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6:20절을 보겠습니다. (신 247쪽)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성경에서 보화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이유는 그 안에서 끊임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쉽게 매너리즘에 빠져 버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오리가 자기가 처음 보았던 것을 어미로 생각하는 것과 같이 처음 들었던 그것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처음부터 복음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좋겠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거의 없다 보니까 복음을 처음부터 듣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를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다른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다른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하면 전통을 따지는 사람들은 심하게 반발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아니 저를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너 외에는 다 잘못이 되었고 너 혼자만이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냐고 도리어 이단과 같이 그리고 교만한 자와 같이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교회는 초대교회를 지나오면서 다른 복음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중간 중간에 하나님께서 어느 특별한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지만 그 세력이 너무 미미해서 사람들은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조차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아주 적은 숫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이 볼 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같이 보여 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리어 멸시를 받았을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교회가 다른 복음에 빠져서 어느 누구 하나도 자기들이 종교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 해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하면서도 자기들이 왜 잘못되었는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지체로 율법을 지켜보았지 않았느냐고 초대 교회에 사람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면서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몇 년 지킨 것이 아니라 수십 년을 그렇게 율법을 지켜보았는데도 자기들이 불법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보고서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죽을 때까지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불법에 이르렀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도들에게 벌써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 보았지만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율법을 점점 더 많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시대에 한 가지씩 율법이 늘어났다고 해도 지금 이 시대 얼마나 많은 율법을 지키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답은 아주 쉽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율법을 지켜보았으면서도 자기들이 그것으로 무엇에 이르렀는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점점 더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체입니다
그것으로는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받은 우리 인생들의 지체는 어떻게 해도 의를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들이 곰곰이 생각만 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예표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도 도리어 율법을 지키는 일에 더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불법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다 지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 것을 불법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는 의에 이를 수 없어서 사도 바울이 그것을 불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해 보았습니다.
우리 지체로 율법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더 율법주의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율법을 안 지켰다면 모르겠지만 그렇게 오래 동안 율법을 지키면서 해 보았는데도 교회는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몇 가지 지킵니까?
그것으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킨 의무를 실행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사람들은 정죄에 빠지는가 하면 율법을 보면 볼수록 자기는 죄인이라는 것이 나타나기 때문에 불법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교회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어서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법에 이릅니다.
어느 누구도 의에 이르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모르다보니까 막연하게 조금이라고 더 잘 지키면 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을 단 하나라도 지키면 의롭다 함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지체를 의에게 드리라고 하니까 도리어 율법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지체와 뒤에 지치는 전혀 다른 지체인데도 사람들은 성경의 단어만을 보고 있습니다.
앞에 지체는 아담으로부터 받은 지체입니다.
그리고 뒤에 지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탄생이 되는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서 그 영이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입니다.
우리 지체로는 안 됩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 지체로는 거룩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 지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안에 탄생이 되는 영이 거룩함에 이른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드리라는 그 말씀을 보고 또 자기들의 지체를 드리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고 그 영이 거룩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입니다
그 영이 거룩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화할 때 거룩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영의 비밀을 모르고 스스로가 거룩함에 이르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온갖 행위들로 거룩함을 나타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들이 도리어 자기 지체를 불법에 드리는 일임에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그리고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에서 이 영의 일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육의 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 육의 일이 사망이 왕 노릇하게 하고 있지만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죄의 종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살 때는 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로마서6장에서 죄의 종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도덕적인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죄의 종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거꾸로 생각하다보니까 성경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죄의 종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의 종인데 도리어 율법을 지키게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킵니까?
그는 의에 대해서 자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죄의 종으로 자기 지체를 드리면서 의에 종으로 드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죄의 종이 되어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율법이 아닙니다.
단 한 가지의 율법이 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순간에 여러분은 절대로 거룩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가 아무리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어떠한 말을 한다 해도 율법을 지키는 순간에는 그는 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가 됩니다.
베드로전서2:24절을 보겠습니다. (신 379쪽)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시대는 십자가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면서 거의 모두가 죄를 이야기를 하면서 도덕적인 죄를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어떠한 죄를 지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선은 도덕적인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계시가 되고 나니까 우리는 율법의 의미적인 죄를 지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겨서 살인을 했고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간음을 했고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그 율법을 어기면서 우상 숭배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세상 죄입니다.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짓는 도덕적인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 죄만 담당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살인을 하고 간음을 하고 도적질을 하고 우상 숭배를 한 그 모든 죄까지도 지고 가셨습니다.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죄를 담당하신 이유는 우리 죄를 사해주시고자 하는 첫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으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도덕적인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안 됩니다
죽을 때까지 도덕적인 죄를 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도덕적인 죄에 대해서는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의 종이라는 것을 아는 성도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런 성도만이 의에 대해서 살 수 있습니다. 의에 대해서 산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 의로운 생명이 탄생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성도만이 반드시 의의 생명이 탄생이 되어서 의에 대해서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지 않습니다.
