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강,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4-1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성경을 모르면 망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분명한 뜻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재앙을 불러 오는 것이며 차라리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더 불쌍한 자가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너무 태평합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 아는 지식으로 마치 전부를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고 자기가 아는 지식이 어떤 정도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일본에서 독도는 자기들 땅이라고 이제 초등학교에서부터 교육을 시킨다고 합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은 일본 아이들이 성장을 하면 당연히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잘 못된 교육을 받으면 그것에 한번 세뇌가 되면 그 아이들이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독도가 자기 땅임을 강력하게 주장을 하고 그렇게 굳게 믿고 살아가게 됩니다. 독도는 분명히 한국 땅이라는 역사적인 자료가 있음에도 그렇게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일본 땅이라고 믿게 되어 있습니다.
교육은 무섭습니다.
내가 바른 교육을 받느냐 아니면 잘못된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서 내 사상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는가 하면 그들은 어려서부터 잘못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 땅에 오신 예수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성경을 보지만 그들은 율법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역시 같은 성경을 보고 있지만 대 다수의 사람들은 구약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보다는 율법을 보고 있습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자의 그림자인데도 구약을 보면서 율법이라는 그림자를 보면서 그것이 실체인 줄 알고 따라가다가는 모두가 죽고 맙니다.
이스라엘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을 뿐이고 지금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보고 있을 뿐이지 사실 이스라엘이 행하고 있는 모든 일을 지금도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행위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구약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몰랐던 것과 같이 지금 이 시대도 예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그저 다수를 따라 끌려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름은 알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이냐 반문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다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모르고 그것에 반하는 행위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행위들을 하고 있는가 하면 마치 주술적인 샤머니즘이 교회 안에 들어 와서 자기 죄를 종이게 기록을 하고 태우는 의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 죄를 자기가 깨끗이 하려고 합니다.
죄가 하나도 남김이 없이 깨끗이 회개를 하고 난 후에라야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참으로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도 자기 죄를 깨끗하게 회개를 하고 난 이후에 거룩한 예배를 드리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예수를 모르는 행위들입니다
내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행위들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는 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저 행위를 따라 자기들의 생각에 해도 좋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면 아무 거리낌이 없이 행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구약에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 대제사장은 율법의 규례를 따라 레위 지파에서 난 자라야 하고 아론의 아들들이 대대로 대제사장을 했습니다. 그 대제사장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그림자이며 모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레위지파가 아닙니다.
유다 지파를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율법의 예대로 라면 예수님은 절대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지만 그 율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자 하는 그림자였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의 대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대제사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승천하신 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의 대제사장이라면 승천하신 자라고 표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을 드렸듯이 예수님은 유다지파를 따라 나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대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대 제사장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육적인 대제사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에 있는 대제사장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대제사장을 믿어야 내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믿는다는 말씀은 그저 예수 믿습니다.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대제사장으로서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일입니다
이 영의 일을 믿지 못하게 때문에 사람들은 아직도 육적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려고 하고 있고 심지어는 죄를 종이에 써서 태우는 어리석은 행위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을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조차 분별이 안 됩니다
레위기 16:29-30절을 보면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7월 10일은 대 속죄일입니다.
이 날은 대 제사장이 모든 백성 앞에서 수송아지와 염소를 잡아서 그 피를 가지고 속죄 소에 들어가 모든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날입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대제사장의 단번 속죄로 이스라엘백성의 모든 죄가 단번에 사해짐으로서 깨끗한 상태에서 일 년을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제사를 드립니까?
대제사장이 일 년 일차로 들어가서 모든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날입니다
이때 백성이 무엇을 해서 그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제사를 받으시면 모든 백성의 죄가 일시에 다 사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입니다
이때 모든 백성은 대제사장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면 자기들의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믿습니다. 대제사장이 속죄를 했는데도 아직도 죄가 남아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자기 스스로 또 제사를 드리고자 한다면 그는 이 제사에 참여하는 자가 아닙니다.
백성은 밖에 있기만 했습니다.
