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9:5절을 보겠습니다. (구 957쪽)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미 죽어 버린 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왕으로 살았다 해도 죽었으면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가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켰다 해도 아니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해서 죽었다고 해도 한번 죽었기 때문에 율법이 더 이상 그를 주관하지 못 합니다.
전도서입니다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습니까? 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고 사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자는 물론 여러 가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복음을 들었던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자는 그가 아무리 복음을 들었다 해도 죽은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산개입니다.
성경에서 개를 비유로 하는 것은 율법주의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주의자가 분명히 나중에 저주를 받을지라도 살아 있으면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비록 율법을 지키고 있어서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을지라도 그가 돌이킴을 받아 회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산개가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모든 것이 결정이 됩니다. 이미 죽은 자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연옥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거의 모든 종교가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죽었어도 살아 있는 자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국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샤머니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죽는 것도 자기 죄로 인하여 죽고 사는 것도 역시 자기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구원을 받았다 해도 그 자녀가 믿지를 않으면 안 됩니다. 또 아버지가 지독한 율법주의자였어도 그 아들이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산 자는 죽을 줄을 압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도 그렇습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주관을 하지 그가 이미 죽었으면 율법이 그를 더 이상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으면 끝입니다.
이 시대는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지 마시고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은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고 또 율법이 더 이상 주관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아는 자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법을 모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율법이 아니라 이 모든 율법을 실행치 아니라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율법을 몰라서 그것을 지키다가 모든 것을 실행하지 못해서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압니다.
우리 성도는 율법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율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성도들이 율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 율법이 사람 살 동안만 주관하고 있습니다.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되고 있습니다.
율법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율법이 어떻게 주관하는지도 아시기 바랍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자가 율법을 지키면 반드시 그 삯이 사망이고 율법은 사망을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죽었는가 하면 율법에 대해서 죽어서 율법이 주관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비밀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가 하면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이 주관하는 그 삯이 사망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7:2절을 보겠습니다. (신 247쪽)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결혼한 여자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으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풀려납니다.”
남편 있는 여인입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거의 문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이 말씀을 보면서도 실제 생리적으로 남편 있는 여자를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알면 이 남편 있는 여인이 누군가를 알 수 있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그저 자기들이 보고 있는 단어를 보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앞이 해석이 안 됩니다
6장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7장에서 해석이 되겠습니까? 해석이 안 되니까 억지로 성경을 풀다가 망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앞에서부터 풀려야지 뒤에 있는 말씀을 깨달을 수 있지 앞에 있는 말씀이 풀리지 않으면 뒤에 있는 말씀을 전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정에서의 남편과 여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면 얼마나 생뚱맞습니까? 그런데도 이 말씀을 보면서 결혼을 해서 남편이 있는 여자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조금만 주의 깊게 보아도 이것이 율법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7장5절부터의 말씀만 연결을 해도 율법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비유입니다
꼭 비유라고 말씀을 해서 비유가 아니라 거의 모든 성경은 시적인 언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는 시각부터 바뀌지 않으면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소경이 되어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그가 수백 번을 읽는다 해도 비유를 문자 그대로 보면 소경으로 살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만 비유가 아닙니다.
신약 성경의 거의 모든 말씀이 비유입니다. 그 비유를 풀지 않으면 성경을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비유를 알레고리하게 풀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답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내 마음대로 비유를 푸는 것이 아니라 그 비유에 대한 답이 성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명을 얻는 일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은 도덕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도덕을 알려고 하면 세상에서 배우면 됩니다. 도덕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까?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 법에 의해서 혼인 관계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남편과 여인의 관계를 몰라서 성경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정말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보고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영의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문자에 갇혀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모든 성경은 이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까? 이 성경을 보고 도덕적으로 잘 살라고 주셨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성경을 상고해서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성경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디모데후서에서 이 성경을 주신 이유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성경을 보면서 도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기들만 도덕을 알고 교인들은 도덕을 모르는 것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만 도덕을 알고 세상 사람은 도덕을 모르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성경을 보느냐에 따라서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남편입니다
무슨 남편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여인의 남편이 아니라 우리 성도의 남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어느 남편이 있는가를 사도 바울이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말씀을 보고 생뚱맞게도 실제 남편과 여인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54:5절을 보겠습니다. (구 1034쪽)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성경을 찾아보면 됩니다.
