 속에 있는 야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역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귀히 쓸 그릇입니다
디모데후서에서 그릇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후서는 디모데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디모데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9장은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생명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에 그런즉 하면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약속의 씨로 여기심을 받는 그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이 말씀을 보고 사역을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강퍅한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긍휼히 여기심을 받으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가 하면 그 안에 약속의 씨가 탄생이 되고 그 씨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음을 받은 물건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음을 받았습니다.
진흙으로 지음을 받은 그 물건이 구원을 받습니까? 이 시대는 신체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까 적당하게 맞을 수 있습니다. 신체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이 말씀이 아주 적절하게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체의 구원이 아니라면 우리는 다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진흙 한 덩어리입니다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분이니까 그 진흙 한 덩어리로 구원을 받을 그릇도 만들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그릇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진흙 한 덩어리로 누구를 만들었습니까?
아담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담은 어떤 그릇입니까? 천히 쓰는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진흙으로 다른 사람을 만들어서 그 사람이 선악과를 안 따먹었다면 귀히 쓸 그릇을 만드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흙 한 덩어리로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 아담이 귀히 쓰는 물건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은 버리는 그릇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버리는 그릇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흙 한 덩어리로 만드신 그릇은 다 버리는 그릇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귀히 쓸 그릇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천히 쓰고 버릴 그릇을 만드셨다는 것을 창세기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역과 생명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로마서는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흙 한 덩어리로 만든 아담이 생명이 있습니까? 그 그릇은 천히 쓰고 버리셨습니다.
천히 쓰는 그릇입니다
왜 천히 쓰는 그릇인가 하면 그 그릇은 강퍅하기 때문에 천히 쓰고 버리는 그릇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흙 한 덩어리로 만드신 그릇은 귀히 쓰는 그릇이 없습니다. 로마서의 말씀을 보고 마치 귀히 쓰는 그릇을 만드신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흙 한 덩어리입니다
모르겠습니다. 두 덩이라면 귀히 쓸 그릇을 만드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진흙 한 덩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을 만드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진흙 한 덩어리로 귀히 쓸 그릇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아담 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그릇이 없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라는 것을 성경을 보았으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아담 한 사람을 지으셨는데 이 시대는 다른 그릇을 또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다 아담의 자손입니다. 우리는 진흙 한 덩어리로 만든 아담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사람을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로마서를 보고 자기 그릇이 귀히 쓰인다고 하면서 자기 그릇은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으로 만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진흙 한 덩어리로는 아담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그릇은 귀히 쓰는 그릇이 아니라 천히 쓰는 그릇으로 버리셨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자기 생각을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그 말씀에 있는 단어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귀히 쓸 그릇은 없습니다.
아담을 흙으로 지으셨지만 그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으로서의 역할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천히 쓸 그릇을 긍휼히 여겨주셔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도 긍휼히 여김을 받으려 하기 보다는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 해서 부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20:24절을 보겠습니다. (신 223쪽)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우리의 생명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아담의 자손은 귀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귀히 쓸 그릇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아담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입니다
얼마나 자기 생명에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불교인들보다도 더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도 귀한 것이 없는데도 이 시대는 생명에 대해서 너무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신체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더욱 더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자기 신체가 귀히 쓸 물건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덩이라 진흙입니다
그 진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그 아담에게서 우리 인류가 탄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 중에 어느 것이 귀하고 어느 것이 천한가를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영의 일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육체를 귀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귀한 물건을 더 귀하게 하려고 율법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이 영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하나도 귀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귀한 것으로 쓸 그릇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진흙 한 덩어리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이 시대는 너무 세속적입니다
아니 세상 적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자기 생명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애착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죽을 병이 들었는데도 하나님께 그 생명을 살려 달라고 떼를 쓰고 있습니다. 죽을 병이 들었으면 이제 천히 쓴 그 그릇을 버릴 줄 알아야 하는데 불교인들도 하는 것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귀히 쓸 그릇이 아닙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는 우리 생명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정말로 귀하게 쓸 그릇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에 있어서는 그 그릇은 천히 쓸 그릇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천히 쓸 그릇을 하고자 하시는 대로 긍휼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지만 사람들은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죽음입니다.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청년의 때를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오십이 넘어가고 육십이 넘어가고 있으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병이 들었으면 이제 하나님께 더욱 더 은혜를 구하면서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그저 육체를 위해서만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자손입니다. 성경은 두 씨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인 육신과 하나님의 자녀인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은 진흙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말씀 그대로 영입니다. 진흙으로 지은 육체는 천히 쓰는 그릇이라면 영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있습니다.
