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2:10절을 보겠습니다. (신 265쪽)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성령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을 볼 때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생각을 먼저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버리지 않고 성경을 본다는 것은 스스로 사망의 길로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이 시대 기독교라는 종교가 되어 있는 신학에서 배운 모든 것은 쓰레기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입니까?
종교인으로 사는 사람은 절대로 성도가 될 수 없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이미 율법 외에도 수많은 법들과 교리들도 가득차 있어서 그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은 육신을 좇아 육신의 생각을 하면서 육체의 일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입니다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율법을 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절대로 성령이 오시지도 않고 오실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지혜입니다
그 지혜로 배운 신학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쓰레기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가장 촉망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대로 말을 하면 최고의 신학에서 공부를 하고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가 가진 모든 것은 배설물보다 못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이 율법의 문제가 절대로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오셔야지만 하나님의 깊은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습니까? 지키지 않는 것이 옳습니까? 이것을 물어보는 제가 더 이상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이성입니다. 그것을 누가 깨뜨릴 수 있습니까?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깊은 것을 깨닫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이 율법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가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가 있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도 안 됩니다.
이제까지의 로마서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으로는 율법을 지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하나님의 깊은 것을 깨닫지 못해서 육신을 따라 육신의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령을 너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샤머니즘적인 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은사라고 하고 있고 그것을 체험해야 한다고 하면서 마치 그것이 이스라엘이 할례를 받아 표징으로 삼은 것과 같이 되어서 믿음이 있는 성도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은사가 아니고 종교적인 샤머니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을 체험합니까?
어떻게 체험을 합니까? 육의 사람이 영을 체험할 수 있다는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체험이라는 단어도 안 나오고 있습니다. 경험이라는 단어도 단 한 번 나오고 있지만 그것 역시 그런 육적인 경험이 아니라 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샤머니즘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은사라고 하는 행위들은 성령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종교적인 샤머니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구속의 일을 깨닫게 하고 믿게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육신이 연약해서 할 수 없는 것을 하시고 우리로 영을 좇아 살게 하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영의 깊은 것을 깨닫기 보다는 다 육신을 좇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따라 살려면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도 받지 않은 사람은 성령을 따라 살 수도 없고 성령의 생각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성령 어떻게 받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전제 조건이 율법의 행위를 버리는데서 부터 출발이 되고 있습니다. 율법을 버리지 않고 아무리 그가 복음을 들어 보아야 성령이 그에게 오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면 영을 따라 사는 성도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성령을 받았다고 해도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은 그런 사람의 감성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깊은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역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영을 좇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 이성을 버릴 때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을 지키는 것이 백번 옳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내가 생각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내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영의 일을 생각하는 성도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서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사도행전2:1-4절을 보겠습니다. (신 188쪽)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영의 생각입니다.
내 스스로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영의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씀 그대로 성령의 생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에만 나오면 다 성령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입으로 시인하면 성령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시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종교의 자유가 무한대로 주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자기들이 교회에 모여서 무슨 짓을 다 해도 되는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로 한다고 해서 성령이 오셨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영의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감동을 해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생각이라고 말씀하니까 마치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령이 오셔서 영의 생각을 하게 역사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성령이 오십니까?
로마서에서 율법을 버리는 전제 조건을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에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성령을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 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입니다.
아니 이것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오순절이 임해야 성령이 오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오순절이 임한다는 말씀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3대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이 있고, 맥추절이 있고, 수장절이 있습니다.
맥추절을 다른 말로는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절기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이 절기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는 일 년이 새로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일직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연대로는 6000년 이지만 하나님의 시간으로는 그것이 아니라 일직선상에 어느 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유월절이 있고, 오순절이 있고, 수장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차례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이 오지 않은 사람은 오순절이 올 수 없고 오순절이 오지 않은 사람은 수장절이 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유월절이 왔다 해도 오순절이 임하지 않으면 수장절이 올 수 없습니다.
반드시 차례대로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절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영의 생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성령이 내 안에 오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오시려면 반드시 조건이 있는데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오순절이 오려면 반드시 유월절을 먹어야 합니다. 이 유월절을 먹으려면 반드시 누룩이 섞이지 않은 무교병을 먹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교병입니다
물론 어린 양도 있고. 쓴 나물도 있습니다. 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 유월절을 먹은 성도에게만 오순절이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정월 십사일이 유월절입니다. 그리고 오십일 후가 오순절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시대 무지한 자들이 맥추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순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령 강림절이라고 하면서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그 절기는 폐하여 졌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이 절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을 삼년 반 동안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내가 가면 보혜사를 보내 주시리니 그가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먹었습니다.