송아지를 잡아서 그 피를 받아서 속죄 소에 들어가 그 피를 뿌리고 백성의 죄를 사해 달라고 하는 자는 대제사장입니다 그렇게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면 모든 백성의 죄가 사해지고 만약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면 대제사장은 그 속죄 소에서 죽게 됩니다.
모든 백성은 믿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살아 나오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제사를 받으시고 자기들의 죄를 사해 주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믿지를 못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고백을 해서 죄 용서를 받으려 하고 있고 심지어는 주술적인 것을 이용하면서 죄 사함을 받으려고 합니다.
레위기 16:33-34절을 보면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며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제사장들과 백성의 회중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이는 너희의 영원히 지킬 규례라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일년 일차 속죄할 것이니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단번에 속죄가 됩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 일차 속죄를 하면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제사를 받으시는 그 순간 모든 백성의 죄가 단번에 사해진다는 말씀입니다. 백성이 자기 입술로 또 자기 양을 잡아서 회개를 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대제사장의 제사를 받으시는 그 순간 모든 죄가 속죄가 됩니다.
이 율법의 규례는 그림자입니다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 속죄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내 스스로 무엇을 해서 속죄를 하려고 하는 모든 행위들은 모두가 율법적인 그림자를 행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은 영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내가 지금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는 볼 수 없어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가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어떤 행위를 함으로서 속죄를 하려고 합니다.
단번 속죄를 레위기에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속죄는 앞으로 오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며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죄를 스스로 해결을 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고도 찜찜합니다.
그렇게 행해 보았지만 실제 자기 마음에서는 정말 그런 행위들로 자기 죄가 속죄가 되었는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모르는 사람은 늘 무엇을 하고도 찜찜하지만 믿음이 있는 성도는 하늘에 승천 하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찜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는 평안하지가 않습니다.
대제사장의 단번 속죄로 내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어떤 행위를 한다 해도 평안하지가 않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율법과 규례를 통해서 미리 그림자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율법과의 관계를 모르고 아직도 그 율법을 따라 행하려고 합니다.
제사는 안 드립니다.
그러나 제사 의식과 같이 무엇을 해야 마음이 위안을 받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율법에 빠져 있는 것과 같이 자기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서 위안을 삼고 있지만 잠시 후에는 또 뭔가 모르게 남아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또 기도를 하고 또 주술적인 행위들을 하면서 반복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승천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일 년 일차 속죄를 하는 대제사장이 아니라 자기 육체를 단번에 드리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렇게 믿는 성도는 자기 모든 죄가 평생의 모든 죄가 다 사해졌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행위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단번 속죄로 우리 죄가 모두 사해 졌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믿는 성도만이 자기 죄가 사해지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아무리 백성의 죄를 위해 속죄를 했어도 믿지를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 죄를 속죄하려고 또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고백하는 회개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죄를 사하기 위해서 행하고 있는 행위들입니다.
제가 고백하는 회개를 전혀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 고백하는 회개로 내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을 하는 것은 내 죄가 사해지기를 위해서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자기 고백이 죄를 사해 주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하늘에 승천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과 대제사장이 내 죄를 사해 주셨다는 것은 믿는 것을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교육은 이성을 상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대제사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라면 당연히 자기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믿음으로 굳게 잡고 그 믿음의 도리를 지켜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위로 속죄를 하려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유월절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셨습니다.
그런데도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아직도 이스라엘과 같이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 입술로 고백을 해서 죄를 사해보려고 밤을 새워 가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나면 좀 죄가 사해진 것 같다가도 또 며칠 지나고 나면 찜찜하니까 자기 속이 풀릴 때 까지 시원하게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임을 고백하고 통곡을 하는 것과 자기 죄를 사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늘에 승천 하신 것을 부정하는 것임을 모르고 잘못된 신앙적 교육으로 대제사장의 속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입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는다고 말씀은 하고 있습니다.
