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90-1,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윤주만목사 2025. 1. 18. 08:46

로마서9:20절을 보겠습니다. (252)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선택입니다

이 시대는 무조건적인 선택의 교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선택의 교리를 아주적절하게 이용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태함을 제공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적인 선택을 받았다는 그것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을 받았으니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선택에 대해서 제가 부정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교리를 이용하여 나태함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선택에는 반드시 왜 선택을 하셨는가가 따라오고 있고 또 누구를 선택하셨는가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성경은 무조건적인 선택을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주권은 하나님께 분명히 있지만 선택을 받은 자가 누군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택하심을 자기에게 이롭게 해석을 하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너무 막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선택을 받은 사람은 끝까지 견인을 해 주시니까 자기가 어떻게 살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행위에 열심을 내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복음을 아는데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택을 받은 자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선택을 받았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분명히 이 말씀만 보면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 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으로 이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9장을 보면서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무조건 적인 선택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이 말씀만 가지고 선택을 했다는 것은 너무 막연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분명히 맞지만 그 하고자 하시는 자가 누군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긍휼이라는 것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성경에서 누가 긍휼을 받은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택하심을 따라 되었습니까?

거기에는 반드시 긍휼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긍휼을 입은 자만이 택하심을 따라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긍휼에 대해서 전혀 모르면서 자기들이 택하심을 입은 성도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택하심을 입었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셨는데 그것이 나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문자를 알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긍휼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누가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까?

사전적인 뜻이 가엽게 여겨서 돕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엇을 가엽게 여겨서 돕고 있습니까? 내가 긍휼을 입은 자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내가 택하심을 따라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십계명의 한 계명도 지키지 못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십계명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지키고 있으면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어서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성경과 전혀 맞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긍휼을 모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셨다고 하니까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이 허물을 하실 수 있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누가 긍휼을 입은 자고 또 왜 하나님께서 긍휼을 주시는 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셨다고 하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을 하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겼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하나님은 완전히 엿장수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겼는데 누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가 하면 십계명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은혜를 구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조건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것이 누군가 하면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자를 그렇게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아무 사람이나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십계명을 보았는데 자기가 그 계명 중에 어느 한 계명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왜 오셨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실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 가난한 자가 아니라 성경을 보니까 내가 십계명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자라는 것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그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다 강퍅합니다.

왜 강퍅한가 하면 십계명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강퍅합니다. 법아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강퍅합니다. 모두가 다 강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강퍅한 자 중에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는 아직 강퍅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그 하고자 하시는 자가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말합니다.

그 뜻을 누가 대적하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십계명을 지키고 있는 자기들이 그 뜻을 대적하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알고 주권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인정을 하는 그들이 사실은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 사람아, 그대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감히 말대답을 합니까? 만들어진 것이 만드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안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안다고 해 보아야 겨우 구원을 받을 정도의 지혜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그리고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어떠한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겨우 구원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성경은 보면 볼수록 그리고 그 깊이를 알면 알수록 놀랍다는 말씀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저 역시도 그 깊이에 더 많이 들어가고 싶지만 늘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누구기에 감히 트집을 잡아 따지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힐문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힐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자기 마음에서 인정이 안 되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서 힐문을 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힐문할 수 없습니다. 왜 힐문을 해서는 안 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게 모든 것을 계시를 해 주셨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보다는 자기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다가 스스로 정죄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셨습니까?

그럼 저 사람은 긍휼히 여김을 받고 나는 아직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까? 그러면 구하시기 바랍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가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고 이해가 안 되면 그것을 가지고 힐문하지 마시고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역시 힐문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이해가 안 되는 말씀들이 있으면 왜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셨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은 불의하시다고 하면서 힐문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엿장수로 만들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입니다.

누가복음11:53절을 보겠습니다. (114)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볼 때 죄인이고 하나님을 잘 믿지 않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만나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상해 있습니다.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구를 만나고 있습니까? 죄인들과 세리들을 만나시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고 계십니다. 그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상해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자기들을 만나셔야 하는데 도리어 죄인들을 만나시고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도리어 주님께서는 화 있을찐저 바리새인들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힐문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천국 복음을 모르면 은혜를 구해야 하는데 자기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트집을 잡고 따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지금 왜 예수 그리스도를 힐문하고 있습니까? 율법을 잘 지키는 자기들은 영접하시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을 만나주시고 있고 더구나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자기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힐문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역시 십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자들은 하나님께 힐문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하면 율법을 잘 지키는 자기들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엿장수 마음과 같아서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의 상식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더구나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친히 써 주신 계명입니다 누구라도 성경을 보면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율법을 잘 지키는 자기들은 영접하여 주시지 않고 도리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영접하시는데 어느 누가 힐문을 하지 않겠습니까?