유월절을 삼년 반 동안 먹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만찬을 드시면서 유월절을 먹은 것을 기념해서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 떡은 생명을 얻게 하는 내 살이라고 하시고 또 잔을 주시면서 이 피는 언약의 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월절을 제자들은 삼년 반 동안 먹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이스라엘의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의 절기를 따라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절기가 다 폐하여 졌고 각자가 유월절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을 먹고 기념하는 성도에게만 오순절이 임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유월절을 안 먹습니다. 아니 자기들은 먹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룩이 섞여 있는 떡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서는 오순절이 그 사람에게 절대로 오지 않고 그런 사람은 그가 아무리 영의 생각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반드시입니다.
여러분이 유월절을 먹지 않으면 오순절은 오지 않습니다. 성령이 여러분에게 오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유월절도 먹지 않은 사람에게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영의 생각을 하려면 아니 성령의 감동을 받으려면 반드시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는 조건이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을 먹어야 합니다.
어린 양을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교병을 칠일 동안 먹어야 합니다. 무교병을 칠일 동안 먹으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성경말씀을 다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무교병을 먹어야지 누룩이 섞여 있으면 안 됩니다. 그 누룩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성령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입니다
율법이 섞이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에서 사도 바울이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서냐고 묻고 있지만 그 말씀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령이 오셔서 주님의 말씀과 같이 내가 너희에게 전한 말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난 이후에 제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 했습니다. 왜 하지 못했는가 하면 생각이 나지 않아서 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다 생각이 나서 그때부터 복음을 전하는 것을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오순절이 임해서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영의 일을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성령을 어떻게 받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달라고 기도를 하면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간구를 하고 진심으로 기도를 한다 해도 절대로 성령은 오시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샤머니즘에 빠져 자기들이 기도를 하고 간구를 하면 성령이 오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진심이라고 하는 것은 쓰레기로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 진심 때문에 도리어 성령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의 생각을 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먼저 유월절을 먹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삼년 반 동안이나 먹었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있습니까? 그 설교는 안 됩니다. 누룩이 섞여 있는 그런 설교는 여러분이 죽을 때까지 들어도 성령의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누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누룩입니다. 그 누룩을 여러분의 집에서, 교회에서 제하지 않으면 절대로 유월절을 먹을 수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유월절을 먹을 때 집에 누룩이 있으면 끊어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룩이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생각입니다.
성령이 오시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니 유월절을 먹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성령이 오실 수 없습니다. 반드시 유월절을 먹어야 오순절이 이를 수 있는데 이 시대는 유월절을 먹는 사람이 없고 그 집에 누룩이 다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누룩이 집에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먹을 때 출애굽기 12장19절에서 누룩이 있는 집은 이스라엘에게서 끊쳐지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온통 누룩 투성이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적은 누룩 한 덩어리만 있어도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스라엘이 될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의 집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 안에 율법이 있으면 그들은 영적인 이스라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율법으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갈라디아에서 분명히 율법의 행위 아래 있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성경이 안 보이고 있습니다.
유월절을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오순절이 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집에 누룩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누룩이 섞이지 않은 무교병을 먹어야지만 성령이 오셔서 내 안에서 영의 일을 생각나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누룩을 제한 상태에서 유월절을 먹고 성령을 받아 영의 생각으로 감동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8:6절을 보겠습니다. (신 249쪽)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정말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생각이라고 하니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육신대로 사는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봉창을 두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도 믿지 않고 성경도 안 보는 그들에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봉창 두드리는 말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봉창을 두드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영의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고 이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고 자기들은 영의 생각을 하니까 천국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의 법을 섬기려고 하는 생각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법을 섬기고자 하는 생각을 하면 반드시 사망을 당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육신이 무엇을 하는 가를 말씀하면서 그 육신이 하는 일을 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고 영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영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이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다수가 육신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일부의 사람이 육신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 다수가 육신의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 로마서를 기록하게 하셨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비교입니다
두 가지를 가지고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나쁜 것이 있고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절대 다수가 나쁜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는 눈이 감겨져 있어서 자기들은 다 좋은 일을 하고 있고 자기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나쁜 의미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왜 사망인가 하면 죄의 법이기 때문에 사망이라는 말씀입니다.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는 순간 우리는 사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이 육신의 생각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순간 사망을 당한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육신으로 무엇인가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육신의 생각이 사망인가 하면 죄가 되기 때문에 사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생은 사망에서 건져 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으로 예배를 드립니까?
