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4:17-20절을 보면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성경입니다
인생의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는 그것을 안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과 같이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인생들의 철학으로는 성경을 보는 것 조차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 전에 가졌던 영화를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럼으로 해서 우리가 성경을 보고 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하신 일의 영광에서 보니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인데 인생들의 철학으로는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깨닫지를 못하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를 나타내심으로 해서 우리 성령을 받은 성도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이 시대 종교인들은 제가 무슨 말씀을 하는지 조차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이 일을 깨달아야 그러니까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를 알아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생들의 철학으로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해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신 성도는 아버지를 알아서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웃깁니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이 시대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서 제가 하는 말씀이 마치 말장난을 하는 것과 같이 생각이 되고 있고 이 문자를 다 알고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창조하신 일의 영광에서 보니까 그러니까 창조를 다 이루시고 보니까 우리 인생들이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고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 안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그렇게 알지 못해서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인생들은 성경의 문자를 보고 자기 합리화를 시키고 있습니다.
주님입니다
다 아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바다 모래 같이 많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은 자들이 없기 때문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없습니다.
아는 사람이 없고 영생을 얻는 자가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진리를 구하고 공의를 행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시는 일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 인생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생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리 인생들을 지으신 목적은 바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은 이것이니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는 단어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영생을 얻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창조하신 일의 영광에서 보니까 우리 인생에게 영생을 얻는 자가 없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면 우리가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아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철학입니다
그가 아무리 세상에서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생을 얻는 일에 대해서 창세기부터 해서 요한계시록까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서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이루시는 일을 보고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영생을 얻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제가 굳이 말씀을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 자기 조상의 이름은 몰라도 아브라함의 이름은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종교가 되어 있는 고대 바벨로니아에서 부르셨습니다. 왜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는가 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먼저 알게 하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셨는가 하면 이 말씀을 보고 모든 이방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부르셨습니까?
우리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복을 받는 일에 있어서 비유와 예표가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이 미리 알고,
그러니까 창조는 다 이루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창조하신 일에 영광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생이 대단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성경은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 일을 증거를 받아 우리 이방인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 그를 부르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그 일에 있어서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증거를 받아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짐으로 해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을 주신 것과 같이 우리도 같은 믿음으로 복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성경입니다
인생 아브라함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를 부르셨는가 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그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저 종교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믿음입니까? 성경이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살았던 당시에는 인생들이 다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입니다
고대 바벨로니아의 도시 중에 하나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 바벨로니아의 도시에는 신전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신전에서 사제가 신에게 물었다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들이 종교가 되어 신전에서 신을 믿고 있던 시대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합니다.
인생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종교가 되어 있는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왜 부르셨는가 하면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부르셨고 실제 그에게 하늘의 뭇별들을 보여주시면서 네 자손이 그러니까 태초에 있는 생명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이 이와 같다고 말씀을 하니까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입니다.
그저 아브라함만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종교가 되어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런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말씀을 하고 아브라함이 믿으니까 그의 믿음을 의를 정하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5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이 시대를 보더라도 28억 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믿음이 있는 성도가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잘 알고 있고 그것으로 종교가 되고는 있지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이 성경을 보고 행위를 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들이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보고 있고 율법의 행위라는 단어를 보고 있지만 율법의 행위가 무엇인지 그리고 믿음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인생들은 그 본성이 종교성을 가지고 있어서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15장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이를 그의 의로 정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조상으로 삼기 위해서 그를 갈대아 우리에게 이끌어 내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대아 우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바로 바벨론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바벨론에서 반드시 이끌어 내야 아브라함과 같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인생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바벨론입니다
그 나라가 없어졌습니까?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바벨론은 종교를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도 바벨론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우리도 역시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신 것과 같이 바벨론에서 반드시 그러니까 종교에서 나와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를 이끌어 내셔서 가나안 땅에 거하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12장부터 해서 말씀으로 보고 있습니다. 14장은 그가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셔서 가나안에 거하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15장에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바로 14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조카 롯입니다
그가 소돔에 거하다가 여러 왕들이 침략을 해서 그들에게 포로가 되어 가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조카 롯이 포로가 되어 가는 것에서 아브라함이 구하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고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사건입니까?