남편이라는 단어만 찾아보아도 이 남편이 무슨 남편인가를 알 수 있는데 이 시대는 그런 수고도 하지 않고 있고 로마서의 말씀을 보면서 로마서에서 해석을 하려고 하니까 도무지 답이 안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는 우리 영생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해야지 도덕적으로 잘살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입니다
네 남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남편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있고 전혀 문장이 연결이 안 되는데도 억지로 성경을 풀고 있습니다. 지금 무슨 남편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영생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두 남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을 받는 두 가지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방법을 두 가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 있는 말씀과 같이 율법을 다 지켜서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영생에 있어서 남편입니다
실제 여인과 남편이 아니라 영생에 있어서 두 남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사야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지으신 남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었으면 아니 우리를 낳으면 우리의 아버지가 되지 어떻게 남편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남편입니다
지으신데 있어서는 분명히 아버지가 맞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있어서는 남편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는 남편이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남편이 있습니다. 로마서6장을 말씀할 때 신명기에 있는 두 남편을 말씀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신명기에 있는 두 남편에 대한 율법을 보고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네 구속자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두 남편이 있습니다. 율법의 남편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남편이 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느 남편에게 속해 있든지 그 남편의 법에 따라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입니다
나는 네 구속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그것을 로마서3장에서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 되었습니다.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다시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 구속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시대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입니다
어떤 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령을 거기에 끼어 넣어 가지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은 삼위일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삼위일체로 인하여 자기들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거대한 종교의 교리에 묶여서 끌려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남편이라는 말씀입니다. 남편의 의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데 있어서 남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6장 마지막 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6장의 말씀과 7장의 말씀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장절이 있을 뿐이지 성경은 연결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6장을 끝내고 이제 새로운 7장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6장을 연결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에 대해서 7장에서 연결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6장 말씀의 연장선상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 남편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이 남편이 있습니다. 이 두 남편을 사도 바울이 7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으려면 이제 우리가 어느 남편에게서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남편입니다
그 안에는 영생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남편이 누구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남편을 비유로 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영생을 내 스스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남편 되시는 주님이 우리를 구속해 주셔야 합니다.
갈라디아서3:23절을 보겠습니다. (신 305쪽)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율법의 남편은 사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남편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 두 남편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두 남편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깨닫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두 남편을 말씀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율법이 또 다른 남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이라는 말씀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만 율법이 남편이라는 말씀이 비유로 되어 있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생명을 얻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 인생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두 남편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그 삯이 사망이고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반드시 이 두 남편에 의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남편을 섬기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섬기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두 남편 있는데 한 남편을 섬기면서 또 다른 남편을 섬기는 것을 음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음부가 되겠다고 하는 것과 마차가지입니다.
음부입니다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음부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단어도 거의 다 문자적으로 보고 있고 실제 남자와 여자가 간음을 하는 것을 가지고 음부라고 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간음한 여자는 구원을 받았어도 영적으로 간음을 하는 음부가 되었던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은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말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남편입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에서는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남편을 믿기 전에는 율법에게 매여 갇힌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남편입니다
그 남편에게 매이면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 율법에 매여 살아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왜 믿을 수 없습니까?
율법에게 매인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에게 매여 있는 여인이 다른 남편에서 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 여인을 음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에 매인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반드시 율법에 매인바 되어 있습니다.
남편 있는 여인입니다
율법의 남편이 있는 여인은 율법에 매인바 되어 있습니다. 그 남편의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습니다. 이렇게 믿음과 율법을 두 가지를 가지고 비교를 해서 말씀할 때는 어느 것 하나가 되면 어느 한 가지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편의 법으로 매여 있습니다.
그에게는 계시될 믿음이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계시될 믿음이 오려면 반드시 율법의 매임 바에서 풀려나야 합니다. 그것을 로마서에는 그 남편의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으면 그 법으로 매여 있어서 절대로 벗어나지를 못 합니다.
그러나 언제 벗어납니까?
그 남편이 죽으면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율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죽든지 아니면 율법이 죽든지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죄의 삯은 사망인 그 남편이 죽어야 합니다.
그 남편이 살아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반드시 그 삯을 받게 되어 있고 사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남편으로 비유를 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우리가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살아 있으면 우리는 그 남편의 법에 매여 있게 됩니다.