어떻게 하면 예배를 잘 드릴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육신의 생각입니다. 어떻게 하면 찬송가를 잘 부를까 하는 것이 육신의 생각입니다.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것이 다 율법 화 되어서 이 시대 예배 때에 육신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편94:11절을 보겠습니다. (구 872쪽)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잠언23:5절을 보겠습니다. (구 936쪽)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육신의 생각입니다.
육신의 생각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허무한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무엇인가 하면 재물을 얻고자 하는 생각입니다.
그 재물이 무엇입니까?
육신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육신의 생각이 사망인가 하면 그 재물이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리면 그 사람에게 아무 것도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달란트를 남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재물이 하늘에 나는 독수리 같이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의 달란트를 맡겨 주시고 또 그것을 남길 수 있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육신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은 사람의 생각자체가 허무합니다. 왜 허무한가 하면 사람의 생각은 재물을 얻고자 하는데 그 재물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간다는 말씀입니다.
너무 성경을 모릅니다.
그저 단어만 알고 그 단어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미는 전혀 모르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면 왜 그 생각이 사망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은 육신의 생각을 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육신의 생각을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 합니다.
사람의 생각입니다.
재물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죄의 법, 율법을 지키면서 그것이 자기 마음에 재물이 되어 쌓이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교회 안에서 점점 더 많은 재물로 부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재물입니다
그것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같이 날아가 버립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육신으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육적인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그것을 하늘에 쌓아 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생각 자체가 육신의 생각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 날아가 버립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산, 아니 천국에 가기 위해서 성도로서 산 그 모든 것이 육신의 생각이며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모르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그 생각을 따라 육신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립니까?
주일을 평생 빠지지 않고 지켰습니까? 그리고 교회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재물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생각지 않는다고 해도 성경에서 그것을 재물이라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그 재물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늘을 나는 독수리같이 날아가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날아가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사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얼마나 허무하다는 것을 모르고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고 그것이 교인들의 마음에 재물로 쌓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하늘을 나는 독수리같이 날아가 버리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육신의 생각을 따라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것이 육신의 생각이라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불행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누군가 하면 교회 안에서 육신의 생각을 따라 율법을 지키다가 그것이 재물이 되어서 하늘을 나는 독수리 같이 날아가 버려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눈이 감겨서 안 보입니다.
육신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느끼고 알고 하는 것은 다 육신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재물이 되어서 허무하게 날아가 버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율법주의로 깊이 빠져 들어가면서도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으면 교회 안에서 평생 육신의 생각만 하다가 사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하는 모든 행위가 육신의 생각이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 행위라고 하면서 영의 생각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8절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육신의 생각입니다.
반드시 사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이 시대는 육신의 생각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육신으로 죄의 법을,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람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영의 생각은 누가 하고 있습니까? 마치 사람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성경을 보고 하는 생각은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것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성령의 생각을 가르쳐 주어야 그 생각을 따라 내가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일을 너무 모릅니다.
영의 생각을 한다고 하니까 자기가 영의 생각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영의 생각은 반드시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역사를 하셔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감동을 해 주셔서 생명을 얻게 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영의 생각은 내 안에 성령이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막연하게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 믿을 수 있으면 그렇게 믿음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할 수도 없고 생명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령이 어떻게 오시는 줄도 모르고 성령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면서 육신의 일을 하고 있는 그들이 영의 생각을 하고 있다고 자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시면 그가 나에 대해서 증거를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인가 하면 성령이 오셔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영의 생명을 얻고 그런 성도만이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영의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육신의 생각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성경을 볼 때 감동을 해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영의 생각을 따라 생명을 얻어 평안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를 위해서는 내가 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는 내가 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감동을 하면 인도함을 받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입니다
말씀 그대로 성령입니다. 이 성령은 내가 원한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내 주셔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영이 내 안에 오셔야지만 내가 이 영의 생각을 따라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어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왜 믿고 있는지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만약에 이 생명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세상에 있는 짐승과 같이 이성을 따라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생명입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믿음의 선진들이 고난을 받으면서도 믿음으로 승리를 했습니다. 그 이김조차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바로 알아서 육신의 생각에 빠지지 말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생명을 얻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next 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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