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강,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 14:1-3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선[善]과 악[惡]
사전적인 뜻입니다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 기준에 맞음. 또는 그런 것.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는 나쁨. 또는 그런 것.
이것은 사전만 찾아보아도 압니다.
사회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늘 깨우치고 살지는 못하더라도 사전을 찾아보면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기준입니다
마치 이 선의 기준의 하나님의 기준으로 오해를 한다면 그는 복음에 대해서 아직 모르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선과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는 선과 악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거의 이 선과 악을 선이라고 하고 악이라고 하면서 받아들입니다.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으로 어긋남이 없이 사는 사람을 보고 선하다고 합니다. 또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면서 그 반대의 사람을 보고 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도덕적인 기준입니다 사전에도 도덕적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구나 선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고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선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나는 악하게 살고 싶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굳이 교회에 나올 필요도 없고 그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선하게 살고자 노력을 합니다.
그렇게 선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그것이 오히려 진짜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선하게 사는 것을 방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도덕적으로 선하게 사는 것이 나쁘다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들은 선하게 살고 싶어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도덕적으로 기준에 맞게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도덕법을 어기지 않고 어려서부터 고아와 과부를 보살피고 가난한 자를 돕고 나그네를 대접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실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았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잘 믿었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진 그들이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도덕군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선(善)인 도덕을 가르치는 곳으로 전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과 같이 교회에서 듣는 설교의 대부분이 도덕적인 선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이것은 도덕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이것을 해야 한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설교를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도덕 선생을 하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지극히 세상적인 사상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도덕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 세상 학문으로 돌아가서 도덕을 가르치면서 율법으로 교인들을 구속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왜 기록했습니까?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삼아서 왜 그들의 삶을 그토록 자세하게 기록을 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실패를 했기 때문에 그들을 거울로 삼아 너희는 그들과 같이 실패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스라엘을 따라 행하려 하고 있고 도덕적인 율법으로 어떻게 하든지 구속을 시키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도덕적으로 따라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불가능 한 일입니다 또한 설령 그들과 같이 도덕적으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진다 해도 영혼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이 가진 흠 없는 율법의 의는 오히려 구원을 방해를 했고 그런 도덕적인 의로는 안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합니다.
누가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느냐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시대도 하나님이 마음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선을 행하기보다는 저희 행위가 부패하고 가증하다고 말씀을 합니다.
부패한 것이 무엇입니까?
정치, 사상, 의식이 타락한 것을 부패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치나 사상 또는 의식이 타락한 것을 보고 또 그런 것을 보면서 세상이 부패했다고 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는 부패는 조금 다릅니다. 몰론 그런 부패도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잘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디모데후서 3:8절을 보면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 바로 부패입니다
또 믿음에 대하여 그 믿음을 버린 자들을 부패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정치, 사상, 의식이 타락한 것을 부패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성경은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 또 믿음을 버리는 것이 부패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십니다. 진리를 대적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사역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 자체가 바로 진리를 대적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가신 사역입니다
이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가셨는데 이 세상 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를 한다면 그는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다른 사람이 진 죄에 대해서 그것을 판단하고 정죄를 한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며 대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또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고 하는 그런 행위들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대적하는 일입니다 율법에서 제사 제도를 다 폐하셨는데 아직도 제사 제도에 있는 절기를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들이 다 부패한 행위입니다
내가 지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남들이 지키니까 나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절기가 진리를 대적하는 일이고 부패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의 생각에서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진리를 대적하는 부패한 일을 하면서도 오히려 자기는 선을 행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버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기 보다는 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달리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빠져 있기 때문에 믿음을 알 수 없고 믿음을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믿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타락을 하고 부패를 한 사람들의 말입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그들은 행위에 빠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한 이유는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바로 그 율법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대적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렇게 합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 해도 역시 이스라엘과 똑 같은 일을 저지르게 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지는 못할지라도 이단으로 정죄를 하거나 아니면 테러를 가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에 하나님이 있었다면 그들이 예수를 죽였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부패하여 진리를 대적하는 일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율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역시 그와 똑 같은 일을 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6:5절을 보면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마음이 부패하니까 진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진리는 내 행위가 좋아져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벌써 초대 교회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에 마음이 부패한 자들에게는 진리가 자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부패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진리가 있을 수 없고 진리가 없는 그들은 결국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행위가 그렇게 만듭니다.
믿음이 없고 행위를 따르게 되면 하나님이 그 마음에 있을 수 없습니다. 행위를 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 보다는 자기들이 행하는 행위를 보기 때문에 그것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이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고 있지만 행위를 따르고 있는 자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소행이 가증합니다.
누구의 소행이 가증 합니까?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음녀의 소행의 가증 합니다.