힐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엿 장수가 아니십니다. 그냥 아무 사람이나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 인생들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달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성경을 모르고 자기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면 그것을 가지고 힐문을 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따지는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세상의 이치로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보다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나에게 부당한 일을 이야기를 했을 때 그를 믿고 있다면 그에게 그것을 따지기 보다는 그가 왜 그 일을 지시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그것을 힐문하고 있다면 그는 너무도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면 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가 누군가를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엿장수 같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입니다

자기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행하시는 수많은 기적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자기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시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바리새인들은 도리어 힐문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이 시대 역시 바리새인과 같이 힐문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네가 천국의 비밀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힐문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았다면 감히 힐문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편지를 율법주의자가 보면 힐문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자를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긍휼히 여기시고 있다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어서 힐문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자기들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지 어떻게 십계명도 지키지 않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느냐고 트집을 잡아 따집니다.

복음의 비밀입니다.

이 비밀을 모르면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로마서의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억지 주장을 합니다. 선택이라는 듣기에 좋은 말을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다고 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힐문할 수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8:13절을 보겠습니다. (126)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감히

우리는 먼저 나를 알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믿음은 나를 아는데서 부터 출발이 되고 있습니다. 나를 모르면 감히 하나님께 힐문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알면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그저 은혜를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솔직히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다 버리신다 해도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설령 우리를 모두 버리시고 이 세상을 멸망시키신다 해도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아니 잘 해서 구원을 받았다면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사는 것이 죄고 사는 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면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해도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입니다

우리는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지 않으면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지 않더라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단어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입에 바른 말은 하고 있지만 그 은혜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말을 합니까?

십계명을 하나도 못 지킨 자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지킨 자는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우리가 계명을 지키지 말아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세리입니다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난해야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데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면서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는 하나님께서 설령 하고자 하시는 자가 하나도 없다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도리어 힐문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엿장수로 생각하면서 자기들은 운명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신체의 선택입니다

말이 좋아 선택이라고 하는 것이지 실상은 운명론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고 무조건적인 선택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사람은 운명론을 따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알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슴을 치며 은혜를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인류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다 유기를 하신다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노아 시대에 노아 한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버리셔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노아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힐문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다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입은 자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힐문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세리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 인생의 처지가 이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 주시지 않으면 모두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히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에 대해서 감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감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첫 마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할 말이 아주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너무 독제가 아니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것을 정해 놓았느냐고 하면서 자기들의 지식으로 교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입니까?

저는 기대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 종교에 빠져 있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과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 편협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편협적인 사고가 맞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리새인이 되어서 자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누군가를 알면 절대로 그런 편협적인 사고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바리새인들보다 더 편협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고 도리어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힐문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힐문하고 있습니다.

창세기1:31절을 보겠습니다. (2)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우리 인류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심히 좋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안 따먹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을 때 이미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따 먹을 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계셨지만 심히 좋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심히 좋은가 하면 비록 흙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저주를 받아 흙으로 돌아갈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시작과 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끝은 없습니다. 모든 시작은 되시고 있지만 끝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끝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 보아야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생명이시기 때문에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심히 좋았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육체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그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에덴에 있을 때부터 우리 인생들이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 인생은 처음부터 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왜 흙으로 지음을 받았는가 하면 그 흙으로 지음을 받은 것은 흙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흙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구원을 받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하셨습니다. 이미 아담과 하와는 창조하실 때부터 그렇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지음을 받았으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지으셨냐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찌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우리 인생은 처음부터 강퍅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강퍅하게 지음을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지음을 받은 우리에게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지었습니까?

그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얼마 전에 시인의 강의를 잠깐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공연을 하는데 중간에 시인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시인은 불교인입니다. 불교를 다니고 있지만 참 설득력이 있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은 외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누구나 외롭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친구가 찾아와서 나는 왜 이렇게 외롭게 사는 줄을 모르겠다는 말을 하면서 너는 시인이라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니까 외롭지 않을 것 아니냐고 묻더랍니다.

그 사람의 대답입니다

나도 사람이다. 사람은 외로운 존재다. 누구나 다 외롭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그것을 받아들여라 사람은 본래 외로운 존재인데 나는 왜 이렇게 외롭냐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대답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불교인인데도 그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지혜가 있습니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받아들이는데서 부터 출발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강퍅하게 지음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생은 본성 자체가 강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버리시고 영으로 구원을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강퍅하게 지음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강퍅한 자라는 것을 인정을 하고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가 누군가를 성경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자기 생명의 문제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그 지혜를 구해서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입니다

솔직히 이런 말씀을 드리면 화가 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불교인보다 더 편협 적입니다. 아니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를 인정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강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자기가 왜 강퍅한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음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지음을 받았습니까? 율법을 지킬 수밖에 없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강퍅하게 지음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이 시대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힐문할 수 없습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입니다

내가 어떻게 지음을 받았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것을 에덴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강퍅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강퍅한 것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불교인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다는 것에서는 인정을 하지 않지만 사람이 그렇다는 것에 있어서는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강퍅하다는 것을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긍휼히 여김을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구원을 받기를 원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다만 자기들이 강퍅해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가난해 지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가난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지만 이 시대는 교회 안에 가난한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율법주의가 되어서 바리새인과 같이 복음을 전하면 힐문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게 만드셨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만든 그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이 시대 역시 긍휼히 여기시고 있습니다.next 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