그는 의에 대해서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은 반드시 죄에 대해서 죽은 성도만이 의에 대해서 살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죄에 대해서 죽기 위해서 더욱 율법을 지키는 우매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죄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일을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의 종입니다
그 사람은 의에 대해서는 자유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반드시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죄에 대해서 죽지를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를 모르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죽지 못하면 그는 의에 대해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의에 대해서 자유 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렇습니까? 교회 안에서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감성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말을 합니다.
안 나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백번 옳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이성을 따라 가고 싶으면 성경을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지혜를 파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면 그는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어 진노를 받습니다.
의와 상관이 없습니까?
그는 절대로 거룩함에 이르지 못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 교인들은 의와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는 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의에 대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이 시대 모든 교인들은 죄의 종으로 살아가면서 죄에 대해서 죽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의에 대해서 자유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우리 죄를 지고 가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것을 아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초보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있다면 그는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무슨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는,
그 때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을 때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될 수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의에 대해서 자유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죄의 종이 되어서 의에 대해서 자유 한 자로 살아가고 있으면서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나쁜 의미는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극히 일부의 사람이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성경에 기록도 하지 않습니다. 다수의 사람이 잘하고 있는데 성경에서 우리에게 경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경계입니다
그러나 경계로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죄의 종이 안 되어 있고 의에 대해서 자유하지도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 안에서 세상 사람에 비해서 그래도 율법을 잘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런 비교를 보면서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의 종입니다
그것을 베드로전서에서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었다는 의미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죄가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죄를 덜 짓는 것이 죽은 것이 아니라 죄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아야 죽은 것임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의미를 모르니까 죽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막연함은 사망에 이릅니다.
성경이 죄에 대해서 죽으라면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그는 절대로 의에 대해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막연하게 자기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 안에서 몇 가지 지키는 율법을 보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에 비해서 자기들이 죄에 대해서 죽은 것으로 비교를 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입니다
죄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나에게서 죄가 나타나고 있다면 나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아니고 의에 대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죄가 무슨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도덕적인 죄는 안 질 수 없어도 율법은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을 안 지키는 것을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와 상관이 없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죄의 종이 되어서 죄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모르고 막연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6:21절을 보겠습니다. (신 247쪽)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현대인의 성경을 보겠습니다.
“그 결과 얻은 유익이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분이 부끄러워하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 생활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죄의 종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우리보다 더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정말 하나님의 성도와 같이 살았습니다. 도덕적으로는 이 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함부로 살고 싶겠습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안 믿고 말지 그렇게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말을 합니까?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은 광명의 천사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은 성도로서 살기를 원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서 도덕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몰라서 죄를 짓습니까?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 죄를 짓고 있습니까? 그런 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 시대 정치인들과 사회 지도층이 왜 죄를 짓겠습니까? 그들은 도덕적으로 청렴해야 그 정치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데도 죄를 짓고 있습니다. 다 알고 있지만 역시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그 안에서 도덕을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은 죄의 종이 되게 만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교회는 점점 더 율법주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 어렸을 때보다 더 율법주의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입니다
도덕적으로 죄를 지면서 살았던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도덕적으로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 시대는 종교가 되어서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까지 있어서 그런 말도 사실 무색하게 되어 버린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지극히 일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수입니다
성경말씀은 다수에게 경계를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 소수의 사람들의 잘못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에는 죄의 종으로 살 때에는 너희가 무슨 열매를 맺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죄의 종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다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예표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죄의 종으로 살았는가를 성경에서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어도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세뇌가 무섭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면서 그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면서도 율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기들이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의에 대해서 종이 되어 있는지를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율법주의입니다
주님이 세우신 그 교회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으로 보고 이성으로 판단이 되는 그 교회는 다 율법주의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의 이름을 붙이고 간판을 내 걸은 모든 교회는 다 율법주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교회마다 율법을 지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무슨 열매를 맺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서도 이스라엘이 무슨 열매를 맺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과 똑같은 행위를 하면서도 자기들은 다른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가7:13절을 보겠습니다. (구 1297쪽)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하리로다”
죄의 종입니다
죄의 종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을 죄의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의 종은 행위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행위의 열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항무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입니다
행위의 열매로 황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의 행위를 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황무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아서 황무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 행위의 열매로 땅이 황무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지키고 있는 단 하나의 행위가 의에 대해서 살지 못하게 하고 있고 그 행위로 땅이 황무해서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무슨 열매를 맺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열매가 없어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데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땅이 황무합니다.