성도는 육체에 애착하지 않습니다.
설령 내일 죽음이 찾아온다 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은 어차피 하나님께서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애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그 안에 약속의 씨가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육신의 자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육신의 자녀는 귀히 쓸 그릇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잠깐 쓸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흙 한 덩어리로 귀히 쓸 것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천히 쓸 것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에게 지금 이 시대도 긍휼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예레미야2:21절을 보겠습니다. (구 1052쪽)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택하심을 받은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네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약속의 씨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육체의 이삭이 아니라 약속의 씨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씨를 심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영의 일을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성막을 짓게 하셨지만 그 성막을 보고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도리어 저주를 받는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행음을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지만 그들은 믿지를 않았습니다. 아니 복음의 씨를 뿌려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씨가 자라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영의 일을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보다 더 육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귀하지도 않은 진흙 한 덩어리로 지은 그것을 귀하다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부르고 있는 찬송가나 복음성가가 얼마나 비 성경적인가를 모르고 자기 신체가 귀하다고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약속의 씨를 심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육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 말씀을 보고 마치 육체의 이스라엘을 말씀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약속의 씨인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이삭을 통해서 야곱을 낳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창세기에서 보고 있는 육체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삭도 야곱도 육신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의 씨를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의 씨가 아닌 육적인 이스라엘의 자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습니다.
악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일이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씨를 심어 주셨지만 그들은 이방과 같이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세상 국가, 사회는 모두가 율법주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법치 국가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법입니다
국가는 법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왕정 국가가 됨으로 해서 더 빨리 율법주의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율법주의를 향해서 가고 있었지만 왕정국가가 되니까 이제 국가가 법에 의해서 통치가 되어야 하니까 법에 익숙해 졌습니다.
육체는 악합니다.
육체를 보고 귀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육체는 천히 쓰는 그릇이라서 악합니다. 율법을 지키기를 원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136:23절을 보겠습니다. (구 902쪽)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현대인의 성경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비참한 처지에 있었을 때 우리를 기억하신 분에게 감사하라. 그의 사랑은 영원하다.”
우리 인생입니다
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알면 뭐합니까?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고 하니까 자기 신체를 기억하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비천한데 있는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을 감사하라고 하는데 자기 육체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육체의 일로 생각하면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모든 말씀도 우리의 영의 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육체의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육체가 비천한데 있다가 조금 높아지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육체를 높여 주십니까? 사단은 우리를 높여 줄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안 높여 주십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 육체를 높여 주시는 것으로 그것을 얻기 위해서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습니까?
조금 높아지면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들었는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천히 쓸 그릇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 기도를 사단이 들어주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하나님이 들어 주셨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감사가 아닙니다.
멸시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도 않은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감사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기억하시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육체는 비천한데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약속의 씨가 탄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비천함을 기억하셔서 영원한 생명이 있는 약속의 씨를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힐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음을 받은 물건입니다.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힐문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를 하자마자 그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보다는 도리어 악한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세 전에 예정이 안 되어 있다면 혹시 우리는 하나님을 힐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천히 쓰는 그릇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그 그릇에 귀한 보배를 넣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영원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배를 모르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7절을 보겠습니다. (신 289쪽)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천히 쓰는 그릇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은 처음부터 영생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따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는 지음을 받은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처음부터도 우리가 그렇게 탄생이 되게 하셨을 수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물건을 만들 때 우리의 생각을 가지고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물건이 우리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따지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더구나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진흙 한 덩어리로 아담을 지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지으신 것이지 천히 쓰고 버리기 위해서 지으신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사랑을 하시고 있습니까? 우리는 비록 천히 쓰고 버릴 그릇입니다. 그러나 이 그릇 안에 보배를 넣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입니다. 비록 우리는 질그릇으로 천히 쓰게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보배를 넣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창세기에서는 아담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으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영의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 역시도 인간인지라 이것을 설명하는데 있어 한계가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제 진심입니다. 저보다 복음을 더 잘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사람에게서 듣고 싶습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늘 생각하는 것이 제가 희미하게나 알고 있는 복음을 조금 더 밝히 보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보배입니다
그 보배가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이 보배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솔직히 부족한 것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설명한다는 것이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천히 쓸 그릇입니다
우리 육체를 가지고 귀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육체가 귀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 가치를 높이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들어온 사람이 와서 봐도 감동을 받을 예배를 드리고 있고 찬송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인격을 주장하면서 육체의 가치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어차피 천히 쓸 그릇입니다. 그 그릇에 보배만 있으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다 비천하게 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취급을 해도 우리 안에 보배만 있으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육체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 보배가 얼마나 귀한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말로는 잘합니다.