그렇게 성경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저 조카 롯을 구해서 오는 일을 성경에 기록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그런 사소한 일을 우리에게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이것을 그의 의로 정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아주 간단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해서 돌아오니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말씀을 하니까 실제 떡과 포도주를 주고 만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인생의 철학으로는 성경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저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사야9: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살렘,
평강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 히브리서에는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로 해서 우리 인생의 언어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평강의 왕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분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인생의 언어로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라는 말씀을 성경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믿지를 않고 이방의 종교는 성자라는 성경에서도 말씀을 하지 않는 것을 자기들의 철학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런 그들이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을 보고 있지만 성경이 풀리지가 않으니까 억지로 풀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성경대로 믿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초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을 한 그대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요한복음6:48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표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이 떡을 먹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떡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고 하면서 다 돌아갔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떡입니다.
이 떡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을 보고 이방의 종교인들이 자기들은 이 떡을 먹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이 시대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떡을 먹으라고 하면 그들은 저에게 무슨 봉창 두드리는 말을 하느냐고 하면서 우리가 먹고 있으니까 너나 잘 먹으라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입니다
창조하신 일의 영광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이 떡을 먹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유대인들을 대표로 해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떡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단 한 가지도 지키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의 종교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안 지키고 있습니까? 그들이 생명의 떡을 먹고 있습니까? 그들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을 먹고 있습니까?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괴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악독한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종교에서 날을 그리고 절기를 해를 삼가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지키기만 합니까?
그 날에 온갖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을 먹는데 힘쓰는 것이 아니라 온갖 행위를 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생의 철학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생명의 떡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떡을 먹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가지고 나왔다고 말씀을 하니까 떡을 가지고 온 것으로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셔서 그가 15장에서 믿을 수 있게 생명의 떡을 먹여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생명의 떡을 먹고 있습니까?
인생들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그러니까 종교에서 이끌어 내시고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떡을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하신 것과 같이 생명의 떡을 먹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가7:9절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포도주입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을 비유로 해서 포도주를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서 바벨론을 말씀을 하면서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에 주신 포도주는 율법을 완전케 하신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는 율법을 생명의 도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주님께서 완전케 하심으로 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떡과 포도주입니다
성경은 영생을 얻는 일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이 믿음이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는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영생을 얻게 하셨다는 말씀이고 이제 15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의 의로 정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역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히브리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이루시는 일을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심으로 해서 우리 역시 믿음으로 태초에 있는 생명을 얻은 자 되었고 그 생명으로 부활을 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모르니까 인생들은 자기 철학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신 일은 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부활을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시지 않았다면 생명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창세 전에 있는 일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주십니다.
이 세상에 복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오직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바알의 사상에 빠져 이 세상에서 복을 받으려고 하고 있고 그런 그들이 발람과 같이 불의의 삯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헛것 같고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창조된 세상의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모르니까 사라지고 마는 것을 구하면서 영생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라함의 대적입니다
비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대적애 대해서 사도 바울이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대적입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고 대적은 율법의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율법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분의 일입니다
종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말씀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비유라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비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들은 그저 그 문자를 아는 것으로 따라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실제 있는 일입니다
그것을 비유로 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얻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싸움에서 얻는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이런 말씀을 보고 그 문자를 아는 것으로 십일조를 강요를 하는 것은 영생을 얻지 못하게 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받으시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조주께서 당신이 창조한 것을 원하시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만들었는데 그 만든 것을 원하겠는가를 스스로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7:9절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십분의 일입니다
제가 말씀을 해도 인생들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포도주입니다
주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의 의를 의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준 것은 이미 주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의 의를 믿었다는 의미에서 주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일을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유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을 보고 드렸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서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다고 율법에 따라 레위는 십분의 일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입니다
창조하신 일의 영광에서 율법은 이미 완전케 하신 일입니다. 그 일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나라의 복을 받았고 그러니까 영생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믿음의 조상이 되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믿는 일에 있어서 상징으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문자 그대로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초는 성경은 창조를 다 이루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에서는 우리 인생은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빛으로 비춰주시고 있고 우리의 믿음으로 생명의 빛을 얻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믿음으로 역사를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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