두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입술로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또 율법의 행위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두 남편 율법의 남편과 예수의 남편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자기 믿음이 좋은 것으로 포장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증하게도 자기 행위를 좋게 꾸미면서 그 행위로 자기 믿음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음행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주 뻔뻔하게 자기 믿음이 좋은 것으로 오히려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행위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진리를 온전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부패하고 또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선을 행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세상 적인 선은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은 기독교인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행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편협 된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인만 선을 더 많이 행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 적인 선은 기독교인이나 비 기독교인이나 거의 비슷하게 행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복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선을 행한다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선하지 못한 인생이 자기가 선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대적하는 일입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지극히 선하게 보이는 그것이 바로 지극히 부패한 행위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흠 없는 의를 가졌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그 안에 시체가 가득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선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기준으로 선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행하고 있는 그 선이 나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런 선을 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사람 보다 더 선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선의 기준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선의 기준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게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선이란 하나님을 찾는 그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잘 지키고 이 세상에서 말하는 법을 잘 지키는 그런 선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그 자체가 바로 선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그는 세상에서 아무리 성자와 같이 살았다 할지라도 선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 해도 이 세상의 모든 법을 다 지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그는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을 찾습니까?
그의 선하심과 임자하심을 바라기 때문에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야지만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내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노력으로 안 되는 사람이 찾게 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자기 노력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다가 안 되면 부모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혼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면 굳이 부모를 찾지 않고 혼자서도 잘 놉니다. 그러나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울면서라도 부모를 찾는 것이 아이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는 자기 힘으로 다 하는 사람이 있고 도저히 자기 노력으로는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율법을 다 지키는 이스라엘은 굳이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안 되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자기 율법의 의가 너무도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는 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그 사람 절실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나와 있지만 교회에서 행하는 거의 모든 율법의 의를 다 하고 있는 사람은 굳이 하나님을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하나님을 찾는 목적이 있습니다.
자기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으려는 하지 않고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이스라엘의 육적인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영적인 것임을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내 육신의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정욕입니다
마치 그런 자기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지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을 찾게 하십니다.
선이 무엇입니까?
바로 내가 죄인이라서 하나님을 찾는 그것이 선입니다
내 노력으로는 도저히 천국에 갈 수 없어서 하나님께 의지를 해서 천국을 가려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각이 없어 천국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이용하려고 합니다.
3절,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다 치우쳤습니다.
함께 더러운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찾는 그 자체가 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행위로는 선을 행하려고 노력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찾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 그 길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임에도 다 치우쳐서 사람들은 율법주의에 빠졌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상과 종교는 다 율법주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이스라엘까지 다 율법주의에 빠져서 다른 길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입니다
그러나 다른 길 율법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 세상의 선,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법을 지키는 일 모두가 똑 같이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을 보고 하나님께서 다 치우쳤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지를 못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셨는데도 지금 이 시대도 역시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없이 그 길을 따라 가려 하기 보다는 율법의 길로 다 치우치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지극히 세상 적이고 초등 학문이라는 것을 모르고 교회 안에 들어와서도 아직도 세상의 사상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1절을 보면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자기가 깨끗해지려고 노력을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어떻게 해야 깨끗해지는 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내 더러운 것을 씻는 방법은 보혜사 성령이 내 안에 임재를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임으로 해서 거룩함과 의롭다 함을 얻는 그것이 바로 씻는 것입니다
선하게 사는 것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을 하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모든 진리를 거절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내가 행위로도 얼마든지 깨끗하게 되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하나의 부속품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행위에 집착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의 의를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도 충분히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으라고 하니까 그것이 믿어지겠습니까? 자기들은 안식일을 아주 잘 지키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안식일에 돌로 쳐 맞아 죽을 일을 하니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안식일을 어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주일날 예배를 안 드리고 다른 일을 한다면 이단이라고 공격을 할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를 안 드리고 아무도 모르는 그 사람만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위로를 해 준다면 아마 이스라엘과 똑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다른 날도 많은데 하필이면 주일날 꼭 그 일을 해야 되겠느냐면서 정죄를 할 것입니다
안 그런다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것 보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 예수님께서 오셔도 이스라엘과 똑 같이 정죄를 하고 아마 죽일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할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찾는 그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굽어 살피시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찾습니까?
히브리서 11:6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찾고 있느냐면 이 세상에서 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복을 얻기 위해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하늘의 복을 얻기 위해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복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도 없었다면 지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나로 하여금 이 시대에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지각을 주셨습니다. 바로 내가 지금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의를 간절히 구하는 그것이 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선은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지각이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내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은혜를 아는 성도는 모든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것이 바로 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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