그러나 행위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고 있습니다.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갖 미사여구를 쓰면서 찬양을 한다고 하는 그들이 행위로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그릇이 비천해야 보배가 들어올 수 있는데 지금 기독교인들은 보배가 들어올 수 없게 자기 육체의 가치를 너무 높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 외에는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 생명까지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게 못 박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 보배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가졌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우리 육체의 생명은 천히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보배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영이 주님이 오시는 날에 하늘에 신령한 것을 입고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9:22절을 보겠습니다. (신 252쪽)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노와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당장 부수어버려야 할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아주셨습니다.”
이제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흙 한 덩어리로 만드신 그릇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뒤에서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진흙 한 덩어리로 귀히 쓸 그릇도 만드시고 또 천히 쓸 그릇도 만드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해석입니다
이제까지의 로마서 강해를 보면 얼마나 그 해석이 잘못 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한 목사가 그렇게 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거의 모든 목사들이 하나님께서 진흙 한 덩어리로 귀히 쓸 그릇도 만드시고 천히 쓸 그릇도 만드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진흙 한 덩어리로 그릇을 많이 만드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진흙 한 덩이라고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토기를 만들 때도 물론 진흙을 전체를 반죽을 합니다. 그러나 그릇을 만들 때는 한 덩어리로 하나의 그릇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만들 그릇을 알고 큰 흙에서 덩어리를 떼어 내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진흙입니다
진노를 받아야 합니다. 아담이 범죄를 한 순간에 이 진흙은 진노를 받았어야 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힐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그렇게 만들었어도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그 안에 보배를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모두가 진흙 한 덩어리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씨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진흙은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진노를 받아야 하는 그릇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진노를 받아야 하는 그릇을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노의 그릇입니다
우리 중에 귀히 쓸 그릇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왜 진노를 받아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에 진노라는 말씀이 있어도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4:15절을 보겠습니다. (신 244쪽)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갈라디아서5:3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진노의 그릇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율법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에덴에서 살다가 율법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뼈 속부터 율법주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부터 우리는 율법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에 누가 처음부터 복음을 알고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성경의 선지자들을 보아도 누가 복음을 알고 태어났습니까?
우리는 율법주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때에 복음을 알았습니까? 아니 복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다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왜 율법이 진노를 이루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왜 율법은 진노를 이루고 있는가 하면 율법을 하나를 지키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켜야 하는 의무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고 싶어서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까? 성경이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율법을 하나를 지키면 성경에 있는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못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율법에 의해서 진노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복음을 깨달았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우리는 율법을 지켰습니다. 아니 이 세상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이 법에 의해서 살았습니다. 우리 육체는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릇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같은 진흙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진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노를 받아야 하는 그릇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그릇들을 오래 참으셔서 구원을 받게 하시고 있습니다.
율법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율법을 알면 우리는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율법을 보고 죄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보고 부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계시가 되기까지는 우리는 어떻게 해도 율법으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진노의 그릇이었다는 것을 율법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십계명을 지켰습니까?
제발 웃기는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느 한 계명도 지키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 율법을 지키면서 우상을 숭배하고 있고, 간음을 하고 있고, 살인을 하고 있고, 도적질을 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제 와서 보니까 하나님께서 정말 오래 참으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의 능력을 알게 하시고자 멸하시기로 준비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시고 있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약속의 씨가 있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힐문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알면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니까 하나님이 어떻다고 하면서 힐문을 하고 있지 성경을 알면 우리는 성경에서 사랑이신 하나님을 더 알아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알아 그 긍휼을 받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진노의 그릇으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진노의 그릇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귀히 쓸 그릇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육체를 보면서 귀히 쓸 그릇이라고 하면서 그 육체로 도리어 악을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만약에 사랑을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 진노의 그릇들을 벌써 멸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영생을 붙잡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next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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