내가 연약하다는 것을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 처지를 이해하시고 가엽게 여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내가 사단에게 질 수밖에 없는 진토임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사단은 우리 인생들 보다 강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힘으로 사단을 이기려고 하고 있고 또 가끔 이기는 그것을 보면서 마치 자기가 사단을 이긴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처지를 이해하시고 가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처지를 모르고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고 율법주의자들이 되어서 이스라엘과 같이 사단과 싸워서 이기려고 하고 있고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보면서 마치 승리자가 된 것으로 축배의 잔을 들고 있습니다.
나는 집니다.
다만 사단이 안건들이고 있을 뿐이지 사단이 마음만 먹으면 나는 무조건 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자가 양을 잡아먹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내가 그렇게 연약하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하는데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은 너무 강합니다.
그렇게 강하게 보이는 이유를 모릅니다.
자기가 강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사단이 건들이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축배를 들고 있습니다. 사단이 안건들이면 양도 강하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마음껏 뛰어 놀고 있을 때는 자기가 마치 강한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깨닫기 바랍니다.
이미 죽어 있는 자는 사단이 굳이 건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자들이 교회 안에서 율법에 빠져가지고 자기가 마치 대단한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죽은 양을 사단은 건들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냥 놓아두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양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연약하다는 것을 모르고 사자가 안 보이니까 마치 승리자가 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오해를 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자기가 지키고 있는 율법을 보면서 스스로 강한 자가 된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체휼하지 않고 있습니다.
처지를 알고 이해를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현장에서 간음을 하다 잡혀온 마리아를 그 처지를 알고 이해를 해 주셨기 때문에 그녀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 처지를 이해하지 않았다면 율법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었어야 합니다.
내가 약해야 합니다.
양이 사자가 되어 있다는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이 시대는 양들이 사자 보다 더 강해져 있어서 굳이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 처지를 이해 받을 필요도 가엽게 여김을 받을 필요도 없는 존재들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습니다.
구약에서 흠 없는 어린 양이라고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이 인생으로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흠 없는 어린 양으로 자기 육체를 하나님께 단번에 드리셨습니다. 만약 죄가 있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는 절대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자기도 죄인인 주제가 누구 죄를 대신 담당할 수 있습니까?
죄인의 죄를 대속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가 없는 의인이라야 다른 죄인의 죄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빚이 10억 있는 사람의 보증을 빚이 5억 있는 사람이 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빚이 없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빚도 없으시고 또 다른 사람의 빚을 다 갚아 주실 수 있을 만큼 부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 바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처지가 가여운 죄인입니다.
율법의 예대로 하면 우리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하는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처지로는 그 율법의 진노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가여운 인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인생으로 오셔서 모든 시험을 받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강해지려고만 합니다. 모두가 사자가 되어 있어서 도무지 무엇을 불쌍히 여겨 주셔야 할지를 모를 것 같습니다. 교회가 어느 때부터 돈 없고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사람은 다닐 수 없는 그런 곳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누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까?
부족한 사람이 연약한 사람이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 연약하고 부족한 것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율법도 잘 지키고 또 교회에서 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척척 아주 잘 합니다. 자기가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혀를 끌끌 차고 있습니다.
내 죄가 사해 진 것은 은혜입니다
자기가 고백을 해서 어떤 행위를 해서 죄가 사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모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단번 속죄로 인하여 자기 죄가 모두 사해 졌다는 것을 믿는 성도는 모든 것이 다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거저 주었습니다.
나는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내 모든 죄가 사해 졌습니다. 바로 그것이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하늘에 승천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성도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아는 성도만이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자기 죄가 티끌만치라도 남아 있다면 흠도 점도 용납을 안 하시는 하나님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믿음으로 도를 받아들임으로 해서 속죄를 받은 성도는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고백하는 회개를 혹시라도 잊어버릴 수도 있고 또 그것으로는 절대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대제사장으로 하늘에 승천하셔서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처지를 불쌍히 여시시고 또 내가 얼마나 연약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도 때를 따라 내가 죄를 질지라도 은혜를 내려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은혜와 진리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89강,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0) | 2019.06.04 |
---|---|
88강,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0) | 2019.06.03 |
86강,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0) | 2019.06.02 |
85강,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0) | 2019.06.02 |
84강,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0) | 2019.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