비유입니다
율법의 생전이라고 하니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있습니다. 율법은 말 그대로 법인데 그것이 어떻게 살아 있어서 생전이 있는지 이해를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남편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의인화를 시켜서 비유로 말씀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어를 모르다보니까 율법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의인화입니다
율법도 의인화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의인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도 의인화를 하고 있고 성령도 의인화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의인화를 해서 하고 있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는 사람을 비유로 해서 의인화를 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사람을 교회로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니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하와도 교회입니다
사라도 교회입니다. 하갈도 교회입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여자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 성경에 여자로 기록이 되어 있다 보니까 그들을 교회로 비유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아가서는 전체가 교회를 여자로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거의 모든 목사들이 아가서를 설교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유의 의인화를 모르면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를 의인화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을 성도로 보면 성경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잠언입니다
지혜를 의인화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부른다 하면서 의인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대표적인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도 의인화를 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예수님께서 존칭을 쓰다 보니까 사람들이 의인화를 모르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국어를 너무 모릅니다. 아니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말씀만 주의 깊게 보아도 이것이 의인화를 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가 오신다고 하니까 마치 하나님이 오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입니까?
그럼 잠언에서 말씀하는 지혜도 하나님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영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진리의 영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삼위일체의 교리에 빠져 이 시대는 성령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매인 바 되었습니다.
율법이 어떻게 우리를 맬 수 있습니까? 비유입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의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의인화 시켜서 남편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네 남편이라고 말씀하시지만 남편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율법이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남편이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되는가 하면 그 남편은 이제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에베소서2:15절을 보겠습니다. (신 312쪽)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시편37:20절을 보겠습니다. (구 828쪽)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 되어 없어지리로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이 죽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원수입니다
율법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원수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삯이 사망을 주는데 그가 원수가 아니면 누가 원수입니까? 이 시대는 원수가 누구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사망의 삯을 주는 율법을 너무 좋아하고 있고 그것에게 매인바 되어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원수를 폐하셨습니다.
율법을 폐하셨다는 말씀은 죽였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자기 원수를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세상 말에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지피지기라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는 사람이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있습니다.
원수를 모릅니다.
자기 원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이 오신 목적입니다. 우리가 원수의 삯으로 받는 사망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지만 기독교인들은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안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는 우리의 전 남편을 죽이기 위해서 이 세상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교회마다 십자가를 걸러 놓고 말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라고 하는 그들이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안 믿습니다.
성경에서 원수라고 말씀을 하고 있어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원수라고 하면 세상에서 생각하는 그런 원수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율법을 의인화해서 시편에서 원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구약을 보면서 다 눈이 감겨져 당시 이스라엘의 원수인 나라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원수입니까? 사람이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까? 물론 사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원수는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원수는 사망을 당하게 만들고 있는 율법입니다.
죄의 삯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삯이 사망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원수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을 봐도 안 보입니다. 자기와 뜻을 달리하고 있고 자기와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을 원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원수입니다
우리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그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과 같이 타서 연기 되어 없어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연기와 같이 없어지는 원수를 이 시대는 너무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자기들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원수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정말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질 정도로 율법을 더 사랑했습니다. 율법을 더 사랑하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율법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합니까? 그러나 그가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자기 육체로 폐하신 그 율법을 지키겠습니까?
율법은 남편입니다
어떤 남편인가 하면 의롭다 하심을 받으면 영생을 할 수 있는 남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으로는 아직까지 그리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영생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결론입니다. 영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남편의 법에 매이면 모두가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는 그 남편을 자기 육체로 죽이셨습니다. 그것을 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삯이 사망이기 때문에 그것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 인생들은 다 율법 아래 매인바 되었다가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인입니다
영생을 얻는데 있어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을 사도 바울이 여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는데 있어서 우리는 여인입니다. 사람이 성경에서 율법을 보면 다 그 율법의 남편에게 매인바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알고 있는 지혜입니다. 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은 다 그렇게 율법의 남편에게 매인 바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의 남편입니다
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이 그 남편에게 매인 바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삯이 사망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남편을 죽이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지혜로는 그 남편의 매인바 된 것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남편을 죽이셨습니다. 이제 죽였으면 그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연기가 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런 연기와 같은 율법에서 이제 우리는 벗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남편이 죽었으면 여인이 그 남편의 매인바 된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어느 누구도 율법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삯이 사망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죽지 않으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입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그것을 지키는 것이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죄를 지어서 사망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다. next 58-1.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58-2,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1) | 2024.10.02 |
---|---|
58-1,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1) | 2024.10.02 |
57-1, 형제들아 내가 법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0) | 2024.09.29 |
56-2,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0) | 2024.09.28 |
56-1,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1) | 2024.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