우리 지체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의의 열매가 나와야 하는데 율법의 행위로 인하여 의의 열매가 없다 보니까 땅이 황무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한 가지를 지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이성으로 백번을 생각해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율법의 행위가 옳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의 일이다보니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황무합니까? 열매가 있습니까? 사람의 이성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도리어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은 것이 더 황무하게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땅이 황무하다는 것이 아니라 영의 생명이 없어서 황무하다고 하지만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의 모습을 보면서 땅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무슨 열매를 얻었습니까?
아무 열매가 없습니다. 땅이 황무한데 거기서 무슨 열매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의 눈으로 이성으로 볼 때는 많은 열매가 있는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를 내고 주일을 지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자기들의 땅은 절대로 황무하지가 않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육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만약에 성경이 육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면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보다 더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인들이 점점 더 바리새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율법의 행위가 자기들의 땅, 육체를 황무하게 만들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의의 열매입니다
영생의 열매입니다. 그것이 없는 행위는 황무한 땅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그 행위가 참과 같이 보여서 자기가 무슨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더욱 더 율법의 행위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잠언6:32-33절을 보겠습니다. (구 917쪽)
“부녀와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
그 때에 무슨 열매를 맺었습니까?
땅이 황무하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열매를 모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열매만을 보고 있습니다. 자기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열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는 땅을 황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열매라고 하니까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의 일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이성으로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오셔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에 따라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자기들이 행위로 체험을 하고 보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행위를 해 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주님께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도리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려서 부터 지킨 그 율법의 행위가 도리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게 하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합니다.
왜 부끄러워합니까? 자기들이 한 일이 어떻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부끄러워하지 죄라는 것을 모르면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부녀와 간음한 자는 무지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부녀와 간음을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잠언의 말씀도 거의 다 문자 그대로 보고 이 세상의 사는 생리적인 부녀로 보고 있습니다.
영혼을 망하게 합니다.
우리 영혼을 망하게 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실제 부녀와 간음을 하는 것으로 우리 영혼이 망하게 됩니까? 제가 부녀와 간음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고 우리 영혼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도 영혼을 망하게 한다는 그 말씀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죄의 종입니다
그것을 율법의 행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율법의 행위를 어디서 하고 있습니까? 주일을 어디서 지키고 십일조를 어디에 내고 있고 그리고 예배를 어디서 드리고 있습니까? 또 온갖 절기들을 어디서 지키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기본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세상에서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보이는 교회 안에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잠언에서 부녀와 간음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무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부녀와 간음을 하면서도 자기들이 얼마나 무지한 행위를 하고 있는 줄을 모릅니다.
영혼을 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간음하는 행위를 칭찬을 하고 있고 또 서로 더 많이 하려고 치열하게 다툼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부녀와 간음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간음을 하고 있는가 하면 그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아내를 교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의 아내는 부녀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라 해도 우리에게는 남의 아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녀입니다. 그 안에서 율법의 다른 남편을 가지고 간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로 인하여 영혼이 망하게 되고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 행위를 교회 안에서 하고 있고 그것을 부녀와 간음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지해서 부녀와 간음하는 자는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면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부녀와 간음을 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가 부녀와 간음합니다.
그 간음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그 행위가 부녀와 간음을 하고 있는 행위라는 것을 모르니까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부녀와 마음껏 간음을 하면서 자기들의 행위에 한껏 취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지합니다.
어느 개인이 부녀와 간음을 하는 무지한 자가 아닙니다. 이 시대 율법을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부녀와 간음을 하면서 무지하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는 그 일에 모두가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부녀와 간음을 했습니다.
우리 성령을 받은 성도도 예전에는 모두가 부녀와 간음을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가 부녀와 간음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부끄러워서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은 부녀와 계속해서 간음을 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부녀와 간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율법을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녀와 간음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절대로 맺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계속해서 율법의 행위를 지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 행위를 했던 이스라엘이 무슨 열매를 맺었습니까? 주님께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를 보시고 그 열매를 얻을까 했지만 없는 것을 보시고 저주를 하셨습니다. 행위의 의로 무성한 이스라엘을 예표로 가르쳐 주고 있지만 그런 말씀들을 보고도 이스라엘과 같은 행위를 하고 있고 심지어는 그들을 형제와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next 56-2.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57-1, 형제들아 내가 법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0) | 2024.09.29 |
---|---|
56-2,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0) | 2024.09.28 |
55-2,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0) | 2024.09.25 |
55-1,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0) | 2024.09.25 |
54-2,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0) | 2024.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